• "충성할 당을 잃고 50대에 길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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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9일 08: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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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환은 2007년 초 "마음이 방황하니, 몸도 방랑"한다며 54세 나이에 길을 떠났다. 그는 또 "충성할 당을 잃고, 마음은 고향을 잃었다"고 한탄한다. 그가 <레디앙>에 마을과 길 위에서 만나 사람과 그들과 나눈 마음을 기록한 기행문을 보내왔다.

    이 글은 ‘실패한’ 진보 정치인의 새길찾기로 읽힐 수도 있고,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온 어떤 중년의 회한의 기록이자 인생 후반전의 모색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레디앙>은 앞으로 4개월 동안 돌아다니며 만난 것들에 대한 그의 기록을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주>

    550년 전, 젊은 김시습은 자기 생각에 갇혀 살았다. 좋게 말해서 이상주의자였다. 그런 이상주의자 책벌레 김시습은 권력 투쟁의 적나라한 모습, 유교적 이상국가 조선에서 일어난 불미스런 일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고향을 잃은 김시습은 결국 책을 모두 불태우고 방랑길에 오른다.

    충성할 당을 잃고 마음은 고향을 잃고

    그의 몸이 방랑길에 오른 건 그의 마음이 방황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방황을 하니 몸도 방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방랑, 그는 일생을 방랑객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십대 중반, 새삼 방랑객이 되기엔 너무 늙었다. 다만 지천명(知天命)을 못한 오십대, 실천명(失天命)을 한 오십대 일뿐이다.

       
      ▲ 평생 진보정당 운동을 해온 민주노동당 주대환 전 정책위 의장이 15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진정한 진보의 길이 뭔지 넉달간 전국을 다니며 모색해보겠다"고 말했다.(사진=연합뉴스)  

    난 진보정당에 갇혀 살았다. 진보정당은 항상 내 마음 속에서 별처럼 빛났고 나는 언제나 당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충성할 당을 잃고 마음은 고향을 잃고 말았다. 하여 마음이 마지막 잎새처럼 흔들리고 있다. 평생 매달린 작은 사업체가 부도나거나 청춘을 바친 직장을 잃은 친구들의 심정이 나와 비슷할까?

    2007년 1월,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하여 무슨 재미로 살고 있는가?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일까? 나는 밥값을 하고 사는가?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존재일까? 내가 밥값을 한다고 믿게 해주었던 민주노동당을 벗어나면 나의 삶은 과연 존재 가치가 있을까? 내 나이가 54살이라는데 그건 맞는 걸까?

    불안과 우울을 가슴 깊이 안고 나는 새해를 맞이했다. 영화 <오래된 정원>의 주인공과는 달리 난 사실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그래서 더욱 불행을 견딜 수 없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행복해지고 싶고, 그래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2007년 1월 15일, 전북에서부터 ‘방랑’을 시작했다.

    우울한 54세 방랑은 시작됐다

    전라북도, 그 곳은 나보다 100년 앞서 전봉준과 김개남과 손화중이 살았던 곳이고, 1990년대 초 내가 오두희와 현주억과 김용구를 만났던 곳이고, 이제 전희식과 박상옥과 나현균이 사는 곳이고, 조철우와 조혜리와 권우철의 고향이다. 그리고 실상사에서는 도법이 보살행을 실천하고 남원분지 한 가운데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이 있다.

    겨울의 호남평야는 텅 비어 있었다. 1894년, 사람과 소와 닭으로 가득 찬 호남평야.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그 곳에서 혁명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빈집들이 늘어선 쓸쓸한 농촌이다. 농민 봉기의 말목장터 새장터회관 사장 허득춘 씨에 따르면 “정읍시 이평면에서는 한 해에 서른 명이 죽지만 한 명도 태어나지 않는다.”

    30년 전 김지하가 노래했던 황토는 여전히 가슴이 아리도록 붉었다. 정봉준이 살던 집과 묘는 정갈하게 보존되어 41세에 대역죄인으로 참수 당할 때와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었다. 42세에 죽임을 당한 김개남의 가묘에도 표지가 되어 있었다. 한때 그를 멀리 했을 가문에서 그를 높이 받들고 있다는 사실이 나그네를 안심시킨다.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젊은 35세였던 손화중이 뜻밖에도 가장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형제와 일가친척들이 많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죽임을 당했다. 그는 도피생활을 도와주던 동지에게 “너에게 빚을 많이 졌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겠다”면서 자신을 고발해주기를 종용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부안에서 익산으로 올라가면서 어릴 적에 지도를 보며 상상하던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지평선을 처음 보았다. 부안에는 핵폐기장 반대 투쟁의 흔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계화도 간척지까지 갔지만 말 많은 새만금사업의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아마 바다 끝으로 더 나아갔어야 했을 것이다.

    젊고 패기있는 군산의 노동운동가들

    호남평야의 끝에 군산이 있다. 호남평야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차는 날이 올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군산공단을 노동자의 물결로 채우는 날은 곧 올 것이다. 군산공단에 최초의 조선소 입주가 결정되었다는 지방지의 기사는 고건의 출마 포기 소식과 함께 실렸다. 군산은 조만간 노동운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것이다.

       
     ▲ 군산 공단 끝 비응도항에서…
     

    그래서인지 군산의 노동운동가들은 아직 젊고 패기가 있었다. 전희남과 최재석, 채상원, 이상모, 고승희, 최현주, 김형균, 그들은 여전히 실망과 좌절을 모르는 젊은이들이었다. 군산 공단 한가운데 자동차 부품 공장 일성테크에서 만난 금속노조 군산지역금속지회장 조영호는 성실한 노동운동가였다. 앞으로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고향 김제의 작은 교회에서 나현균은 할머니들에게 침을 놓고 있었다.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마산 타코마 조선소에 취직했던 나현균은 굳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교육부장을 맡았다. 전해투 위원장을 거치며 거듭된 단식 투쟁에 몸을 다 버리고 한의학을 배워 스스로를 치료하던 그는 지금 마흔 여덟 나이에 우석대 한의학과 학생이다.

    병든 노모를 지극하게 모시는 효자, 나현균에게 그의 지금 생각을 물었다. 그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을 착취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은 변함없다”고 말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는 어쩌면 진보였던 적도 없고 보수였던 적도 없고 다만 착취 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살아왔을 뿐일 게다.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사람 한 명

    군산에도 한 사람,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전주 서호주정 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김용구는 해고되어 집진(集塵)설비 사업을 하던 중에 1995년 산재 사고를 당하여 벌써 12년 째 목 아래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산재 환자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2년 동안 마음이 흩어 지지 않았다.

    김용구에게 민주노동당은 위로와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마음이 방황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12년 동안 간병을 하고 아이들을 키워주신 어머니와 이모부 덕분에 그는 살아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노동운동, 진보정당은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제 기독교인 조카의 열렬한 전도를 받아들일까를 고민한다. 

    전노협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던 현주억은 이제 며칠 지나면 민주노동당 익산시위원회 위원장 임기를 마친다. 작년에 익산에서는 민주노동당 시의원이 3명이나 당선되는 경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운동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한해를 보냈다. 비례대표 시의원은 음주운전 사건 전부터 표결 사고로 위원장을 힘들게 했다.

    장수군 장계면 골짜기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전희식은 지금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을 함께 했던 동지이자 친구인 송경평과 친하게 지낸다. 고흥 촌놈인 송경평은 우직하게 착한 사람이다. 국회의원 송영길도 고흥 촌놈이니 아마 한 집안일 게다. 바보스런 송경평이 영리한 부인 덕에 인천에서 학원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니 안심이다.

    자동차 공장에선 전공이 기계를 수리하느라 돌아다니기 때문에 조직하기 좋다고 직업훈련원를 다녀 전공으로 취업했다. 그리고 박현채 선생을 비롯한 쟁쟁한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독학으로 온갖 사상서들을 독파하였다. 손이 유난히 커서 별명이 왕손인 전희식, 그는 한때 인천 노동운동의 희망이었다.

    두 갈래의 길, 전희식과 이재오

    우리는 부평에서 송경평을 1988년 총선에 내보냈다. 그리고 역시 부평 갑을 두 선거구에 나란히 송경평과 전희식을 1992년 총선에 민중당 후보로 출마시켰다. 송경평은 두 번 다 2등을 했다. 세월이 15년 흐르고 그 선거에서 함께 민중당 후보로 출마했던 이재오는 한나라당 대표가 될 뻔하고, 전희식은 생태주의자 농사꾼이 되었다.

    전희식은 도법 스님과도 무언가를 하고, 귀농운동본부 이사도 맡고, 영화도 만들어 출품하기도 했고 책도 여러 권 썼다. 일본과 유럽의 유기농업을 돌아보기도 하고 참선과 요가, 도를 닦는 온갖 프로그램을 섭렵하였다. 최근엔 동학 수련을 갔다 왔다. 이제 도사가 다 된 그가 사는 덕유산 골짜기에는 별이 유난히 밝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전희식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가면 신동엽이 <금강>에서 노래한대로 “반도는/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의/ 무정부 마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에 청춘들의/ 축제가 자라났다.”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가 독립한 정신으로 자기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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