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저러한 국가론에 대한 '해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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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7일 01: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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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들녘
    『개념-뿌리들 1, 2』 이정우 지음, 철학아카데미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김용규 지음, 웅진

    세 권의 책이 있다. 두 권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간이며, 한 권은 불쑥 소개하기에는 유효 기간이 한참 지난 책이다. 시점은 둘째치더라도 세 권의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두 권은 ‘개념’이라는 간판을 걸고 나온 데서 묶이고, 또 두 권은 ‘철학’이라는 겉옷을 비교적 가볍게 걸친 데서 엮이며, 또 두 권은 ‘어려운 거 쉽게 쓰기’라는 트렌드에서 만난다(다른 한 권 또한 저자의 이름에 비해 ‘정말’ 쉬운 글이 분명하지만 두 권에 비하면 상대도 안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범위 좁히는 것부터가 먼저겠다. 먼저 두 권이 공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항목을 비교하며 읽고, 다른 한 권에서는 부족하나마 국가론 언저리에 있는 에세이를 덧붙여 다른 책들과 대비해 본다.

    흔히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표현은 ‘어렵다’라는 말이다. 일단 문체가 주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학자들 특유의 번역 투 어조나 만연체 문장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미로와도 같은 인용구 연쇄망의 영향 또한 없진 않을 것이다. 그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 독자들에겐 그야말로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일 뿐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나, 많은 학자들은 ‘개념 잡는 일’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개념의 발명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그거야 드물디 드문 대가들 얘기고, 일반 독자들로서는 개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조차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개념이란 극히 미묘하고 유동적이고 모호한 우리의 경험 내용들을 일반화하고 평균화해서 잡아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 내용들의 그 의미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p.1-13)

       
    『개념-뿌리들 1, 2』 이정우 지음, 철학아카데미
     

    이정우가 내놓은 개념에 대한 개념. ‘일반화하고 평균화해서 잡아주는’ 일이라니 개념은 정밀묘사가 아니라 ‘얼추’ 그려 놓은 그림인 모양이다. 말이 대강(大綱)이지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하고 철학사의 굵은 줄기를 놓쳐서는 안 되며 다른 이의 개념을 설명하고 다시 자신 고유의 개념까지 덧붙이니, 개념은 어려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게다가 이정우의 표현을 빌면 개념에는 주름이 접혀 있다. 섬세한 주름 사이 의미가 있고 맥락이 있다. 개념을 파악하는 데는 문헌학적 식견만큼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는 게 불가결한 문제일 터. 여기까지도 힘든데, 인문학에서 개념은 외톨이 개념으로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한다.

    “개념이라고 하는 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개념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개념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다른 개념들을 불러옵니다.”(p.1~15)라는 이정우의 말이나 “인문학의 개념들은 자연과학의 개념들처럼 뜻이 구체적이지 않으며, 단일한 의미보다는 복합적인 뜻의 그물을 가진다. 하나의 개념은 인접한 개념들과 연관되고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p.5)라는 남경태의 설명이 그렇다.

    두 저자가 공히 다룬 ‘국가’라는 개념을 보자. 국가는 개념이기 이전에 먼저 우리에게 실체로 피부에 와 닿는 것이겠지만, 저자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갖고 있는 국가의 실체는 이미지에 가깝고 실은 조각난 그림들에 불과하다.

    국가라고 하면 떠오를 법한 군대, 세금, 국가보안법, 애‘국가’, 대통령, 국회 등이 있다지만, 그저 부분들에 불과하며 한 부분조차 인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먼저 국가를 설명하려는 남경태의 도입문을 보자.

    “1917년 러시아 임시정부의 탄압을 피해 잠시 핀란드로 도피하고 있던 시기에 레닌은 『국가와 혁명』이란 책을 썼다. 그리고 1963년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될 차비를 갖추던 시기에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을 썼다.

    레닌이 말하는 국가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전 일시적으로 존재하게 될 프롤레타리아 국가이며, 박정희가 말하는 국가는 오랜 왕조 시대를 거쳐 공화국으로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다. …… 제목은 비슷해도 두 사람의 책은 전혀 다르며, 같은 개념이라도 좌파인 레닌과 우파인 박정희가 그 개념에 실은 의미는 정반대다. 국가란 정의하기 나름인 것일까?”(p.56~57)

    레닌과 박정희를 대비하는 것도 빼어난 전략이지만, 국가의 정의란 결국 국가에 대한 이념에 부응할 수밖에 없음을 먼저 실토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즉 국가 개념은 사실상 국가들의 개념들인 셈이다. 이 개념들 중 으뜸은 너나 할 것 없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으로 지배하는 국가를 모델로 삼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정치 형태를 군주정, 귀족정, 공화정으로 구분하고 그 가운데 공화정이 으뜸이라고 여겼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당시의 국가란 인구 1만 명이 넘지 않는 도시국가에 불과했다.”(p.57~58)

    남경태의 설명은 특별히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 주지 않는다. 평이한 서술이고 일반 상식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폴리스의 인구학, 지리학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것과 대비되는 웅장한 고대 중국의 경우를 부가하여 설명한다. 간단한 설명으로, 국가론의 시원인 플라톤 철학의 권위를 동아시아의 그것과 견주면서 은근슬쩍 무너뜨리는 것이다. 개념은 한 데 머물지 않고 널리 확장된다.

    반면 이정우의 설명을 보니, 일반적인 플라톤 위주의 국가 개념 풀이가 실제로는 너무 넓은 데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플라톤은 법/관습, 국가, 교육, 정의 등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사유하고서 방대한 저작들을 남긴 최초의 철학자죠. 방금 인용한 『국가』에 그의 정치철학적 사유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politeia라는 이 책의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폴리스론 또는 폴리스 정체(政體)론이 됩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는 res publica(직역하면 public thing, 즉 공공의 일/것이죠)로 번역되었고, 여기에서 현대어 republic이 나옵니다. 우리말로는 공화국으로 번역되죠. 때문에 politeia는 국가론, 이상국가(플라톤이 그린 것이 이상국가이기에), 공화국, 정체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p.2-280~281)

    플라톤 『국가』의 번역을 따지고 드는 일을 보자니 철학자들 특유의 언어유희로 빠져드는 것 같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읽어 보면 ‘국가론’의 쟁점들을 파고들고 있기도 하다. 사소한 번역에서도 국가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아래처럼 정치학과 형이상학을 한 데 결합해 내어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이상국가론은 형상이론과 맞물려 있어요. 오늘날의 정치학은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전통 정치철학은 특정한 형이상학적 근거 위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키아벨리 이후에 형이상학과 정치학이 갈라지고, 개별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이 성립합니다. 플라톤은 국가의 형상이 존재한다면, 즉 이상국가가 존재한다면, 그 형상을 모방하는 정당한 법/관습의 수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p.2-282)

    다만 ‘형상’ 개념이라는 또 다른 어려운 숙제가 기다리고 있을 뿐. 남경태와 이정우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국가라는 단어의 함정 또한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흔히 국가를 조국이라고 표현하면서 민족과 거의 동일시하는 우리 사회의 과도하게 민족주의적인 풍토에서는 국가의 개념에 비하하는 의미를 담기가 매우 어렵다.”(p.57)

       
      ▲『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들녘 
     

    남경태는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혼동하고 또 혼용하는 일반적인 상식과 관행을 무너뜨린다. 남경태가 이념적 혼란을 지적한다면 이정우는 행정 명칭이 야기하는 혼란을 집어낸다.

    “국가와 정부는 달라요. 국가란 특정한 국명을 가진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의 문제죠. 말 그대로 ‘res publica’입니다. 존재론적으로 보아 추상적 존재입니다. 반면 정부는 국가의 한 기관이죠. 그러나 정부의 힘이 워낙 강하고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부와 국가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p.2-282~83)

    이후 두 저자는 시대 순으로 국가를 키워드로 한 서양 정치철학사를 훑는다. 남경태가 역사와 사회과학적 배경을 거론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면, 이정우는 예의 능숙한 솜씨로 각 사유의 특징들을 펼쳐 놓는다.

    남경태의 경우.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가는 대외적으로는 국제 질서의 주체로 활동했고 대내적으로는 국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법치국가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변하고 전 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완료되자 국가는 새로운 임무를 가지게 되었다. 국가는 이제 성장의 엔진이 멈출 지경에 처한 자본주의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했다.”(p.59~60)

    남경태의 개념 풀이는 이처럼 철학적 개념을 역사, 사회, 문화 등의 맥락 속에서 서술함으로써 그것의 문자적 의미보다는 생생한 이해를 돕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에 집착한 나머지 개념을 고정된 맥락에서만 떠올리게 하는 약점 또한 분명해 보인다.

    아래의 문장은 저자 고유의 정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면서도 매우 상투적인 설명에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계급 지배의 도구로 파악한 레닌과, 긍정적인 관점에서 사회 발전의 수단으로 간주한 박정희는 둘 다 자신의 국가관을 현실에서 완전히 정당화하지는 못했다. 극좌와 극우가 실패했다면, 새는 역시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만 하는 걸까?”(p.60) 적어도 ‘쉽게 쓰기’의 강박관념이 만든 결과라고 해야 할까.

    이정우의 경우는 반대로 사회과학의 빈약함을 느끼게 한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설명은 책이 목적하는바(대중 강연)에 비해 상당히 정교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맥락을 엿보는 대목에서는 그저 그런 일반적 설명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정우 본연의 생각이 알 듯 말 듯하게 모호하게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 철학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 중에 하나가 이념적으로 날카롭지 않고 무딘 것이라면, 이정우의 글 또한 이 점에서 그리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68년 이후 후기구조주의의) 흐름에 있어 정치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권력의 문제입니다. 구조주의 사유의 문제점은 사실상 만들어진 것, 즉 권력이 개입해 구성한 것을 마치 자연법칙처럼, 마치 원래 그런 것처럼, 즉 주어진 것으로 착각했다는 점에 있죠.

    이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맞붙어 싸워야 할 것, 저항해야 할 것을 우리가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수동적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 그것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판단될 경우 그것들을 고치고 그것들에 저항해야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호체제(‘체계’가 아니라 ‘체제’입니다)를 만들어내고 관리하고 강제하는 핵심적인 존재는 바로 국가(와 자본주의)입니다.”(p.2-316~317)

    철학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대중과 소통하는 태도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겠지만, 반드시 벗었으면 싶을 만한 철학의 외투를 여전히 걸치고 있는 건 아닐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김용규 지음, 웅진
     

    김용규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의 빅브라더를 다루면서 사회공학과 이상국가(또는 유토피아)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설명 틀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그는 철학적, 정치학적 환원 작업을 이 침대에 자주 비유한다.

    “사람들은 이렇듯 나름대로 어떤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그것에다 맞추려는 사람을 프로크루스테스라고 하고, 그런 획일화 작업에 사용되는 폭력적 도구를 일컬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합니다. ……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사회공학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최초의 사회공학 저서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국가』가 보여주듯, 모든 사회공학에는 이상적인 사회 형태를 설계하고 확정하는 작업과 그것에 맞게 인간을 길들이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죠.”(p.281~82)

    문학과 철학을 신화적 비유로 매끈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론 또는 국가철학의 문제설정 자체를 사회공학이라고 잘라 말하는데, 그 주장은 차치하고서라도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침대 얘기는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분명 사회가 가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의해서 제조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거지요. …… 모든 유토피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의한 ‘잡아 늘이기’와 ‘다리 잘라내기’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을 기반으로 설계되고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p.304~5)

    저자의 정치관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만, 어찌 보면 상식적인 선에서 서둘러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다음 대목에서는 더더욱. “결국 우리가 진정 원하는 유토피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한다는 거지요.”(p.307)

    김용규가 문학 이야기에 철학적 에세이를 곁들인 이유를 들어보자.

    “철학적 해석이라는 말에 눈길을 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작품의 배후에 숨어 있는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밝히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분석으로서, 비평가들이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분석을 통해 얻어진 비평이라는 이름의 커피는 어느 문학 살롱에서든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당신도 이미 그 씁쓸함과 무미함을 간혹 맛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석은 다르다. 해석은 여느 문학 살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메뉴다.”(p.7~8)

    분석을 지양하고 해석을 지향하겠다는 건 좋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해석은 무엇인지, 얼마나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 소설에 마르셀의 철학을 덧붙이는 건 보여도 정작 철학적 해석이 무엇인지 내놓지를 않는 거다.

    저자는 카프카의 「변신」이 가족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실은 당위로 보이는 서술)에 얼마만큼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적어도 카프카는 가족의 해체와 붕괴의 방향에서 쓴 것이 아닐까. 기자의 어설픈 판단으로는, 소리만 요란했지 자신의 해석 없이 알맹이 없는 서술을 넘어서, 아예 텍스트의 맥락조차 잘못 짚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편 알라딘의 ‘나귀’라는 독자는 실수라고 하기엔 용납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수두룩했다고 전한다. “오셀로는 무어 출신의 장군이지요.”(p.95) 무어는 지역 이름이 될 수 없고 인종 집단이라는 독자의 설명이다. 물론 사전에서는 인종적 명칭도 될 수 없다고 전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유대인 신학자 본회퍼”(p.179)에서 본회퍼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 박학다식으로 이름난 저자의 이름에 견주자니 사소한 실수라고 덮기엔 구멍이 꽤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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