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론은 21세기 반공론"
        2007년 01월 27일 01: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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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원순 변호사
     

    고건 사퇴와 손학규의 부상으로 ‘중도’가 유행하고 있는데, 두 정치인의 부침에만 ‘중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갈등, 대립을 조장하는 언행을 자제하며,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집단 행위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박원순(아름다운재단), 최열(환경재단), 이석연(뉴라이트전국연합) 등의 「국민께 드리는 글」, 그 이벤트를 소개하며 “이념의 과잉으로 사회가 멍들고 구성원들이 고통받는 일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경향신문>의 1월 12일자 사설도 아름다운 ‘통합과 상생’, ‘중도’를 설파한다.

    황석영의 놀라운 학설

    외국 체류 중 잠시 귀국한 황석영은 한 수 더 뜬다. “보수와 진보 진영을 편가르는 1987년 체제는 이번 대선을 계기로 막을 내려야 한다 ……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합리적 보수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만들어질 것 ……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 정치가 낡은 보수와 진보의 틀에 갇혀 국가발전을 위한 역량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 …… 합리적 보수의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도적 사람이 많아져야 과거 상처를 치유하고 선진적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경향신문> 1월 23일자 인터뷰).”

       
      ▲ 소설가 황석영씨
     

    점잖은 시민단체 전직 대표들이 갈등, 대립을 조장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들이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집단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공권력의 담지자인 줄도 처음 알았다. <경향신문> 사설 집필자가 말하는 이념 과잉의 사회는 1950년의 한반도인가?

    1987년으로 인해 진보와 보수의 편가름이 시작됐다는 황석영의 놀라운 학설은 역사학계에 보고되어야 한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중 어느 것이 보수이고, 어느 것이 진보인가? 기껏해야 낡은 보수와 새 보수이고, 그 차이마저도 신자유주의로 통일되어 없어졌다는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하지 않는가?

    유럽에서 5년째 살고 있는 황석영이 국민의 삶의 질을 위해 합리적 보수와 중도를 제시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배움과 노쇠의 반비례 법칙을 증명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귀국하기 전까지, 삶의 질이 가장 발전했다는 유럽에서 왜 100년 넘게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지 살피길 바란다.

    진보를 무시하고 싶어하는 강준만

       
      ▲ 강준만 전북대 교수
     

    “정치권에서 좌우 논쟁 갈등이 벌어지면 서민층은 비웃다가 나중엔 욕한다. 민생과 별 관련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수 한국인의 최대 관심사이자 고통의 근원이기도 한 취업ㆍ아파트ㆍ사교육이라고 하는 3대 이슈에 좌우 구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중도(中道)’를 두텁게 한 뒤에 좌우가 한 단계 낮은 키로 중도의 양 옆에 포진해야 한다. 극단적 분열주의가 기승을 부리면 어느 쪽이 옳건 그르건 모두 다 자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강준만, 「왜 중도(中道)인가?」, <한국일보> 2006. 11. 14).

    과연 고용 정책에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없는가? 강준만은, 비정규직 제도를 철폐하라는 사회 각계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사적 주택시장 부양책과 국공유 임대아파트 확대책은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명확한 구분점이지 않는가?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다.

    강준만이 보수, 진보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분명히 실재하는 진보를 애써 무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지향이 보수 양당 사이에 걸쳐 있음을 밝히며, ‘한국인의 고통’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건과 손학규, 황석영이나 강준만은 ‘중도’를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수고스레 정치나 사회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의 끝 지점과 또 다른 끝 지점을 자연과학적 자로 재고, 그 정확한 중간 지점을 찾아내는 행정력만 갖추면 된다.

    대화가 부족한가, 충돌이 부족한가

    중도론자들의 주장처럼 대화가 부족한가? 한국 사회에서 계급 계층 간의 충돌이 시작된 지는 이제 고작 20년이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그 역사가 200년이 넘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충돌이지 않은가?

    중도론자들의 주장처럼 안정되고 선진적인 나라들에서 중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진보와 보수가 갑론을박하고 진퇴하며 이룬 역사의 산물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중도는 지점(地點)이 아니라, 시점(時點)이다. 그렇다면 중도의 필요충분조건은 일제에서 열린우리당에 이르는 지난 100년의 보수 치우침을 상쇄할 향후 100년의 진보 치우침이어야 한다.

    정치에서 중도론은 실권 위기에 몰려 몸부림치는 ‘노무현네’의 분칠이다. 역사적으로 중도론은, 엄마 화장품 훔쳐 바르며 어른 흉내 내는 어린 아이의 구상유취한 수작이다. 개혁이라 자처하는 정치세력, 시민운동, 언론매체의 중도론 합창은 채 영글지 않은 진보를 짓밟으려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 반공론의 21세기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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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보수 정치 행로를 밟아 온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이 화해, 통합, 상생을 주장하는 시민사회 인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은 이념과 정책의 대립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이념적 ‘타락’을 권고합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4887)한 것과 비판의 지점이 유사해 흥미롭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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