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폭력이 아니라 그들의 절망이다
    교육부 대책 폭력적…경쟁 교육의 귀결
    [교실 안팎] 2012년 대한민국의 교실에 아이들은 없다
        2012년 05월 02일 09: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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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락가락 한다. 요즘 학교 분위기도 썰렁하다. 학생들의 잇따른 죽음과 ‘학교 폭력 후폭풍’ 때문이다. 스승의 날이라고 가슴에 꽂아주는 카네이션 한 송이가 천근만근의 무게로 가슴을 짓누를 것 같다.

    지난해 말 대구에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정부는 교육청․검찰․경찰을 총동원해서 학교 폭력 근절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를 비웃듯 그 뒤로도 아이들의 자살이 줄을 이었다. 학교 폭력 해결 유공자에게 인사 가산점을 준다는 말이 나오자 경찰관이 학교를 방문해서 일진 명단을 내놓으라고 을러대고, ‘고교생 삼청교육대’ 논란까지 불거졌다.

    고교생 삼청교육대?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육부)는 급기야 전국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학교폭력 설문조사를 했다. 그것도 표본을 대상으로 한 표집(標集)조사가 아니라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수조사였다. 그리고 최근 그 결과를 공개하고 학교 홈페이지에도 게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불과 20%만이 응답한 전수조사 결과를 놓고도 말들이 많다. 처음부터 20% 표집이라면 상관없지만, 전수조사에서 20%의 응답은 특정집단 편중 가능성 때문에 애당초 통계로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설문조사에 사용한 ‘학교 폭력’, ‘일진’이라는 용어가 불분명해서 응답자의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너무 넓다는 것도 문제다. 결국 교육부의 조사는 통계의 신뢰성을 좌우하는 모집단 선정, 질문 구성, 조사 과정부터 통계의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 것 중 하나는 “최근 1년간 학교 폭력 피해 경험이 있느냐?”란 물음이었다. 교육부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산술적으로 합산해서 그 비율로 학교 폭력 정도에 서열을 매겼다.

    지난 1년간 친구와 몸싸움을 하거나 욕을 한 번도 안 한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결국 설문조사에 한 명도 참여하지 않은 학교는 ‘학교 폭력이 없는 학교’가 되었고, 적극 참여한 학교는 ‘학교 폭력이 심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막장 드라마의 종결판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학교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다. 이런 걸 통계라고 내놓은 교육부의 용기에 정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런 결과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두고, 항간에서는 “쓰레기를 가지고 만든 음식을 놓고 ‘맛이 있네, 없네’, ‘영양이 많네, 적네’ 따지는 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 와중에도 보수언론들은 이 쓰레기 같은 자료를 가지고 “전교조가 주도하는 혁신학교, ‘일진 있다’ 응답 비율 더 높아” 하는 식의 기사를 내보내 발군의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다. ‘전교조 때리기’라면 쓰레기든 뭐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움켜쥐고 휘두르는 꼴이다. 하긴 쓰레기로 얻어맞으면 훨씬 더 비참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 막장 드라마의 종결판은 교육부가 내놓은 이른 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이다. 이 대책은 ‘학교의 책임성 강화’, ‘학교 폭력 예방교육 강화’, ‘가해 학생에 대한 처벌 수위 강화’, ‘피해 학생 보호’, ‘일진 학생 엄정 대처’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걸 보통사람들도 알아듣기 쉽게 번역하면, “선생들, 너네 똑바로 못해?”, “사고치는 놈들은 초전에 박살내 버려!” 라는 뜻이다. 언젠가 자주 듣던 ‘추억의 레퍼토리’다.

    그러나 여기엔 폭력 학생에 대한 원초적 공포와 적개심만이 번득일 뿐, 이들을 폭력으로 이끄는 교육현실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또 통제 불능의 청소년에 대한 원색적 복수심만이 난무할 뿐, 그들 역시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육적 배려는 애당초 관심 밖이다.

    그 많은 ‘사고뭉치’들을 모조리 학교 밖으로 쫒아내면 학교는 과연 안녕하실까? 내 눈에만 안 보이면 그 아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일상적 폭력을 배태하는 폭력적 구조가 학교 안에 버티고 있는 한, 남은 아이들이 다시 폭력에 빠져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학교 폭력 논쟁이 은폐시키는 것들

    결국 교육부의 종합대책은 문제의 근원을 보지 않는 전형적인 대증요법(對症療法), 그것도 일벌백계 식의 폭력적인 요법이다. 이런 식이라면 학교폭력은 단지 ‘유예’될 뿐 ‘해결’되기 어렵다. “사과가 썩는 이유는 사과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과상자가 썩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우리 교육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이자, 성급한 대증요법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그런데 최근 ‘학교 폭력 후폭풍’을 보면서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정치의 계절’만 돌아오면 ‘학교 폭력’ 또는 ‘교사 때리기’가 여론을 호도하는 단골메뉴로 등장하곤 했던 과거 경험을 떠올리자는 게 아니다. 학교를 이 따위로 망쳐 놓고 교사만 잡도리하는 것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자는 것도 아니다.

    ‘학교 폭력’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과 갈등의 뒤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가 고스란히 숨겨진 채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 폭력은 그 자체로 매우 우려되는 현상이고 그에 대한 해법 찾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긴급한 문제지만, 그것은 동시에 골병 든 우리 공교육의 깊은 뿌리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증후군의 하나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지금 중․고등학교 교사들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아이들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등교하지 않는 아이 불러내기’부터 시작해서 ‘지각하는 아이 모닝콜 해주기’,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 깨우기’, ‘수업 방해하는 아이 진압하기’, ‘대드는 아이 달래기’, ‘싸우는 아이 뜯어말리기’, ‘담배 피우는 아이 감시하기’, ‘공부와 담 쌓은 아이 끌어안기’, ‘남의 물건 훔치는 아이 가려내기’, ‘가출한 아이 데려오기’ 등등……

    십여 년 전만 해도 한 달에 두어 건에 불과했던 이런 일들이, 요즘에는 하루에도 대여섯 건 씩 쓰나미처럼 몰아친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수업준비나 교재연구는 뒷전으로 밀린다.

    아이들은 매트릭스에 접속, 다른 세상에

    수업시간에 제대로 공부하는 아이는 많아야 한 반에 열댓 명, 영어․수학 시간은 전멸 아니면 다행이다. 등교하자마자 자리 펴고 하루 종일 엎드려 자는 아이가 보통 네다섯 명, 공부엔 관심 끄고 잡담하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아이가 대여섯 명, 나머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몽롱한 눈길을 하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학교의 풍경』을 쓴 조영선 교사의 표현을 빌리면, ‘아이들은 매트릭스에 접속해서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고, 교실에는 의식 없는 빈 몸뚱어리만 남아있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게임의 세상에, 다른 아이는 춤과 노래의 세상에, 또 다른 아이는 비행과 폭력이 난무하는 위험한 세상 언저리에 가 있다. 깨어있는 아이는 불과 열두어 명, 바야흐로 선진국 수준의 소규모 학급은 이미 실현된 셈이다.

    아이들을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하려면, 교사는 네오가 돼 매트릭스에 접속한 후 아이들을 설득해서 데려와야 한다. 아니면 스미스 요원이 되어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오거나……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매트릭스와 접속해 있는 동안 성질 급한 교사가 섣부르게 코드를 뽑으면 충격을 받고 깨어난 아이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러나 현실세계가 자기와 무관하고 재미없다고 느끼는 순간, 아이들은 언제든지 다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아이들이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유일한 시간은 점심시간뿐이다. 하지만 밥을 먹고 나면 다시 매트릭스로 떠난다. 알맹이는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텅 빈 몸뚱어리만 남아 있다. 2012년 대한민국의 교실에 아이들은 없다.

    이 막장 드라마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내 기억으로는 ‘교육 경쟁력’이란 미명 아래 평준화가 사실상 해체되고 특목고․자사고 같은 입시 명문고가 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다.

    경쟁 교육 도입되면서 교육 붕괴

    그리고 이명박 정부 때 도입된 ‘고교 선택제’ 같은 경쟁 드라이브 정책이 이 드라마에 극적 긴장감을 한껏 불어 넣었다. 부유층의 우수한 학생들은 몇몇 ‘명문고교’로 몰리기 시작했고, 이른 바 ‘명문대학’들도 그에 맞춰 ‘돈 안 드는’ 내신보다는 ‘돈 먹는 하마’인 수능과 논술의 비중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변두리 지역 학교들은 새로 형성되는 서열체제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닦달하며 입시교육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교육비가 급증하고 대학등록금도 덩달아 치솟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그러나 대학 정원이 고무줄이 아닌 바에야, 처음부터 명문대학에 들어갈 아이와 골백 번 죽었다 깨도 들어가지 못할 아이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 지방대는 어찌어찌 들어갈 수 있지만, 졸업한 뒤 그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운명이다. 절대로 승자가 될 수 없는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경주…… 그렇다고 들러리 서는 것을 거부할 수도 없는 아이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지만, 사회와 학교는 이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준 게 없다.

    교실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존감을 잃어갔다. 스스로 존중받지 못하는 학교에서 타인을 존중하라는 말은 한 낱 공염불이다.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우수한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쏟는 교사 역시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공부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어떤 아이들은 음악이나 연예, 게임의 세계로 빠져들지만, 그것이 결코 미래의 꿈과 희망을 대체할 수 없기에 점점 더 깊은 절망과 자기 파괴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또 어떤 아이들은 매우 거칠고 파괴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소수의 승자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는 승자독식의 경쟁체제는, 그 자체가 엄청난 폭력이기에, 매일같이 폭력과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점차 타인의 고통에도 둔감해지게 마련이다.

    “당신은 네오인가, 스미스 요원인가?”

    이 음습한 공간에서 폭력의 문화가 싹을 틔우고 일상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가 ‘학교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그 체제에서 우위를 차지한 아이들은 자기만의 폭력적인 질서를 타인에게도 강요한다. 마치 어른들이 그들에게 그랬듯이…… 그 아이들이 바로 ‘일진’이다.

    지금 학교는 바늘이 째깍째깍 돌아가는 수백 개의 시한폭탄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떤 폭탄은 터지기 일보직전이고, 어떤 폭탄은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관심조차 끌지 못한다. 그리고 또 어떤 폭탄은 바깥이 아닌 안으로 폭발해서 자기 자신을 한 순간에 파괴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그런 경우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학교 폭력’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학교 폭력’은 빙산의 일각이다.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아이들의 거대한 분노와 절망, 고통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면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피할 수 없다.

    ‘교육의 총체적 붕괴’를 가져온 경쟁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영화 속 슈퍼컴퓨터가 생체전류를 섭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매트릭스에 붙잡아 두었듯이, 우리 사회와 학교는 소수 승리자의 전리품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아이들을 경쟁교육 체제에 꽁꽁 묶어놓았다. 아이들이 묻고 있다.

    “당신은 네오인가요, 스미스 요원인가요?”

    필자소개
    전교조 서울지부장과 대변인을 지냈고, 현재는 고척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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