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도정치 중심주의 vs 사회 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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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5일 01: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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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적 민중주의를 고민했어야

    둘째의 실패 요인과 관련하여 최교수와 나의 관점 차이를 극명하게 만드는 것은 대안적 가능성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이다. 예컨대 참여정부 혹은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의 실패는 대체로 동의하는 전제 위에서, ‘혹시 다른 가능성이 있었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자.

       
      ▲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민주노동당 세력이 그 자리에 있었을 때 대면했을 보수적 저항을 돌파할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를 고민해보자. 나는 여기서 최교수가 이야기하는 바대로 참여정부가 제도정치를 우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도정치에 대한 비(非)제도정치적 저항을 ‘진보적 민중주의(progressive populism)’로 돌파하지 못해서 현재의 위기가 나타났다고 본다.

    오히려 보수세력-사회적 보수나 미디어 보수-이 중도자유주의적 제도정치의 역할을 부정하는 방식(예컨대 다수당이지만 도저히 다수당적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혹은 중도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실제적인 효과에서 무력화시키는 방식, 예컨대 세금중과적인 부동산 정책을 선의의 희생자들을 부각시키고 부동산기득권세력의 저항을 촉발하면서 실제적인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것처럼)으로 저항하는 것에 대항하여, 오히려 대중과 결합하고 소통하면서 이를 돌파하는 적극적인 전략을 추진하지 못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통상 논란이 되는 민중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의 논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나는 박정희가 60년대 개발주의적 드라이브 정책이나 70년대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서 일종의 ’우파 민중주의‘ 혹은 ’보수적 민중주의‘ 전략을 추진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민주정부는 ’진보적 민중주의‘ 정책을 통해서 자신의 지지대중들-심지어는 보수적 대중까지-을 경제적으로 획득하는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였다. 민중주의라는 것은 제도적 한계를 우회하여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과 결합하는 전략을 말한다.

    사실 참여정부 하에서 대중들은 민주정부의 경제적 혜택을 체험하기는 커녕 부동산 양극화 등 더욱 파괴적인 경제적 결과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중들의 경제적 절망을 미디어 보수는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비판의 정서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조중동’을 상수(常數)로 보는 인식

    이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 박정희를 반(反)박정희 세력이 배워야 할 지 모른다. 박정희의 군대식 리더십은 목표성취적인 리더십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 존재하는 ‘장애물’들에 대해서 불평하는 식이다.

    여기서 나는-참여정부 집권세력이 불만을 터뜨리는-이른바 조중동을 ‘상수(常數)’로 보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이는 ‘용인’ 여부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박정희도 언론에 대해서 매일 불평을 터뜨렸다. 조국근대화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보도하지 않고 빈곤이 심화된다거나 하는 등 늘 언론이 ‘불만 확대기관’처럼 작동한다고 불만을 터트려왔다.

    물론 그는 <경향신문> 기자를 구속하거나 빈곤문제를 다루는 기자들을 중앙정보부에 연행하여 고문도 했다. 반독재 민주세력이 추동한 민주주의는 바로 구 독재세력이 혹은 보수세력이 ‘민주주의적 저항’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보수의 제도정치적 공간에서의 저항과 비제도정치적 저항과 비판에 대해서, ‘진보적 민중주의’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이 필요했다고 본다. 이것은 제도정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보수의 제도정치적・비제도정치적 저항과 비판을 넘어서면서 ‘사회적 공존’을 이루기 위해서도, 그리고 그를 통해서 ‘정치적 공존‘을 이루기 위해서도 필요하였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대한 대안적 응전의 가능성

    셋째 참여정부의 최대의 실패요인은 극단적인 양극화와 불평등화에서 표현된다. 이것은 정당한 비판이다. 이것은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제약・굴절 효과를 극복하고 그것을 역류하면서 대안적인 사회경제정책을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적 현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역류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담지자가 되는 역설적 상황이 이러한 현상을 결과했다고 할 수 있다.

    최교수도 강조하는 ‘노동없는 민주주의’로 한국민주주의가 전락했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동의한다. 나는 이를 민주정부 10년 혹은 87년 이후 20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한국사회가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조희연, 2005, “‘87년 체제’와 민주개혁운동의 전환적 위기: 그 원인과 대안의 모색”, <시민과 세계> 8호, 11월)로 전환되었다고 표현한다.

    민주성(정당개혁 등)이나 투명성은 여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현저히 높아졌지만 더욱 험악한 계급사회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역류하지 못하고 그것의 담지자가 되거나 대안적인 사회적 정책을 취하지 못함으로써 계급적・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되기 보다는 심화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이다.

    문제는 그 원인이 무엇이고 패착은 어디에서 발생했으며 다른 가능성은 무엇이었는가하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앞서 서술한 대로 ‘진보적 민중주의’를 구현할 사회경제적 개혁정책을 급진적으로 구사하지 못해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말로만 하지말고 구체적 정책을 달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하는 거대한 힘은 집권세력의 주관적 오류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민주화의 제3의 물결’에 속하는 많은 제3세계 민주정부들–참여정부를 포함하여–의 개혁에 대한 거시적인 제약요인이자 굴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제약・굴절효과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사회경제적 정책의 대안적 비전과 사회적 힘이다.

    양극화와 불평등화로 표현되는 참여정부의 실패의 원인과 관련하여, 최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참여정부 집권세력 자체의 ‘주관적’ ‘오류’ 보다도 민주진보세력 일반의 ‘대안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신자유주의를 역류하는 새로운 사회진보의 동력을 창출하지 못한 시민사회 및 사회운동세력의 ‘사회적 저항력의 한계’가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오류’라는 것은 정답이 있는데 적용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답을 새롭게 창조해야 하고 정답을 구현할 사회적 역관계를 창조해야 하는 데에 있다.

    먼저 ‘대안의 한계’라고 하는 것은, ‘진보적 민중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창출해야 하는데 민주진보세력 일반, 그 일부로서의 최교수나 나를 포함하는 민주진보적 지식인들의 역량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교수와 내가 일정한 책임을 지면서 안출해야 하고 지적(知的)으로 돌파해야 하는 지점이다.

    참여정부에 돌을 던지기에 나는 솔직히 이 문제에 대한 뾰족한 해답을 제출할 수가 없다. 언젠가 신문에서 노대통령이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만 강조하지 말고, 구체적인 정책을 나한테 달라. 답답하다”고 이야기했다는 보도를 보았을 때 나는 자괴감을 느꼈다.

    물론 참여정부가 관료들에 휘둘린 것, 부동산 정책이 청와대를 거쳐 관료적 스크린 과정이나 의회 통과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의원 자체 의해서 갖은 굴절을 겪은 과정을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책 ‘패러다임’적 수준에서 민주진보세력 일반의 지적 한계를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돌파를 할 수 있다.

    이 위기의 국면에 우리가 민주진보세력을 혁신해야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최교수처럼 보수적 정권의 시대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선거에서 승리하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며 그럴 정도로 우리의 민주의식은 성숙해 있다-위기의 근본원인을 혁신하는 대안적 비전과 정책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대안 실험의 사회적 힘을 형성하라

    다음으로 참여정부의 실패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거시적 제약요인에 의해 주어지는 계급적・정치적 역관계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가능케 하는 계급적・사회적 역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이는 주체의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구조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초국민국가적 수준에서 주어지는 제약요인을 역류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 내부의 사회적 저항력을 획득해야 한다.

    남미의 최근 실험들이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힘의 형성은, 제도정치로 수렴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운동정치의 강화’를 통해서, 대중들이 중도자유주의적 정치, 즉 참여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실망과 절망이 보수적으로 회귀되지 않고 급진적 열망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 최교수의 논지와 정반대로 제도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비제도정치적인 사회적 힘을 만들어내야 한다.

    대중을 급진적으로 분노하게 하는데 정답이 있다

    현단계 참여정부-보수는 이것이 진보정부라고 한다-의 실패는 신자유주의를 역류하는 새로운 사회진보의 동력을 창출하지 못한 시민사회 및 사회운동세력의 ‘사회적 저항력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며, 시민사회 및 사회운동세력이 극복해가야 하는 과제를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강남사람은 계급의식이 투철한데 강북사람은 계급의식이 없다’라고 쓴다(조희연,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과 절망을 ‘급진적 열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레디앙).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의해서 굴절된 참여정부의 민주개혁에 대해서 분노하는 대중들이 보다 급진적 열망을 가지게 될 때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를 역류하는 정책을 정부나 제도정치세력이 취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정치세력은 단순히 표를 많이 얻기 위하여 제도정치적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즉 사회를 구성하는 대중들을 급진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대중의 표를 유혹하는 보랏빛 청사진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분노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미디어 보수가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해서 이반하도록 대중이 계급적으로 분노하게 해야 한다. ‘부유세’를 제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급진적 열망으로 전환하는 쟁점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제도정치로 수렴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나아가 사회를 구성하는 대중 자체를 급진화하도록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진보화’의 과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과제가 필요한 대목이다.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

    사실 객관적 조건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사회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적 민중주의’를 실험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남미와 달리 주객관적 조건으로 인하여 차베스가 탄생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 진보적 민중주의의 실험을 제약하는 것은 아무래도 남북분단과 반공냉전주의-최교수가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의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에 의해서 주어지는 ‘의식의 거대한 보수적 포획’이다.

    물론 이것이 많이 균열되고 있지만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역류하는 대안적인 급진적 실험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정도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만큼 대안의 이념적 지형은 협소하다.

    이러한 내재적 제약효과에 더하여,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규율효과와 이데올로기적인 보수화 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박상훈 박사가 ‘신자유주의 보수혁명’(“민주화의 퇴행과 보수적 대중운동”, 한국사회포럼 2006, 3월 24일, 대방동 여성플라자)이라고 부른 바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규율효과가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이데올로기만은 아니다. 이는 시장과 자본에 대한 대중의 새로운 순치(馴致)를 촉진하는 현단계적 힘이다. 그것은 대중을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에 순치되고 그것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강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대중들은 국제경쟁력 담론에 저항하기 보다는 그것의 필요성과 적실성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자기 삶-고통스럽지만-을 꾸려가고 있다.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지속

    여기서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을 뛰어넘고자 하는 급진진보적 세력은 바로 한편에서는 진보적 민중주의가 가능한 사회적 대안을 안출(案出)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역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여전히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진보화’의 과제가 사회운동에게 주어져 있다.

    여기서 나는 줄곧 현재의 위기현상을 참여정부 주체의 문제로 환원해서 ‘타자화’시키고 방식으로 분석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위기적 상황은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1920년대 소련의 내전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물론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 다수가 민주노동당에 투표할 정도로 대중이 변화해 있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위기의 진보적 극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반도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되지만).

    ‘진보적 민중주의’를 구현하는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인 사회적 국가’를 실험하기에는 이미 ‘권력이 정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으며’(나는 이 말이 노대통령이 한 가장 적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의 수용소 발언 등과 비교해 볼 때), 시장적 기득권세력과 대자본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적 미디어는 이미 반(反)개혁지로서 보다는 계급지(階級紙)로서 인식하고 행위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역류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의 정치적 위기는 그러한 질서에 역류하기에는 힘이 너무 약하고 그것에 포획되어 순치되기에는 너무 강한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갈 길이 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급진적 분노는 87년 6월 항쟁 속에 내재화된 것이 아니다. 6월 항쟁 이후 지난 20년 동안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가 존재하는 의제들-정치개혁, 재벌개혁, 정당개혁 등-을 중심으로 어떤 의미에서 ‘쉽게’ ‘압축적으로’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97년 전면적 개방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내재화’로 인하여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와 불평등을 극복하는 방안에 대해서 대중적 합의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개방화가 반독재세력이 아니라 반독재정부라고 하는 국민정부에 의해서-경제위기 극복의 방략으로-추진되었기 때문에, 또한 민주정부라고 하는 참여정부에 의해-한미FTA 추진의 형태로-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은 더욱 복합적인 의식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대중들이 일관된 방향으로 급진적 분노를 표현하기에는 아직 이르거나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대중들이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 지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대안적 비전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흐름을 형성해가야 한다. 예컨대 중도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개혁주의’를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 전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래구상 같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국민적 정치운동’ 세력은 기성 정치-보수적 정당이건 중도자유주의 정당이건-를 ‘낡은 정치’라고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도자유주의 정치세력을 진보화하고 사회화하는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선도해야 한다.

    시민운동 같은 경우, 자신들이 추동한 민주성과 투명성이 증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험악한 계급사회가 출현했다고 하는 인식 위에서, 공공성이나 사회공공성과 같은 담론을 새롭게 수용해야 한다.

    예컨대 ‘참교육학부모회’와 전교조가 선도해온 ‘참교육’의 ‘참’은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 교육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계급사회적 불평등’의 재생산에 저항하는 진정한 사회적 ‘공(公)’교육에 무게가 찍어질 수밖에 없다(나는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지만 ‘성적장학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부유층 자제’들에게 ‘떡하나 더 주는’ 것일 수 있다).

    대안적 비전을 담는 다양한 프로젝트들

    이러한 변화의 선도적 지위에 급진진보적 정치세력과 민중운동, 진보운동이 설 수밖에 없다. 보수적 미디어가 선도하는 것처럼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해서 분노하지만 자신들의 분노를 급진적 지향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는 대중들이 급진적 저항의 무대로 나아오도록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사회적으로 진보화시켜 가야 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역류하는 대안적 비젼을 선도적으로 구체화해가야 한다. 이것이 현단계 진보의 핵심적인 혁신과제이다(조희연, “한국의 이념갈등과 ‘진보의 혁신’,‘보수의 혁신’”, 한국정치학회・사회학회 연합학술회의, 2006년 10월 20일, 프레스센터)

    이러한 혁신에는 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들이 경쟁할 것이다. 정치적 개혁주의에서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전환하고자 하는 중도자유주의적 혁신 프로젝트도 있을 수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 급진진보적 프로젝트도 존재할 수 있다(조희연, “경계 뛰어넘지 못하는 진보, 반독재 민주세력,‘분열’하라”, 오마이뉴스). 급진진보적 프로젝트 내에서도 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가 경쟁할 수 있다.

    이러한 대안적 프로젝트들은 근본적으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축적체제’를 역류하고 그것을 공적・정치적으로 규율하는 것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개방경제는-한국은 아시아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금융시장 및 자본시장 등이 개방화된 나라이다-는 양극화 기제를 구조적 본질로 내장하고 있다.

    이 양극화는 과거 공적 부조가 필요한 하층계급만이 아니라 중간층 혹은 중산층의 붕괴까지를 포함하는 가혹한 과정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경제적 과정이 대중의 정치적 불만을 촉진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 국민경제의 정치적 안정화를 위해서도 양극화 기제에 대한 공적・사회적 상쇄가 필요하다.

    이러한 공적・사회적 상쇄 기제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 소수의 경쟁력 부문과 대중경제 부문의 ‘단절’을 상쇄하는 대책들이 내포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 보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자본이나 일부 부문이나 집단을 중심으로 국제경쟁력이 강화되더라도 그것으로 광범한 사회적 대중들의 삶의 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자로 보더라도 대기업의 고용은 130만 내외에 불과하다.

    즉 보수가 이야기하는 선진화 프로젝트는 결국 ‘130만을 위한 선진화’이다. 대안적 프로젝트는 ‘1,300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명박의 경부운하 프로젝트 같은 것도 박정희 시대를 답습하는 ‘토건국가적’ 신개발프로젝트일 뿐이다. 그러한 프로젝트들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양극화 문제와 불평등화 문제는 전혀 해결될 수 없다. 결국 제도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노, 또한 정치와 사회의 괴리는 여전히 지속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대안적 비젼을 안출하기 위한 고민과 탐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사회연대국가, 사회연대경제, 진보적 대중경제, 사회투자국가, 사회적 완충국가, 급진적 서민경제, 지구화시대의 신대중경제,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대안경제 등 그러한 대안적 비젼을 무엇으로 부르건 간에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대중을 먹고 살게 해주는’ 대안을 내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은, 보수에서 이야기하는 ‘선진화’가 결국 ‘가진자들의 선진화’임을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진정한 의미의 ‘서민들이나 못가진자들의 선진화’가 가능한 대안패러다임을 구체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최교수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인데, 현시기 우리의 고투(苦鬪)가 이러한 대안적 비젼을 안출하는 것을 통하여 민주진보를 혁신하는 과정이 되지 않고 정권 재창출을 위한 것이거나 진보세력의 지지표를 확대하기 위한 정치적 고민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는 대중의 절망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민주진보세력이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도 어렵다. 이런 점에서 시대정신의 보수화를 저지하고 진보적 시대정신의 ‘구성적 창조’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의 상황 속에서, 대중에게 새로운 희망의 내용들을 만들고 그것을 대중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되어야 의미를 갖는다.

    돌이켜 보면 국민정부에서 참여정부로의 이행은 ‘연속’의 과정만은 아니었다. 국민정부 주체세력의 부패 등에 대한 ‘단절’의 과정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차기 정부로의 전환과정은 참여정부의 무능과 한계, 실책에 대한 ‘단절’이 과정일 수밖에 없다. ‘가혹한 단절’ 속에서 새로운 희망, 혹은 희망의 근거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제도정치 중심주의와 ‘사회’ 중심주의

    마지막으로 최교수와 나의 견해 차이에는 근본적으로 현재의 위기와 갈등을 보는 제도정치 중심주의적 관점과 ‘사회’중심주의적 관점의 차이가 근저에 존재한다.

    제도정치는 기본적으로 타협의 공간이다. 최교수가 기대하는 정치적 공존과 정치적 안정화는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이 타협을 안하고자 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복합적인 정치적・사회적 동학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에서 제도정치-최장집교수가 복원하고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하는-의 확장과 정착이 갖는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최교수가 참여정부 정치 주체들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정치적 공존’은 나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공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적 갈등을 수렴하는 제도정치의 진정한 역할을 저해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정치주체들이 제도정치의 역할을 확장하여 그것에 사회적 갈등을 수렴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여정부로 상징되는-제한된-중도자유주의적 정치마저도 보수적 정치사회세력들이 비타협적으로 거부하고, 또한 중도자유주의적 정치가-무능력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거시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대중들의 사회적 고통을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되는 ‘정치와 사회의 괴리’, 혹은 정치에 대한 사회(그 구성원으로서의 대중)의 분노 때문에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나는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참여정부로 상징되는 중도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타협성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보수세력-자본을 포함하여-의 비타협성이 문제이며, 신자유주의적 힘에 의해서 파괴된 대중들의 분노를 완충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것이 문제이다.

    예컨대 한국의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의 역량 수준은 세계적인데 그에 대립하는 자본진영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또한 시민사회와 노동의 요구를 수렴하는 제도정치적 역할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에, 정치는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게 되는 것이다.

    낭떠러지 사회와 벼랑끝 전술

    나는 한국사회가 ‘낭떠러지 사회’이고 그래서 노동세력은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게 된다고 말한다. 노동세력이 60년대처럼 개발독재에 의해 포섭되어 존재하면 낭떨어지 사회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데 노동세력이 세계 최고수준의 전투력을 갖고-물론 최근의 내적 위기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있기 때문에 사회적 공존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러한 사회적 불만, 혹은 정치에 대한 사회의 불만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을 미디어 보수세력이 증폭시켜 참여정부에 대한 불신과 비판으로 수렴시키게 되고 이것이 참여정부의 위기로 나타나게 된다. 나아가 이 위기에 편승하여 제도정치 공간 내의 정치적 보수세력은 중도자유주의세력과의 안정적인 비(非)적대적 공존을 거부하게 되고 이것이 최교수가 지적하는 제도정치의 정상화를 저지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회의 급진화가 나타날 때만이 보수세력의 비타협성이 견제되고-보수세력과 중도자유주의세력의 비적대적 공존을 기본으로 하는-제도정치의 정상화가 가능하게 된다고 판단한다.

    나는 이런 전제 위에서, 제도정치 중심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서, ‘정치와 사회의 관계’ “‘사회’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의 위기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교수가 이야기하는 제도정치의 정상화와, 제도정치가 사회적 갈등을 수렴하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도 오히려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사회진보화’가 진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앞서도 서술하였지만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세력이 집권세력이 되었을 때도 제기되는 난제들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이 글을 썼다. 참여정부의 실패는 참여정부 주체들의 계급적 한계 때문이라고 하거나 신자유주의정부였기 때문이었다고 한 마디 말로 분석을 대체해버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나는 그 자체는 인정한다).

    단지 나는 사회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정치를 연구하는 정치사회학자로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헤게모니의 정치나 진보적 민중주의의 과제는 사회주의 체제 혹은 사민당 정부에서도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본다.

    헤게모니의 정치나 진보적 민중주의 대신 스탈린주의는 이를 ‘유혈적 폭력’으로 대체했다. 박정희도 결국 정확히 그러했다. 이런 점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자세로 고민을 해보자는 취지이다.

    존경하는 최장집 교수님과의 논쟁이 현시기 위기를 보는 다양한 해석들을 분출시키고 그를 통해 시대에 부응하는 대안적 사고가 구성되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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