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대법원의 최근 판결들
    [기고] 변화 외면하는 미국 민주정
        2022년 06월 29일 01: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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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에 올린 김정진 변호사의 글을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미국은 오래된 국가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수식어를 하나 더 붙이면 이해가 갈 거다. 미국은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다.

    미국에서 성인남자 보통선거권을 시행한 것이 19세기 초인데 아마 이즈음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제도였다. 1793년 로베스삐에르의 국민공회가 보통선거제를 도입하기는 했으나 외국과의 전쟁 등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쓸 당시만 해도 유럽의 왕들과 지배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였다고 하고, 오히려 가장 두려운 집단은 보통선거제를 주장하는 민주주의자였다고 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바로 군대를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의 주장대로 실현이 되면 그것은 바로 훈족의 로마 파괴에 버금가는 문명의 파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유럽에서 성인남자 보통선거권이 일반화된 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특히 노동운동이 격화하면서 도입된 나라가 많았다)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미국의 민주정체는 그 자체로 상당히 오래된 체제다.

    미국이 만든 많은 제도들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민주정체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그 제도들을 앞다투어 받아들였다. 심지어 한국처럼 장기간 독재를 거친 나라에서도, 대부분의 선진국은 민주정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제도가 선진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정파를 떠나 별 이견이 없었다. 다만 제도 도입에 있어서 시기상조론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든 한국 같은 나라들은 선진국의 제도를 열심히 비교 분석해서 도입하였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역부족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최빈국이었던 1960년대에도 우리 선배들은 전체적으로 외국제도를 그대로 베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대한 여러 선진국의 제도를 조사하여 취사선택 여부를 고민하였고, 필요할 경우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었다. 1967년 전면적인 세법 개정을 할 당시 정부는 미국의 유명한 재정학자인 머스그레이브로부터 아주 상세한 세법 개정안에 대한 자문을 받았고, 이 보고서는 당시 잡지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한국의 제도가 계속 개선되었던 것은 이러한 경로를 밟은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우연히 초기에 도입한 제도의 영향 때문에 그 경로의존성을 밟다보니 의도하지 않게 특정분야는 제도나 관행이 상당히 발전하게 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건강보험 분야가 이렇다고 본다. 1970년대 대상자가 공무원과 대기업 노동자로 한정된 의료보험법을 논의할 때 이것이 세금이 아니기에 관련자들의 조세 저항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경제기획원-재무부 관료들의 생각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면서 이 보험료는 전국민이 납부하게 되면서 사실상 조세와 별 차이가 없게 되었고, 급기야 자영업자 소득 파악 문제 때문에 소득 외에 재산까지 보험료 부과 기준에 포함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으로 어찌 되었던 잘 작동하는 체제가 된 것은 분명한 일이다.)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는 민주정의 제도들

    하지만 너무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어찌 보면 자신이 모든 것의 원조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라도 18세기-19세기에 형성된 제도를 잘 바꾸지 않는 것 같다. 미국의 발명품인 대통령제를 많은 나라들이 수입했지만, 어느 나라도 미국의 그 이상한 대통령 선거제도를 수입하지는 않았다. 연방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도 하지만 전 세계에 연방제인 많은 나라가 있지만 저런 이상한 간접선거를 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 헌법 전공자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 헌법 제정 당시에 큰 영향을 미친 연방주의자들의 주장을 담은 ‘Federalist Paper’는 아주 중요한 헌법해석의 근거가 된다고 한다. 아마 다른 나라라면 그냥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상적 조류 정도로 이해되었을 것인데 200년 이상된 팜플렛이 헌법해석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언듯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로 치면 정약용이 쓴 형법서인 ‘흠흠신서’가 현행 법률의 중요한 해석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미국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오래된 나라이고, 지금 기준에서 보면 이상한 제도들도 잘 바꾸지 않는 나라다.

    개인적으로는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종신제 또한 사실 매우 뜨악하다. Federalist Paper에 연방대법관을 종신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는 선거로 뽑히는 대통령과 의회가 신성한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가 있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대법관을 종신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최초 도입 경위야 어찌 되었든 현대사회처럼 수명이 늘어난 나라에서 이런 종신직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미국과 미국제도를 아무리 찬양하는 사람도 이 종신직을 대한민국에 도입하자고 하는 사람은 과문한지 몰라도 본 적이 없다. (만약 양승태 씨 같은 사람이 종신 대법관이었다면 사법농단을 죽을 때까지 했을 것 아니겠는가. 현 대법원장이 종신으로 한다고 하면 아마 보수층들은 폭동이라도 일으켰을 것이다.)

    전 세계 시민들을 충격과 공포에 시달리게 하는 미국의 총기난사 사건도 보면 그렇다. 결국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는 것이 “미국 수정헌법 제2조(무기소지의 권리) 기강이 확립된 민병들로서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요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당하지 않는다.” 때문이라고 한다. 일단 헌법에 민병의 자유를 집어넣은 것도 현대 시각에서 보면 이상한 일이다.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대개 ‘압제에 대한 저항권’ 같은 표현으로 쓴다. 민주정체가 서기까지 무력 충돌, 혁명을 포함한 여러 곡절이 있는 것이 어느 나라나 일반적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민병 및 무기 소지의 자유까지 헌법에 넣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수정헌법 또한 18세기에 나온 것으로 미국의 주들이 영국에 대항하여 민병대(그 대장이 워싱턴 아니겠는가)를 결성한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고색창연한 18세기적 내용을 버젓이 21세기에도 헌법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그냥 미국에서만 통하는 말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미국이 독립할 당시에는 뒤에서 장전하는 소총이나 탄창으로 장전하는 소총이 없었다. 화승총 비슷한 것을 사용하던 시절의 규정을 M16과 AK 소총의 시대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로 대 웨이드((Roe v. Wade.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의 연방대법원 판결) 판결의 번복을 보면서도 이 오래된 나라는 더 이상 세계를 지도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여전히 GDP가 세계 1위이며, 국방비는 다른 모든 나라를 압도할 만큼 많이 사용하는 나라이기는 하다. 그런데 미국이 단지 이러한 경제력과 국방력만으로 세계를 지도해왔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이 연합하여 나찌 독일을 유럽에서 패퇴시키고, 일본 제국주의를 굴복시켰을 때 미국은 어찌 되었든 문명의 수호자였던 것이고, 전후 자유무역이라는 이상을 내걸고 자국 국내시장에 타국의 접근권을 공평하게 보장했을 때, 한국 같은 나라는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설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악수하는 동영상이 돌아다니는 고령의 바이든을 보면서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생각난다. 로마의 전성기의 마지막 황제이자 유명한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에서 산 기간 동안 추운 접경지에서 지낸 기간이 더 많다고 한다. 로마의 국경은 이미 게르만족 등으로 인해 불안해져 있었기 때문에 최고사령관으로서 황제는 도저히 로마에서 편안히 지낼 수 없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몸도 약했다고 하는데 이 병약한 철인 황제가 추운 겨울에 주둔지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로마의 장군들은 마음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아들인 코모두스가 네로를 버금가는 막장 짓을 하고 사람을 죽여도 변방의 장수들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

    2차대전 후의 구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단기간에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그 경향은 분명해 보인다. 새로운 것은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계는 또 다른 격변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닌지 변방의 서생은 우려할 따름이다.

    필자소개
    변호사.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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