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미궁 속, 장은증권 '의문사' 10년
    By tathata
        2007년 01월 25일 12: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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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또렷한 상흔이 있다. ‘패배’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채 아픔을 재생시킨다. 지난 98년의 장은증권 퇴출은 김병곤 씨(41)에게 아직도 아물지 않는 ‘한’으로 남아있다.

    지난 21일 98년 외환위기 때 퇴출된 장은증권의 김병곤 씨를 여의도에서 만났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커피 전문점을 찾던 중, 그는 먼발치에 있는 고층빌딩을 향해 “저 빌딩에 장은증권이 있었다”며, 마치 ‘역사의 현장’을 더듬는 듯 말했다.

    김 씨는 “굳이 이런 인터뷰를 해서 1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이미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이제 그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이 과제”라며, “눈물샘을 자극하는 10년 전 아이엠에프의 상황을 회상하기 보다는, 외환위기가 정확히 왜 왔는지, 외환위기를 초래한 사람들은 지금 그 책임을 오롯이 지고 있는지 취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 10년간 삶의 고정변수, ‘장은증권 퇴출’

       
      ▲ 장은증권 노동자 김병곤씨
     

    장은증권의 퇴출은 지난 10년간 그의 삶을 규정해온 ‘고정변수’였다. 장은증권에서 나온 이후 그는 지난 10여년간 다른 증권사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며 쉽사리 적응을 해나가지 못했다.

    “장은증권 노동자들이 지금은 국회로, 은행권으로, 다른 업계로 진출하여 뿔뿔이 흩어져 제 살 길을 살고 있지만, 원해서 그리로 간 것은 아닙니다. 장은증권이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최근에는 예전에 알던 상사분이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회사 퇴출에 모든 원인을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사회 부적응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그만큼 회사의 퇴출은 직원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남아있다는 말이었다

    장은증권은 60년대 명동에서 철판으로 주식거래를 하던 시대에 생겨났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 김 씨는 92년 1월에 입사했으며, 당시 장은증권의 전국 점포수는 12개, 직원 4백여명의 작지만 내실있는 증권회사였다.

    그 때는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있는 줄도 몰랐다. 말 그대로 문서 복사하기 등 사무를 보조하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이 정규직 노동자와 다른 고용형태였을 뿐이었다. 장은증권의 영업직 직원의 경우도 다른 증권사 직원들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임금이나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주식에 투자하여 회사가 정해준 할정액을 채웠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제 돈을 쏟아붓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금융감독위원회는 97년 ‘금융기관관리 선진화 방안’을 내놓았다.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었다. “외환위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금감위가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갑자기 총위험 대비 자기자본비율을 150%로 낮추지 못하면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장은증권은 전산자동화 설비 투자, 사옥 매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가던 터였기 때문에 당연히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었죠.”

    부실금융기관으로 선정되는 것은 퇴출선고나 마찬가지였다. 98년 2월에 그는 당시 박강우 위원장과 함께 사무국장으로 노조 선거에서 당선됐다. 노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장은증권의 대주주인 장기신용은행을 설득해서 150%를 맞출 수 있도록 자금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새로 취임한 이대림 사장 또한 오세종 장기신용은행장을 만나 자금지원을 설득했다.

    “회사는 살려야 한다” 전 직원 사직서 제출

    장기신용은행 측은 처음에는 직원 50%의 사직서 제출을 전제로 자금지원 계획을 밝혔으나, 나중에 기존 입장을 뒤집고 전 직원의 사직서 제출을 요구했다. 노조는 “회사가 문 닫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회사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는 위기감으로, 전 직원의 사직서 제출 요구도 수용했다.

    일단 회사를 살린 후 정상화되어 인력을 채용하면, 그 때 다시 회사로 돌아가도 늦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98년 7월 3일 새벽, 이대림 사장과 노조의 합의는 그렇게 이뤄졌고, 회사측은 직원들에게 곧바로 160억여원 규모의 명예퇴직금을 지급했다. 160억 가운데 1백억원은 직원들이 할정액을 채우기 위해 대출을 받아 사들인 주식을 처분하는 금액이었으며, 나머지 60억원은 1년간의 기본금과 퇴직금을 합한 명예퇴직금이었다.

    노사합의가 극적으로 이뤄지자, 조합원들은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져 근처 포장마차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되뇌이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다음날인 7월 4일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 “장은증권 직원들이 고객 예탁금으로 명예퇴직금 잔치를 벌였다”, “고객들의 돈으로 야반도주하는 몰염치한 행위”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됐다. 노조가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쓰고 명예퇴직금을 받아낸 이른바 ‘먹튀’ 사건이라는 것이다.

    7월 3일 밤에 노사합의가 됐는데, 불과 몇 시간만에 언론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장은증권 노사를 향해 화살을 겨냥했다. 이쯤해서 이대림 사장도 갑자기 입장을 뒤바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노사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며 박강우 위원장을 고소했다. “당시 교섭석상에 저도 있었고, 많은 조합원들도 있었는데 강압은 있을 수 없었죠.”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명퇴금’이 ‘먹튀’로, ‘노사합의’가 ‘강압’으로 둔갑

    그리고 일주일 후 이대림 사장이 금융감독위원회 직원의 입회 하에서 장은증권의 ‘영업중지’를 신청했다. 한 회사의 사장이 자구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스스로 자기 회사의 사업을 포기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박강우 위원장을 조사한 담당 검사는 “강압과 협박에 의한 합의서 강요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며 “별다른 혐의를 찾기 힘들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이 사장과 업무상 배임을 공모했다고 혐의를 제기했다.

    모든 게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 사장의 갑작스런 영업중지 신청, 박 위원장에 대한 고소고발과 검찰의 태도변화, 그리고 장기신용은행의 자금지원 약속 파기 등… 그리고 이런 의문점들은 진실이 규명되지도  못한 채, 회사도 어려운데 직원들은 명예퇴직금만 챙긴다는 ‘도덕적 해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졌다.

    퇴출의 결정타 날린 <매일경제>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장기신용은행의 5백억 자금지원을 계속 요청했고, 금감위 경영평가위원회에 재무구조 개선책을 제출하는 등 재기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장은증권은 경영평가위원회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았고, 노조는 영업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금감위원회에서 장은증권, SK증권, 쌍용증권 등에 대한 개선계획 평가를 심의하는 첫 날, 위원들의 책상에는 그 날자 <매일경제>신문의 보도가 올려져 있었다. “국민의 혈세로 만든 장기신용은행이 부실증권회사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최고의 점수를 받은 장은증권은 재기의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매일경제>가 왜 그런 보도를 했는지,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금감위의 부실금융기관 지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은증권은 노조가 이제 직접 외자유치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대만 큐슈그룹의 5백억원 지원을 거의 성사단계에까지 이를 정도로 진척시켰다. 금감위를 찾아가 이같은 사실을 알렸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렇게 98년 장은증권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여전히 미스테리에 싸인 장은증권 ‘의문사’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장은증권의 퇴출은 증권사의 의문사처럼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외환위기가 왜 왔는지, 당시 금감위 재경부 관료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파헤치는 것이 먼저”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됐다. 이유조차 모른 채 그들은 당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사라졌지만, 노동자들은 회사를 잊을 수 없었다. 특히 예금보험공사가 제기한 박강우 위원장에 대한 160억원 손해배상과 대법원의 징역1년6월 집행유예 3년 판정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김병곤 씨는 해외자본 유치마저도 실패하자, 더 이상의 기대를 품지 않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리젠트증권, 메리츠증권, 현대선물, 우리증권 등… 해마다 그의 명함은 바뀌어갔고, 정규직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김 씨는 현재 서울증권 계열사의 서울선물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는 지금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니다. 서울선물에는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별도의 팀이 꾸려져 있는데, 회사 측은 이들 직원들에게 4대보험 가입만을 지원할 뿐 어떤 임금도 지급하지 않는다. ‘서울선물’이라는 명의와 금융상품만 가져올 뿐이고, 상품판매를 통해 수익이 발생하면 그것을 일정비율로 나눌 뿐이다.

       
      ▲ 아이엠에프 이후에도 금융권의 구조조정은 계속됐고, 노동자들의 투쟁도 계속됐다. 사진은 지난 2004년 12월 5일 증권사 노동자들이 업무영역 확대 문제를 놓고 싸우는 모습.(사진=사무금융노동조합)  
     

    “번만큼 챙기는 나는 불안한 자영업자”

    “일종의 자영업이라고 할까요.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 구분이 무의미하죠. 능력 있다고 생각하면 굳이 (고정급을 주는) 정규직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번만큼 가지고 가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고요.

    물론 예전의 장은증권에서처럼 같이 얼굴을 마주보며 친목을 다지는 직장 분위기는 기대할 수 없죠. 각자 알아서 일하고 알아서 돈을 챙겨가는 ‘각박한’ 생활입니다. 만약 그 달 한 푼도 벌지 못했을 때, 월급은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는 자산 가치의 변화 속도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라도 했다.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변화의 속도나 폭이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는데, 보름새 부동산 가격이 수천만원씩 오르는 현상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생 자녀들에게 상위권 대학을 강요하기 보다는 광속처럼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는 법을 체득할 것을 조언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내년부터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 대형 증권사들이 4~5개로 통합되는 등 대규모 구조조정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된다. 사무금융연맹은 이 법이 외환위기의 구조조정에 비등할 정도로 금융권 노동자의 대량해고를 몰고 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서울선물 또한 서울증권으로 통폐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김 씨 또한 구조조정의 ‘쓰나미’를 또다시 겪어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는 셈이다.

    10년 전 투사들이 뭉친다

    “장은증권의 ‘동지’들은 가족처럼 만나는 모임을 갖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시골의 밭을 하나 구해 포도농장을 함께 일구고 있죠. 재미가 정말 쏠쏠합니다. 직접 재배한 포도를 나눠 먹는 맛이 달콤하더군요.

    10년 전 그 사건은 여전히 저에게 한으로 남아있지만, 이제는 모두 털고 일어나서 동지들과 함께 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직까지는 아이디어 수준이라, 자료나 현지조사를 펼치고 있는데,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든든합니다.”

    김 씨는 그들이 새롭게 일굴 사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는 않았지만, 약간 들뜬 표정이었다. 과거는 실패했을 지라도, 미래는 승리한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나 할까.

    그들이 펼칠 사업에는 외환위기나 정리해고, 금융감독위원회, 언론의 악의적 보도, 부실금융기관, 회사퇴출과 같은 우울한 단어들이 결코 들어서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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