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라는 로컬리티
    재현을 못한 거장의 범작
    [Come&See] <브로커>의 아쉬움
        2022년 06월 24일 1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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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칼럼 <나의 해방일지>와 <우리들의 블루스>, 동전의 양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3번째 작품 <브로커>는 깐느의 수상 여부 및 감독의 명성과 상관없이 범작이다. 흡사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인 <아무도 모른다> 와 <어느 가족>의 서사를 반반씩 섞어 놓은 것 같은 <브로커>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이라는 로컬리티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리얼리스트로서 개인의 일상에 천착하는 히로카즈 영화는 대체로 느슨한 서사구조를 띠고 있다. 그는 촘촘하게 구성된 서사를 통해 드라마틱한 결말을 도출하는 방식이 아닌, 반복되는 일상이 느슨하게 포개지면서 관객들을 캐릭터들의 삶에 천천히 젖어 들게 만드는 방식의 서사를 추구한다. 이러한 ‘허허실실’ 서사에 영화적 순간을 부여하는 원동력은 서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로컬리티에 있다. 그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본의 가마쿠라나 도쿄의 로컬리티는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캐릭터들이 숨 쉬며 살아가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히로카즈 영화의 핵심은 로컬리티의 서사에 있다.

    당대의 리얼리스트인 켄 로치나 다덴 형제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켄 로치는 영국 북부 노동자 밀집 지역의 로컬리티를 서사의 원천으로 삼는다. 다덴 형제의 영화도 벨기에 공장 지역인 리에주의 로컬리티를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이처럼 장르 감독이 아닌 리얼리스트에게 로컬리티란 서사 그 자체나 다름없다. 아침에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고, 퇴근해서 동네 펍에서 맥주 한잔 들이키는 일상과 녹차에 미소 수프로 아침을 해결하고, 선술집에서 사케를 들이키는 일상은 서사에 ‘지금 여기’라는 핍진함을 더해 주는 로컬리티인 것이다.

    로컬리티의 서사는 카메라가 서사의 주체를 잡아주다 밖으로 빠져 다른 사물이나 공간을 응시하는, 즉 컷 어웨이를 통해 도드라진다. 특히, 히로카즈는 컷 어웨이를 통해 서사의 로컬리티 를 잘 표현하는 감독이다. 좁게 이어지는 골목, 흩어지는 구름, 빠르게 교차하는 전철, 어두운 굴다리, 쓸쓸한 해변, 텅 빈 다다미 거실 등의 컷 어웨이는 단순히 시간 경과나 배경을 보여주는 쇼트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캐릭터들이 정주하는 공간의 정서와 문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서사가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할 수 있는 시공간을 획득하게 만드는 이미지이다.

    로드무비 형식의 <브로커>는 이러한 로컬리티의 서사가 결핍되어 있다. 부산에서 시작해 영덕, 울진, 인천, 서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의 공간들이 소개되지만, 공간의 나열에 그칠 뿐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범 세계적인 이슈인 베이비 박스 문제가 한국이라는 로컬리티와 결합하여 어떠한 특수성을 갖는지? 어떠한 사회적 함의를 획득하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로컬리티를 체득하지 못한 외국인 감독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히로카즈 영화 중 이례적인 서사 구조와 맞닿아 있다. 이는 <브로커>와 가장 비슷한 서사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어느 가족>과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난다. 두 영화는 서사의 내용적인 측면은 닮아있지만, 서사의 구조는 판이하다. <어느 가족>이 유사 가족의 일상과 사연에 집중해서 쫓아가는 단순한 서사구조를 통해 일본 사회의 복지 시스템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면, <브로커>는 상현 일당, 미혼모 소영, 이들을 쫓는 경찰 수진, 소영의 살인사건을 쫓는 강력계 형사, 살인 피해자 가족, 그리고 입양 부모들 등의 모습을 교차편집을 통해 제시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서사구조는 공간의 로컬리티를 표현하는 데 한계를 노출한다. 수많은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다루는 다층 플롯은 한국 사회의 베이비 박스 문제를 본질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한국을 서사의 배경으로 전락시킨다. 로컬리티 재현의 실패는 고스란히 관객들의 감정적 동일시와 연결된다. <어느 가족>이 유사 가족이 해체된 후 유사 가족이 다시 조우하는 엔딩에서 관객들의 동일시를 끌어낸다면, <브로커>의 여러 캐릭터의 현재를 보여주는 결말은 관객들의 감정적인 몰입을 방해한다. 마치 장르 영화처럼 설계된 <브로커>의 서사구조는 베이비 박스 아기 우성을 둘러싼 다층 캐릭터의 이해관계는 잘 표현했는지는 몰라도, 히로카즈식 로컬리티의 표현이나 휴머니즘의 투영에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브로커>의 영화적 순간은 단연 소영이 모텔 방에서 불을 끄고 “태어나서 고마워”라는 말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상현 일당의 도주 행각처럼 너무 지난한 길을 걸어왔다. 그 과정에서 이 휴먼한 리얼리스트는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다시 그의 일본 영화가 보고 싶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소개
    영화감독. <고백할 수 없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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