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지모' 쟁쟁한 명망가들 어디 숨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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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4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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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삼지모’는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의 약자로, 지난 해 5월 삼성재벌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조언해줄 전문가들 모임으로 발족시켰다. 삼성은 그룹경영 전반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개선점을 지적해줄 옴부즈맨들의 모임이라고 그 성격을 밝히고 있다.

    삼성은 당시 X-파일과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둘러싸고 여론이 악화되자, 이씨 가문의 8천억원의 사채 출연에 이어 이 모임을 발족시켰다. 발족 당시 ‘삼지모’는 결국 삼성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들러리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삼지모 참여 인사는 모두 8명으로 김형기 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경북대 교수), 방용석 전노동부장관,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신인령 전 이대총장, 이정자 시민운동지원기금 이사, 최열 환경재단 대표, 최학래 전한겨레신문 사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이다. <편집자 주>

    나는 5년 동안 <시사저널> 독자였다. 개선문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집으로 배달되던 시사저널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 나와 한국을 연결해주는 거의 유일한 끈이었다. 독일에서 인쇄되던 한겨레 구주판을 보던 극성 유학생도 있었지만, 나는 시사저널 정도로 만족했다.  

    파리에서 나를 한국과 연결해주던 유일한 끈

    돌이켜 보면 그 시절처럼 우리나라 정부의 책을 많이 읽던 시절도 없었다. 파리에 있던 한국 문화원에는 별 책은 없었지만 찾아보기 어렵던 유신전집을 포함해서 박정희 시절에 열심히 찍어내던 책들이 대부분 있었다. 그 당시의 내 기억으로는 김훈의 글을 <시사저널>에서 읽는 것이 요즘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 시사저널은 비교적 괜찮은 읽을 거리였다는 것으로 기억난다.

    소위 ‘시사저널 사태’라고 부르는 사건을 보면서 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시사저널>은 보통 정론지라고 부르는 잡지이고, 때로는 객관성이라는 지나친 잣대로 양 쪽의 견해를 다 보여준다는,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잡지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언론 중의 하나이다.

    <시사저널> 사태가 벌써 몇 주째 접어드는 것을 보면서 심경은 밝지 않다. 코메디에 가까운 이 희극적인 사태가 사장측의 소송과 직장폐쇄와 함께 또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 너무 익숙하게 보아온 직장폐쇄와 손배소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자꾸 이 사건의 이면과 발단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 전국언론노조 시사저널분회 조합원들이 22일 서울 충정로 편집국 앞에서 회사 쪽의 직장폐쇄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미디어오늘 이창길 기자 photoeye@
     

    삼지모의 직무유기

    그리고 ‘삼지모’라고 삼성과 사회가 충돌하게 되는 일들을 부드럽게 풀겠다고 모였던 소위 ‘삼성표 시민단체’ 어른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사회적 직무유기라는 표현을 쓴다면, 분명히 이 사건은 삼지모라는 조직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단지 삼성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은 기사를 실으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직장폐쇄와 손배소까지 진행되게 된 이 사건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자, 다가올 자본독재의 시대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미리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말지 사태, 시민의 신문 사태, 조금 멀게는 당대비평 휴간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위에서 오랫동안 버텨왔던 많은 매체들이 사라지거나 나름대로의 아픔들을 겪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진실’과 ‘사실’에 대해서 지불하고자 하는 비용의 크기를 살짝살짝 알려준다. 내 조심스러운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 사회는 진실에 대해서 지불하고자 하는 지불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진실은 복잡하고, 해석을 가지고 있다.

    진실과 사실에 대한 지불 비용의 크기

    더 많은 진실들이 등장하고 더 많은 해석이 등장한다고 해서 ‘절대진리’에 도달할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은 없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값어치를 낮게 생각하는 사회는 결국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게 된다.

    사회 한 구석에서 <시사저널> 같이 비중 있게 오랫동안 활동해온 매체가 직장폐쇄를 겪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은 그만큼 진실의 가치가 우리나라에서 낮게 매겨진 것이라고 경제학적으로는 해석하게 된다. 진실에 대한 지불의사(willingness-to-pay)가 너무 낮다.

    이런 사회는 결국 마케팅이 지배하게 된다. 건강과 보건, 인권과 생존권, 그리고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또 다른 핍박들에 대한 진실은 마케팅 앞에서 서 있기가 어려운 시대를 사는 셈이다. <시사저널> 사태는 이런 흐름 위에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이 터져나온 것은 한국 사회의 마케팅의 정점에 서 있는 삼성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삼성에 관한 진실을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가?

    <시사저널>도 버티지 못하는 흐름이 형성된다면 한국은 마케팅 빅 브라더의 사회로 한걸음 성큼 나서게 될 것이다. 물론 언젠가 한국 사회는 완전히 기업 마케팅이 표면에 나서고, 자본의 뒤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시대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이 산업별 독과점화가 빠르게 진행되면 자본 지배의 완전한 암흑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삼성에 관한 진실의 지불 비용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진실을 생명으로 생각하는 언론들이 남아있는 편이고, 또 거대한 기업지배의 사회로 한국 사회가 넘어가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

    <시사저널> 사태는 그래서 삼성과 한국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맺을 것인지에 대한 또 다른 경계선에 해당한다. 삼성에게 할 말은 하겠다고 많은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지지하는 모임’에 참가했던 여덟 명이 지금 이 건에 관해서 입을 열거나 아니면 중재에 나서야 할 때이다.

    최열 대표는 "삼성의 무노조경영에 대해서도 의의를 제기하겠다"라고 하면서 삼지모에 참가하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 말이 사실이고, 소위 한국 사회의 대표 어른이라고 생각되어 삼성이 초청한 이 여덟 명의 어른들의 삼지모 참여가 선의라면,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중재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시사저널> 사태는 언론계와 시민들 각각에게 던져진 질문인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질문을 받은 곳은 역시 삼지모의 소위 ‘어른들’이다. 삼성에서 주는 자금지원에 눈이 멀었다는 후배들의 시퍼런 질타에도 불구하고 할 말은 하겠다고 가신 것이라면, 지금 그 할 말을 해야 할 순간이 온 셈이다.

    여기서 숨으면 당신들이 한국에서 할 일은 없다

    어차피 삼성에 대한 보도 과정에서 생긴 일이고, 결자해지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는 삼성이 직접 풀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울 때 삼지모가 움직이는 것이 불안하지만 나름대로의 균형을 위한 수순이다. 이런 내 생각이 야박할지도 모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 건에 대해서 삼지모에 참여한 쟁쟁한 명망가들이 "내 일 아니다"라고 숨는다면, 이 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국 사회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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