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오늘 팟캐스트 -       ▒       <편파티비> 유튜브 -       ▒      


  • 푸틴 대통령 1기,
    푸틴과 러시아의 현대사
    대통령 대행에서 크림합병까지-②
        2022년 06월 21일 10:19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 앞 회의 글 푸틴과 러시아의 현대사 : 대통령 대행에서 크림합병까지-①

    2. 푸틴 대통령 1기 (2000~2004)

    푸틴이 대통령이 될 무렵, 러시아 경제는 급반전을 겪고 있었다. 1999~2000년 세계 유가가 빠르게 상승했고 러시아도 대규모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양호한 경제환경을 배경으로 정부는 재정균형을 달성하고 부채의 조기상환을 달성할 수 있었다. 시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상황도 점점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푸틴은 매우 우호적인 경제적 조건에서 임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림] 1988~201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석유 차익(석유 수입에서 생산비용을 뺀 차익)

    https://www.theglobaleconomy.com/Russia/oil_revenue/

    최저치는 1997년으로 1.68이고, 최고치는 2000년으로 14.51이다. 즉 1997년과 2000년은 극과 극을 이루었다.

    [그림] 1990~2022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https://www.macrotrends.net/countries/RUS/russia/gdp-growth-rate

    1998년 GDP 성장률은 –5.30%였던 반면, 1999년 6.40%, 2000년 10.00%를 기록한다. 그로부터 2008년까지 매년 5%를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1) 철권통치를 향한 기반 구축

    그렇지만, 집권 초기부터 앞으로 펼쳐질 철권통치를 예시하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먼저 푸틴은 연방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단행했다. 푸틴은 상원격인 연방회의에서 주지사를 쫓아내고, 연방회의의 중요한 권한을 박탈하며, 그 대신에 러시아 전역을 7개 지역으로 분할하고, 각 지역에 대통령이 임명한 전권대표가 선출된 주지사를 관리하게 했다. 대통령은 연방의 법률을 위반한 주지사를 해임할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다. “본래 러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 이는 우리의 유전암호에 있는 실질적 규정이고, 전통이며, 정신적 유산”이라고 말하며 이런 조치를 정당화했다. 몇 년 후에 이르면 지방정부의 권한은 대부분 사라져서, 러시아가 연방제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되었다. 푸틴은 당선된 주지사가 그를 거스르려고 할 때 해임하기보다는, 아예 출마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선호했다. 유력한 후보들이 아주 사소한 이유로 줄줄이 출마자격을 박탈당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또 하나의 극적인 사건은 언론, 특히 텔레비전 방송 분야에서 나타났다. 사태의 전개를 보면, 푸틴은 정교하게 조금씩 잘라내는 ‘살라미 전술’에 능했는데, 텔레비전 채널을 한 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굴복시켜 나갔다. 먼저 옐친과 푸틴에 대해, 특히 체첸전쟁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적인 보도를 내던 민간텔레비전, NTV를 소유한 미디어-모스트(지주회사)의 올리가르히 구신스키가 2000년 6월, 불분명한 이유로 체포되었다. (올리가르히는 과두제를 뜻하는 그리스어 올리카르키아에서 유래한 말인데, 소련 붕괴 후 거대재벌로 성장한 특권계층을 가리킨다.) 당시 구신스키는 자유의 대가로 미디어-모스트를 가스프롬(국영에너지회사)에 속한 미디어그룹에 매각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또한, 8월에는 최신예 핵잠수함 쿠르스크가 침몰하여, 푸틴은 집권 이후 여론이 가장 악화되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 최대 올리가르히인 베레조프스키가 상당한 지분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영텔레비전 ORT가 푸틴을 공격했다. 침몰 당시 외국의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푸틴이 백여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베레조프스키의 개인 비리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구신스키와 달리 베레조프스키는 대선 때 푸틴을 지지했다. 그렇지만 그는 친푸틴이라기보다는 친옐친이었다. 푸틴의 입장에서는 그가 세상 바뀐 줄 모르고 위세를 떨려는 인물로 보였을 수 있다.) 구신스키는 2000년 스페인으로, 베레조프스키는 2001년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결국 NTV는 프롬 미디어에 넘어갔고, 베레조프스키가 보유하던 ORT의 지분은 다시 국가로 돌아왔다. 푸틴의 뜻대로 처리된 셈이었다. 이 두 사건은 언론을 길들이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고, 권력에 도전하려는 올리가르히에 본보기를 보이려는 시도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편, 푸틴은 권력의 요직도 직계인사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푸틴은 대통령선거 후 1년 정도는 옐친이 임명한 인사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가 안보부서 최고위급 인사부터 자신의 측근 인사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신임 국방부장관 세르게이 이바노프, 신임 내무부장관 보리스 그리즐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자 KGB의 동료였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갈수록 경제부처, 국영기업으로 확대되었다. 푸틴하에서는 군대, 정보기관, 경찰, 군산복합체 등 무력부서 종사자를 뜻하는 실로비키, 그중에서도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 고위직에 대거 진출했다. 푸틴 자신이 KGB, 즉 실로비키 출신인데, 푸틴의 정치에는 비밀을 엄수하고 조직에 충성하는 실로비키가 제격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푸틴 초기 권력의 삼두마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KGB,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자유주의자(법률가, 경제학자), 옐친 시대의 유산인 올리가르히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중 핵심은 실로비키인 반면, 올리가르히가 특히 문제적이었는데, 뒤에서 살펴본다.)

    [그림] 2002년 10월,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태를 촬영한 러시아 NTV의 방송 장면. 테러리스트 진압을 위해 투입된 가스 때문에 정신을 잃은 인질을 특수부대가 밖으로 이송하는 장면이다.

    https://pioneerworks.org/broadcast/i-did-not-know-anna-politkovskaya-gary-indiana

    40여 명의 체첸 반군세력이 모스크바 두브로브카 극장에서 912명을 인질로 잡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투입된 가스 때문에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인질 중 최소한 130명은 가스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 인질의 가스중독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었는데, 인질들은 건물 밖으로 실려 나온 후 90분 이상 방치되었다. 그후 구급차가 도착했지만, 이들을 치료할 만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어떤 가스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러시아 언론은 사망자가 많지 않다는 식으로만 보도했고, 체첸 반군이 어떻게 모스크바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특수부대는 왜 그렇게 대처했는지는 다루지 않았다.

    표를 보면 고르바초프 때와 비교해 옐친 1기, 2기를 거치며 실로비키가 요직에 대거 진출했는데, 푸틴 자신이 옐친 때 등용된 실로비키였다.

    (출처: 장덕준, 푸틴의 사유화 정책과 재산권 제도화 문제, p. 169.)

    2) 푸틴 1기 경제개혁

    한편, 푸틴은 집권 초부터 시장경제 지향의 경제정책을 입안, 추진했다. 이 개혁안은 어떻게 나왔나. 1999년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는 러시아 산업에 관한 중요한 보고서를 출판했다. 러시아는 물질적, 인적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연간 8%의 성장도 가능하지만, 심각한 장애물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왜곡된 조세제도 때문에 거대한 보조금이 비능률적 기업에 제공되고, 부동산 시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금융시스템과 법체계가 경제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등등.

    앞에서 언급한 자유주의 법률가 게르만 그레프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을 모아 ‘그레프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조세제도의 개혁, 금융개혁, 규제 완화, 민영화, 사회개혁,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사법개혁과 국가개혁을 통해 8%의 경제성장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푸틴은 카시야노프 총리를 비롯해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인사를 정부 요직에 앉히고, 2000~2003년 폭넓은 경제개혁 정책을 실현했다.(1)

    먼저 에너지 호황으로 재정균형을 달성하자,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세금의 수를 줄이고 세율을 낮췄다. 개인소득세는 (평률) 13%, 법인소득세는 (35%에서 낮춘) 24%를 적용하기로 했다. 세금부담을 낮추는 게 탈세를 줄이리라 기대했는데, 실제로 징세율이 높아져서 추가적인 감세, 예컨대 부가가치세 감세가 가능해졌다. 둘째, 중소기업의 설립절차를 간소화했다. 이는 관료에게 뇌물을 주어야 할 필요를 상당히 줄였고, 그에 따라 등록된 기업의 수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셋째, 1993년 헌법은 개인이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농업용지의 매매는 2002년에야 가능해졌다. 거대사업가들이 수만 헥타르의 광대한 농경지를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넷째, 파산법을 개정해 기업사냥꾼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어렵게 했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합자회사법을 개정해 자산매각을 비롯해 주주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는 결정은 이사회의 만장일치나 주주총회를 거치게 했다.(2) 다섯째, 은행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은행 면허 취득을 위한 최소자본금을 늘리고, 자기자본비율도 상향조정했다. 여섯째, 연금제도 개혁은 현행 부과방식 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적립방식의 민간연금제도 도입을 골자로 했다. 또한, 새로운 노동법은 서유럽의 노동법을 모델로 했는데, 그 이전과 비교해 해고와 기간제 계약을 용이하게 했다. 일곱째, 집권 초기 WTO 가입을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했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했는데, 이 역시 푸틴을 자극했다. 중국과 달리, 러시아는 수입관세가 평균 12% 정도이고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서구가 주로 문제로 삼은 것은 사법체계, 특히 세법과 관세법의 불투명성이었는데, 새로운 세법과 관세법, 민법이 채택되고 지적재산권법도 완전히 새롭게 입법되었다. 그리하여 2003년까지 러시아는 WTO 가입을 위한 조건을 거의 충족했다. 그렇지만 막상 2003년에 이르자, 푸틴은 WTO 가입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벨로루시를 묶는 새로운 자유무역지대 구상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타깃으로 한 정책이었는데, 2004년 가을에 치러질 우크라이나 대선을 앞두고 친러시아 후보를 지원한다는 대단히 정치적인 목적을 담고 있었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에 대한 러시아, 푸틴의 개입은 뒤에서 다시 다룬다.) 러시아의 WTO 가입은 메드베제프가 대통령이던 2011년에야 현실화되었다.

    3) 푸틴과 올리가르히

    푸틴은 2000년 7월 크렘린궁에서 21명의 올리가르히와 모임을 열었다. 앞에서 언급한 구신스키와 베레조프스키는 초대받지 못했고,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오히려 푸틴과 너무 가까워서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브라모비치는 2003년 영국 축구팀 첼시를 인수해 유명해졌다. 그는 옐친 패밀리와 부를 공유했던 것처럼, 푸틴과 재산을 공유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따라 다녔다.) 이 자리에서 푸틴은 분명히 말했다. “당신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 나는 사유화로 초래된 결과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만남 후, 올리가르히의 첫 반응은 서로 연합하고 로비를 벌이기 위한 조직, 기업연맹(RSPP)을 구성했다. 2007년 6월 현재, 24명의 기업가를 보면 금속분야 9명(철강 6명), 금융 5명, 석탄 2명, 첨단기술 2명, 임업, 식품공정, 석유, 가스, 전기, 철도 분야가 각각 한 명이었다. 이 중에 단 네 명이 국영기업 소속이었다.

    2003년 2월에 그 전과 유사한 두 번째 모임이 있었는데, 이때 유코스 오일을 포함한 석유, 금융재벌을 이끌던 호도르코프스키가 푸틴의 역린을 건드렸다.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의 부패혐의를 제기한 것이다. 로스네프트가 소규모 석유생산업체 노던 오일을 인수할 때 매입 비용이 과다지출되었고, 이는 로스네프트 경영진과 정부 관리에 대한 리베이트로 쓰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푸틴은 예비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라며 (즉 사적인 착복은 아니라며) 매우 강하게 화를 내고, 유코스 역시 과도한 예비자금을 가진 것 아니냐며 (즉 세금을 착복하고 있지 않나며) 몰아붙였다고 한다. 당시 푸틴은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트의 경영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최측근 인사를 앉히고 에너지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던 중이었다. 사후적으로 보면, 바로 이날 호도르코프스키와 유코스 오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 당시 상황을 파악하려면, 먼저 1990년대 러시아 석유산업의 사유화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3) 2003년 말 브리티시 페트롤륨의 추정에 따르면 러시아의 석유 확인매장량은 전 세계의 6%(세계 7위)이고, 천연가스의 경우 26.7%(세계 1위)였다. (석탄 확인매장량도 전 세계의 15.9%에 달했다.) 그만큼 러시아의 석유산업 잠재력이 막강했다는 뜻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국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면서 국영기업 경영자들이 기업을 콘체른, 리스, 지주회사, 합작회사와 같은 형태로 탈바꿈하는 ‘자연발생적’ 사유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자 석유, 천연가스를 주축으로 하는 에너지산업 부문의 법인화(corporatization), 즉 국유기업을 공공소유 법인기업(주식회사)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연가스 부문은 개발, 채취, 운송이 일관된 과정으로 연결되어 있고, 가스운송이 대부분 파이프라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가독점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사유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반면, 석유산업은 소련 시절에도 산유지별로 분산된 형태로 경영되었고, 석유기업 경영진과 지방엘리트가 유착관계를 형성해 1990년대 초반, 중앙정부에 사유화를 압박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연방정부는 서방의 석유산업을 모델로 하여, 석유산업을 10~12개의 ‘수직통합 석유기업’(VIOC)으로 재편할 계획을 세웠다. 수직통합 석유기업은 각각 지주회사의 형태로, 유전개발, 생산, 정유, 석유제품 생산, 운송까지를 통괄하는 기업을 뜻했다. 그에 따라 정부는 1991~2년, 루코일, 수르쿠트네프쩨가스, 유코스 등을 수직통합 석유기업으로 법인화했고,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사유화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옐친은 석유부문을 포함한 광범위한 사유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시장경제를 통한 새로운 러시아 건설이라는 명분을 추구하고자 했다. 또한, 1990년대 초반 국제유가가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방정부가 석유산업을 국영체제로 유지할 동기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법인화된 석유기업이 거대 금융-산업그룹의 주축으로 재편된 계기는 1995년에 도입되어 1년 반 동안 진행된 ‘주식담보대출 경매’ 방식의 사유화였다. 이는 오넥심방크의 포타닌이 제시한 안으로, 이에 따르면, 6개 상업은행이 컨소시엄을 구성한 후, 핵심 국영기업들의 주식을 담보로 러시아 정부에 20억 달러를 공여하고, 은행들이 기업을 신탁받아 경영하며, 1년 후 정부가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 은행이 기업주식을 소유하거나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되었다. 옐친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1995년 말에 경매가 개시되었다. 은행가들은 43개 우량기업의 사유화를 제안했는데, 최종적으로 12개 기업이 매각되었다. (석유기업 5개, 석유판매회사 1개, 해운업체 3개, 철강회사 2개, 비철금속회사 1개.)

    경매과정은 수많은 추문을 양산했다. 올리가르히는 대상기업이 전략기업이라는 명분으로 외국인의 참여를 배제했고, 높은 입찰가를 제시한 일반기업에서 대해서는 약속한 가격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근거로 입찰자격을 박탈했다. 정치권과 결탁해 내부자정보를 이용하거나, 마피아와 손잡고 경쟁자나 반대세력을 협박하고 테러를 가하는 행동도 불사했다. 경매 결과, 석유기업의 경우 6대 석유회사 중 3개가 베레조프스키, 호도르코프스키, 포타닌이라는 금융자본가의 손에 넘어갔다. 옐친은 어째서 이렇게 파격적인 사유화를 단행했나? 옐친은 1996년 대선을 앞두고 재선 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했고, 올리가르히의 힘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즉 옐친은 그들의 자금과 미디어 장악력을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당시 연방정부의 조세수입이 매우 저조한 상태였기 때문에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국유자산 매각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할 유혹도 컸다.

    베레조프스키, 호도르코프스키, 포타닌, 이들이 1990년대 중반, 옐친 시대 급부상한 대표적 신흥 올리가르히였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푸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갈라졌다. 베레조프스키의 운명은 텔레비전 방송 ORT를 다루며 앞에서 언급했고, 이제 호도르코프스키를 살펴보자.

    호도르코프스키(메나텝 그룹)는 거대 올리가르히로 부상한 후, 합법화와 고급화 전략을 구사했다. 기업구조와 회계시스템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전가격 조작을 중단하고 상당한 세금을 납부하며, 비영리재단 ‘오픈 러시아 재단’을 설립하고 광범위한 자선활동도 전개했다. 그렇지만 2003년 푸틴 대통령에게 국영석유회사의 부패 문제를 제기한 직후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는 2003년 10월, 죄목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연방 검찰에 의해 체포되고, 결국 탈세 혐의로 기소되었다. 유코스는 러시아 내에서 세금이 낮은 지역에 등록해서 세금을 줄였는데, 이게 빌미가 되었다. 다른 기업도 다 그렇게 하므로 무리한 법 적용이라고 항변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2004년 7월 연방법원으로부터 체납세금, 과징금, 이자분으로 도합 70억 달러가 넘는 세금추징을 당하게 되어 사실상 파산상태에 빠졌고, 그 액수는 그 후 몇 년간 불어나 280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2005년 9년 형을 선고받았다. 푸틴은 2013년 말에 그를 사면했다.) 그리고 유코스의 주력 석유생산 기업인 유간스크네프쩨가스의 지분 76.8%는 법원의 강제경매 과정을 통해, 결국 국영회사인 로스네프찌에 넘어갔다. 따라서 이 과정을 일종의 ‘강제적 재국유화’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림] 호도르코프스키와 아브라모비치의 엇갈린 운명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50601/8195354/1

    (출처: ‘러시아 부자 2인의 엇갈린 운명’, 《동아일보》, 2005년 6월 1일.

    2004년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500대 부자 중에서 러시아 최고의 부자는 개인 재산 150억 달러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세계 16위) 당시 유코스 회장. 2위는 106억 달러의 로만 아브라모비치(세계 38위) 추코트카 주지사였다. 1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엇갈렸다. 호도르코프스키는 2005년 5월 31일 모스크바 법원에서 9년형을 선고받았다. 2003년 10월부터 583일 동안 복역한 그는 앞으로 7년 반을 더 감옥에 있어야 형기를 채울 수 있다. 유코스가 공중분해 되면서 그의 개인 자산은 1년 만에 22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반면 아브라모비치 주지사는 크렘린으로부터 주지사 연임 통보를 받았다. 주지사는 면책특권이 있는 연방상원의원을 자동으로 겸직하게 돼 있어 부와 권력을 모두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심지어 주지사이면서도 주로 영국에 머물렀다.

    유코스의 몰락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의 분석이 있다. 첫째, 호도르코프스키는 국영 파이프라인 회사인 트랜스네프트의 독점에 대항해 중국과 손잡고 민간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국영 가스프롬이 비효율적이라며 가스 분야에서 유코스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2003년부터는 유코스의 자산 대부분을 매각하기 위해 엑슨모빌과 협상을 개시했다. 반면 푸틴은 2003년 ‘러시아 에너지 전략 2020’을 발표했는데, 국가전략산업으로서 석유, 천연가스 기업은 국가의 대표기업(national champion)으로 국가이익에 기여해야 하고, 정부의 조정과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푸틴의 개인적 입장을 반영했다. 그렇지만 선두권 석유회사의 호도르코프스키는 푸틴의 정책에 계속 반항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호도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정치권에 광범위한 로비를 펼쳤다. 2003년 10월, 연말의 총선을 앞두고 1억 달러를 동원해 푸틴의 통합러시아당뿐만 아니라, 야당인 우파세력연합, 야블로코, 공산당에도 자금을 뿌려, 100명의 지지자 그룹을 형성했다는 말이 돌았다. 친푸틴 성향의 모스크바 싱크탱크, ‘국가전략위원회’는 「올리가르히 쿠데타 전야의 러시아」라는 보고서를 발표해서, 호도르코프스키가 돈으로 정치를 매수하려 하고 있고, 나아가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하고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며, 심지어 그 본인이 대통령으로 나서려 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즉 호도르코프스키가 에너지정책에 반기를 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표] 2006년 여론 조사, 1990년대 무상 또는 국가지정 가격으로 사유화된 기업의 국가환수 필요성에 관한 여론(%)

    장덕준, 푸틴의 사유화 정책과 재산권의 제도화 문제, p. 177.

    그렇다면, 푸틴이 에너지 부문에 대한 국가통제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1990년대 중반, 옐친이 주식담보대출 경매를 할 당시와 비교해 국제유가의 상승세가 가팔랐다. 즉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 석유산업의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둘째, 1990년대 사유화의 결과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푸틴이 올리가르히를 제압하기 위해 매우 거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오히려 대중이 환영할 것이라는 정치적 기대가 작용했을 것이다.

    셋째, 에너지 부문 국가통제 강화, 특히 국영 석유·가스회사를 푸틴의 이너서클이 직영하는 시스템은 핵심 지배 엘리트의 경제적 이익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었다. 즉 실로비키에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2007년 조사에 의하면, 표본 기업 가운데 이사회에 1명 이상의 정부관리가 파견되어 있는 기업이 29%에 달했다. 국영기업 이사가 된 공무원은 원칙상 급여를 받을 수 없지만, 정말 그러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유코스 사태를 계기로, 푸틴 세력이 초법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는 방식이 마피아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에서, 마피아의 보스, 즉 국가 마피아라는 시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즉 국가가 유일한 이권세력은 아니지만, 여러 이권세력을 통할하는 보스라는 뜻이다. 당연히 푸틴 이후로 국영 에너지기업은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석유생산에서 민간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90%에서 2007년 45%로 하락했다. 훗날, 영국으로 망명한 구신스키는 러시아에서 투옥된 호도르코프스키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자기과신 때문이었다.”

    4) 2003년 총선과 2004년 대선

    2003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유코스 사건은 2000년 대선 직전의 제2차 체첸전쟁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유코스 사태는 온갖 탈법, 불법으로 부를 축적한 올리가르히에 대한 정당한 제재라는 대중적 인식이 강했다. 유코스는 통합-러시아당에도 정치자금을 제공했지만, 정부가 장악한 언론은 우파연합, 유블로코, 공산당에 정치자금을 낸 행위만 반복해서 보도했다. 올리가르히는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푸틴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푸틴과 사적인 관계를 다지는 데 공을 들였다. 실제로 푸틴은 대선 후, 2005년 3월 기업연맹 회의에 참석해 1990년대 사유화 과정을 전면적으로 재조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유화와 관련된 범법행위의 공소시효를 10년에서 3년으로 대폭 축소했다.

    2003년 총선 결과, 푸틴을 지지하는 유사 여당, 통합-러시아가 과반에 육박하는 223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럽평의회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이번 선거가 “자유로웠지만 공평한 선거는 아니었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두드러진 부정선거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특히 방송언론이 편파적이었다.

    * 2003년 총선 결과, 푸틴을 지지하는 유사 여당, 통합-러시아가 과반에 육박하는 223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통합-러시아는 두마 개원을 앞두고 무소속의 영입에 공을 들여, 개헌을 할 수 있는 300석을 뛰어넘는 306석을 확보했다. 반면 공산당은 의석이 계속해서 크게 줄었다.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우파연합, 야블로코 역시 크게 의석이 줄었다. 조국-인민-애국연합은 3당이 되었는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정서를 자극해 공산당의 지지표를 뺏어 오는 데 전략을 맞추었다.

    하원 선거 이후, 2004년 3월의 대통령선거에서 푸틴의 승리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공산당의 주가노프와 야블로코의 야블린스키는 더 이상의 굴욕은 싫다는 듯 입후보를 포기했다. 푸틴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으나, 동시에 민주적인 선거라는 겉모양을 갖추고 싶었다. 그래서 공산당이 KGB 대령 출신의 하리토노프를 출마시키도록 설득했다. 최종적으로 6명이 후보로 등록했는데, 무소속의 푸틴이 71.9%, 공산당의 하리토노프가 13.8%를 얻어, 푸틴이 여유롭게 승리를 거뒀다.<계속>

    <각주>

    1. 오슬룬드에 따르면, 그레프가 총리가 되지 못한 이유는 구 옐친파와 권력분점 때문이었다. 정부 내 가장 강력한 권력은 카시야노프 총리나 볼로신 대통령 행정실장에게 있었는데, 그들도 대체로 자유주의적이었지만, 옐친 패밀리의 인물로 올리가르히의 이익을 촉진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레프 경제개발·무역부 장관과 쿠드린 재무부장관, 개혁적 하원의원들이 전통적인 관료층이나 올리가르히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과 대결하며 개혁정책을 전개했다. 푸틴은 대체로 개혁파에 힘을 더했으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볼로신 대통령 행정실장은 2003년 호도르코프스키가 구속되자(이 사건은 뒤에서 자세히 다룬다) 이에 항의하며 사임했고, 카시야노프 총리는 2004년 전격 해임되었다.

    2. 러시아의 사유화 초기, 소련체제의 국영기업 경영자들이 주요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외부자들의 소유·경영권 인수 시도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새롭게 주요 국영기업을 인수한 신흥 올리가르히는 이처럼 내부자 출신이 지배하는 기업에 관심이 많았으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런 기업을 인수하기 어려웠다. (1990년대 중반 신흥 올리가르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그러자 이들은 목표 기업이 채무를 지고 있던 금융회사의 주식지분을 사들여 스스로 채권자가 된 다음, 소액주주를 동원해 목표기업의 경영진이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벌였다. 그 후 법원의 강제 결정을 통해 목표기업의 소유·경영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1998년의 파산법은 이런 절차가 매우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보장했다. 즉 3개월 이상 연체된 5천 달러 이상의 채권을 가진 채권자라면 누구라도 채무기업을 대상으로 파산신청을 할 수 있고, 파산 신청을 당한 기업은 중재 법원이 파견한 임시관리자가 경영을 하도록 했다. 1997년 금융위기와 1998년 도입된 파산법 절차와 결합해, 신흥 올리가르히가 손쉽게 목표기업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2002년 푸틴의 새 파산업은 기업사냥꾼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어렵게 했다. 즉 파산절차를 개시하기 위해서는 채권자와 기존 경영진의 합의가 있어야 하며, 파산매니저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동의를 얻어서 임명해야 했다. 또한, 소액주주의 경영권 참여를 어렵게 해서 채무기업의 채무변제가 용이하게 이뤄지도록 했다. 종합하면, 푸틴의 새 정책은 신흥 올리가르히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내부자 출신 기업인의 지위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또한, 이는 1990년대 이루어진 사유화의 결과를 인정함으로써 소유관계의 안정화를 꾀하겠다는 정책적 약속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장덕준, 「푸틴의 사유화 정책과 재산권의 제도화 문제」, 《중소연구》, 2007년 가을.)

    3. 장덕준, 「러시아 국가-자본관계의 변화: 석유산업의 경우를 중심으로」, 《슬라브학보》 26권, 2011.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