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오늘 팟캐스트 -       ▒       <편파티비> 유튜브 -       ▒      


  • 대문 없는 크리스마스 실,
    기억해야 할 셔우드 홀 가족 이야기
    [컬렉터의 서재] 2대에 걸쳐 헌신했던 선교사 가족
        2022년 06월 17일 10:37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띠리리리….띠리리리….

    새벽을 깨우는 알람 소리.

    2021년 6월 15일 새벽 3시 40분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떴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 했던 이유는 오래 전부터 수집하려고 점 찍어둔 물품의 경매 마감 시간이 10분 전으로 임박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시간에 경매가 마감되는 것은 이 물품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 이베이(eBay) 경매에 올라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시간대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입찰에 참여했다. 2주 전이었던 6월 초 시작가 1,000달러로 출발한 경매는 여러 차례 경합을 벌인 끝에 결국 내가 적어 낸 1,810달러로 끝났다. 7명이 경합을 벌였는데, 내 바로 아래 입찰자가 써 낸 가격은 1,780달러였다.

    이런 꼭두새벽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이 소란을 부렸던 것일까? 전 세계에 55장 정도만이 남아있다는 1940년 크리스마스 실(seal) 때문이었다. 1940년 크리스마스 실은 때때옷 입은 한국의 두 아이를 도안으로 한 것인데, 여기에는 아이들 뒤로 ‘대문이 있는 것’과 ‘대문 없는 것’ 두 종류가 있다. 대문 있는 실은 몇 만원 정도에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비해, ‘1940년 미발행 실’ 또는 영어로 ‘No gate seal’로 불리는 ‘대문 없는 실’은 수집하기 매우 어렵다. 가격도 비싸서 우리 돈으로 대략 200만원에서 350만원 정도로 거래된다. 내가 이베이 새벽 경매에서 낙찰받은 것은 당연히 ‘대문 없는 실’이었다. 2주 정도가 지난 후 낙찰받은 실이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날아왔다. 실 판매자는 이 실에 대한 사연을 알고 있는지 실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기쁘다는 메모를 적어 놓았다.

    [사진] 1940년 크리스마스 실로 왼쪽은 미발행 실인 ‘대문 없는 실’, 오른쪽은 대문 있는 실. 왼쪽 실은 실 전문가 스테판 하세가와의 도록에 따르면 현재 55장 정도만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건호 소장)

    1940년 대문 없는 실은 언제나 나의 버킷리스트 상단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비용을 치르고 어렵사리 이 실을 수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조그만 실 속에 우리가 꼭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한 선교사 가족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멀리 아프라카에서 헌신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잘 알면서도, 이 실의 역사와 함께 했던 이 선교사 가족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 위대한 가족은 한국에서 2대에 걸쳐 헌신했던 셔우드 홀 가족이다. 그들은 현재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2021년 11월 어느 가을 날, 나는 미국에서 온 실과 조그만 꽃다발을 준비해 그들의 묘를 찾았다. 늘 그곳에 들러 추모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 대문 없는 실을 수집한 김에 날을 잡은 것이다. 나는 셔우드 홀 가족의 묘에 헌화하고, 그들이 보여준 크나큰 사랑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이번에는 이 실을 들고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화진포의 성’에도 들렀다. 일제 강점기 셔우드 홀 가족의 별장이었던 곳이다. 화진포 해변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자리잡은 화진포의 성은 옛 주인의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높다란 언덕 위에서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 글은 이 크리스마스 실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선교사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이 가족을 직접 소개하기보다는 가족 중 한 명에게 가족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통해 듣는 이야기가 훨씬 더 생동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왼쪽은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셔우드 홀 가족묘다. 기단 부에 ‘HALL’이라는 큰 글자가 보인다. 추모의 마음을 담아 작은 꽃다발을 그 위에 올려다 놓았다. 오른쪽은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에 있던 셔우드 홀의 별장인 ‘화진포의 성’으로 독일인 건축가 베버가 지은 서양식 건축물이다. 이 집은 셔우드 홀 가족이 1940년 강제 출국당한 후 일본 군부가 소유했다가 해방 이후 이 지역을 점령한 북한이 김일성 별장으로 활용했고, 한국 전쟁 후 대한민국 소유가 되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화진포의 성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 셔우드 홀 가족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이다.

    로제타 홀과 제임스 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에디스 마거릿(Edith Margaret)입니다. 우리 가족을 잊지 않고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가족을 대표해서 여러분들게 우리 가족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2대에 걸쳐 의료 선교를 했기 때문에 100년에 걸친 긴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족 이야기는 제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과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로부터 시작합니다. 엄마 로제타는 미국 사람이고, 아빠 윌리엄은 캐나다 사람이셨어요. 한국에 먼저 오신 분은 엄마셨어요. 원래 엄마는 선교사나 의사가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셨대요.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늘 봉사하는 삶을 꿈꾸었던 엄마가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떤 책에서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라는 말을 읽고서였대요. 미국에서 마운트 홀요크 여자신학교를 세우신 메리 라이언이란 분이 하신 말인데, 이 말에 엄마는 가슴이 마구 뛰었대요. 엄마 인생을 바꾼 이 한마디 말은 이후 평생 엄마의 좌우명이 되었답니다.

    여기에 더해 1885년 봄 인도에서 선교 활동 중 귀국한 챈들러 부인이 인도에서 많은 여성들이 관습 때문에 남자 의사들에게 몸을 보일 수 없어서 죽어가고 있고, 여성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는 강연을 듣고 의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셨어요. 그래서 엄마는 1886년 세계 최초의 여자의과대학인 미국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셨답니다. 그리고 4년간의 공부를 마치자마자 미국 북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사로 미지의 땅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1890년 10월 13일 드디어 조선 제물포항에 도착했는데, 이 날이 우리 가족이 조선과 첫 인연을 맺은 날입니다. 그때 엄마 나이는 스물 다섯이셨어요. 당시 미국 북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사 서울 지부의 책임자는 메리 스크랜튼 여사셨대요. 그 분은 조선에 온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데, 쉰 둘의 나이에 의사인 아들을 설득해 조선에 데려올 정도로 선교에 열정적인 분이셨어요. 아! 참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우신 것도, 여성들을 위한 최초 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우신 것도 이 분이십니다. ‘보구여관(保救女館)’은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인데 당시 왕비 마마가 지어주신 이름이래요. 보구여관의 첫 여의사는 메타 하워드라는 분이셨는데, 2년 간 일하다 병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새로 여의사가 필요해서 우리 엄마가 오신거래요.

    당시 엄마는 조선말을 전혀 못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쓰신 ‘새로운 한영문법’이란 책을 공부하면서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하셨대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허을’이라는 한국 이름도 갖게 되셨구요. 엄마가 조선에 온 지 열흘째 되는 날, 김점동이란 학생에게 통역을 맡겼대요. 14세 소녀 김점동은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었는데, 행동이 재빠르고 영리했대요. 엄마는 점동을 조수로 훈련하기로 결심하고 하나 하나 의학 기초를 가르치셨대요. 나중에 김점동은 감리교 세례를 받고 이름을 김 에스더로 바꾸었답니다.

    한국에서 의료 선교를 시작한 엄마는 그 열정이 대단하셨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화상으로 손가락이 손바닥에 붙어버린 열 여섯 살 된 소녀를 수술하는데, 손바닥에서 손가락을 떼어네면서 속살이 드러난 부위에 옆에서 끌어당겨 붙여 놓았던 피부가 다 떨어져 나갔대요. 피부 이식을 위한 재수술을 해야하는데, 그 소녀가 겁을 먹고 강하게 거부했대요. 그때 엄마는 자신의 팔에서 피부를 세 조각 떼어냈대요. 더 떼어내려는 걸 주변의 만류로 결국 중단하고, 이화학당 소녀 봉업이, 여자 교사 로드 와일러와 벵겔, 문병 온 환자의 오빠들이 피부 기증을 자원하여 수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살신성인을 실천하신 분이셨어요. 그런데 당시 조선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과 까닭 없는 의심이 의료 선교에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서양인들이 어린이들을 데려다 잘 먹여 살을 찌운 다음 그 피를 빨아먹는다느니, 아이들의 눈을 뽑아 카메라의 렌즈로 쓴다느니, 사람들의 눈과 혀로 약을 만들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도는가하면 엄마가 한국 오기 몇년 전에는 일부 조선인들이 외국인들과 학교 등을 습격하는 일도 있었대요.

    [사진] 로제타 셔우드 홀과 윌리엄 제임스 홀

    이제 아빠 윌리엄 제임스 홀 이야기도 해 드릴게요. 아빠는 10대에 결핵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적이 있었대요. 그 경험으로 아빠는 의사가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고 의대에 진학하셨죠. 캐나다 사람인 아빠가 미국인인 엄마를 처음 만난 곳은 뉴욕 맨해튼에 있던 어떤 무료 진료소였대요. 그때 아빠는 해외 선교를 준비하면서 그곳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그곳에서 엄마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엄마도 아빠를 좋아했고 둘을 사랑을 키워가죠. 그러다가 1889년 크리스마스에 아빠가 엄마에게 청혼하셨는데, 그때가 엄마가 조선으로 가기 일 년 전이었습니다. 엄마는 그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엄마가 미국 북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회에 5년 동안의 독신 서약을 한 상태라 당장 결혼은 할 수 없었어요.

    결국 엄마는 약혼 상태에서 혼자 조선으로 떠나 버렸고, 아빠도 엄마를 따라 조선으로 갈 방법을 백방으로 강구하시게 되죠.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도 있죠? 안식년 중인 스크랜튼 여사의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빠는 바로 조선행을 자원합니다. 엄마가 있는 조선에 얼마나 가고 싶으셨는지 계약 조건을 논의할 때 급여를 받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래요. 결국 1891년 12월 15일 엄마에 이어 아빠도 조선에 도착하게 됩니다. 엄마와 아빠는 잠시 재회의 행복을 누리셨어요.

    그리고 두 분은 엄마가 했던 5년 독신 서약을 깨고 1892년 6월 27일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윌리엄과 로제타는 하나의 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신혼의 단꿈도 잠시, 1892년 9월 감리교 연찬 선교회의에서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엄마는 서울의 보구여관에서 계속 근무하고, 아빠는 평양으로 가서 선교지를 개척하라는 발령이었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아빠는 사랑하는 엄마를 서울에 두고 1892년 9월 홀로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평양에서 아빠는 낮에는 주로 한국어 공부와 진료를 하고, 밤에는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했어요. 평양에 가신 아빠가 몇 달 후 처음 서울로 돌아오셨을 때의 엄마 일기장을 보면 당시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어요.

    그는 날마다 점점 더 깊이 사랑에 빠져드는 것 같다. 수없이 달콤한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고마워하고 있는지 거듭 말한다. 하루 100번도 넘게 내게 키스를 하고 팔로 감싸안아 무릎에 앉히고도 만족할 만큼 가까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지 매 순간 나를 자기의 넓은 가슴에 그냥 안고 다니고 싶어한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된 젊은 신혼 부부에게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은 큰 고통이셨을 거예요. 서울과 평양은 직선거리로도 195km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셔우드 홀의 탄생과 아빠의 죽음

    이렇게 떨어져 생활을 하던 중 1893년 11월 10일 오빠 셔우드 홀이 태어났어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었대요. 이즈음 엄마는 자기도 평양에서 아빠와 함께 사역하게 해달라고 교회 측에 계속 요구하셨어요. 결국 엄마 뜻대로 1893년 여름 연차회의에서 두 분은 평양에서 사역하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그래서 엄마 몸조리도 끝나고 날씨도 풀린 후 엄마, 오빠 그리고 김 에스더는 서울을 떠나 1894년 5월 8일 평양에 도착해요.

    그때 평양에서 난리가 났대요. 서양 여성과 아기는 평양 사람들에게는 처음보는 구경거리였습니다. 아빠는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니, 어쩔 수 없이 “내일 10명씩 짝을 지어 오시면 다섯명씩 방으로 들어와서 아내와 아기를 구경하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설득했대요. 그런데 그 다음날 더 큰 난리가 났어요. 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왔답니다. 평양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 이렇게 고작 3명 뿐이었습니다. 관청은 관청대로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데다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동물원 원숭이처럼 쳐다보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구경거리로만 끝났으면 좋은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1894년 5월 15일부터 성문 옆 한옥건물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조선인들의 적대감과 반감이 매우 컸어요. 우리 가족이 머물고 있던 집에 돌을 던지고 벽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심지어 우리 가족에게 물을 길어다 주는 지게꾼이 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지게꾼이 봉변을 당하는 날이면 오빠를 목욕시킬 물은 고사하고 당장 오늘 밥 지을 물도 부족했다고 해요. 당시 엄마 아빠의 당혹감은 어떠셨을까요?

    좀처럼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결국 아빠만 평양에 남고, 엄마와 오빠는 안전한 서울로 가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다시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죠. 서울에 온 지 얼마되지 않은 1894년 11월 10일에는 엄마가 서울에서 아빠 없이 오빠의 돌잔치를 열었대요. 조선의 풍습대로 오빠의 돌상에는 넝마 인형, 책, 성경, 장난감 팽이, 청진기 등 앞으로의 인생을 점치기 위한 물건들이 놓였답니다. 오빠는 그 물건 중에서 청진기를 집었대요. 엄마는 이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오빠가 엄마 아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도 오래 가지 못했어요. 그로부터 2주 후 엄마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일을 맞게 됩니다. 당시는 청일전쟁 중이었는데, 평양에서 말라리아와 이질이 창궐했을 때입니다. 부상병을 치료하던 아빠에게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아빠는 서울에서 치료받기로 결정했는데, 그 힘든 몸을 이끌고 평양서 서울까지 오는 데 꼬박 9일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아빠의 병세는 점점 나빠졌구요. 병명은 발진티푸스, 아빠는 고열에 혼자서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아빠는 의사로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아셨나봐요. 가시던 그날 무언가를 쓰려고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하셨대요. 그런데 힘이 너무 없어서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에 담겨있는 말을 다 할 수 없었던 아빠가 힘을 내서 엄마를 쳐다보며 할 수 있는 말은 띄엄띄엄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아빠는 마지막으로 오빠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전염병에 걸려서는 안되니까 가까이 오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아빠는 그저 먼발치에서 한참동안 아들을 너무도 슬픈 눈빛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11월 24일 해질 무렵 결국 아빠는 먼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그때 아빠 나이 34세, 결혼한지 2년 5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신혼이었던 엄마의 상심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오빠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쓴 오빠 육아일기에서 당시 엄마가 느꼈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요.

    11월 24일 토요일 해질 무렵, 아빠는 마지막 숨을 쉬셨단다. 아빠의 두 손은 엄마의 두 손을 잡고 있었고 아빠의 눈은 엄마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는 부드럽게 사랑스러운 두 눈을 감겨 감겨드렸다. 그리고 나서 아빠의 눈이 엄마의 눈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아빠의 눈을 한 번 더 뜨게 했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볼 수 있도록. 아빠의 눈은 여전히 밝고 맑아서 아빠의 사랑스러운 영혼이 그 몸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아빠의 눈을 감겨드리고 그 방을 나왔다……그날 밤 엄마는 자정 12시에 잠에서 깨었고 겉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몰려와서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엄마는 아빠가 가시는 마지막 길에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과 속옷, 목회자용 컬러, 커프스, 넥타이 등을 입혀드렸습니다. 그리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아빠의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아빠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엄마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자 미국으로 오빠를 데리고 가셨대요. 이때 박 에스더 부부도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아까 김점동이 김 에스더가 되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박 에스더라고 하니 뭔가 좀 이상하죠? 김 에스더는 17살 때 박유산과 결혼하는데, 그때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박 에스더로 개명했습니다. 박 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남편 박유산은 농장일을 해서 아내 학비를 댑니다. 그런데 박 에스더가 의대를 졸업하기 얼마 전 박유산은 폐결핵에 걸려 죽게 되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의대를 졸업하면서 박 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됩니다.

    그리고 이번 엄마의 미국 방문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어요. 1895년 1월 17일 에디스 마거릿 홀이 태어납니다. 이 여자 아이가 바로 저랍니다. 그래서 저는 아빠를 직접 본 적이 없어요. 제 이름은 엄마 아빠가 함께 태어날 아기를 위해 미리 지어 둔 이름이래요. 에디스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여자 이름이었고, 마거릿은 아빠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 친할머니 이름입니다.

    평양의 오마니

    엄마는 미국에 온 지 거의 1년 만인 1897년 11월 10일 오빠와 저를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하필 그날은 오빠의 생일이었대요. 이날 엄마는 아빠가 몹시 보고 싶었던 것이 분명해요. 그날 일기에 엄마는 이렇게 썼어요.

    태어난 날에 태어난 곳인 한국에 도착한다면 아주 기막힌 우연의 이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4년 전 오늘 셔우드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바로 그 고향에 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셔우드를 맞아줄 사랑하는 아빠가 계시지 않았다.

    엄마는 평양에 가서 아빠의 유업을 잇고자 했어요. 1898년 5월 1일 엄마는 오빠를 데리고 평양 땅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빠와 함께 큰 포부를 품고 평양에 첫발을 내디딘 지 만 4년 만이었습니다. 엄마가 오기 1년 반 전에 엄마의 모금으로 이미 ‘기홀병원’이 설립되어 있었어요. 아빠 윌리엄 홀을 기념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다 평양에 온 지 한 달 만에 엄마는 1898년 6월 18일 ‘광혜여원’이라는 여성 전용 병원을 새로 개원했습니다. 이후 기홀병원과 광혜여원은 장로교 병원과 연합하여 1923년 평양연합기독병원이라는 종합병원으로 탄생했는데, 이 병원은 해방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부속병원으로, 다시 지금의 평양의학대학병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엄마는 광혜여원 옆에 어린이 병동도 새로 지었고, 그 병동이 완성될 무렵 병동 한쪽에 시각 장애 소녀들을 위한 교실을 마련하고 수업을 시작합니다. 아빠의 전도로 첫 신자가 된 시각장애인 오봉래를 위하여 한글 점자 교재를 개발하고 ‘평양여맹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에서 처음으로 특수교육도 시작하셨습니다. 조선의 ‘헬렌 켈러’로 불린 오봉래는 일본 도쿄맹학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평양여맹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사진] 1898년 평양 도착 직후의 로제타 가족. 왼쪽이 에디스 마거릿, 오른쪽이 로제타 셔우드 홀, 가운데가 셔우드 홀이다.

    1900년 가을에는 오빠가 이모라고 불렀던 박 에스더가 의사가 되어 미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사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에스더 이모는 엄마와 같이 평안도, 황해도 지역으로 다니며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 이모가 1910년 갑자기 결핵에 걸려 34세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어요.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준다는 이유로 이화학당에 맡겨졌던 가난한 소녀 김점동을 의사 박 에스더로 길러낸 이가 엄마셨으니, 그녀를 떠나보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1915년에는 엄마에게 뜻깊은 행사가 열렸는데, 평양에서 ‘홀 부인 조선 온 지 25주년 기념행사’였습니다. 엄마가 조선에 왔을 때가 25세였으니 이때 엄마 나이가 50세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엄마는 그동안 평양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어느 때부터인가 ‘평양의 오마니’로 불리고 있었어요. 그 후 엄마는 1921년 보구여관의 후신인 동대문부인병원(오늘날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 원장으로 발령이 나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고, 1928년에는 새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과 인천간호전문보건대학를 설립하셨죠. 몇 년 뒤인 1933년 10월 엄마는 한국에서의 43년간 기나긴 의료 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향했고,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4월 5일 85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렇게 사랑했던 아빠가 묻힌 양화진에 같이 묻히셨습니다.

    셔우드 홀과 크리스마스 씰

    1910년 에스더 이모의 죽음은 오빠 셔우드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어요. 한국에서 태어난 오빠는 원래 미국에 돌아가 사업가가 되는 꿈이 있었대요. 그런데 에스더 이모가 그렇게 결핵으로 죽자, 엄마에게 “엄마 저도 의사가 될래요. 이모를 앗아간 결핵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어요.”라고 했대요. 셔우드 오빠는 엄마가 세운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가서 마운트 유니언대학을 거친 후 1923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해서 결국 의사가 됩니다. 돌잔치 때 청진기를 잡았던 그 오빠잖아요.

    오빠는 유니언 대학 시절 만난 메리언 버텀리와 조선 선교에 헌신하기로 약속하고 1922년 6월 결혼합니다. 메리언 역시 필라델피아여의대를 졸업한 의사였습니다. 오빠 부부는 1925년 8월 조선에 입국하여 황해도 해주 땅에 새롭게 기반을 잡기 시작했어요. 미국에서 결핵을 전공한 오빠는 그곳에서 1928년 해주구세요양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결핵전문요양 병원을 설립합니다. 오빠는 결핵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해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사람 꼴인데 한국에서는 5명 중 1명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어요.

    오빠는 병원만 운영한 것이 아니었어요. 옆에 시범 농장을 같이 운영하면서 환자들에게 건강한 급식을 제공하고 환자의 사회 복귀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양원이나 시범 농장 운영에는 많은 비용을 필요하잖아요? 오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2년 한국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Seal)을 도입했습니다. 오빠가 발행한 최초의 실은 남대문을 도안으로 삼은 거래요. 남대문은 한국의 상징이며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를 나타낸 거죠. 그런데 최초 도안은 남대문이 아니었대요. 원래는 거북선에 대포를 배치하여 한국의 적(敵)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는 그림이었는데, 일제 당국이 문제를 삼아 변경한 거래요. 일본인들에게 거북선은 결코 좋은 기억일 리가 없었겠죠.

    [사진] 왼쪽은 해주구세요양원 의료진 사진(1929), 오른쪽은 셔우드 홀이 첫 실을 발행할 때 그린 거북선 도안인데, 총독부의 불허로 실제 발행하지 못했다. 이 도안은 현재 미국 스미스 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실이 발행되던 초기에는 이게 너무 생소했던지 잘 팔리지 않았대요. 당시 한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실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마을 입구 큰 나무 밑 돌무더기에 돌을 몇 개 더 던져 올린다든지,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헝겊을 매달아 귀신을 달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던 때였대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실 보급 초기 셔우드 오빠는 다음과 같은 엉뚱한 편지들을 받기도 했어요.

    “저는 당신이 결핵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광고를 보고 실을 샀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이 실을 정성껏 가슴에 붙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약은 나의 심한 기침을 조금도 낫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돈을 돌려주시기를 청구합니다.”

    “여러 사람들 입에 자자한 그 훌륭한 크리스마스 실 약을 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값은 얼마라도 지불하겠습니다.”

    오빠가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한 것은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모두 9차례였어요. 실의 도안은 주로 널뛰기, 그네타기, 팽이돌리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 주로 한국인의 생활 모습을 그렸어요. 미국이나 캐다나 등의 후원자들이 그런 한국의 풍속을 담은 실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으로 2개의 도안(1937년 38년 실)을 그린 인물로 김기창이란 화가가 있어요. 그는 네 살 때 귀가 먹어 말도 못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조선 화단의 유명한 스승 아래서 그림 공부를 하여 화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화가 최신영이란 분과 호주의 장로교 선교사인 에즈먼드 뉴(Esmond W. New, 한국명 유영완)란 분도 1935년, 1939년 실 도완을 하나씩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실 도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은 역시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입니다. 그녀는 1915년부터 25년까지 동양의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일본인에게서 판화를 배우고 있었는데, 몇차례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1930년에는 서울 우리 엄마가 살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여러 차례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인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쓴 책 [Old Korea] 서문에서 “나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강인한 성품을 잘 알게 되었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라고 쓰기도 했어요. 그녀가 도안을 그린 실은 세 종류인데, 1934년 ‘아기업은 엄마’, 1936년 ‘연 날리는 어린이’, 1940년 ‘한국의 두 아이’가 그것들이죠.

    [사진] 셔우드 홀이 발행한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발행한 총 9장의 크리스마스 실이다.(박건호 소장)

    그런데 오빠는 1940년 ‘한국의 두 아이’ 실을 끝으로 더 이상 실을 발행하지 못했어요. 이것이 일제 강점기 마지막 실이 되고 말았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어요. 1940년 실의 원래 디자인은 두 아이들 뒤에 대문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이 실은 인쇄되자마자 일제 당국이 트집을 잡았습니다.

    검열관은 세 가지를 문제 삼았는데, 첫째는 두 아이가 조선 고유의 한복을 입고 서 있으니,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불온한 그림이라는 것이었어요. 천진난만한 어린 남매가 독립투사로 둔갑해 버린 셈이죠. 두 번째는 실에 ‘소화(昭和) 15년’이나 ‘황기(皇紀) 2600년’를 쓰지않고 서기인 ‘194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는 점, 마지막으로 아이들 뒤로 보이는 산 그림이 고도 20미터 이상 보여주어서는 안된다는 보안 규정을 어겼다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헌병대가 사전 경고도 없이 들이닥쳐 오빠가 보급 준비를 끝낸 크리스마스 실 상자들을 압수하고, 그림 원본도 폐기해 버립니다. 이렇게 이 대문 없는 실은 발행되지 못했던 거죠.

    압수 당시 극소수의 실만이 독수리눈 같은 헌병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게 고작 55장 정도를 넘지 않는다고 해요. 이런 희소성 때문에 지금은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강압적 압수 이후 오빠는 실을 새로 만들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실 그림을 도안했던 엘리자베스 키스는 절대 수정할 수 없다고 펄펄뛰다가 오빠의 계속된 설득으로 결국 새 도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녀는 이런 수정이 기분 나빴던지 새로 발행하는 실에는 자신의 이니셜인 ‘E.K’는 절대 넣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수정 도안은 이전 도안을 큰 틀에서는 유지하면서, 1940년 연호를 ‘소화 20년’으로 바꾸는 대신 크리스마스 실 발행 9년차를 의미하는 ‘NINTH YEAR’로 수정했고, 아이들 바로 뒤에 큰 문을 그려넣는 식으로 디자인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대문을 통해 먼 산이 그대로 보였으므로 ‘20m 보안 규정’에 저촉되는 것은 이전과 별반 다를바 없었지만 검열관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수정 도안은 사실 완전히 새로 그린 것은 아니었어요. 이미 1925년에 제작한 채색목판화 그림이 있었는데, 이것을 약간 변경했을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틀린 그림 찾기’를 좋아하시나요? 제가 보여드리는 아래 두 개의 그림은 모두 엘리자베스 키스가 제작한 목판화인데, 왼쪽은 1925년 제작한 목판화, 오른쪽은 대문 없는 실이 압수된 후 새로 만든 도안 목판화입니다. 1940년 실의 도안이 1925년 것을 약간 변형해 만든 것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의 똑같이 보이죠. 이것을 구분할 때 가장 뚜렷한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찬찬히 보세요. 눈썰미가 있는 분은 찾으실 거예요. 두 아이 사이에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는 여인입니다. 25년 판화에는 있고, 40년 판화에는 없죠. 그게 차이입니다.

    [사진] 1925년 목판화에는 두 남매 사이로 물항아리를 인 여인이 아기를 업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있지만, 1940년 실 제작용으로 새로 제작한 목판화에는 없다. (박건호 소장)

    어쨌든 이 터무니없는 일제의 탄압으로 오빠는 스파이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무거운 벌금을 내고 강제출국을 당합니다. 오빠가 쓴 [조선회상]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이 있어요. 회고록은 오빠가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1940년 11월 강제 추방되어 부산항을 떠나던 장면으로 끝나요. 저는 그 대목을 읽고 오빠가 얼마나 조선을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태극기를 걸어 놓고 만세라니…

    출발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아이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아름답게 수놓은 조선 국기를 꺼냈다. 해주에서의 환송연 때 조선 친구들이 기념품으로 우리에게 준 것이다. 나는 태극기를 펼친 다음 나뭇가지에 걸었다. 우리 가족은 태극기 주위에 모여 섰다. 조선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축복을 기원할 때 “만세”라고 부른다. 이 말은 “1만 년을 사십시오!”라는 뜻이다. 우리 가족 다섯 중 네 명은 모두 조선에서 태어났다. 메리안도 생애의 전성기를 조선에 바쳤다. 나는 가족에게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자고 했다. 우리 가족은 목소리를 높여 “만세!”를 외쳤다. 조선의 진정한 국기에게 ‘만세’를

    이렇게 1940년 조선을 떠난 오빠 가족은 바로 캐나다나 미국으로 가지 않고 다시 인도로 가서 의료 선교를 계속합니다. 인도에서는 빈곤 계층이 많이 살았던 곳인 현재 라자스탄주의 아즈메르(Ajmer)에 가서 결핵 퇴치를 위한 ‘마다르 통합 결핵요양원’을 운영하며 23년간을 헌신하게 되죠. 그리고 1963년 은퇴 후 여생을 캐나다에서 보내다가 오빠 부부는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91년 4월과 9월 나란히 세상을 떠났어요. 오빠는 98세, 메리안은 95세의 나이였습니다. 두 분 모두 화장 후 그 유골을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먼저 묻혀 있던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합장하게 됩니다.

    [사진] 1940년 11월 강제 출국되기 직전 셔우드 홀이 미국 보스턴에 사는 의사 톰슨에게 보낸 엽서로 이 엽서는 셔우드 홀이 한국에서 보낸 거의 마지막 친필 엽서이다. 1940년 11월 26일 해주 소인이 찍혀있다. 여기에서 홀은 인도로 이주하게 되었음을 알리며 앞으로는 서신을 인도로 보내라고 썼다. 넷째 줄에 ‘Ajimer India (인도 아즈메르)’ 지명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그리고 에디스 마거릿

    아! 참. 엄마 아빠 오빠 이야기만 했네요. 저 에디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시죠?

    1894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저를 잉태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엄마가 잠시 미국에 가셨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죠. 그 후 엄마가 한국 귀환할 때 같이 왔고 엄마가 평양 갈 때도 동행했어요. 평양에 발을 디딘 게 1898년 5월 1일이었어요.

    그런데 평양에 도착한 첫날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이질이라는 병이었어요. 저는 닷새째부터는 심하게 앓았는데, 계속되는 구토와 설사, 심한 복통으로 점점 기력이 없고, 정신이 흐릿해졌어요. 엄마는 매일 매일 열도 재고 하셨어요. 열이 41도까지 올랐어요.

    5월 23일 너무 아파서 저는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어요.

    “엄마, 안아서 흔들어 주세요”

    그때 엄마는 제 뜻대로 제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안아주셨죠. 그리고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가만가만 저를 흔들어 주셨어요. 저는 그제서야 고통이 사라졌고, 마음은 평온해졌고, 숨이 점차 가늘어졌어요. 어느새 엄마 대신 아빠가 저를 대신 받아 흔들어주셨어요. 저는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채 구별하지 못한 채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어요. 1895년 1월 17일이 제 생일이니까 저는 사실 몇 년 살지를 못했어요. 한국에 온 지 반 년만에 죽었으니까요. 그날 엄마가 쓴 육아 일기에는 저의 마지막을 이렇게 적어 놓으셨어요.

    오후 8시 40분. 눈을 크게 뜨고 엄마를 바라본 채 작은 영혼이 서서히 떠나갔다. 그렇게 그 아이는 세상에 보내주신 그분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재잘대던 어린아이의 입맞춤과 작은 손이 없어진 지금 그 아이가 없는 삶은 너무나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데려가셨으리라.

    “아빠가 이디스를 너무나도 원했나 봐요”

    제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오빠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죽었을 때 엄마는 저에게 하얀 드레스를 갈아 입혀 주셨어요. 오빠는 죽은 제 몸을 만지는 것을 처음에 무서워하는 듯했지만 이내 하얀 클로버 꽃을 따서 제 손에 쥐어 주었어요. 그리곤 제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죠. 오빠도 제가 죽은 것이 큰 슬픔이었나 봐요. 오빠는 가끔씩 엄마에게 물었대요. 얼마나 기다려야 예수님이 오시고 에디스가 다시 살아날 것인지. 누이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죠. 나중에 오빠가 쓴 회고록에는 “오랫동안 잠잘 때 가위에 눌려 고생했고 자주 한밤중에 깨어나 혼자서 흐느껴 울었다”라고 썼어요. 오빠는 태어나서 막 1년이 지난 뒤 사랑하는 아빠를 잃었고, 다시 다섯 살이 채 되기 전에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어버렸던 거죠.

    [사진] 로제타 홀의 에디스 육아일기의 한 페이지에 말린 꽃이 붙어있다. 동생 에디스가 죽고 난 후 오빠 셔우드 홀이 무덤 곁에 핀 꽃을 꺾어 엄마 로제타 홀에게 주자 그걸 말려 일기장에 붙여 놓은 것이다. 로제타에게 저 꽃 속에 에디스의 영혼이 들어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슴 시린 아픔이 담긴 꽃이다. (로제타 홀 기념관)

    엄마는 무척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자신을 떠받치던 기둥 하나가 갑자기 무너졌고, 온통 세상은 어두워진 듯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병을 고치느라 정작 자신의 딸을 돌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저는 엄마를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답니다. 엄마에게 오빠와 저는 가장 큰 위안이셨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랑을 주셨고, 기대도 크셨어요. 엄마는 오빠처럼 저도 나중에 의사가 되길 바라셨어요. 저도 죽지 않고 살았다면 의사가 되었을 거예요. 엄마 일기에 보면 분명히 저에게는 셔우드 오빠보다 더 의사 자질이 보인다고 했어요.

    에디스는 병자들, 특히 병난 아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 모른다. …밤에는 ‘하나님 모든 조선 아이들에게 축복해주세요. 머리에 뭐가 났고 눈이 아픈 병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세요’라고 간구했다. 이빨을 뽑는다든지 종기가 나서 절개를 해야 할 경우에도 셔우드는 잽싸게 도망을 가버리지만 에디스는 다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어느날 오후 에디스가 병원에 찾아왔다. 그때 한창 수술 중이어서 아이가 왔는지도 몰랐다. 수술 도중에 피가 튀어서 내 얼굴에 묻었다. 이때 에디스는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엄마의 얼굴을 닦아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의사가 될 것으로 믿는다.

    제가 죽은 후 엄마가 광혜여원 옆에 어린이병원을 지은 것도 저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병원 이름도 ‘에디스 기념병원’으로 이름 붙이셨구요. 제가 어린 나이에 먼 길 떠난 것을 마음 아파하신 엄마는 제가 죽은 지 몇 년간은 제 생일날 또래 아이들을 초대해 저 없이 생일파티를 여셨구요. 제가 죽고 난 후 2년 동안 더 육아일기를 쓰셨어요. 엄마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저를 놓지 못하셨던가 봐요. 제가 간 지 2년이 지난 1900년 5월 23일 일기에서는 이렇게 적었어요.

    너를 잃은 상실감이 점점 더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엄마는 엄마의 마음을 진찰해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병을 진단하기는 어렵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늘 엄마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성령께서 엄마를 가르치시고 이 영적 상태에서 건져내 주시기를.

    [사진] 남편과 딸을 잃은 로제타 홀이 쓴 일기 중 한 부분이다. 아랫부분에 한글로 “예수 인도하소셔. 어둡고 길 모르니 나를 도와 주소서”라고 썼다. 당시 로제타가 겪었던 정신적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엄마는 제가 살아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빠 곁에 묻히기를 원하셨어요. 5월 26일 관에 든 저는 엄마를 떠나 아빠 곁으로 갔어요. 제가 아빠 곁으로 가면서 가족 절반은 이생에, 또 절반은 하늘에 있게 된 셈이죠. 아빠가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귀여운 네가 내 딸 에디스니? 하시면서 아빠는 저를 꼭 안아주셨어요. 이렇게 제가 아빠 옆에 제일 먼저 갔던 거죠. 다음에 엄마가 왔고, 다음에 오빠 부부가 와서 지금까지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답니다. 저는 아주 짧게만 살았지만 죽어서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일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가끔 우리 가족을 찾아와서 기억해주는 한국인들 보면 반갑고 그래요. 1984년 한국 정부가 오빠를 초청해 훈장도 수여하고, 2021년 문화재청에서는 엄마가 제작한 점자 교재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조금씩 저희 가족의 노고를 인정해 주시니 제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런데 여기 오신 오빠는 아직 마음 아프신 게 있대요. 저는 잘 모르지만 오빠가 말하기를, 한국이 경제적으로 많이 좋아졌는데 아직 결핵은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는대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결핵 발병률이 1위라고 하고요. 2020년 결핵은 한국 법정 감염병 중 최다 사망을 기록하기도 했대요. 2020년 결핵 사망자 수는 1356명으로 같은 기간 코로나19로 사망한 환자보다 1.5배나 많았다고도 하구요. 죽어서도 그런 걱정을 하다니 우리 오빠 정말 못 말릴 사람이예요. 에디스는 오빠에게 이제는 그런 근심 그만하고 그냥 편히 쉬라고 이야기했답니다.

    우리 가족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려고 합니다. 한국은 우리 가족의 모든 희로애락과 늘 함께한 나라였고, 애정과 진심을 다한 나라예요. 한국인들이 잘되는 것을 보면 먼곳에서 우리 가족도 같이 기쁘답니다. 우리 가족은 늘 여러분과 함께 할 거예요. 한국인 여러분! 우리를 잊지말아 주세요. 그럼 안녕히…….

    [사진] 강제 추방된 후 44년 만인 1984년 셔우드 홀 부부가 1984년 대한결핵협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부모와 여동생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이 방문 때 한국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해 셔우드 홀 가족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다. 이 무덤 참배 후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지금도 한국을 사랑한다. 내가 죽거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땅에 묻어 주길 바란다.” 그리고 7년 뒤 유언대로 그는 아내와 함께 이 묘지에 합장되었다. 어머니 로제타가 한국에 온 지 꼭 101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는 셔우드 홀 가족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

    *이 글은 쓰는데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김동열 번역, 좋은 씨앗, 2003)과 [로제타 셔우드 홀](박정희, 키아츠, 2018)을 참고하였다.

    * <컬렉터의 서재>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