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노무현 정권을 실패했다고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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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1일 1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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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대통령이 언론계 편집, 보도국장들과의 오찬에서 개헌발의와 관련하여 “책임 있는 사람은 멀리 내다보며 가지만, 여론은 그렇게 멀리보지 않는다”며 여론에 관계없이 개헌발의를 추진할 것임을 다시 한번 역설하였다고 한다.

물론 ‘여론’이 자신의 결심을 철회할 정도의 합리성과 논리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전제 위에서다. 개인적으로 개헌의 시기와 정략성을 둘러싼 문제는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노무현정권의 논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개헌발의의 근거로 내세운 이유가 진정 합리적이고 중요하다면, 그 시기 여부는 부차적이거나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연임제 근거, 의회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역설

무엇보다 단임제가 책임정치와 일관된 정부정책을 방해하는 요소이기에 연임개헌이 필요하다는 노무현정권의 기본발상은 스스로 의회주의자임을 내세우면서도 정당정치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곤혹스러움이 앞설 뿐이다.

그 이유는 단임 대통령제 아래에서는 어찌되었든 집권정당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재집권함으로써 책임정치와 정책의 일관성을 계승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문제는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이 재집권의 가능성을 상실했다고 판단될 만큼 대중의 지지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을 단임제라는 제도의 한계 문제로 슬그머니 바꿔치기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정당을 꿈꾸었으나 한 기수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망선고를 눈앞에 둔 자유주의 집권정당의 불투명한 위상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것은 정당정치의 기본이다. 또한 연임제가 재집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거기에 책임정치, 정책의 일관성 등을 갖다 붙이는 것은 더더욱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정당정치를 더욱 희화시키고 그 기반을 약화시키는 행태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개헌제안을 ‘정략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의 핵심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정당정치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에 대한 이의 제기임에도 불구하고 개헌제안이 자신의 연임 등과는 무관한 것이기에, 또한 개인적으로 어떤 득을 볼 것이 없는 제안이기에 결코 정략적이지 않다고 반박하는 노무현정권의 인식수준과 언술, 그리고 자의이든 타의이든 걸핏하면 불거지는 탈당 언급은 정당정치를 대통령 자신의 행태와 동일시하는 반정당정치의 발상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재산과 교양을 가진 엘리트 모임으로서의 보수 정치

이것은 선거 때만 되면 대통령의 탈당, 중립 혹은 거국내각구성을 단골메뉴처럼 외치는 수구정치세력들의 요구에 의해 더욱 조장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또한 수구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이 과거에 자행했던 불법적인 선거개입의 그림자에 가위눌려 있음을 반증하는, 반정당정치의 행태가 초래한 또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원래 보수정치가들에게 정당은 ‘재산과 교양’을 지닌 엘리트들이 대중들의 고통스런 삶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의기투합하고 한담을 즐기는 모임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런 발상과 행태가 크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나아가 본시 그들은 대중을 민주주의에 대한 결속력이 빈곤한 천박한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고 그런 발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는 만큼 대중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도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3선개헌과 유신헌법이 “대의명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수 대중에 찬성에 의해 흔쾌히 통과되었다는 역사인식과 논법으로 자신의 개헌발의를 정당화하는 것 또한 이런 발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공개적 독재체제로서의 유신체제가 대중의 ‘흔쾌한 지지’ 속에 구성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논의, 그의 발언이 자신의 ‘재야운동의 의미’마저 부정하는 ‘몰역사성’의 표현임을 상기시키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역동성을 찬탄해마지 않았던 바로 그 대중을 이제 필요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객체로만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에게 대중은 조작(manipulation), 관리의 대상으로서만 고려될 뿐, 더 이상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의미 있는 정치의 주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생각 없는 설득의 대상일 뿐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보수정치를 지배하는 정치공학에 깊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말한 바대로 이제 87년과 같은 ‘혁명적 상황’, 그런 ‘적대와 갈등의 시간’이 마감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종종 말하듯 이제 민주주의가 대강 완성되었고 따라서 더 이상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동원은 불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분명 전형적인 근대 보수정치학의 올곧은 신봉자이다.

노무현정권, 신자유주의의 긴 역사적 안목

   
  ▲ 개헌의지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잇는 노무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따라서 그에게 한미 FTA반대를 외치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심지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에게조차 자행되는 반민주적인 공권력 남용, 집회와 표현의 자유 등 과거 그가 그렇게 옹호하고자 했던 기본권리를 봉쇄하는 조치 등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데, 그것은 이미 성취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대중의 직접행동을 사전에 규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자구책이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이번 개헌 제안처럼 역사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닌 그와 같은 리더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조치들’인 것이다. 6.3항쟁을 좌절시키며 본격화된 민주적 목소리들(voices)에 대한 억압, 3선개헌과 유신체제의 추진, 그 제2막으로서의 5.18민중항쟁의 유혈진압과 유신체제의 재편인 5공화국의 등장을 이끈 그 리더들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문제를 ‘긴 시각으로 멀리 보고자 한다는 것’에 대해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는 분명히 역사를 멀리 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회가 상이한 위상과 성격을 지니는 계급들, 계층들이 맺고 있는 이런저런 사회관계들, 정치관계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그 또한 그러한 비대칭적 관계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상기해야 할 것은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은 집권 이후 시대적 과제인 개혁추진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고자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수구정치세력 등 야당이 사사건건 몽니를 부림으로써 그 성과가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한 것을, 언론에 호도된 여론에 의해 그 진정성이 왜곡되어 온 ‘안타까운 현실’을 누누이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심지어 시민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더 이상 ‘공허한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고 다그친 바 있다. 이번 개헌발의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들에 대한 인식과 행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이것은 노무현 정권이 자신들의 긴 역사 안목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실제 노무현정권은 긴 시각으로 문제를 보고자 하였는데, 대연정 제안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노무현정권이 ‘정국 발목잡기의 원조’로 지적하며 정치적으로 함께 할 수 없을 것처럼 비판하던 그 수구정치세력에게 대연정을 제안한 사실은 대중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정권을 지지했던 개혁지향의 대중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무도 몰라주는 노정권의 역사적 안목

그런데 그것은 결코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노무현 정권에게 한국정치의 비합리성을 상징하는 ‘국정발목잡기’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간주되었던 대연정은 단지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즉자적 정략의 발로’에서 제안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과 수구정치세력인 한나라당이 그 성격상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그의 진지한 발언에 의해 뒷받침된 바 있다. 즉 그 발언은 외견상 드러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차이가 더 이상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지향을 훼손시켜서는 안된다는 객관적 분석과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공통의 지향은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근거한 번영된 국가 건설’이다.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집권한 이후 대중이 그렇게 희망하던 개혁입법들과 남북문제를 둘러싸고 지루하게 전개되어 왔던 근 10여 년에 걸친 그들 양자의 갈등이 의미 있는 이렇다할 성과 없이, 결국 집권경쟁의 와중에서 그들 간의 차이가 엄청난 것처럼 대중을 호도하는 이벤트용 카드로 되풀이하여 기능한 사실은 이를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한 반증이다.

이 와중에 이들은 신자유주의 관련 조치들을 이심전심 모두 처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IMF위기의 도래 이후 그 해소의 부담을 대중에게 전가하는 과정에서 첨예화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을 제어, 완화, 변형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과정을 위기극복과정으로 규정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업적’으로까지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대중학살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세력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자신들의 업적이라고 선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격으로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그 고통을 감내한 대중은 없다.

‘원 포인트 개헌’, ‘87년 체제’에 대한 위로부터의 선제공세

바로 이런 맥락 위에서 노무현 정권의 대연정 제안은 실제 이루어져 왔던 ‘신자유주의 공조’를 법, 제도적인 수준의 ‘신자유주의 보수대연합’으로 마무리지음으로써 글로벌 자본과 지배권력의 장기적인 헤모니를 구축하고자 한, 긴 안목의 발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탈환을 눈앞에 두고 무너진 수구정치세력은 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와신상담 오직 정권재탈환에만 눈이 멀어 ‘조합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파시스트들의 후예답게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긴 안목에서 볼 때 ‘이미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신자유주의 우군’에 대해 상처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대연정 거부에 대해 노무현 정권이 왜 그토록 답답해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번 개헌 제안 문제도 이와 같은 시각 속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 이 제안은 이미 후반부에 들어선 한미 FTA협상, 서민과 중산층의 몰락가능성을 내세우며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그 주위만을 배회하는 가운데 심화되는 부동산 문제, 비정규직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노자문제 등 현안을 대중의 가시권 밖으로 밀어낸다.

그 자리는 개헌 이슈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개헌 논의는 대선국면에서의 유용한 카드로, 장기적으로는 ‘6.29협약’으로 상징되는 보수독점의 정치사회체제로부터 기인하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연임제라는 ‘원 포인트 개헌’를 통해 마무리하여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안정적 집권의 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정치적 선제권 행사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 방안은 과거 대연정을 제안할 때,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차선책으로 고민되었던 중선거구제 도입 등 정치관련법, 권력구조의 개정 가능성 등의 발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즉자적인 것이 아니다.

노대통령의 깊은 뜻을 몰라주는 야속한 한나라당

그런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한나라당은 이번 개헌이 대선에 결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수차례 강조하였는데도 한 술 더 떠서 제안 자체를 무시하니 노무현 정권으로서는 ‘한나라당의 민주성’까지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긴 안목에 근거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역사적 소임 또한 마무리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인데,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은 그 출범에 즈음하여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정리하고 마무리 짓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과제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즉 김영삼정권 이후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심화, 완성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핵심 과제였다.

누가 노무현 정권을 실패했다고 말하는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노무현 정권은 흔히 말하듯 ‘실패한 정권’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한미 FTA체결로 그 백미를 장식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는 ‘책임 있는 정권’이다.

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만이 이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이며 현실이라는 것을 마지막까지 보여주는 ‘신자유주의 경쟁국가’로서의 그 자신의 성격과 역할을 가감 없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이 노무현 정권을 비판, 고립시킬 것이 아니라 그 성과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발언한 것은 그 본질을 파악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집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수구정치세력 또한 노무현 정권이 이룬 성과 위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 친미정책을 더욱 견고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반한나라당의 기치’를 내걸며 집권저지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호소하는 것은 의아하기조차 하다. 자신들의 이룬 지금까지의 성과가 비록 재집권으로 이어지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초록은 동색’인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이어져 거의 계승될 것이 확실한데도 말이다.

역사적 종착지에 이른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자가당착

이런 모순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들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역할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 수구정치세력과 신자유주의 공조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 ‘반한나라당’을 외치며 자신들이 처해 있는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모순된 시도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위기’가 평화와 개혁을 내세우며 ‘반한나라당’을 외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위기’의 근원은 그들 자신이 이 사회의 지배적인 세력이 됨으로써, 그 결과 기존의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을 넘어나가기보다 그것을 옹호하고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게 됨으로써 필연화될 수밖에 없는 보수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 그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신자유주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점은 이미 드러났고 그들이 말하는 평화의 물적 조건 또한 그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점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평화는 국경 밖의 문제로, 국가 간의 문제로 간주될 뿐, 분열된 사회내부의 관계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역사적으로 종착점에 다다른 이들에게는 정치적 분화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미 이 문제는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이들에게 가장 커다란 사안으로 남아 있다.

물론 역사적 종착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들이 여전히 행사하고 있는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정치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주체이고 다시 재기하여 권력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역사적 종착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의 삶을 옹호하고 민주주의와 진보를 말할 수 있는 자리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평화와 개혁을 외쳐도 이제 그것은 역사적 시효만료의 빈껍데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이 유신체제 운운하며 자신들의 과거조차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대통령은 언론데스크들과의 오찬에서 개헌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에게는 퇴임 후에도 책임을 따져 물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그 ‘책임’의 아래에는 ‘역사적 책임’을 의미한다는 주석이 따라붙는다.

물론 길게 보면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나라당은 ‘역사적 책임’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 포인트 개헌’ 제안이 담고 있는 의미를 ‘신자유주의 보수대연합’이라는 큰 틀에서 해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 포인트 개헌’의 실현은 노무현정 정권이 간파하듯 지금 이 대선국면의 시기가 가장 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향후 개헌 논의는 ‘87년 체제’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논의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은 단지 연임조항의 삽입으로 제한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그 과정은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들과 실제적인 헌법의 내용을 둘러싼 쉽지 않은 대결을 함축할 것이고 따라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불투명한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주는 역사의 교훈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물을 수 있는 책임은 거기까지이다. 왜냐하면 이번 ‘원 포인트 개헌발의’가 노무현 정권과 신자유주의세력들에게는 매우 중요할지 모르지만, 대중에게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그 제안 근거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용의 낭비라는 주장 또한 민주주의를 기술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보수정치학의 오랜 주장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결속을 의문시하는 너무나 익숙한 엘리트주의의 발상이 숨어 있다. 나아가 그 비용의 계산근거 또한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에 직면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선거는 물론 대중의 의사를 묻는 기제들은 다종다양하면 할수록 좋은데, 그래야 이들이 대중의 눈치라도 좀 더 살피게 될 것이고 바로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노무현 정권에게 필요한 것은 개헌반대세력에게 역사의 책임을 따져 물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해온 ‘긴 안목의 정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 또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한 정치의 리스트에는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의 상징’으로서 이 사회의 모든 관계들을 자본과 시장의 우위로 만드는데 핵심역할을 한 것이 가장 첫 번째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본 순간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이제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현실이, 실은 그 자신이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자극, 추동한 결과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사회를 부와 권력을 지닌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의 양극사회, 아니 ‘비대칭적 양극사회’로 심화시킨 권력의 수장으로 기록될 것이고 지금 강행하고 있는 한미 FTA 협상이 그의 임기 안에 성사된다면 이 또한 이 사회의 ‘글로벌 시장가치’를 더욱 높인 업적으로서 그 목록의 백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항상 끝이 있다. 신자유주의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것이 나타난 지 어림잡아 근 40년이 다 되어 간다.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사회관계들의 단절, 파편화, 파괴를 통해서만 성장하기에 세계 도처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일하는 여성, 소수자 등 대중의 항의와 저항을 광범위하게 필연화시키고 있다.

역사에는 항상 끝이 있다

늦게 막차를 탄 한국사회 또한 그것을 압축적으로 수용하였고 그로 인해 과거 자본주의 산업화가 잉태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이제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 되어 이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바로 이 현실이 신자유주의 시대가 준 가장 커다란 역사적 교훈의 보고이다. 따라서 교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보고에서 얻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이로부터 배운 것이라곤 극단적 경쟁논리에 근거한 더욱 견고한 압축성장의 도그마이다.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포함하는 사회관계들에 대한 성찰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의미 있는 그 어떤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긴 역사적 안목에 담겨 있는 실제 내용이다. 그리고 그 발상의 극단인 신자유주의 시대의 거의 끝자락에 노무현 정권이,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놓여져 있다. 과연 이 고통스런 관계들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이 재앙과 같은 현실에 대해 역사는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을까. 한편으로 ‘원 포인트 개헌’에 명운을 건 듯한 노무현 정권의 행태를 보면서, 다른 한편 삶 그 자체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한미 FTA 반대를 외치고 있는 거리의 소중한 움직임들을 생각하면서 긴 안목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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