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허 한보철강에 노동자 숨소리 박동
        2007년 01월 21일 01: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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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IMF 사태’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다. 김대중 정권은 ‘IMF 졸업’을 자랑스레 선포했지만 IMF 체제는 우리가 졸업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학교가 아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체제’가 됐다. 공공부문의 해체와 시장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금융 개혁이라는 이름의 파괴적이고, 노동배제적인 구조조정 등으로 대표되는 IMF 체제는 우리의 현재이고 극복해야 할 미래이기도 하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자들의 생활은 후퇴했고, 인식은 소극적-방어적-개인적으로 바뀌어갔으며, 조직력은 눈에 띄게 약화돼가는 모습을 보였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심화시킬 수 있는 유력한 사회 세력인 노동조합은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격으로 인해 고립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은 있고 있어야 한다. 고난의 10년 세월 속에서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완강한 투쟁은 멈추지 않고 있으며, 민주노조 진영은 조직의 산별 전환 과제에 탄력을 붙였고, 노동정치를 강조하고 있는 민주노동당도 이 시기에 국회에 진출해 현실정치의 교두보를 놓았다.

    희망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레디앙>은 거대한 IMF ‘쓰나미’와 그것이 만들어 놓은 ‘체제’에 맞서 고통받으면서 싸워온 사람들을 만나서 지난 10년의 세월과 희망의 근거를 알아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17일 아침 길을 나섰다. 서해안 고속도로 송악IC를 빠져나와 당진을 향해 뻗은 38번 도로를 달리자 오른 편으로 공장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현대제철의 성공적인 제철소 건설을 기원합니다”라는 현수막이 지나간다. 10년 전 무너져내린 한보철강의 꿈이 현대제철로 부활하기를 바라는 지역 주민들의 소망이다.

    IMF의 신호탄 한보철강 부도

    정확히 10년 전인 1997년 1월 23일이었다. 새해 벽두부터 날아든 한보철강 부도 소식은 3천3백여 노동자들에게 청천병력이었다. 당진의 청년들이 많았지만 포항을 비롯해 외지에서 온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제2의 포항제철을 꿈꾸며 밤낮 없이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이 날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한보철강의 부도는 한보그룹 연쇄부도로 이어졌고, 기아자동차와 한라그룹의 부도로 확산됐다. 한보철강의 위탁경영을 맡은 포스코는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했다. 약속했던 B지구 건설은 중단됐고, 노동자들의 후생복지는 50%로 축소됐다. 그리고 그해 10월 1,500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통보됐다. 정리해고에서 제외된 노동자들에게는 830%의 상여금 반납을 요구했다.

    다음해인 98년 7월 A지구 열연공장 가동이 중단됐고 800여명의 노동자들은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남은 노동자들에게는 무기한 상여금 반납이 강요됐다. 부도 1년 6개월만에 전체 노동자의 70%가 공장을 떠났다. 젊음과 희망으로 폭발했던 당진공장은 절망과 눈물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노동조합이 없었다.

    폐허의 한보철강 다시 태어나다

    현대제철 당진공장 정문에 도착하자 정상수 조직부장이 환한 표정으로 맞는다. 노동조합 회의실에서는 50여명의 간부들이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지회 대의원대회를 열고 1년 사업과 예산을 심의하고 있었다. “비정규직 사업비를 늘립시다.” “연대사업비도 늘려야 합니다.” 대의원들의 제안과 토론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대차그룹은 2004년 10월 한보철강을 인수했고 지난 해 10월 철강석과 석탄 등 원자재를 녹여 철과 철강제품을 만들 수 있는 일관제철소 기공식을 열었다. 포스코에 이어 두 번째다. 원자재를 녹이는 고로 1~2기는 2011년에 완성되고 3기가 완성되는 2015년에는 연간 1,200만톤의 철을 생산해 현대와 기아자동차에 납품하게 된다.

       
     
     

    10년 전 진흙투성이의 공장이 아니었다. 1만평의 광활한 공장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A지구 열연공장부터 철근공장까지 노동자들의 뜨거운 땀방울이 한겨울 맹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전기로에서 쇳물을 녹이고, 철근을 자르거나 압착시키는 노동자들과 꿈의 ‘고로’를 짓는 건설노동자들까지 당진공장은 ‘한보’의 눈물은 씻어내고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니네가 IMF 주범 아니냐?”

    1997년 10월 김광호(36) 조합원은 1,500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 공장을 떠났다. 이력서를 내는 회사마다 “니네가 IMF 주범 아니냐?”며 ‘한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주 조그마한 회사뿐이었다. 화물차를 몰았고 작은 회사를 전전하며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여기서 해고당한 직후가 가장 힘들었죠. 왜 이렇게 됐나 그 심정뿐이었어요. 친구들은 만나면 한보 얘기만 했어요. 저는 뭐라고 말도 못하고…” 힘들지만 살아가야 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낳았다. 그렇게 한보를 잊고 살았던 그에게 지난 2004년 12월 입사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입사원서를 넣었고, 2004년 12월 공채 1기로 공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올해 연봉은 4천만원이 넘는다. 한보시절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복직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족이 화목해져서 좋아요. 남들한테 여기 다닌다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도 있구요.”

    7년만에 공장으로 돌아오다

    “부도 나고 정리해고 당할 때 노동조합이 있었으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정리해고 시키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대의원대회가 끝났다. 1년 사업계획을 확정한 간부들이 밝은 얼굴로 회의장을 쏟아져 나온다. 조금 후 3층 식당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정기대의원대회 기념식이 열린다. 김일권(33) 선전차장은 회의장을 준비하고 음식을 나르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한보시절을 겪지 않았다. 2004년 12월 공채 1기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보와 IMF를 모를 수가 없다. 1998년 제대를 하고 취업을 준비하는데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보시절부터 계셨던 선배들이 옛날 노동조합 없던 시절을 얘기하면서 우리 신입 조합원들을 많이 이끌어주셨죠. 다 같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열심히 활동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지금 공채 4기까지 입사했다. 조합원은 400여명에서 지금 764명으로 늘었고 곧 800명을 넘어설 태세다. 새로 입사한 이십대 젊은 조합원들은 피눈물을 흘리던 한보시절을 모른다. “노동조합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르는 세대가 들어오면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어요.” 그래서 그는 밤낮으로 열심히 노조활동을 한다.

    “다시는 IMF가 오지 말아야죠. 그런데 정부는 IMF보다 더 충격이 크다는 한미FTA를 체결하려고 하고 있잖아요. 대기업이라고 방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꼭 막아야죠.”

    한보 그 시절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부도시절, 뒤늦게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1998년 10월 송승욱 지회장을 필두로 세 명이 노조를 만들었고, 연구동 80일 점거농성과 상경투쟁을 거치면서 조합원은 400명으로 확대됐다.

    조합원들은 정리해고의 위협이 닥치면 밀물처럼 노동조합으로 들어왔다가 회사가 협박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매각이 실패하면서 조합원들은 모두 노조를 떠났고, 휴직자를 포함해 18명만이 남았다.

    2000년 11월, 사측은 휴직자를 포함해 500여명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한보철강 노동자는 450명으로 줄어들었다. 3년만에 3천여명이 잘린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총 1,230%의 상여금을 불법으로 반납해야 했다. 금속노조로 전환한 ’18명의 전사’들은 노동조합의 깃발을 움켜쥐고 버텼다.

    18명이 전사들에게 기회가 오다

    숨죽여 기다렸고, 3년 만에 기회가 왔다. 2004년 철강 수요가 증가했고 일감이 많아지면서 노동자들은 반납한 임금을 되돌려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어 현대차그룹의 매각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경영진의 고철리베이트 비리가 발각되자 불신과 분노가 팽배했고, 피해보상과 고용보장 요구가 광범위하게 펴졌다.

    노동조합은 강제반납했던 상여금 1천만원을 요구했고, 10일만에 404명 전원이 노조에 가입했다. 금속노조 한보철강지회는 한보철강공업(주)와 INI스틸(주)에 3자 교섭을 요구했고, 7월 7일 1차 경고파업을 시작으로 7월 22일부터 8월6일까지 16일간의 총파업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18인의 전사 중에 황룡선(36) 후생복지부장(사진 왼쪽)이 있다. 1995년 3월 23일 한보철강에 입사한 그는 1998년 7월 강제휴직을 당했고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집에서 농사일을 돕기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노가다’를 하기도 하면서 2년 6개월을 버텼다.

    노동조합이 없으면 아무도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연구동 점거농성과 서울상경투쟁 등 노조활동에 앞장섰다.

    “난리도 아니었시유, 분유값 없었고, 애들 교육비도 없었쥬. 건설회사 노가다하다 또 부도나서 돈 떼이는 거에유, 환장하쥬.” 회사 부도나고 한푼도 못 받을 때 그는 시골 노인네들 걱정할까봐 “어려워도 월급은 나와유”하고 말했었다.

    그런 시절을 지나자 회사는 매각 과정에서 한국노총으로 전환하라고 유혹했다. 뒷돈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현대 인수 이후에는 산별노조를 탈퇴시키려는 공작도 있었다. 그러나 한보시절 노동조합이 없어서 그 고통을 겪었던 그들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활동가들의 헌신 살아숨쉬는 현장

    노동조합 회의실 한켠에 만든 잠자리는 지난 3년간 간부들의 집이었다. 2004년 16일의 파업과 철야농성을 시작으로 2005년 83일, 2006년 129일의 철야농성을 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간부들은 스스로 ‘감금’돼 광활한 1만평 공장을 뛰어다니며 조합원들을 만났고, 회사와 싸웠다.

    춥고 배고픈 시절을 버티면서 단련된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현장을 살아 숨쉬게 만든 것이었다. 송승욱 지회장은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게 한보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3시30분부터 3층 식당에서 시작된 기념식에는 130여명의 조합원들이 자리를 메웠다. 4조 3교대를 근무를 감안하면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참가한 것이었다. 모범조합원 표창을 받은 이의탁 조합원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노조의 지침에 따라 중식집회와 출근투쟁, 지역집회에 열심히 참석해 이 상을 받았다.

    새로운 과제 비정규직

    그러나 현대차 재벌이 누구인가. 사용자들은 정규직이 일하던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우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비정규직 비율을 늘리려고 하고 있다. 현재 하청노동자는 20개 업체 650여명이고 2차 하청까지 포함하면 700명이 넘는다. 노동조합이 사력을 다해 막고 있지만 만만치 않다.

    철강석과 석탄을 녹이는 고로가 완성되면 앞으로 당진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수는 1만5천명에 이를 전망이다.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고로가 멈춘다는 건 회사로서는 끔찍한 일이다. 회사는 비정규직을 대폭 늘려 정규직 노동조합의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황룡선 부장은 “4조3교대로 바뀌면서 예전에 정규직이 일하던 기중기, 포장, 출하같은 부서에 비정규직이 일하고 있다”며 “신입사원 선발과정에서 정규직을 늘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활한 대지에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공장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폐허의 한보철강을 노동자들의 심장소리가 박동치는 공장으로 만든 현대제철 노조간부들은 이제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를 위한 더 큰 투쟁으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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