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용, 사유도 고민도 없는 허위거나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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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0일 03: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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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은 평소 존경받던 원로들이나 지식인들의 엉뚱한 말들에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떤 동기에 의해 사상적 전향이 이루어지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장정일은 그 원인을 잘못된 중용의 태도에서 찾는다.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 애쓰다 보면 현실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발언을 할 수밖에 없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p.5)

    그리고 이어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p.4~5)

    솔직하면서도 읽는 이를 뜨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심지어 중용의 태도와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조차 장정일의 고백을 듣노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중용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의 고백이 날카로운 것은, 중용 비판으로 사회와 문명의 허위를 까발리는, 하나마나한 그럴싸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중용을 취하려는 태도를 앎(무지)의 문제와 연결한다. 이는 인문학 위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한국에서 인문학이 잘 안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뼛속 깊이 스며든 우리의 ‘둥글게 둥글게’ 의식/무의식들 때문이다. 장정일을 응용하자면, ‘중용을 취하고 있으면 인문학의 허세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교양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인문학의 중용은 인문학의 결여였다.’

    책의 세부 내용은 물론 서문의 주장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꼼꼼한 텍스트 읽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장정일은 스스로에게 공부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그런 공부의 과정 자체란다.

    공부하겠다 마음먹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고백은, 인문학에서 커다란 범위를 점하고 있는 문학 입장에선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무게를 지닌다. 허세와 허위에 빠진 철학도 문제라지만, 상서롭기 그지없고 세상에 태평하며 나오는 것마다 문제작 범주에 드는 문학 판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 시인의 참고서지는 오직 시집밖에 없으니, 시인이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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