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와의 소통 또는 낮은 곳을 향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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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0일 03: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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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다양성과 보편성 그리고 옛것과 새것이 항상 공존하는 둥지의 알들이야말로 인문학의 희망입니다.”(p.91)

    이어령의 ‘둥지의 알’로 충분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소통의 측면에서는 얼 쇼리스가 쓴 『희망의 인문학』이 꽤 적절한 사례가 될 듯싶다. 물론 이어령은 모두와의 소통을 말하지만, 얼 쇼리스는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묻는 데서 차이가 제법 크기는 하다. 얼 쇼리스의 소통은 싸잡아 모두가 아니라 낮은 곳과의 소통이다.

    책이 처음 소개된 것은 2004년 8월의 일이다. KBS의 <가난한 자의 철학자 얼 쇼리스의 희망수업>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그것인데, 이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클레멘트 코스 이야기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클레멘트’라 붙여졌지만, 이 말은 야구선수이자 선행의 대명사 ‘로베르토 클레멘테’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 안팎을 살피려 취재한 도중 만난 번역자와 어느 사회복지사 얘기에서도 그 충격적 경험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사례들이다. 책이나 예술 근처에 가지도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놀라울 만한 변화.

    “1996년 12월, 헨리 존스는 바드대학 흑인학생회의 회장으로 추대됐다. …… 데이비드 이사코프는 자신의 생물학 수업에서 과일파리를 이종 교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 수산나는 그때까지도 화학자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아주 뛰어난 어느 교수의 수업을 듣고 난 다음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었다.”(p.265~66)

    더 나아가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된 가난한 학생들의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책은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가난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들이 있다. ‘그 사람은 게으를 거야’, ‘타고난 성품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 등 가난의 이데올로기라 불릴 만한 생각부터 적절한 동기 부여와 직업 교육과 알선이 뒤따른다면 빈곤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얼 쇼리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기존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존 관점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가난에 대한 기존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치더라도, 그런 관점이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p.24)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가난이 선천적이라는 생각은 편견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며 일반인과 빈자를 분리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직업 교육이나 훈련이 소득의 크기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얼 쇼리스가 생각하는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비니스라는 재소자에게 사람들은 왜 가난한 것 같냐고 묻는다. 비니스의 대답.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p.168)

    이 대화는, 얼 쇼리스가 미국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기획하고 곧장 행동에 옮기게 만든 주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얼 쇼리스는 비니스의 언급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읽는다.

    “비니스는 고대 고리스에서 정치가 탄생했던 과정과 똑같은 길을 걸어 왔다. 그녀는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은 바로 인문학을 의미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 줄곧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도록 해준 근본적인 원천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p.173)

    인용문에서 보듯, 얼 쇼리스 생각의 기본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교양과 덕성을 갖춘 시민에 있다. 그런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단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든 사례들은 이러한 생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얼 쇼리스의 실험은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성프란시스대학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책이 번역되자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런데 “가난 벗어나는 열쇠, 인문학”, “빈자에게 적선 대신 인문학을”과 같은 기사 제목을 보게 되면 책의 내용을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 쇼리스 말마따나 인문학 교육이 자기를 성찰하게 하고 삶의 동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야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곧 부富로 직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이 여전히 배고픈 학문이라는 건 우리의 상식이고 경험이니까. 마음의 부를 말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또 다른 우려 또한 든다. 요컨대 이런 논의는 한편으로는 (그 의도와 달리) 빈곤의 실제와 원인을 은폐하는 효과를 지닌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니 넘어가자.

    언론의 과장된 홍보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 클레멘트 교육이 그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자. 빵과 장미가 있다. 세상은 지금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줄 빵이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빵이 아니라 장미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미가 빵을 산출할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그것은 ‘경험적으로’ 옳(았)다. 사실상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곤란하다. 논리적 판단을 떠나 유의미한 사회적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설픈 논리로 가늠할 수 없는, 책의 표현을 빌자면 ‘클레멘트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의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장미를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장미가 있기나 한 것인가. 혹여 그 장미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성토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쪽에서는 인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말하는데 한쪽에서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인문학이라……. 의문에 대한 접근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 장미는 없다는 것이 하나라면, 또 하나는 ‘낮은 데로 임할 수 없는’ 한국 인문학 자체의 문제이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주관한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 설립을 위한 실제’ 워크숍 자료집을 보며 우려는 거의 불신이 되었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에 참가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 요약문은 이랬다.

    “자기 의식은 자기 확신은 물론 타자로부터의 인정도 필요하다. …… 전자는 자립적 의식으로서의 주인Herr, 후자는 비자립적 의식으로서의 노예Knecht.” “페이디다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논의가, 이런 교육이 어떻게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정치적 삶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과문한 기자로서는 판단키 어렵다. 다만 적어도 위에서 이어령이 언급했던 ‘공감’의 문제를 상기해 본다면 이런 이야기는 거의 소통 불가능에 가까운 게 아닐까.

    장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장미를 전달하는 태도가 고압적이다. 게다가 이 장미 전달식 주최 측의 마인드를 알 수 있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문학 강의를 위한 강사의 조건은 사회적 지명도, 강의 실력, 노숙인에 대한 애정 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적 지명도는 참여자들의 자긍심을 세우기 위해서 중요하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현실의 인문학은 어떠한지, 인문학이 죽음에 이르렀을 만큼 한심한 작태라면 그 대안적 인문학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언사이다. 혹여 이들에게 인문학이란 ‘뽀대 나고’ ‘그럴싸한’ 게 아니던가.

    물론 문제는 간단치 않다. 다음과 같은 노숙인 수강생들의 반응을 보자니 ‘환상의’ 허울 좋은 장미도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전달된 셈이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고, 생활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나 혼자서 생각하는 공간이 없어서 불편하다. 내가 편안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과연 내가 인문학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 내가 원하는 이상이 높아져서 내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책이 말하는 자기 성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직접적인 그들만의 ‘성찰’.

    이 책은 양면적인 문제작이다. 빈곤의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고 그 해결책을 달리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인문학 교육을 염두하고 읽노라면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교육 예술’이라는 문화예술 관계자 워크숍에서 몇몇 논자들의 지적도 기자의 이런 시선과 맥을 같이 한다.

    “클레멘트 과정에 비록 비판적 글쓰기가 있지만, 대부분 과거의 원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현재 하부구조 자체를 파고드는 직접성을 피하고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목적은 언젠가는 그 직접성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얘기하고 싶습니다”라는 김지섭의 말이나 “텍스트 중심주의에 있는 아카데미 인문학은 정전 해석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세계와의 대화, 삶과의 대화, 현장과의 대화를 외면하는 인문학자 또는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인문학적 풍토에서 ‘대화’는 사교에만 필요할 뿐입니다”라는 이광준의 지적이 그렇다.

    요컨대 문제는 클레멘트 코스의 한국적 적용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이미 노출된 인문학의 여러 문제들이 한참이나 선행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고 진정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에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저 여러 양상들을 보면서 문제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간단치 않다는 것만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인문학 위기 이전에 인문학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그러한 편견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그것은 한국의 인문학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공부』 서문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읽힌다.(‘장정일의 공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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