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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실의 유령처럼 떠도는,
    그러나 인간이 되고자 했던 다이애나
    [최인규의 Come & See] 기괴하고 슬픈 <스펜서>
        2022년 05월 07일 08: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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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데믹 시기 극장 관람이 귀해진 지금, Come & See! 다시금 극장에서 영화를 소비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최근 개봉작 중 눈여겨 볼만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코너 제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1985년 러시아 영화 <컴 앤 씨>를 차용했음을 밝힌다. ‘반전’을 다룬 러시아 영화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긴 하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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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되고 싶었던
    유령의 기괴하면서도 슬픈 사이코드라마! <스펜서>

    새벽녘 시골길을 밝히는 것은 군용 트럭의 움직임이다. 트럭의 헤드라이트는 안개로 뒤덮인 시골길을 뚫고 어디론가 향한다. 거대한 별장에 도착한 트럭에서 식자재가 공수되고, 이내 오와 열을 맞춘 요리사들에 의해 군사작전하듯 부엌으로 공수된다. 그 시각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홀로 운전대를 잡고 어디론가 향하지만 길을 잃고 만다. “내가 어디에 있지?” 혼잣말하던 그는 급하게 차를 세우고 KFC로 뛰어들어가 대중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길을 물어본다. 1991년 크리스마스 전야 영국 노퍽주 샌드링엄 왕실 영지의 모습이다.

    <스펜서>의 도입부는 교차편집을 통해 집단과 규율로 대표되는 왕실과 개인과 자유로 표상되는 다이애나를 의도적으로 병치시킨다. 이 오프닝은 어둡고 음울하게 표현된 샌드링엄의 풍광에다 다이애나의 어두운 표정을 더해 영화 전체 이미지를 직조한다.

    이러한 오프닝은 집단 속에 속박당한 개인의 모습이 영화의 주제라는 것을 암시한다. 왕실의 속박과 불행한 결혼생활은 다이애나 서사의 주된 축이다. 엠마 코린이 다이애나를 맡은 <더 크라운>이나, 나오미 와츠가 다이애나를 맡은 <다이애나>도 마찬가지이다. <스펜서>가 전작들과 다른 점은 다이애나 서사의 뉘앙스만 차용한 채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구구절절한 서사가 아니라 감정에 방점을 찍는다.

    전작들이 결혼과 이혼에 이르는 다이애나의 외연적인 서사를 치밀하게 그려냈다면, <스펜서>는 다이애나의 심리적 궤적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실화 영화의 운명과도 같은 ‘모두가 다 아는 스토리’의 클리쉐를 뛰어넘는다. 영화는 수많은 캐릭터의 관계 속에서 다이애나를 보여주는 왕실 드라마가 아니라, 올곧이 다이애나 개인 심리에 초점을 맞춘 사이코드라마 노선을 택한다. 영화는 이러한 노선을 성취하기 위해 몇 가지 영화적 기제를 제시한다. 관객들은 이러한 기제를 통해 ‘신경쇠약 직전의 다이애나’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기제는 빛바랜 아버지의 코트이다. 겨우 영지에 도착한 다이애나는 허수아비에 걸려있는 외투가 아버지 스펜서 백작의 낡은 코트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애나의 고향 집은 영지 인근인 파이크 하우스이다. 다이애나는 시종에게 아버지의 코트를 자신의 치수에 맞게 수선을 부탁한다. 영화 말미에 다이애나는 이 코트를 걸친 채 사냥터에서 찰스로부터 아들 해리와 윌리엄을 떼어놓고는 차에 태워 런던으로 향한다. 다이애나 윈저가 다이애나 스펜서가 되는 순간이다. 결국, 아버지의 코트는 다이애나가 왕실의 삶을 거부하고, 결혼 전 과거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두 번째는 두 개의 진주 목걸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다이애나는 만찬용 진주 목걸이를 건네받는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사실 이 목걸이가 찰스가 연인 카밀라 파커에게도 선물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이애나는 억지로 목걸이를 착용하고 만찬에 참석하지만, 목을 조여 오는 분노와 질투심에 시달린다. 찰스와의 결혼이 둘 만의 것이 아니라, 셋이었다고 항변하던 다이애나를 상기시켜 보면, 이 진주 목걸이는 잘못된 결혼의 굴레와도 같은 것이다. 다이애나가 목걸이를 끊어 굵은 진주가 바닥에 나뒹구는 판타지 장면은 잘못된 결혼생활을 벗어나려는 다이애나의 욕망의 몸부림인 것이다.

    마지막 기제는 앤 불린의 유령이다. 다이애나는 서재에서 앤 불린에 관한 책을 발견하고, 자신과 앤 불린을 동일시하며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매들린(킴 노박)이 19세기 비운의 여성 칼로타의 망령에 동일시하는 것처럼,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영국 성공회를 창시한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 1세를 출산하지만, 누명을 쓰고 즉위 천일 만에 참수 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앤 불린의 이 비극적인 스토리는 나탈리 포트만이 앤 불린으로 분한 <천일의 스캔들>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국 왕실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의 왕비이자 역설적으로 근대 영국의 초석을 다진 엘리자베스 1세의 모친이기도 한 앤 불린과 다이애나는 사랑, 배신, 이별,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러브스토리의 단골 주인공이다.

    기구한 운명의 앤 불린은 영화 내내 다이애나를 괴롭힌다. 다이애나는 극도로 앤 불린의 존재를 꺼리지만, 빙의된 것처럼 앤 불린에 구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이애나가 한밤중에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빈집에 들어간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하우스호러 <디 아더스>처럼 연출된 이 장면에서 급기야 앤 불린의 유령은 자신의 몸을 드러낸다. 마치 도플갱어처럼 다이애나의 몸과 겹쳐져 보이는 투 쇼트의 미장센은 이 잔인한 사이코드라마의 화룡점정이다. 가까스로 자살 충동을 이겨내는 다이애나의 모습에서 다이애나가 앤 불린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라는 희망도 엿보이지만, 모두가 아는 사실처럼 잠시 그 시간은 유예될 뿐이다.

    영화가 이러한 기제를 표현하는 방식은 우아한 하우스호러 장르에 기대고 있다. 왕실의 고급 취향과 다이애나의 우아함이 고스란히 반영된 집과 소품, 의상은 매혹적이지만 그 자체가 공포이다. 마치 전통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야에 난방을 안 하는 저택, 입실할 때마다 사람의 몸무게를 재는 저울, 진주 목걸이, 앤 불린의 책 등 샌드링엄의 모든 것은 다이애나를 피폐하게 만든다. 여기에 <잭키>, <네루다> 등 실존 인물 심리 묘사에 일가견이 있는 파블로 라라인의 연출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클레르 마통의 쉴 새 없이 부유하는 카메라, 그리고 라디오헤드 조니 그린우드의 드라이한 음악이 직조하는 예의 그 우중충한 미장센은 관객을 다이애나의 심연 그 밑바닥으로 안내한다. 탄식과 슬픔은 올곧이 관객의 몫이다.

    앤 불린의 유령을 보고 빈집을 빠져나오는 다이애나는 경비들과 마주하게 되고, 그들에게 “유령을 보았을 뿐이다”라고 상부에 보고하라고 이른다. 결국, 영화는 왕실의 유령처럼 떠도는 다이애나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스토리이다. 그것도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 보여준다”. <디 아워스>의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만)의 내레이션 마냥, 영화는 단 3일간의 다이애나의 모습을 통해 다이애나 삶 전체를 조망한다. 작은 퍼즐 조각이 거대한 그림을 직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작은 퍼즐 조각은 너무 치명적이다.

    아버지의 점퍼 / 진주 목걸이 / 앤불린의 유령 / 소령 게임

    필자소개
    영화감독. <고백할 수 없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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