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딜의 막후에서
    노동개혁을 선도했던 위대한 인물
    [정의로운 경제] 132주년 노동절, 프랜시스 퍼킨스
        2022년 05월 01일 11: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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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노동부 본부 건물에 붙여진 이름

    혹시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노동부 본부 건물의 별명을 아는가? ‘프랜시스 퍼킨스 빌딩(Frances Perkins Building)’으로도 불린다는데 1980년에 카터 대통령이 붙여준 이름이란다. 프랜시스 퍼킨스는 짐작한 대로 미국 노동부 역사에서 아마 가장 전설적이라고 할 만한 노동부장관 이름이다. 중성적인 이름과 달리 미국 정부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잠깐 얘기를 돌려보자.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전설적인 포크가수 밥 딜런을 모르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현장에 밥 딜런과 함께 노래했고 그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그와 달리 일관되게 시민운동 현장 일선에서 늘 노래해온 존 바에즈(Joan Baez)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모두가 알만큼 유명하지만, 케인즈의 <일반이론> 작업을 가장 곁에서 함께했고 케인즈 사후 영국 케임브리지를 기반으로 정통 케인즈이론을 이끌며 미국의 사이비 케인지언과 맞서왔던 빼어난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 (Joan Robinson)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유사하면서 더 극적인 사례가 하나 더 있다. 1930년대 대공황을 평화적으로 극복해낸 뉴딜정책에서 연상되는 인물은 누구에게나 루스벨트 대통령일 것이다. 그 막후에 뉴딜 개혁의 핵심정책들을 준비하고 설계하고 실행해낸 인물이 존재하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런데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자 마자 노동부장관이 되어 루스벨트와 12년이라는 가장 오랜 동안 내각을 함께 한 두 명 중의 한 사람, 바로 노동부 건물의 별칭으로 붙여진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다.

    그림1 1935년 미국 사회보장법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그 뒤의 퍼킨스

    의류공장 화재 참사로 죽어간 여성노동자들, ‘뉴딜이 태어난 날’

    2022년 5월 1일은 132번째 노동절이다. 노동절이면 통상적으로 노동권을 위해 싸운 헌신적인 노동조합 활동가나 이름있는 노동운동가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프랜시스 퍼킨스는 노동자도 아니고 노동조합 활동가도 아니었다.

    1880년에 태어난 그는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지식인으로서 산업안전과 빈곤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뛰어든 정책가이자 개혁가였다. 새삼스럽게 퍼킨스라는 인물을 회고하는 이유는 최근 대선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중대재해 문제나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이슈들에 대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들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종류의 사안이 어떻게 퍼킨스라는 인물과 연결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1938년의 퍼킨스(1880~1965)

    퍼킨스의 대학 전공은 예상과 달리 물리학이었고 부전공으로 화학과 생물학을 공부했으니 얼핏 노동정책과 연관짓기 쉽지 않다. 그런데 전기에 따르면 마지막 학기에 미국경제사를 수강할 때, 직접 공장을 방문해 노동조건을 조사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산업현장은 노동시간 제한도 없고 산재를 당했을 때 보상해주는 규정도 없이 여성과 아이들이 공장에서 위험한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학부 졸업 후 퍼킨스는 시카고로 가서 미국의 사회봉사가 제인 아담스가 세운 헐 하우스(Hull House)라는 이민자를 위한 정착촌 복지시설에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가난한 이민자, 노동자들과 접촉하면서 열악한 노동현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후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이수함과 동시에 미국소비자연맹( National Consumers League) 일원으로 작업장 실태를 조사할 기회를 얻게 되는데, 여기의 경험에서 그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본원인이라는 인식을 굳혀가게 되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1911년에 발생한 트라이앵글 의류공장(Triangle Shirtwaist Factory) 화재사건을 뉴욕에서 우연히 직접 목격한다. 대부분이 여성 이민자들로 구성된 노동자 수백명이 공장 빌딩 8~10층에서 일하던 와중에 화재가 났지만, 사업주는 작업장 출입구를 잠가놓은 상태였다. 불길을 피하려고 수십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고층에 뛰어내리다 사망한 것을 목격한 퍼킨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당시 화재로 대부분 여성을 포함해서 146명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99년 뒤인 2012년 10월 방글라데시 나이키 공장 화재로 의류공장직원 112명이 사망하는 사건과 너무 닮았다).

    “공장주의 탐욕과 입법가의 무관심이 146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아 갔다는 현실”에 깊은 충역을 받는 그는, “고상한 삶을 살려고 했던 개인적인 비전을 버리고 노동자 권리를 위해 싸운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고 로버트 퍼트넘은 최근 저서에서 그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 사건을 가르켜 퍼킨스는 훗날 ‘뉴딜이 태어난 날(the day the New Deal was born)’이라고 불렀다.

    노동부장관직 수락의 조건

    의류공장 화재 참사 이후 뉴욕주는 산업안전을 위한 시민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퍼킨스는 여기에 참여해서 화재재발 방지뿐 아니라 노동자들과 가족의 건강에 관한 사안까지 조사와 정책제안을 확대했다. 이후 작업장에서의 안전과 건강에 관해 가장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뉴욕주의 법안으로 제도화되었고 이는 다른 주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퍼킨스 스스로 산업안전에 관한 분기점이 되었다고 자평했을 만큼 중요한 성과였다.

    이 경험을 기반으로 그는 여성 최초로 1918년 뉴욕주 산업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산업안전과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입안하게 된다. 그리고 1928년에 새로 주지자가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시 퍼킨스를 신임해서 그에게 노동정책 책임을 계속 맡기게 된다. 그 와중인 1929년 대공황이 터졌고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자 퍼킨스는 뉴욕주를 넘어 국가적으로 노동문제에 개입한다. 당시 후버대통령이 근거 없이 실업률이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하자 노동통계를 들어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한편 뉴욕주에서 고용지원과 실업보험 제도를 준비해나간다.

    그리고 1933년 마침내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첫 노동부장관으로 퍼킨스를 떠올리게 된 것은 결코 이례적일 것도 의외일 것도 없었다. 비록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 등장하는 순간이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루스벨트의 노동부장관직 요청에 그는 곧바로 수락하지 않고 전제조건을 달았다. 주 40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실업보험제, 아동노동금지, 사회보장법, 공공고용서비스, 건강보험 도입을 추진할 테니 대통령이 지지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노동부장관으로 워싱턴에 입성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신과 루스벨트 대통령, 그리고 수백만명의 잊혀진 평범한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려고 워싱턴에 왔다”

    ‘루스벨트 뉴딜이 아니라 퍼킨스 뉴딜’

    대공황의 와중에 루스벨트 내각의 노동부장관에 취임한 그는, 뉴딜 초기 일자리 프로그램인 ‘시민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을 가장 강력히 옹호하는가 하면 실업자를 위한 긴급구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국가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에 따라 대규모 공공일자리 창출을 지휘한다.

    또한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노령연금과 실업보험, 장애지원금을 포괄하는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설계했는데, 미국 복지제도의 근간이 될 이 법은 1935년부터 발효되었다. 한편 최저임금제와 주40시간 노동시간, 아동노동금지를 포함하는 ‘공정노동표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 역시 그의 지원에 힘입어 1938년 제도화되었다. 이로써 그의 임기 12년 동안 그가 장관이 되면서 전제조건을 걸었던 내용 가운데 건강보험제도만 빼고 거의 다 제도화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니 1944년 한 잡지에서는 ‘루스벨트 뉴딜이 아니라 퍼킨스 뉴딜’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스스로 이름을 개명하고 여성참정권 운동에도 참여하는가 하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고수한 그는, 남편과 딸의 정신질환으로 가장으로서의 역할까지 감당하면서 20세기 뉴딜시대에 미국 복지와 노동개혁의 정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국의 기성세대 엘리트들 가운데에서도 엄혹한 노동현장의 실태를 접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다양하게 노력해온 이들은 적지 않다. 하지만, 자신들이 막상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거나 유력한 정치인이 되었을 때까지 초기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제도개혁을 구현해낸 이들은 드물다.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좌절되고, 여전히 주4일제는 고사하고 주 52시간 제도도 역진될 위기에 처해 있으며, 반쪽짜리 중대재해 처벌법 탓으로 지금도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의 얼마간은 끝까지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한 기성세대 엘리트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노동개혁가 퍼킨스를 돌아보면서 한 번쯤 성찰해볼 일이다.

    (주: 프랜시스 퍼킨스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 번역된 <업스윙>에서 퍼트넘이 473~476쪽에 걸쳐 소개해주고 있으며, 저널스리스 커스틴 다우니(Kirstin Downey)가 2009년에 쓴 전기 <뉴딜의 막후에서 활약한 여인(The Woman behind the New Deal)>이 좋은 참고가 되었다. 아울러 프랜시스 퍼킨스 센터 웹사이트(francesperkinscenter.org)를 참조했다.)

    * <정의로운 경제>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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