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크를 지나간 한국,
    업스윙은 어떻게 다시 올 수 있을까?
    [정의로운 경제] 불평등 '도금시대'의 반전, 어떻게?
        2022년 04월 29일 03: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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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지는 대한민국과 희망

    2016년 초겨울부터 해를 넘기면서까지 이어진 촛불항쟁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2017년 3월 박근혜 탄핵과 5월 문재인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까지 이른 한편의 파노라마가 오래전 기억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과 5년 전 일이다.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드디어 엉망진창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승기조(upswing)을 시작했다고 들떠 있었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약속하고, 최저임금을 16%까지 올리는가 하면 진보적인 소득주도성장 정책까지 채택하면서 상승기조를 확인해주는 듯했다. 노동과 삶의 현장에서 부당하게 대접받는 이들이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 존중받는 정의가 되살아나 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4년 전 4월 2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을 넘어 한국 땅에 오고, 두 달 뒤인 6월 12일에 싱가폴에서 열린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으로 그 기운은 확실해지는 듯했다. 대결과 반복의 오랜 역사가 정말로 막을 내리고 협력과 공존의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22년 5월을 앞둔 지금, 우리 사회에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까? 5년 동안 급격히 악화된 자산 불평등은 70년 전 농지개혁 이전 수준으로 회귀하고 있다. 여성과 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오히려 더 거세지기만 한다. 허울만 남은 정치적 민주주의도 거대 양당의 기득권 방어논리로 변질되는 조짐이 강화되고 있다. 점점 다가오는 기후위기는 아예 사회적 공론장에서 외면받는 실정이다. 불과 4~5년 만에 한국 사회가 상승기조는 고사하고 명백한 하강기조로 전환된 것 같다. 마치 선진국으로 인정받자마자 피크를 지나서 내리막길을 걷는 것처럼.

    한 세기 동안 벌어진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나로’

    사실 지독한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양극화, 사회적 분열, 문화적 나르시즘, 그리고 아직도 만연한 인종차별, 젠더 차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만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시기가, 흔히 도금시대(Gilded Age)로 알려진 19세기 말 서구에서도 거의 유사한 수준으로 있었단다.

    그런데 지금과 유사한 100여년 전의 불평등과 양극화의 어두운 시대 속에서 “평등, 공유된 이익, 공유된 운명, 상호간 의무, 공유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진보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추세를 반전시켜 상승기조를 만들어냈고 1933년 뉴딜에서 1960년대 민권운동에 이르는 평등화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추세가 다시 역전되어 지금과 같은 불평등이 부상되었다는 역사적 반전의 스토리를 엮은 책이 번역되었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킨 미국의 원로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이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세일린 롬니 가렛(Shaylyn Romney Garrett)과 함께 2020년에 저술한 <업스윙(Upswing: How American come together a Century Ago and How We can do it Again)>이 바로 그 책이다. 최근 번역되어 나왔다.

    본문만 500여쪽 되는 제법 두터운 책에서 그들은 미국의 125년 역사를 ‘나에서 우리로, 다시 우리에서 나로’ 변화해온 역사로 재정의한다. 경제적으로는 19세기 말 도금시대(Gilded Age)의 최악의 불평등에서 20세기 전반기의 평등화(그 정점이 1960년대)로, 그리고 최근 50여년 동안의 다시 불평등화 추세로 요약한다. 같은 시기 동안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양극화 시대에서 초당적 협력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정치적 양극화로의 반전이 이어졌고 그 끝이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미국 양당의 끝없는 대립이라고 설명한다.

    사회·문화적으로는 19세기 말 사회진화론자들의 적자생존과 우생학이 판치던 극단적인 개인주의 시대 안에서, 진보주의자들이 등장하여 각종 사회단체와 우애단체를 조직하는 등 ‘상호부조의 협동적 이상’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축적되어 1950년대까지 ‘보통사람을 위한 팡파르’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를 정점으로 반전되어 공동체는 시들해지고 개인을 강조하는 문화가 신자유주의 승자독식 문화와 얽히면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심지어 퍼트넘은 1960년대부터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간주되었던 민권운동과 페미니스트운동도 사실은 20세기 전반기 내내 다양한 차원에서 진행되다가 1960년대에 전사회적 운동으로 부상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한마디로 인종차별과 젠더차별 해소를 위한 1960~1970년대 사회운동의 큰 부흥은 “이미 잘 보존된 불쏘시개용 나무토막에 성냥불을 붙이는 것”이었다는 진단이다.

    그런데 이렇게 “경제적 평등, 정치적 공동체주의, 사회적 결합, 문화적 이타주의”가 정점에 달하고 “평등, 공유된 이익, 공유된 운명, 상호간 의무, 공유된 가치”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960년대부터 다시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양극화, 문화적 개인주의화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1979년 대처의 집권과 1980년 레이건의 집권은 어쩌면 그 결과에 불과할 수 있다고 한다.

    상승기조, 업스윙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퍼트넘이 정작 책을 통해 찾으려 했던 것은 서구 사회가 1960년대라는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그동안 많이 언급되었던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과 유사했던 19세기 말 최악의 불평등과 정치적 분열, 적자생존의 냉정한 사회 속에서 서구인들이 어떻게 새롭게 상승기조로 극적인 반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제2차 도금시대’라고 불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긴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전에 한 번 지금과 같은 엉망진창의 혼란스런 상태에서 빠져나온 적이 있다” 바로 지금처럼 불평등이 극심하고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19세기 말의 서구 사회 말이다. 19세기 말 시작된 ”제1차 도금시대는 미국에 엄청난 물질적 진보를 가져왔지만, 더불어 불평등, 양극화, 사회 혼란, 그리고 문화적 이기주의도 함께 가져왔다. 이어 10~20년이 지나 20세기가 시작되었고, 진보운동이 이어지면서 역사의 진로를 새로운 방향으로 재조정하는 정책이“ 이어졌다.

    도금시대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진보주의를 일구어냈던 흔적들을 더듬으면서 퍼트넘은 이렇게 요약한다.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려면, 상대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관심을 기울이고 실제 행동으로 노력할 때라고.

    로터리 클럽을 조직했던 폴 해리스, 인종차별을 반대해 싸운 아이다 웰스, 스탠다드오일의 독점실태를 폭로한 아이다 타벨, 고기 도축산업의 비리를 다룬 업튼 싱클레어, 뉴딜시절 노동부 장관이 되어 개혁을 이끌었던 프랜시스 퍼킨스나 클리브랜드 시장으로 지방개혁의 모범을 보였던 톰 존슨을 포함한 무수한 사회운동가나 정치적 리더들이 그런 길을 걸었다.

    ”도금시대를 진보시대로 바꾸어 놓은 개혁가들은 이주민과 엘리트, 여자와 남자, 흑인과 백인, 주부와 직업 정치인, 노동조합주의자와 자본주의자, 대학 졸업생과 공장 노동자, 상의하달 방식의 관료와 하의상달 방식의 운동과,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그리고 중도 무소속 등 거의 모든 사람을 끌어들였다“

    퍼트넘은 ‘개혁운동을 양심의 문제’로 인식했던 19세기 말 미국 개혁가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개혁가들이 자아성찰을 한 결과, 그들 자신의 파괴적인 개인주의를 발견해냈고, 그들 자신도 착취적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공모했음을 파악했다. 이런 깨달음은 사회의 잘못을 시정하려는 열정적 노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진보주의 개혁가들은 절망에 직면하자 희망을 소환했고, 다양한 문제들에 집중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의 새롭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퍼트넘은 강조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등학교 설립 운동, 참정권 등 여성 권리를 위한 운동들, 그리고 반독점 운동까지 실로 풍부한 운동들을 창안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업스윙을 만들려면?

    마지막으로 퍼트넘은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거의 모든 측면에서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여 국가적인 하향추세로 더욱 깊숙히 빠져들어 가고 있다.” “‘나’만을 강조하는 파괴적이고 냉소적인 추락을 멈추고 ‘우리’ 공동체주의의 잠재력과 약속을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공유된 가치의 재평가에 나서야 한다. 공익을 위해 자기 자신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개인적 특권과 권리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미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공유된 계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어떨까? 어쩌면 우리 사회의 하강도 최고의 상승기라고 생각했던 1987~1997년 어느 시점부터 사실 예고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진보를 자처했던 586 정치인들의 최근 행보를 보면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또한 5년 전 촛불항쟁으로 잠시 반짝했던 상승기조는 일종의 착시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맥락에서 2020년대 이후의 상승기조를 이끌고 나갈 동력들도 이미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준비되고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곳에서 새로운 세대들의 인식과 경험 안에 축적되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기성세대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성찰하기는 고사하고 기득권을 지속시키는 도구로 남용하는 문화가 압도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퍼트넘은 125년 역사를 정리하면서 이런 결론도 남겼다. 평등화, 공동체 가치 인정, 인종과 젠더 평등 추구 등의 사상 문화적 변화는 기존 세대들이 생각을 바꿔서 이뤄졌다기보다는, “나이가 많은 전통주의 세대가 무대에서 사라진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고.

    * <정의로운 경제>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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