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철과 아이들이 어른과 역사를 지켜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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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15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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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를 생각하면 마치 빛 바랜 흑백사진들이 영상처럼 지나간다. 페퍼포그 뒤에 숨어있던 완전무장을 한 로마병정들, 아이들을 잡기 위해 하얀 헬맷을 하고 가죽장갑을 낀 공포의 백골단들이 날뛰던 시절이었다. 다발탄과 지랄탄이 하늘과 땅에서 발광하고 최루탄의 메스꺼운 냄새가 오장육부를 완전히 뒤집어놓던 시절이었다. 이에 맞서 아이들은 돌맹이와 화염병, 장대로 무장했던 시대였다.

    겁없는 아이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인생을 걸다

    당시에 아이들은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아이들이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었고, 또 감옥에 가기 위해 줄을 섰다. 10대 후반, 20대의 아이들이 겁도 없이 조국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인생을 걸고 싸웠다. 감방에서 막 나온 까까머리 아이들은 한 동안 영웅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백발이 성성하던 늙은 정보경찰들의 주고객은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한 마디로 못된 어른들이었다. 아이들을 상대로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혈안이 돼있었다. 자존심은 깡그리 내팽개친 채 정보를 캐내기 위해 아이들에게 밥을 사주면서 “선생님”이란 존칭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미행하고 체포하여 구타하고 강간하고 살인적 고문을 저지르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다. 아이들을 상대로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못된 어른들에게 군부독재정권은 일계급 내지 이계급 특진과 함께 엄청난 금액의 포상을 내렸다.

    오히려 아이들을 상대로 한 잔인한 범죄를 계속해서 부추겼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 하나가 물고문으로 죽었는데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어떻게 언어라는 매개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종철아, 잘 가거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 아들을 잃은 박종철의 아버지가 장례식에서 한 말은 온 국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자식을 잃고 아무런 할말이 없다는 아버지의 심정을 온 국민들은 이해했던 것이다.

    선동가들의 공허한 연설보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장에서 터져 나온 이 한 마디는 온 국민들을 숙연하게 사로잡아 버렸다. 사실 온 국민들도 할 말이 없었다.

       
      ▲ 박종철 열사 49제가 열리던 당시 명동성당
     

    온 국민들도 할 말이 없었던 그때 그 사건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던 전 국민들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종철 열사의 사망소식을 접한 평범한 국민들의 개인적인 저항은 감동의 극치를 이뤘던 부분이었다.

    며칠을 금식했다는 평범한 가정주부들과 시민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교회나 절에서는 열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도회모임을 자발적으로 열었다. 박종철과는 개인적으로 하등의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박종철의 죽음은 평범한 시민들의 잠자던 의식을 일깨웠다. 6월 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종철의 사진을 보는 순간 온 국민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 동안 수 많은 아이들이 죽어갔지만 전두환정권의 언론통제와 왜곡으로 인해 국민들은 그들을 괴물같은 ‘용공분자’로 생각했다.

    당시에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은 "용공분자들은 죽어도 싸다"는 식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국민들 속에 심어왔다. 하지만 이들이 수년 간 들인 공은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갔다. 수년 간 학생들과 민중들을 괴물같은 ‘용공분자’로 각색해왔던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선전은 앳된 모습을 한 박종철의 사진 하나로 깨끗하게 깨져버렸다.

    열사나 투사는 괴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순진무구한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이 최초로 깨달은 것이다. 박종철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어른들을 나서게 만들었다. 더 이상 전두환 군부정권은 어른들과 아이들을 떼놓을 수 없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감싸고 나섰기 때문이다.

    1989년에 6.25전쟁 이래로 최초로 전국적 노동조합조직인 전노협의 전신인 전국회의가 주최한 노동자대회가 서울대에서 있었다. 전노협 출범 2개월 전이었다. 발대식이 끝난 뒤 정문이 전경들에 의해 봉쇄되면서, 노동자들을 지켜준다며 교문 앞에서 각목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던 학생들을 만난 적 있었다.

       
      박종철 열사 20주기추모식은 (구)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앞마당에서 열렸다. ⓒ 진보정치 이치열 기자  
     
       
      열사를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헌화하고 돌아간 (구)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 진보정치 이치열 기자  
     

    늙은 노동자를 지켜주던 어린 학생들

    그때 나는 학생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당시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던 나는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꽤 오랫동안 학생들을 제대로 본 적 없었다. 노동과 술과 세상사에 찌들어 겉늙어버린 노동자들만 만나다 오랜 만에 학생들을 보니 그렇게 어려보일 수 없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노동자들을 지켜준다고 추위에 떨면서 서있던 아이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당시에 가장 원망스러웠던 것은 어른들이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정말로 비겁했고 비굴했다. 지금은 노동자, 농민들의 시위가 일상화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어른들의 시위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겁에 질려 떨었던 어른들은 아이들 뒤에 숨어있었다.

    노동자들이 당해도, 농민들이 당해도, 도시빈민들이 당해도, 감방의 죄수들이 당해도 모두 아이들 몫이었다. 아이들은 어디든지 달려가야 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보호자 노릇을 톡톡히 했던 시대였다.

    당시에 아이들과 함께 민주화를 외쳤던 정치판의 닳아 빠진 어른들도 있었다. 이들이 바라던 민주화 세상이란 권력과 부가 자신들에게 집중되는 세상이었다. ‘군바리’들이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자 열받아서 싸웠다. 이들은 교묘하게도 반인류적인 범죄를 저지른 군부독재의 범죄자들과 거래했다. 군부독재세력이 만든 당에 합류하는가 하면, 뒷거래로 엄청난 돈을 받고 이들을 사면해주기까지 했다.

    당시에 아이들이 바랐던 민주화는 달랐다.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민주화로 생각했다. 심지어는 많은 아이들이 노동자로 농민으로 변신해 험한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아이들은 공장에서 일하다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산재로 목숨을 잃기도 했고 손가락을 잘리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아이들은 어른으로 성장했다. 돈과 권력을 쥔 나쁜 어른들의 영향을 받은 어떤 아이들은 민중들을 착취하는 대열로 합류해 들어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다수 아이들은 여전히 품었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이름 없이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80년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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