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집하는 것과 수집하지 않는 것
    [컬렉터의 서재] 컬렉터의 품격과 가져야 할 덕목
        2022년 04월 28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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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묻곤 한다.

    어떤 것들을 수집하냐고.

    그리고 또 묻는다. 옛날 것 모두가 수집 대상이 되는 것이냐고.

    나는 답한다. 아무거나 수집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옛날 거라고 무조건 수집하지 않는다고.

    마치 산해진미 수많은 음식들이 차려진 뷔페에서도 먹는 음식은 그중 일부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수집은 선별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르고 또 골라야 한다. 처해있는 현실적 제약 때문이다.

    수집에는 일정한 기준과 원칙이 있다. 모든 수집가들은 자신들만의 룰을 정하고 그에 맞추어 컬렉션 생태계를 구축한다. 이번 글은 수집가가 무엇을 수집하는지, 또 무엇을 수집하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다. 수집가들의 취향과 기호가 제각각이니 이 글은 당연히 역사 컬렉터인 나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내가 수집하지 않는 것.

    먼저 내가 수집하지 않는 것들부터 말해 보자. 그것들을 뒤집으면 무엇을 수집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이다.

    첫째. 부피가 큰 것은 수집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가치가 있더라고 큰 것은 피해야 한다. 감당가능한 곳에서 수집하게끔 양보하는 것이 옳다. 수집은 수집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수집과 보관 그리고 활용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보관 혹은 보존 대책 없는 수집은 무책임하고, 활용 계획 없는 수집은 공허하다. 수집과 보관, 활용은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다.

    수집 초기 컬렉터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수집품을 어디다 보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활용 계획은 조금 미룰 수 있는 일이지만, 보관·보존은 수집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처음 수집 세계에 입문할 때는 그 재미에 빠져 다른 것들은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다. 보관 공간 역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몇 개 되지 않는 초라한 수집품 가지고서 그런 문제를 고민하는 건 사치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고, 봄 여름 가을 지나면 추운 겨울이 오는 법. 수집가들은 세월 흘러 어느 순간 수집품들이 점령군처럼 자신의 생활공간 상당 부분을 차지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뿔사! 이미 늦었다.

    수집가는 그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자신과 가족들이 나가든지 수집품들이 나가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과의 갈등으로 수집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수집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상황을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아는 수집가들은 한결같이 생활 공간 이외에 별도의 보관 장소를 가지고 있다. 수장고 혹은 소장고라 할만한 그럴듯한 건물 형태가 어려우면 콘테이너라도 임대한다.

    수집가들 대다수의 꿈은 자신의 수집품으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수집가들은 사람들이 모여 선망과 감탄의 눈으로 자신의 수집품을 감상하고 품평하는 것을 뿌듯해하고 행복해한다. 그러나 박물관 건립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겠는가?

    경기도 고양시에는 중남미문화원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박물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 종교 전시관, 조각공원 등이 어우러진 곳이다. 외교관 출신의 이복형 원장과 그의 아내 홍갑표 이사장이 40년 동안 수집한 중남미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 문화원이 세워진 것은 1995년, 그들의 나이 이미 환갑을 훌쩍 넘겼을 때였다. 자료 수집을 포함하여 부지 조성, 나무 식재 등 문화원 설립 준비에만 꼬박 20년 이상이 걸렸다.

    가서 한번 둘러보면 컬렉터의 꿈이 어떻게 아름답게 구현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대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뜨거운 열정으로 숱한 난관을 극복해낸 결과물이다. 몇 개월 전 이곳을 찾았을 때 이제 구순을 목전에 둔 홍 이사장은 자신의 자서전에 이런 글귀를 적어 주었다. 아직도 그녀는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함께 꿈을 꾸며 함께 행복합시다.”

    [사진] 왼쪽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중남미문화원의 전경, 오른쪽은 박물관 내부 모습이다. 한 수집가의 집념과 의지가 어떻게 아름답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러나 이 중남미문화원 설립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1,000명 중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이야기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수집가들은 결국 박물관 건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말년에 자신이 수집한 물품들을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아니면 눈물을 머금고 싼값으로 처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영민하게 이런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아니 우연히 그렇게 됐다고 하는 편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나의 수집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설명할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니 그 수집품이 애당초 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큰 호박만한 높이 40cm 크기 달항아리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병풍을 펼쳐 놓고 수업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다 보니 손에 들만한 크기의 서류 종류나 호패, 오래된 책들 그런 것들을 모으다 보니 부피 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해결돼 버린 것이다. B4나 A3 크기의 클리어 화일 한 권이면 수집 장의 종이 문서를 거뜬히 보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별도 공간을 마련할 필요 없이 생활 공간 속에 수집품과 같이 공생하는 몇 안 되는 컬렉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너무 비싼 것도 수집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다. 수집가들은 돈이 없다. 곁에서 보면 돈이 많아서 수집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수집을 하느라고 늘 돈이 없다. 그래서 수집가들은 ‘처절’하다. 부산의 수집가 김길성 씨는 언젠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수집가들의 처절함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적절하게 정리한 적이 있다.

    컬렉터란 인생 끝자락이 처절한 사람들입니다. 첫째 물건을 수집하느라 돈을 다 써버려 가진 돈이 없어요. 그래서 처절하고. 둘째, 가족들에게 저 좋은 일만 하는 이기적 인간으로 취급 받아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처절하고. 셋째, 오래 수집에 몰두하다 보면 대개는 전문적 지식과 식견을 갖게 돼요. 그래도 사회적으로는 얼치기 취급을 받거든요. 논문 쓰고 학위 따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학자의 말은 공신력이 있지만 우리 말은 잘 안 믿어주니 그것도 처절하지요. (중앙일보, 2014. 7.18 인터뷰 기사 중)

    대부분의 수집가들은 수집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지 수집품을 팔아 돈을 벌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혹시 주변에 자신의 수집품을 자랑하면서 얼마 얼마를 남발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수집가는 그렇게 떠벌리지 않는다. 컬렉터도 갖춰야 할 품격이 있다. 수집 결과 그것이 어쩌다가 부(富)를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목표로 달려들지는 않는다.

    수집가들은 비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수집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구매 계획과 지출 배분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번 수집하면 이것들은 팔기도 쉽지 않다. 하루에도 수백, 수십만주가 거래되는 주식 시장과 달리 이런 물품을 다루는 경매 시장은 그리 뜨겁지 못하다. 100만원에 수집한 수집품인데, 10만원에도 못팔 수 있다. 수집은 장기적인 보유를 전제로 이뤄진다. 돈이 상당 기간 묶인다는 의미이다. 풍차를 향해 호기롭게 달려가는 돈키호테가 되어서는 안된다. 큰 비용을 지불하고 산 수집품이 정작 나중에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에 팔렸을 때 그 상심은 얼마나 크겠는가? 이런 경험을 초기에 몇 번 겪으면, 그는 수집 세계에 제대로 발도 붙여보지 못한 채 필시 저주의 말과 함께 이 세계를 떠날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한 달에 얼마 정도 범위 내에서 수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만약 수집품이 욕심나서 두 달치 비용을 한 번에 썼다고 하면 그 다음 달 수집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수집을 위해서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 수집은 조금씩 조금씩 모아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 하나 채우는 즐거움이 수집의 진정한 맛이다. 한 번에 누군가의 수집품을 몽땅 사들이는 것은 진정한 수집이라 볼 수 없다. 그것은 그냥 구매일 뿐이다.

    셋째. 가치나 진위가 불분명한 것도 피하려고 노력한다. 수집품이 거래되는 시장에는 위작(僞作)과 가짜가 넘쳐난다. 처음 수집에 입문하는 이들이 반드시 치르게 되는 비싼 수업료도 여기서 발생한다. 특히 도자기류의 상당수는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가짜라고 생각하면 된다. 새로 위조해 만든 물건을 옛날 물건처럼 보이게 하는 신묘한 기술을 그들은 구사한다. 금속에 적절하게 녹을 입히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떤 물건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저건 가짜일 수 있다라는 의심과 함께 검토를 시작해야 한다. 이 세계가 그리 만만한 세계가 아니다. 온라인 경매의 경우 화면상으로 보이는 물품에는 더더욱 가짜가 숨어 있을 공간이 많다.

    내가 겪은 경험담이다. 2015년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의 얼굴이 담긴 제4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가 온라인 경매에 나온 적이 있다. 1960년 4.19 혁명의 원인이 된 3.15 선거 당시 자유당의 포스터였다. 여기에는 “나라 위한 80 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트집마라 건설이다” 이런 구호도 보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경매에 참여하여 꽤 높은 가격으로 낙찰을 받았다. 그런데 실물 받고 나니 뭔가 이상했다. 포스터의 훼손된 부분이 매끈하다. 옛 종이가 찢어졌거나 훼손되면 그 부분에 미세하게나마 요철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뭔가 훼손된 흔적은 분명히 보이는데, 만져보면 매끈하다. 이거 뭐지???

    그렇다. 옛 포스터를 똑같이 인쇄한 것이었다. ‘복제(replica)’라고 하면 똑같이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 포스터의 경우는 복제도 아니고 그냥 프린터한 것에 불과했다. 검색해보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품과 동일한 자료로 그 원본 파일을 다운 받아 인쇄한 것으로 보였다. 컴퓨터 화면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포스터를 근거 자료 삼아 판매자에게 항의했다. 인쇄물을 팔면 어떻게 하느냐고. 판매자는 자신도 수집한 것이라 잘 모르겠다고 발뺌했다. 결국 어찌어찌하여 환불을 받았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 이 수집의 세계이다.

    [사진] 왼쪽은 경매에 나왔던 4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로 원본 포스터를 그대로 인쇄 출력한 것이다. 오른쪽은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의 포스터로 왼쪽 경매 물품의 원본 자료이다. 컴퓨터 화면상으로는 두 자료의 구분이 쉽지 않다.

    그럼 어떻게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까?

    먼저 의심부터 하라. 그리고 자신을 맹신하지 말라. 위조품을 만드는 이들은 당신보다 이 수집 세계에서 더 전문가들이고 교활하다. 당신은 쉬운 사냥감이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를 해야한다. 먼저 털린 다음에 시행착오라 생각하고 공부해도 되겠지만, 그때는 이미 영혼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일 것이다. 그리 되기 전에 하나하나 공부를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혼자가 어려우면 주위에 전문가를 찾아 자문을 구하라. 그들은 그 분야에 오랫동안 공력을 쌓으며 수집한 덕에 나름의 촉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통하면 100%는 아닐지라도 오류를 줄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들은 미지의 수집 세계를 헤매는 당신에게 등대불이 되어 줄 것이다.

    진위 여부 판단과 관련하여 이런 것도 참고할 만하다. 어떤 물품이 마음에 들어 수집한다고 하자. 그런데 진위가 의심된다. 그러면 그 판매자가 어떤 물품들을 판매하는지 같이 둘러보면 도움이 된다. 그가 판매하는 것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출처 불명이고 중국산이 많이 섞여 있으면 이것도 가짜일 가능성이 높고, 그가 다루는 물건이 대체로 신뢰할 만한 것이면 이것도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수집품의 수준은 컬렉터의 수준과 비슷하고, 물품의 수준도 판매자의 수준과 비슷하게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진위를 판정할 능력이 어느 정도 갖춰졌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좋다. 좋은 수집품은 늘 수집가를 기다리고 있다. 간절히 수집하고 싶은 물건은 반드시 나에게 온다. 인연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그러니 성급하게 마음 졸일 필요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차근차근 준비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나 하나!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

    컬렉터가 갖추어야 할 또 다른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 한시(漢詩)는 초보 수집가들에게 좋은 어드바이스가 될 것이다. 퇴계 이황이 64세의 나이로 제자 김취려에게 써 준 ‘자탄(自歎)’이라는 제목의 시다.

    已去光陰吾所惜 當前功力子何傷
    但從一簣爲山日 莫自因循莫太忙

    이미 지난 세월이 나는 안타깝지만, 그대는 이제부터 하면 뭐가 문제인가?
    조금씩 흙을 쌓아 산을 이룰 그날까지 미적대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지도 말게.

    나는 무엇을 수집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수집하고자 하는가? 너무 크거나 무거운 것, 너무 비싼 것, 진위 여부가 애매한 것들을 이미 배제했으니, 이제는 수집할 자료들을 찾아 떠나보자.

    첫째. 그것은 역사적 의미와 스토리를 풍부하게 담고 있어야 한다. 역사 컬렉터는 역사를 수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번잡하고 어려운 방식이 아니라 아주 간명한 내용과 형식으로 역사를 증언하는 자료라면 금상첨화이다. 역사의 스냅샷으로 남아 한 시대를 설명해주는 자료는 그것 자체로 빛난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 그 시대를 만날 수 있다. 일종의 타임머신이다.

    구한말 정미의병 때 의병들에게 납치된 일본어 통역관 조용익을 찾으라는 군수의 훈령, 흥미롭지 않은가?

    한국전쟁 중 남한 청년 권봉출이 북한군에 강제로 끌려간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고향 예천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읽기 전부터 설레지 않는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1일 신탁통치 반대를 이유로 익산군청 산림계 주사 전우경이 미군 도지사에게 제출한 사직서, 일제강점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현지인에게 ‘한국인(Korean) 손기정’이라고 써 준 손기정의 사인지는 또 어떤가?

    1944년 일본군에 징병되어 가면서 아내와 딸에게 남긴 김태봉의 유서는 어떠한가?

    모두 가슴 떨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래서 그 자료들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 이런 자료들은 교과서가 담지 못한 당대의 절절한 이야기를 그 속에 품고 있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다른 사람들에게 대신 들려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둘째. 생활·풍속의 변화,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좋은 수집 대상이다. 하나하나 개별 자료는 잘 담아내지 못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이면 흐름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그래서 몇 개의 자료들만 연속해서 모아도 시대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수집한 자료 중에는 복식 변화를 담고 있는 사진 자료들이 있다. 오래 전 여성들이 특별하게 관광이나 계모임 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때 여성들의 공식적 외출 복장은 무조건 한복이었다. 그 행사 자체가 연례 행사이니만큼 한복은 최고의 예복을 갖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복 사이에 양장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정한 과도기를 지나면 한복은 거의 소멸하고 양장으로 바뀌게 된다. 내 수집 사진들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가 그 과도기다. 이런 사진들을 통해 생활 속에서 한복이 어떻게 밀려나는지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하필 1960년대부터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그 이유까지 규명해 볼 수도 있다.

    [사진] 옛 사진을 통해 해방 이후 여성들의 외출, 모임 복장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박건호 수집 사진)

    2020년 출간한 졸저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에서 한 챕터를 할애해 다룬 ‘태극기가 걸린 결혼식장’ 사진도 그렇다. 결혼식 사진을 여러 장 수집하다 보니 태극기가 걸린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1970년대 사진일 거라는 첫 예상과 달리 그것들의 연대는 주로 1950년대였다. 이것들은 일제 강점기 처음 등장했던 신식 결혼(당시는 ‘사회 결혼’이라고 불림)의 영향이었다. 당시 결혼식장에서는 일장기가 걸렸는데, 이것이 해방 이후 태극기로 교체된 것이다. 이 태극기는 1960년대 이후 점차 결혼식장에서 퇴출되었다. 이 변화의 흐름이 사진 속에 담겨 있고, 나는 수집을 통해 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 학교 졸업 사진이나 수학여행 사진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런 사진들을 보면 남녀학생을 자로 잰 듯이 분리 구별되어 있다. 38선이 지도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풍속과 관습이 그대로 스냅샷처럼 사진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남녀유별 습속은 생각보다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분단선은 점차 흐릿해지고 남녀 학생들은 사진 속에서 조금씩 섞이기 시작한다. 역사 교과서에서 직접 다루는 주제는 아니지만, 이런 풍습의 변화를 수집품 속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큰 것이다.

    셋째, 벼락같이 ‘발굴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자료들이다. 사실 역사 자료 수집의 진정한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무심코 지나칠 뻔한 물건이었는데, 알고 보니 중요한 자료. 뜻하지 않게 발견된 이러한 자료들은 마치 보물을 찾은 탐험가가 느낄 만한 짜릿함을 선물한다. 2001년 장 피에르 쥬네 감독의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Amelie)]에서 아밀리에가 ‘보물 상자’를 발견했을 때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자만이 지금 아멜리에의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40년 전 한 소년이 숨겨놓은 보물 상자였다. 8월 31일 새벽 4시에 아멜리에는 굳은 결심을 했다. 상자의 주인이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 보물 상자를 돌려주리라. 만약 그가 감동한다면 평생을 좋은 일만 하며 살리라. (영화 [아밀리에] 중에서)

    영화 속 장난기 넘치는 처녀 아멜리에는 집에서 뜻밖의 물건을 발견한다. 바로 누군가의 오랜 추억이 담긴 ‘보물 상자’. 그녀는 주인을 찾아 상자를 돌려주기로 결심한다. 오래된, 어쩌면 잊혔을 수도 있는 물건을 찾아줬을 때 주인의 반응이 궁금했던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에 상자를 놓고 주인이 그곳에 오게끔 유도한다.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는 상자를 찾고 기쁨에 오열하는 주인의 모습을 보게 되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과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그 일을 계기로 주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시작한다. 우연히 발견한 보물 상자 하나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던 아밀리에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뜻하지 않게 소중한 물건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호기심은 아밀리에가 느꼈던 것만큼이나 수집가를 흥분시킨다. 탐정과 같은 진정되지 않는 호기심이 수집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보물 상자를 발견한 아밀리에가 그것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행복감을 느꼈던 것처럼 나도 우연히 수집한 중요한 역사 자료를 다른 방식으로 주인에게 돌려주리라 마음먹는다. 즉 그 자료에 담긴 소중한 이야기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재구성해서 이 세상에 들려주리라 다짐하게 된디. 기쁨은 기쁨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맺힌 것은 해원의 염원을 담아 그렇게 ‘보물 상자’를 남긴 옛 사람과 그가 속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소중한 역사 자료를 발굴한 일은 종종 있었는데, 그중 오래 전 수집한 사진 하나가 떠오른다. 15년 전이던가 언젠가 경매 사이트에 허름한 옛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낡은 액자에 들어있는 상태인데 누군가가 태극기를 배경으로 연설하는 장면이다. 그는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30∼40대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뒤에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반대하자”는 구호도 적혀 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런데 연설하는 이 남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누굴까..누굴까…

    혹시 (김)무정 장군?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했던 전설의 독립운동가, 대장정에 참여했던 몇 안되는 한국인! 일제 강점기 김원봉, 김일성과 함께 무장독립군의 ‘3김 장군’으로 불린 인물! 연안파의 핵심으로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와 한국전쟁 때 인민군 2군단장으로 활동했다가 이후 숙청된 인물!

    무정의 사진이라고 판단한 나는 이 사진을 액자와 함께 헐값에 낙찰받았다. 나중에 물건을 직접 보니 상태는 리프린트된 것이 아니라 실제 당시 사진이 분명했다. 사진이 담긴 액자도 오래된 것이라 족히 몇십 년은 된 듯했다. 게다가 이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사진이었다.

    [사진] 왼쪽은 역사컬렉터가 우연히 수집한 사진으로 1940년대 무정이 연설하는 장면이다. 오른쪽은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무정 장군의 모습이다. 동일한 인물이다.

    전설의 독립운동가의 사진 원본을 발굴하다니!

    사진 속 인물이 얼굴이 닮았다는 점 말고, 무정 장군임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부분이 있었다. 사진을 확대하여 꼼꼼히 살핀 결과이다. 이 사진 속 인물이 연설하는 책상 앞에 식순을 쓴 종이가 붙어있는데, 8번째 순서로 ‘무정동무 강화(講話)’라고 쓴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사진이 어떻게 흘러 흘러 경매에 나오게 되었을까? 액자도 꽤 낡았는데 누가 소장했던 것일까? 게다가 무정 장군은 남한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고향도 북쪽이라 친척도 남한에 거의 없을 것인데, 이상한 일이다. 혹시 숙청당한 무정의 가족이나 친척이 가지고 있던 것일까? 중국 조선족 동포 누군가가 이걸 들여와서 판 것일까? 그러기에는 가격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경위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이 사진을 처음 발굴했다는 점만은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이 사진에는 지금 태극기와는 다른 형태로 4괘가 그려진 태극기가 걸려있고 이를 배경으로 무정이 연설하고 있다. 뒤에는 “조선학생에 대한 일본의 노(예)화 교육, 소위 [황국신민화 교육]을 반대하자”고 크게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왼쪽에는 ‘0000 청년 단결 만세’라는 글귀도 보인다. 내 추측으로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무슨 행사 같아 보인다. 찾아보니 중국 교포 학자가 쓴 어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41년 1월 10일, 태항산 항일근거지의 진동남팔로군전선 총사령부 소재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1차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회장으로 당선된 무정동지는 화북조선쳥년련합회 행동강령과 과업을 진술하면서 간부양성과 조선혁명단체의 통일, 화북 20만 조선동포들은 항일투쟁에로 뭉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마 이 대회에서 무정이 연설하는 장면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 사진은 몇 년 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매도하여 내 손을 떠났다. 가끔 살다보면 이렇게 ‘로또’ 맞는 일이 가끔 있다. 이렇게 우연히 대단한 자료를 만나는 경험들, 그 속에서 느끼는 흥분과 감동이야말로 수집의 진정한 맛이다. 이것이 수집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이유이자 원동력이다.

    넷째. 프라퍼갠더(propaganda)를 통해 사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자료들도 수집 대상이다. 내가 ‘거짓의 증거’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다. 이런 거짓의 증거들과 함께 그것들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들도 함께 수집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진실을 남기고 증언하고자 하는 컬렉터의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기록이든 음성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그런데 이렇게 남겨진 자료들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역사 컬렉터가 갖추어야 할 자격 중 하나가 이런 자료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사회적 기억을 바탕으로 역사는 쓰이지만 늘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기록조차 제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자료 비판, 자료 분석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을 그 당대의 사람이 아니라면 또 그 전후의 맥락 속에서 설명하지 않으면 놓치게 될 내용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다 놓치고 건너뛰어 버리면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힘세고 목소리 큰 자들의 기록만 진실인 양 행세하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의 올바른 증거나 증언이 될 만한 자료들을 영원히 같이 남겨둬야 한다. 명백히 거짓을 담고 있으면서도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거짓의 증거’들은 훗날을 위해 두고두고 수집하고 보존해야 한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조선일보]가 전두환에 대한 찬양 기사를 실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 신문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왕을 찬양하는 기사도 숱하게 실었다. [동아일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일제 강점기 말기, 특히 중일 전쟁 이후의 신문들은 좋은 수집 대상이 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늘 자랑스럽게 말해 왔다. 자신들은 1940년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폐간된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항일 민족지임을 반증할 수 있다고.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중일전쟁 이후 급격히 친일화한 이 신문들은 더 이상 비판적 언론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총독부 입장에서는 전시 물자도 부족한 그 시국에 동일한 논조의 신문이 여럿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1940년 두 신문은 자진 폐간 방식으로 얼마간의 돈을 받고 폐간한 것이다.

    이런 폐간 과정을 조금만 살펴도 이것은 친일의 증거가 될 뿐, 항일의 증거라고 자랑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그 시기의 언론 활동에 대해 사과할 요량이 아니라면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일제 강점기 언론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 정도 친일은 불가피했다고 현실적 이유를 들어 이해하고 편들어 주는 사람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항일 언론으로 일제와 맞서다가 강제 폐간됐다고 선전하는 것은 후안무치이며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이런 이유로 일제 강점기 말기 그들의 친일 언론 활동의 증거들을 수집해두는 것은 그들의 거짓 주장에 맞서 ‘역사의 진실’을 남긴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얼마 전 끝난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송한 선거 홍보자료가 집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전직 검찰총장 출신의 야당 대통령 후보의 홍보 팜플렛도 있었다. 뭐라고 썼나 몇 페이지를 넘겼더니, 사실을 왜곡하는 내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저는 사람을 위해 충성하지 않습니다. 국민을 위해 충성합니다.”

    인용부호까지 해서 후보가 실제 한 말인 것처럼 홍보 책자에 담았다.

    “저는 사람을 위해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저 표현은 전직 검찰총장 윤석열을 권력에 맞서 싸우는 ‘강골검사’ 이미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표현이다. 여기에서 그에 대한 거짓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벌써 서점에는 전직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 당선인을 다룬 아동 위인전까지 출간되어 팔리기 시작했다. 책 제목은 “원칙과 소신의 대통령 윤석열”이다. 그 중 한 챕터 제목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이다. ‘강골검사 윤석렬’이라는 챕터도 있다.

    “저는 사람을 위해 충성하지 않습니다.” 저 말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에서 배제된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이 2013년 10월 21일 국회 법사위원회 서울고검 국정감사에서 한 말이다. 당시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과 대화를 주고받다가 그것도 정갑윤 의원의 말을 되받아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그래서 정갑윤은 저 말의 저작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정갑윤: (…..) 이런 대한민국 검찰 조직을 믿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사는지 걱정됩니다. 하다못해 세간에 조폭보다 못한 조직으로, 이것이 무슨 꼴이냐. 증인은 혹시 조직을 사랑합니까?

    윤석열: 네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정갑윤: 사랑합니까?

    윤석열: 네.

    정갑윤: 혹시 사람에 충성하는 건 아니예요?

    윤석열: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의 말은 정리하면 이랬다.

    “저는 (검찰) 조직을 대단히 사랑합니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말을 조금 바꾸면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검찰) 조직에 충성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철저하게 ‘검찰주의자’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실제 검찰총장이 된 이후 그가 보인 행보도 그러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 조직을 총동원해 저항했다. 어차피 대통령은 5년 임기의 한시적 권력에 불과할 뿐이지만, 검찰 권력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개혁의 총대를 맸던 법무부 장관 조국 가족의 삶은 철저하게 난도질 당하고 유린되었다.

    [사진] 왼쪽은 지난 20대 대선 당시 국민의힘 선거 홍보 책자의 일부 내용이다. 거짓의 증거이다. 오른쪽 위는 방송에서 유시민 작가가 실제 발언 내용을 사실에 부합되게 설명하는 장면이고, 오른쪽 아래는 한 시민이 윤석열의 발언을 사실과 다르게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시민은 ‘국민에게 충성’ 정도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게 충성’을 말했다고 그 왜곡을 한 단계 더 확장시키고 있다. ‘검찰 조직’이 ‘국민’이 되었다가, ‘국가’와 ‘민족’으로 진화하는 장면이다. 거짓 신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저는 사람을 위해 충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조직에 충성할 뿐입니다.”

    이 말은 평생 검사로 살아왔던 그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한 섬뜩한 표현이었다. 이렇게 말한 것을 선거 홍보물은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왜곡했다.

    “저는 사람을 위해 충성하지 않습니다. 국민을 위해 충성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인용부호까지 써가며 국민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것처럼 표현한 것은 명백한 조작이다. 얼핏 보면 비슷한 말 같지만, 따져보면 그 의미는 천양지차다. 검찰 편의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사하고, 선택적으로 기소하고, 선택적인 공정을 실천해 온 그와 그 조직이 정말 국민에 대한 충성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검찰 조직 이기주의를 표현한 것이 어떻게 국민에 대한 충성으로 둔갑할 수 있는가?

    검찰 기득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어떻게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일 수 있는가?

    나는 이 선거 홍보물을 수집 대상에 포함시켰다. 나중에 사실을 왜곡한 자료로 수집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을 지키려고, 검찰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한 검찰주의자를 국민을 위해 싸운 어벤져스 영웅으로 둔갑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평가하고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의 비애, 그래서 겸손하라!

    컬렉터가 관심 있게 수집하는 대상 마지막 다섯 번째는 ‘역사의 오류’를 담고 있는 자료들이다. 크게 보면 위의 네 번째 이야기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다.

    먼저 화폐 이야기를 가지고 비유를 해보자. 화폐 수집가들은 ‘에러 화폐’ 수집에 많은 돈을 지불한다. 희귀하기 때문이다. 제작 과정 중에 문제로 인해서 잘못 만들어진 화폐를 ‘에러 화폐’라고 하는데, 옆으로 돌렸을 때 앞면과 뒷면이 180도 반대로 되어 있는 회전에러 화폐를 포함하여, 중심점이 맞지 않는 동전, 한 개의 주화가 이중 삼중 여러 번 압인된 경우, 화폐 측면의 홈 파임이 잘못된 경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런 에러 화폐 중 희귀한 것은 매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 미국 달러 중 델몬트 상표가 우연히 들어간 20달러 지폐는 최근 헤리티지 옥션에서 12만 5천달러(한화 약 1억 4천만원 정도)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사진] 일명 ‘델몬트 노트’로 불리는 이 에러 화폐는 최근 경매에서 12만 5천 달러 이상으로 거래되었다. 액면가 20달러의 6,000배가 넘는 가격이다.

    이런 에러 화폐를 들어 비유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이처럼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역사의 오류’를 담고 있는 자료들이다.

    역사의 오류?

    수집을 하다 보면 인간의 불완전한 미래 예측 능력을 보여주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자료들을 보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절감할 수 있다.

    나는 수집을 통해 인간의 미래 예측이 얼마나 빈번하게 빗나가는지를 볼 수 있었다. 거꾸로 그런 실수가 미약한 인간의 의지나 계획을 한순간에 뒤엎어버리는 역사와 시간의 도도한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자료들 중에는 이런 것들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정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역사를 잘못 증언하게 된 사례 말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이 자료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구체적으로 몇 개의 예를 살펴보고 글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먼저. 한국전쟁과 관련된 자료 2점인데 하나는 지도이고, 하나는 우표이다. 전쟁 중 발행된 지도나 우표들 중에는 역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역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들이 꽤 있다. 당시 전쟁 상황이 워낙 가변적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내가 수집한 지도부터 보자.

    [최신조선형세지도]라는 제목의 이 지도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한 것이다. 발행일은 1950년 7월 28일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이 갓 지난 시기였다. 당시 북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진를 거듭하다가 낙동강을 사이에 둔 채 국군 및 유엔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제 북한에 의한 통일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지도에는 한반도 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하나의 국명과 하나의 국기(인공기)만 표시하고 있다. 지도상에서 대한민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지도에서는 수도(首都)를 평양으로 표시하고 있다. 서울은 그냥 주요 도시로 표시했을 뿐이다. ‘남조선을 해방시켰다’는 기쁨이 그렇게 컸던 것일까? 이 열기는 북한 헌법마저 무력화시키고 있다. 1948년 제정된 북한 헌법 제10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고 규정했고, 이는 1972년 헌법이 개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 지도는 ‘上海新文化書社’ 출판, ‘通聯書店’ 발행으로 적혀 있는데, 중국의 정부기관과 관련있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민간에서 만든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북한이 이런 지도 제작에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지도에는 당시 북한과 사회주의 동지국이었던 중국이 당시 느꼈던 ‘사회주의 승리’의 감격이 반영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하여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서둘러 이런 지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서둘렀기 때문이었을까? 내지의 큰 지도 왼쪽 ‘工業及農産圖’라는 작은 첨부 지도에서는 남북을 아우르는 국명을 ‘朝鮮民主主義人民和共國’이라고 적어 놓았다. ‘공화국’을 ‘화공국’으로 잘못 적은 것이다.

    그들은 알았을까? 그로부터 고작 2개월 뒤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수복 그리고 10월 1일 38선 돌파로 이어지는 전세의 역전을! 결국 이 지도가 말해주는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라는 역사는 실제 일어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지도는 결과적으로 제대로 된 역사를 증언할 수 없게 되었고, ‘역사의 오류’로 남게 된 것이다.

    전쟁 중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국토통일 기념우표’는 이와 반대되는 자료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초 38선을 돌파해 북한의 수도였던 평양을 점령하고 드디어 10월 26일 압록강에 도달하였다. 북진 멸공통일을 신념으로 삼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남한에 의한 북진통일 완수를 ‘확신’하였다. 단기 4283년(1950년) 11월 10일 발행된 세 종의 우표는 백두산 천지에 태극기가 나부끼는 그림, 한반도를 가운데 두고 태극기와 유엔기가 좌우에 있는 그림,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가운데 들어간 그림으로 되어있다.

    당시 이 우표를 발행한 체신부 안내문에는 “이 우표는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국토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하였다”고 씀으로써 남한 정부에 의한 북진통일을 기정사실화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리고 말았다. 북진통일 완수는 그들의 신념이었지 역사는 되지 못하였다. 이 우표가 발행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9일 밤, 중국군이 ‘지원군’이란 이름으로 몰래 한반도 북쪽으로 진입하고 있었고(중국군의 공식적인 참전일은 10월 25), 한반도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남쪽 정부는 이런 전쟁 상황에 대해 그만큼 오판하고 있었고,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것처럼,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1953년 7월 남과 북은 서로 큰 상처만 남긴 채 휴전에 돌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쟁 당시 양측은 모두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모두 승리감에 도취된 채 김치국부터 마셨던 것이다. 북한에 의한 남북통일을 기정사실화한 지도 1점과 남한이 발행한 국토통일 기념 우표는 이런 ‘역사의 에러’를 담고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다.

    [사진] 왼쪽 지도는 조선형세지도의 표지와 펼쳤을 때의 지도 모습이다. 북한에 의한 남북통일을 기성사실화해서 제작하였다. 수도는 평양으로 표시했다. 오른쪽 3장의 우표는 대한민국 정부가 남북통일을 기념하여 1950년 11월 제작한 우표이다. (박건호 소장)

    또 하나 예로 들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하는 기념 우표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10월 8일부터 10월 25일까지 서남아시아의 버마, 인도, 스리랑카 등 3개국의 대통령과 호주 총독 및 뉴질랜드 수상의 초청을 받고 이들 5개국을 차례로 공식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당시 체신부는 10월 8일 총 5종의 기념 우표를 발행하였다. 이들 우표 각각의 디자인은 왼쪽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방문국의 정상, 즉 버마의 우산유 대통령, 인도의 간디 수상, 스리랑카의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이 있는 것도 있고, 호주나 뉴질랜드의 경우에는 정상의 얼굴 대신 양국 국기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우표들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역사를 잘못 증언하고 말았다. 일종의 ‘에러 우표’이다.

    왜인가? 바로 첫 방문국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10월 9일 예상치 못한 큰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 사건!

    북한의 소행으로 알려진 이 참사로 당시 대통령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17명이 순직하고 15명이 부상하였다. 과장하자면 대한민국 정부의 내각 절반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대통령은 몇 분 뒤에 도착하여 가까스로 화를 면했지만, 이후 남은 모든 순방 계획을 취소, 급거 귀국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 발행된 5종의 우표 중 버마 방문 기념 우표만 제대로 된 역사를 반영할 뿐, 나머지 4종의 우표는 일어나지도 않은 거짓 역사를 증언하는 우표가 되고 만 것이다. 4종의 우표는 직후 판매 중지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2005년도에도 있었다. 2005년 2월 우정사업본부는 황우석 교수의 획기적 연구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 배양 성공‘ 특별 기념 우표를 발행하였다. 휠체어를 탄 남성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다 마침내 두 발로 서서 휠체어를 버리고, 앞에 서 있는 여성에게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다. 그런데 소위 ‘황우석 파문’이 일면서 ‘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을 기념해 만든 특별우표가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우정사업본부는 황 교수의 논문이 허위로 판명나더라도 이미 발행한 특별우표를 취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전쟁 때 국토통일 기념 우표처럼, 전두환 정부 때 동남아 5개국 순방 기념 우표처럼, 이 ‘황우석 우표’도 한국 우표 역사에서 길이 남을 ‘역사’가 되고 만 것이다.

    [사진]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등 5개국 순방을 기념하여 발행한 우표들이다. 그러나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사건으로 오른쪽 4종의 우표들은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아래는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배양 성공 특별우표’이다. 이 우표가 나온 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이 밝혀지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이 우표도 우리나라 우표 중 역사의 오류가 담긴 몇 안되는 우표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 예는 2017년 달력이다. 2017년도 달력의 마지막 장인 12월 달력의 ‘20일’에 빨간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라고 적혀 있다. 대통령 선거를 위한 임시 공휴일로 예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일, 즉 공휴일이 되지 못했다. 2016년 10월 말부터 시작된 ‘촛불항쟁’과 그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파면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제 19대 대선은 따뜻한 봄날인 5월 9일 실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제 저 달력 자체가 역사적 유물이 되고 말았다. ‘촛불항쟁’과 대통령 탄핵·파면의 격동의 역사를 저 달력은 조용히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가정을 해보자.

    몇 백 년이 지난 후 누군가가 저 달력을 낡은 문서 더미 속에서 발견했다면, 그리고 12월 20일에 붉은색으로 대선을 표시한 저 달력을 본다면 그는 2017년 대선이 5월에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과연 금방 알아챌 수 있을까? 달력이 거짓말을 할 거라는 생각을 못하고 그는 19대 대선이 2017년 12월 20일에 치러졌다고 기억할 것이다. 2017년 5월 9일 19대 대선이 치러졌다는 것은 그가 팩트체크를 거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2017년 달력이 흥미롭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컬렉터로서 나는 2017년 국민 주권의 실현을 온몸으로 외쳤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고 미래에 증언할 2017년 달력을 조심스레 말아서 내 컬렉션에 포함시킨 것이다.

    [사진] 내가 수집한 2017년 달력이다. 12월 20일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해 대선은 5월에 실시되었다. ‘촛불항쟁’(오른쪽사진)의 결과였다.

    위에서 언급한 서너 가지 예들을 통해 사람들이 그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개인도 그렇고 국가나 사회도 똑같다. 우리는 2019년 가을까지만 해도 앞으로 몇 년간 코로나바이러스로 마스크가 일상인 삶을 살아갈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게 인생과 역사의 묘미라는 생각도 든다. 예측한 대로만 일들이 일어난다면 삶이, 역사가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겠는가? 개성이 충만한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그들이 만드는 사회가 다채롭듯이, 변화무상한 사건들이 교차하고 가변적이고 다이내믹한 사건들이 좌충우돌하며 만드는 역사는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예측 불가능한 미래,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자료 속에서 만나며 시간 앞에서 역사 앞에서 늘 겸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인간!

    이것은 컬렉터가 갖추어야 할 또 다른 덕목인 것이다.

    그런데 겸손함이 비단 컬렉터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일까?

    그렇지 않다. 모두가 겸손해져야 한다. 특히 권력을 잡은 자는 더더욱 그렇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영원할 것 같아도 금방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맞아 꺾이고 붕괴되는 것이 역사이다.

    0.73% 차로 대선을 겨우 이기고도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행세하는 새 대통령과 그의 정부도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 자신이 평생 걸어 온 길이 오로지 정의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 기준으로 국민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는 더더욱 없다. 대한민국의 정의, 공정, 상식을 특정인들이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거라고 예측한 일들이 때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결국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인간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권력은 도도한 민심의 바다에 떠 있는 배에 불과하다. 그 배를 띄우는 것도 시민들이지만, 그 배를 뒤집는 것 역시 시민들이다.

    * <컬렉터의 서재>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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