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너는 나의 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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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2월 05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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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주 영화감독
 

그저 그냥 조용히 탈당계만을 제출하면 될 일일지 모른다. 사실 무척이나 명백한 결과가 아니던가.

비상대책위원회는 혁신안을 제출하였고 임시 당대회에서 그 혁신안은 부결되었다.

그 혁신안이 원안 그대로 통과되기를 갈망했던 당원의 입장에서 결정 할 수 있는 다음 행보는 지극히 단순하다.

더 이상 당의 결정을 지지할 수 없다면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 당의 결정을 현저하게 위배하고 싶어진다면 징계받기 전에 탈당할 일이고, 미련이 남으면 궁시렁거리며 비빌 언덕을 찾으면 될 일이다.

2월 3일. 난 탈당계를 다운받은 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담담했다. 심지어 ‘이젠 선거 시기만 되면 급작스레 다정하게 전화를 거는 당직자의 목소리-나를 뻘쭘하게 만드는-를 안 들어도 되니 좋지 아니한가’라는 기분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나의 심장을 터지게 만들었던 그때

그런데, 사인을 해야 하는 그 순간, 내 심장과 머리는 순식간에 2002년의 대통령 선거로, 혹은 1992년의 대통령 선거 때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 아마 나의 붉은 심장을 터질듯 벌렁거리게 만들었던 그 기억들이 바로 지금 나를 촌스럽게 "나 탈당했습니다"라고 소문내며 글을 쓰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먼저 나의 게으름과 무관심에 대해 반성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것 같다. 나는 지난 대선 시기 당 후보를 결정하는 선거에서 공개적인 글까지 써가며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누가 흥행에 연달아 실패한 영화감독 아니랄까봐 무협지의 한 구절을 흉내 내며 지방의 토굴방 같은 곳에서 시나리오를 쓰다가 자괴감 가득한 상태로 서울로 돌아와 비참한 꿈만 꾸면서 뒤척이던 이른 아침에 난 권영길 후보의 전화를 받았다.

‘무엇인가 당을 위해 세상을 위해 할 게 있구나’라는 마음에 신나하며 지지를 약속하고 심지어 바로 글도 쓰고 자신만만하게 당 홈페이지와 이곳 저곳의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나는 엄청 당황했었다.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권 후보를 감히 지키고 싶어졌다. 그리고 대선. 나의 민주노동당은, 나의 권영길은 민중을 배신했다. 혹자는 민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말하지만 난 진심으로 우린 외면당한 것이 아니라 배신했다고 말하고 싶다.

외면당한 것이 아니라 배신한 것

우린 목이 터져라 민생 문제를 얘기하고, 경제 민주주의를 외쳐야 했다. 그 어떤 후보보다 명백하게 한미 FTA에 대해 과학적인 문제제기와 대안을 이야기해야 했다. 당신이 주식 몇 장 가지고 있어봤자, 땅 몇 평 가지고 있어 봤자, 일터에서 성실하게 노동해봤자 분배의 민주주의가 확보되지 못한다면 불행해질 뿐이라고 심장으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민노당은 정동영의 뒷북이거나 FTA에 대해서는 미국산 광우병 소밖에 모르는 철부지처럼 굴었다. 코리아연방제에 대해 민중들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며,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함께 걸어갈 것이라고 약속한 너의 약속은 거짓이었고, 넌 우리를 배신했다고 판정했다.

권영길 의원이 민주노동당 후보가 된 것에 대해, 그로 인해 자주파가 원하는 그 방식 그대로 대선이 디자인된 것에 대해, 그에 조금이라도 일조한 당사자로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 그 모든 것은 나의 게으름과 무관심. 바꿔 말하면 ‘후천성 평당원 의식 결핍증’이다.

(급작스런 궁금증 하나. 왜 주사파라고 말하면 그분들은 기분 나빠할까요? 난 누가 나보고 좌익이라고 하면 기분 하나 안 나빠하며 방실방실 긍정을 하곤 하는데. 그분들. 의외로 당당함이 없는 거 아닌가? 종북주의도 굳이 따지자면 사상 아닙니까! 왜 스스로의 사상을 부끄러워하시며 숨기시나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이제 당도 완전 접수 하셨는데)

따지고 보면 나는 투철한 사상과 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다. 가끔씩 들어와 보는 <레디앙>에서 사상투쟁을 하는 몇몇 논객들의 글을 읽으면 옆에 사전이라도 하나 필요할 정도로 부족한 게 많다. 대학 시절에도 누구보다 겁이 많았고(신체의 크기와 용기는 비례하지 않는다) 과학보다는 감성으로 세상을 읽는 편이었다.

8년 동안의 지지에 대한 사랑과 예의

영화 일을 시작하면서, 1992년 백기완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홍보 비디오를 만들게 되면서 좋은 선후배를 많이 만나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시기 울산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투쟁사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만들며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아주 느리게 조금씩 나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심지어 마흔이 지나서도 여전히 만들어가고 공부를 하고 있는 거북이의 사촌 같은 나는 대선을 지나오면서도 단 한 번도 탈당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실패는 그저 미래를 바라보는 망원경이라고 믿었고, 지난 8년간 민주노동당이기에 눈물을 멈출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나는 진보의 힘을 믿고 있었고 당이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당과 분당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음에도 내 8년 간의 지지와 사랑에 예의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비상대책위원회와 심상정 의원의 활동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이유였다.

그러나 친구들! 나는 이제 도저히 이번 당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도, 외면할 자신도 없어졌다. 당헌과 당규를 어긴 당원을 제재조차 할 수 없는 당. 국가보안법을 핑계로 자신의 잘못을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버리는 대의원들. 도대체 2008년 바로 지금 민주노동당이 왜 지지를 받지 못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당직자들. 그들과 같은 전선에서 웃을 자신이 없다.

친구들, 이번에 도저히 안되겠어

   
  ▲변영주 감독작품 ‘발레교습소’ 포스터.
 

고작 영화감독 따위에게도 세상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과 명예는 있단 말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봉건적인 폭압과 학정에 지쳐 있을 북쪽의 친구들에게 진보주의자로서 부끄럽지는 않고 싶단 말이다.

그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20년 전, 에이즈의 주범이 미군이라며 이성을 잃은 벌건 눈 크게 뜨며 외치던 자주파, 당신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때부터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당신들도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우기기에 나는 믿었다. 

그래서 언제나 노란 손수건 휘날리며 우리를 ‘한나라당 이중대’라고 망언을 서슴치 않았던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할 때, 난 의아했지만 진보라는 단어를 믿었고 민주노동당이라는 우리 당의 명예를 믿었다.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했다. 세상도 변하고 의식도 변한다고 믿으면서 당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한 거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나의 당이 아니다. 그것이 이번 당 대회의 결정이었다. 승복한다. 그래서 이제 떠나려고 한다.

진보란 언제나 고민하고 공부하고 반성하고 당대의 흐름에 대해 예의를 다해 관찰하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삶의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감히 주제넘게 말해본다. 민주노동당은 이제 당신들의 것이지만 당신들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다만, 그냥 탈당계만 내면 될 일을 굳이 이렇게 구절구절 잘 쓰지도 못하는 긴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하고 싶다. 지금 탈당계를 다운받고 고민하거나 좌절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친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자. 8년 전, 우리는 지금보다도 ‘심하게’ 어려웠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실수도 했으며, 오류도 범했으며, 좌절도 했다. 우리는 여전히 나약하고 여전히 바보짓도 하겠지만,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어떤 것들이 부족한지 서로 얼굴 맞대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다보면 바로 알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러니 친구들. 다시 시작하자. 걱정도 하지말고 지치지도 말고 더더욱 냉소적이지 말자. 어떻게 다시 시작할지 어디서 손을 잡을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으며 이야기하자.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 아깝긴 하지만 더 좋은 이름 만들 수 있을게다.

앞으로 몇 년. 우린 국회의원 하나 없는 상태로 예전처럼 뼈빠지게 고생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뭐! 어떠냔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바로 지금. 겁날 게 뭐가 있단 말이냐.

안 그렇습니까, 친구들! 그리고, 진심으로 이제 다시는 게으르거나 무관심한 당원 따위는 되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고민하고 긴장하는 괜찮은 평당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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