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매한 미래, 모호한 구상, 잼없는 토론
        2007년 01월 15일 01: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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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이 왔고, 참 재미 없는 토론이었다. 지난 1월 12일 열린 <한국사회의 창조적 미래를 위한 구상 시국 대토론회>에 모인 청객은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너른 강당을 가득 메웠고, 서른 명은 넘음직한 카메라 기자와 일곱 대나 되는 TV 카메라가 몰려 들었다.

    그런데 그 카메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선주자 문국현 사장 그림’을 잡은 후 썰물 빠지듯 사라졌고, 아홉 명이나 되는 약정 토론자 중 태반이 ‘미래구상’의 발표와는 별 무관한 덕담을 네 시간 가까이 되풀이했다.

       
      ▲ 지난 12일 열린 <한국사회의 창조적 미래를 위한 구상 시국 대토론회>
     

    이 토론회에서 발표를 맡은 정대화(상지대 교수)는 “진보개혁세력의 단일후보로서 국민후보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대화 교수 주장의 요지는 이러하다.

    “사회적 양극화, 한반도 위기, 진보개혁세력 전체가 불신받는 상황, 지역주의 구조화, 정치적 보수화 등을 보아할 때 한국사회는 위기다.

    그런데 기존 정치세력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 열린우리당은 정책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대안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국가경영적 관점을 가지지 못하고 문제제기식 사회운동에 머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미래의 소중한 자원이되 현실적 대안세력은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운동이 대안이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운동은 ‘정치’가 아니다. ‘정당’도 아니고, ‘정치세력화’도 아니다. ‘시민운동’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상상력의 운동’이다.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을 형성해야 하며, 그 주체는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시민이다. 새로운 정치운동은 낡은 이념적 잣대를 뛰어넘는 합리적 신진보세력이다. 새로운 정치운동의 목표는 진보개혁세력의 연대와 연합을 통해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인데, 후보가 아니라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선(先)정책 후(後)후보 전략에 입각하여, 진보개혁진영의 반수구 단일후보를 추진할 것이다.”

    ‘미래구상’에 관련된 요즘의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아도 ‘뭔가 하려나 보다’는 것 이상의 정보를 얻기 어려워, 그 주체들을 만나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고, 토요일 토론회는 그 모호함을 공개한 자리였다. 물론 신문지상에 몇몇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지만, 그 이름들은 ‘미래구상’ 이전에도 소설 수준에서 거론되던 것이었고, 올 가을까지는 끊임없이 되풀이될 정치상품이다.

    ‘미래구상 제안자 97인’에 속한 토론자들의 의견도 정대화 교수의 발표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나간채(전남대 교수, 제안자)는 “지나온 정부에서 개혁정책들이 여러 번 좌절을 겪었다고 해서, 그리고 그 추진방식이 미흡했고, 개혁피로감이 누적되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멋진 드라마를 연출해냈지만, 그 후의 흥행에서 실패한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면서, 다가오는 대선에서도 더 아름다운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문구대로라면 ‘미래구상’은 ‘돌아온 노무현’이다.

    임동규(부산YMCA 사무총장, 제안자)는 “반한나라당 전선 구축을 위한 조직이라든지, 열린우리당과 통합한다는 이미지는 향후 조직에 대한 신선감을 못주게 되고 뻔한 얘기가 되면서 부정적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고 토론하면서, 정대화 교수와는 달리 이 운동을 ‘시민사회단체의 정치세력화’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임진택(민예총 부회장, 제안자)은 “진보 보수 혹은 좌우의 분별에 바탕하여 나아가는 것이 과연 정확한 분석이며, 효용성 있는 판단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중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관심과 교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대화의 ‘진보개혁세력’이라는 틀거리 자체를 부정하는 듯이 들리는 언급이었다.

       
      ▲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이 날 토론회에서 카메라 플래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대선주자로 많이 거론되는 문국현(유한킴벌리 사장)이었는데, 그는 “정치를 잘 모르고 관심 없다”고 말하며, 「사람 중심 나라 발전 모델」이라는 나름의 경제론을 폈다. ‘미래구상’의 미래는 과히 먼 시점이 아닌 듯 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집권 1년 만에 실업률을 낮추고 무역흑자를 늘렸다. 이런 외국 사례, 정부개혁과 사회적 대타협에 대한 검토를 더 해야 한다. 잭 웰치, 엘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한국 경제 위기 진단과 그 대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재벌의 수출 중심 체제를 중소기업의 고용 중심 체제로 바꾸어야 하고, 장시간 노동을 평생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 독일이나 영국처럼 일을 안 하는 사회가 되면 곤란하지만, 미국 일본처럼 일과 휴식, 교육이 공존하는 사회로 가야 한다.”

    이 날의 토론회에서, 현실적 관점에서 짚어보아야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언급한 이는 손석춘(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이 유일하다.

    “진보개혁세력의 단일후보 제안은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낼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으므로, ‘미래구상’이 가장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이다. ‘미래구상’이 민주노동당과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화했는지 궁금하다.

    민주노동당과 ‘미래구상’이 함께 힘을 모아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대한 다른 구상도 있을 수 있다. 국민이 공감하는 정책을 마련하고, 그것이 의제가 되도록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대선에서 실패하더라도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 강화나 강력한 진보정당 건설의 밑절미가 되도록 해야 한다.”

       
      ▲ 손석춘 새사연 원장
     

    ‘미래구상 제안자 97인’의 면모는 대단히 다양하다. 몇몇은 자유주의 정부에서 고위 관료였던 이들이고, 몇몇은 한나라당과도 접촉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몇몇은 ‘민주노동당이 좌익적이지 못해 불만’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았다니 대단하다면 대단하달 수 있지만, 그들 각각은 나름의 진단과 각각의 대안을 여전히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미래구상’에 대한 여러 풍문을 “신문 보고 알았어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미래구상’의 교집합은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 정도인데, ‘새로운 리더십’ 구상의 원 특허권자는 청와대의 대선 시나리오 중 하나다. 그리고 정치 브로커들의 시나리오를 ‘시민’이 차용하게 한 유력한 논거는 민주노동당의 지지부진한 실태다.

    그런데, “미래의 소중한 자원이되 현실적 대안세력은 아니다”라는 진보정치세력에 대한 진단은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것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 논리는 87년에도, 92년에도, 97년에도, 02년에도 나왔던 것이고, 진보정당이 30석이나 30% 정도의 지지를 얻고 있을 미래에도 의연히 되풀이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래구상’은 1987년으로 되돌아가는 ‘Back to the Future’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구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운동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미래구상’의 운동 원칙은 주요 시민단체들이 동조하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미래구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동력은,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여권의 재편 과정에 후보를 앞세워 개입하는 것만이 남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보아도, 박원순 변호사나 문국현 사장의 행보가 어떠할지는 ‘미래구상’이 표현하는 바 그대로 ‘상상력’에 속한다. 이것이 진지하다면 투기이고, 투기가 잘못되면 사기가 되기 십상이다.

    1997년 봄 어느날, 정대화를 비롯한 십 여 명의 사람들은 대학로 근처의 술집을 찾아 들었다. 국민승리21 마스터플랜을 마련하여 추진하는 중이던 그들은, 그 술집에 걸린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구호 삼아 외치며 건배했었다.

    아직 창대하지는 않지만, 민주노동당은 더 이상 미약하지 않다. ‘미래구상’은 미약할 뿐더러 모호하기까지 하다. 이 겨울을 나고 봄쯤에는 모호하지 않은 미래구상을 볼 수 있을까? 봄에도 ‘미래구상’을 계속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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