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권력의 제한?
    지금 어떤 '한계'에 주목해야 하나?
    [정의로운 경제] 불평등, 기후위기 그리고 검수완박
        2022년 04월 21일 09:3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다시 생각해보는 권력과 부의 한계

    20대 대선에 패배한 다수당 민주당이 꺼낸 가장 긴급한 화두는 불행하게도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검찰개혁이었다. 코로나19 이후를 위한 정책이나 긴급한 경제 불안정 해소, 부동산 규제완화를 둘러싼 심각한 쟁점들, 다당제 연합정치를 위한 중대한 개혁과제를 다 제쳐놓고 ‘검수완박’이 172석을 총동원해 민주당이 관철시켜야 할 개혁이란다. 심지어 ‘무소불위’ 검찰권력을 제한할 수 있다면 ‘가짜 무소속 의원’ 만들기도 불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제한 없이 무한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검찰뿐일까? 한계 없는 폭주로 국민 삶에 고통을 주는 이슈가 과연 검찰의 전횡만 있을까? 도대체 강한 권력을 가진 다양한 정치집단과 관료들의 권력의 한계는 어떻게 정하는가? 더 나아가 정치권력보다 위세가 더 커진 경제권력, 즉 막강한 자산과 부를 가진 경제집단들의 부의 한계는 어떻게 정하는가?

    근대사회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대체로 개인의 무한한 욕망 추구를 허용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미화하는 문화 안에서 살고 있다. 권력이든 자산이든 소유하고 있는 것에 제약과 한계를 부과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오직 자연스럽고 희망적인 것은 한계를 모르고 팽창하고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진화해오면서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은 상당 수준에서 인정하고 수용해왔다. 하지만 경제분야로 가면 얘기가 다르다. 개인의 무한한 물질적 욕망 추구는 자연스런 본성으로 받아들여지고, 기업의 무한한 이윤 추구와 팽창도 당연시되었다. 심지어 국가 수준의 무한한 경제성장은 온 국민이 추구해야 할 절대선으로 격상되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규제완화’ 바람이 불면서 일정하게 경제사회의 각 영역에 두어졌던 ‘한계들’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반대로 경제권력의 무한 팽창은 두드러지고, 견제받지 않는 경제권력의 힘은 막강해졌다.

    “사회가 ‘희소성(scarcity)’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연구하는 학문”(그레고리 맨큐)으로 경제학을 정의해온 다수 경제학자들도, 자원의 희소성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의 충돌을 해결한다면서 ‘한계 없는’ 경제의 팽창을 찬양해왔다. 전통적인 경제학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wants)는 무한(limitless)하지만 자원은 상대적으로 희소(scarcity)하다. 결국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경제가 어느 수준에 올라서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정상상태(steady state)를 유지한다면, 사실상 이는 정상이 아니라, 심각한 정체상태(stagnation)이며 극복해야 할 상태다.

    우리 스스로 정해야 하는 한계들

    그러나 최근 지구의 한계를 위협하는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팀 잭슨(Tim jaction)이나 요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 등 생태경제학자들은 ‘한계(limit)’에 대해서 보다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제나 사회, 정치에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유(freedom)와 정의, 지속성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으로 삶이 부서질 때 한계는 새삼스럽게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서구사회는 1, 2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참상과 재난을 겪은 후에 ‘한계’를 정하고 ‘절제(moderation)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불평등 수준에 한계를 두었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겨서 사적 부의 축적이나 과도한 상속을 제한하려 했다. 주당 노동시간에 한계를 부과했으며 기업들이 저지르는 환경피해도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핵무기 개발에 제한을 두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 이어졌다.

    최고임금을 제한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토지 소유를 제한하거나, 은행의 대출한도를 정하기도 했다. 정치적 로비나 선거 캠페인 비용을 제한하려는 조치들도 있었다. 지금 우리는 자동차의 속도제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흡연 장소 제한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식품이나 약의 독성정도를 엄격히 검사하고 제한하는 제도가 모든 나라에서 강화되고 있다. 이처럼 정치에서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문화에서도 한계는 건강한 사회와 좋은 삶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한계들을 민주적으로 결정해서 정하고 또 보강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위해 민주주의가 정한 ‘자발적 제한’들에 대해서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규제(regulation)’라고 낙인찍고 제거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제한은 필요 없으며, 각자의 욕망(wants)이 한계 없이(limitless) 추구되도록 놔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어갔다. 각자 개인의 무한한 욕망과 자원의 희소함 사이에서 시장의 가격 메카니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문화는 코로나19를 겪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지금은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한계를 정할 때

    하지만 어느 정치집단이나 관료집단 가운데 과도한 권력의 남용이 우려되는 요소가 있으면 민주주의를 위해 제한되어야 하고 견제되어야 한다. 검찰 권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치와 행정을 넘어서 경제 사회분야에서도 권력과 부의 제한 없는 남용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보자. 30년 전인 1992년에는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 비중이 전체의 34.1%로 39.4%인 미국보다 훨씬 양호했고 독일이나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불평등이 일정수준 이하로 제한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소득격차가 계속 벌어지면서 2020년 현재 한국의 불평등은 미국의 45.7%보다도 높은 46.2%를 상위 10%부자들이 차지할 정도로 한계범위를 넘어갔다. 부동산 등 자산 불평등은 상식적인 한계선을 한참 초과했다. 성공적인 농지개혁으로 1950년대 이래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대한민국이 지금은 상위 10% 자산과 하위 50% 자산의 격차가 무려 52배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처럼 지금 소득과 자산 불평등은 그야말로 한계를 모르고 심화되고 있지만 이를 제한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정치권에서 보이지 않는다. 최근 최저임금제도 무력화, 노동시간제한 무력화, 부동산 규제완화, 대출 규제완화 등 최근 불평등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는 조치들이 새 정부에서 논의되고 있는데도 정치권의 대응은 무력하기만 하다.

    기후위기로 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최근 IPCC는 6차보고서를 연속 발표하면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조치를 더 이상 미루면 안된다는 절박한 표현을 가감 없이 공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탄소배출 제한은 아직 요원하다. 그나마 2020년 코로나19 재난으로 전 세계적으로 약 5.4% 가량 줄어들었던 온실가스배출이 불과 1년만에다시 4.2% 가량 늘어나면서 거의 코로나 이전수준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지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간의 기술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화석연료에 기대 이윤추구를 하려는 기업들의 한계 없는 욕망이 작동한 결과다. 오직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가 한계를 부여해야 하지만 한국정치는 지금도 기후위기 대처를 위한 1.5도 한계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데 매우 인색하다.

    그림1 코로나19 이후에 다시 탄소배출이 증가함

    한계는 좋은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요르고스 칼리스는 2019년에 쓴 작은 책 <한계들(Limits>에서 한계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래 자연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단다. 예를 들어 중력 그 자체는 한계가 아니라 팩트다. 하지만 우리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목적을 세우면, 자살할 생각이 아닌 이상 그때부터 중력은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에 한계를 지운다. 바닷물은 물고기에게는 생명을 주지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운다. 이처럼 한계는 주체와 주체의 의도에 있는 것이지,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결국 한계를 지워야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다. 검찰을 포함해서 어떤 권력기관의 한계를 더 명확히 두는 것이 필요한지 결정하는 것은 더 민주적인 정치를 위한 우리의 선택일 수 있다. 경제·사회적으로 허용 가능한 불평등 수준에 한계를 정하는 것도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더 평등한 삶을 살겠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무한성장을 주장하는 화석연료 문명에 대해서 ‘추가온도상승 1.5도’라는 한계를 지우는 것 역시 우리의 미래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우리의 의지라는 것이다. 한계란, “자연 그 자체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며, 우리가 만들고 싶어하는 세상, 그리고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세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어떤 한계를 정해야 하는가?

    * <정의로운 경제> 칼럼 링크

    필자소개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