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틱 연애 빼고 다 가진 여자의 좌충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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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13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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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 샤론 크럼 지음, 임정희 옮김

    이른바 ‘칙-릿chic-lit(또는 칙-북chic-book. 젊은 여성을 뜻하는 속어 chick와 결합한 합성어)’을 분류되는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들은 이제 확실히 출판의 대세가 되었다.

    칙-릿으로 분류할 만한 것들을 꼽자면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꼽을 수 있을 텐데,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있고, 『쇼퍼홀릭』, 『처음 드시는 분들을 위한 초밥』, 그리고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와 같은 작품들이 그 계보를 잇는다고 말할 만 하다.

    포스트-페미니즘 소설

    물론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바겠지만, 칙-릿의 ‘장르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패션, 언론, 광고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일과 사랑을 동시에 성취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단련되는지가 칙-릿의 주요 이야기를 메운다.

    그런 점 때문에 칙-릿이 초창기에는 포스트-페미니즘 소설로 꽤 주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칙-릿의 여성들은 그저 여성이기만한 것이다. 이제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와 함께 칙-릿의 여성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지 보라.

    “좋소. 그럼 남자들이 여자한테 바라는 게 뭐라고 생각해요?” “엄격한 정직함, 자제심, 정확성, 지성, 의무감, 야망, 프로근성, 멋진 섹스, 지시를 내리고 따르는 능력.” “와~” “뭐가 ‘와’죠?”
    “와, 남자들이 그런 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흥미롭군요.”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의 주인공인 뉴욕 지방검사보 제인과 동료 검사 그레이엄이 나누는 대화의 한 장면이다. 남자와의 로맨틱한 연애 외에 모든 것을 가진 여자 제인 스프링의 치명적인 결점이란 과연 무엇일까?

    어째서 그녀는 데이트할 때마다 퇴짜를 맞고, 남자 동료들에게는 딱 ‘친구’까지만 가능한 것일까? 서른 넷에 9개월을 보태는 시간 동안 제인 스프링이 해결하지 못한 지상 최대의 난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난제의 한 복판에 뛰어든 제인 스프링의 좌충우돌 성공담을 읽어야만 한다.

    34년 9개월 산 여인의 좌충우돌 성공담

    그녀의 야심에 가득 찬 결심.

    “첫째, 남자들이 여자한테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겠다. 둘째, 바로 그런 여자가 되겠다. 셋째, 그 다음에는 한 번 이상 데이트를 하고 자신을 영원히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겠다.”(p.64)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 샤론 크럼 지음, 임정희 옮김
     

    모든 것을 다 갖췄지만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는 간파하는 능력까지 완벽하게 구비하지는 못한 제인, 그래서 그녀가 택한 방법은 지금의 그녀와 정반대인 ‘도리스 데이 되기’.

    1950~1960년대 그 어떤 남자도 스크린과 무대의 여신이었던 도리스 데이의 데이트를 거절하지 못했다. 제인이 주목한 점은 바로 그것이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다르게 말하자면,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도리스 데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당연히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을 터이다.

    그러나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제인만은 유독 진지했으며, 제인의 판단은 100%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적중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그녀의 외모였으며, 이것은 동료 검사들과 법정의 배심원들까지 사로잡았다.

    스포츠 브라를 벗어던지고 후크가 달린 브래지어로 가슴을 모아주자 그 동안 숨겨진 바디라인이 살아났으며, 플랫 슈즈를 벗고 매끈하게 뻗은 각선미를 한층 더 돋보이도록 펌프스를 신자 일단 그녀에게 꽂힌 시선은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물론 말투도 바뀌었다.

    그녀는 이제 귀엽지만 섹시하게, 지적이지만 부드럽게, 꼼꼼하지만 나긋나긋 속삭이듯 이야기할 줄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제인 스프링은 더 이상 남자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 남자들의 사랑 받을 준비를 완료한 여성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꽃미남 대 반듯남

    이때 칙-릿의 여주인공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반드시 꽃미남일 필요는 없다. 대개의 경우 Mr. Flower가 아니라 반듯한 남자인 Mr. Right과의 로맨틱한 만남이 칙-릿의 최종적인 키포인트가 된다.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에서도 그건 마찬가지.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지만 영악하기 그지없는 변호사가 아니라 경찰인 마이크가 마침내 제인의 ‘그 남자’가 되어 준다. Mr. Right는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입장을 취한다. 할리퀸 소설과 비교한다면 여자 주인공도 남자 주인공도 상당히 진화했다거나 사회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다.

    마이크는 2000년대에도 여전히 도리스 데이가 자신 앞에서 매혹을 흩뿌려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제인 스프링이 갖춘 능력과 독립심, 일에 대한 추진력과 열정 등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더욱 고무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다독인다. 그러나 ‘도리스 데이 되기’ 그 이전의 제인 스프링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도 아니다.

    마이크의 촌평은 이렇다.

    “내 생각에는 제인과 도리스를 합하면 좋을 것 같소. 어떤 점은 도리스가 좋지만 어떤 부분은 제인이 더 좋소. 제인은 똑똑하오. 독립적이고 주관이 확실하고 일에 대한 열정이 있소. 난 그런 여자가 좋소. 하지만 도리스는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섹시하지. 당신은 둘 다 될 수 있소.”(p.353)

    ‘도리스 데이 되기’ 이전의 제인이 늘 궁금했던 대목에 대한 정답이 바로 이것이다. 호랑이가 아니라 요염하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되는 것, 이건 소설의 결론이기도 하다. 즉 유능하고 친절하며 섹시한 여자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Mr. Right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재편하기 위해 여자를 구슬리는 방식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까끌까끌한 태도로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를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칙-릿에 대한 가장 올바른 독법은, 그것을 하나의 지침서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시대의 루저looser’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들을 동원하기 위한 보편적 논리

    아니나 다를까, 마이크의 자리에서 제인 스프링의 변신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일과 사랑,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순 없습니다. 제발 ‘행복이냐 불행이냐’ 하는, 19세기 식으로 묻진 마십시오. 중요한 건 성공입니다. 회색 레인코트를 휘날리며 하이힐 뒤축을 대리석 로비에 꽂아야 합니다”(조선일보, 김광일 기자)라고.

    일과 사랑을 동시에 성취하는 방법으로서 제인 스프링의 변신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구태에서 벗어나 보란 듯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히로인이 되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칙-릿을 젊은 여성들의 중심 무대에 세우기 위해 동원하는 보편적인 논리일 터이다.

    자,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여주인공은 대체 어떤 모습이길래? 그녀들은 결코 자신의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뒤로 감추고 내숭 떨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 앞에서 당당하기 때문에, 더 예쁘고 더 매력적이고 더 섹시하게 보이기 위해 불꽃 튀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제인 스프링이 화려한 립스틱을 바르고 예쁜 구두를 신고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낀 것은 바비 인형을 닮으려는 허황한 발상이 아니라, 사랑스럽거나 섹시하게 자신을 연출함으로써 미적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고군분투의 일환인 것이다.

    브랜드에 살고 브랜드에 죽고

    제인 스프링이 도리스 데이를 역할 모델로 설정하는 바람에 다소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긴 했지만, 『섹스 앤 더 시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혹은 『쇼퍼 홀릭』 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이 시대 새로운 여주인공들은 욕망을 제어하거나 숨기는 대신 그것을 즐기며 살기를 원한다.

    여기서 그 즐김의 가장 확실한 지표가 되어 주는 것은 바로 소비. 그래서 칙-릿에는 끊임없이 브랜드 네임이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이 소비하는 상품의 브랜드 네임이 얼마나 화려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이냐에 따라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증명할 수 있고, 매력 지수가 좌우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칙-릿의 정서는 패션잡지의 정서와 흡사하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는 마놀로 블라닉 구두라면 마치 영혼이라도 바칠 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놀로 블라닉 구두와 에르메스 핸드백이 완성해주는 뉴요커 패션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뿐인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중 “지금 너에겐 샤넬이 필요해”라는 대사에서 샤넬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앤드리아 삭스가 매력적인 여자로 재탄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제대로 만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패션잡지한국판 <BAZAAR>의 11월호에서는 샤넬을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은 진부하고 통속적인 요소들을 어떤 방식으로 트위스트하고, 재발견해내느냐가 중요해진 시대다. 또 패션 안에서 미묘한 콘트라스트와 아이러니를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는 감히 샤넬 백은 그 콘트라스트와 아이러니, 재발견, 트위스트가 모두 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패션 아이템이라고 단언한다. 샤넬이야말로 우아한 레이디와 펑키하고 그런지한 배드걸에게 모두 공평한 브랜드가 아니던가.”

    ‘우리말 사전’ 옆에 끼고 읽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우아한 레이디가 되었든 펑키하고 그런지한 배드걸이 되었든 모두 칙-릿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똑 부러지고 당당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럭셔리 브랜드 제품으로 자신을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드러낼 정도로는 안정적인 경제력을 갖추고 있으며, 자신에 어울리는 패션 트렌드에 항상 예민하여 언제든 쉬크한 모습을 연출할 줄 아는 여자.

    여기서 잠깐 팁. ‘쉬크하다’ 대신에 ‘세련되다’라고 절대 말하지 마시라는 것. ‘세련된’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쉬크’는 ‘쉬크한 뉴욕 스타일’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럭셔리’를 ‘사치스러운 취향’으로 바꾸어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온갖 명품 패션 브랜드들과 패션 스타일은 칙-릿에서 매우 일상적인 수식어가 되어 출몰한다. ‘무심한 듯 쉬크한 그녀들’의 ‘뉴요커 스타일의 삶’은 ‘우리말 사전’을 옆에 끼고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개그콘서트’의 <패션7080>의 멤버들의 제안이 여기서 매우 쓸모 있다. 그들은 압구정동을 동경하는 지방의 젊은이들이게 이렇게 말한다. “기분 좋다고 막 상경하지 말고 느낌 갖고 필 충만할 때 그때 상경하란 말이야!” 칙-릿도 마찬가지다. 느낌 갖고 필 충만하게 읽어야만 한다.

    쉬크한 그녀들, 럭셔리하면서 도도한 그녀들, 현실적인 욕망을 숨기는 것보다는 그것을 드러내는 데 더 익숙한 그녀들은, 그러나 칙-릿의 열풍과 함께 등장한 신인종이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를 하나의 휘황한 디자이너 부티크라고 할 때, 그 쇼윈도에는 매 시즌마다 가장 힙한(hip: 엉덩이라는 뜻이 있지만, ‘최신 유행에 밝은/ 앞서 있는’ 등의 뜻도 있다) 스타일로 디스플레이한 남녀 마네킹을 세워왔다. 마네킹들은 어떤 시절에는 ‘부자 아빠’의 컨셉으로, 또 다른 시절에는 ‘미시족’ 컨셉으로 치장을 바꾸며 쇼윈도 바깥세상을 매혹해 왔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그 마네킹들은 언제나 마놀로 블라닉 혹은 지미 추의 하이힐 뒤축을 대리석 바닥에 꽂은 채로 코트 깃을 세운 채 서 있었다. 지금 그것들은 한 손에는 브랜드 로고로 장식된 똑 같은 핸드백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똑 같은 쉬크와 럭셔리’를 걸치고 디스플레이 돼 있다.

    마네킹을 따라 포즈를 취하고 마네킹이 입은 것을 똑같이 입으며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무심한 듯 쉬크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 ‘무심한 듯 쉬크하게’ 일할 수는 없다. 사랑도 일도 끝내는 얼마나 징글징글한 본색을 드러내는지 안다면 결코 그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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