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씨배 우승 그리고
    제자 이창호와 10년 대전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조훈현②
        2022년 04월 18일 10:3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조훈현① “반상 위의 전신 등장하다”

    1987년, 대만의 부호 잉창치는 세계 바둑대회를 주최한다고 발표했다. 최초의 응씨배 세계대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한중일을 중심으로 누가 세계 최강인지 실력으로 증명하자는 것이었다. 우승상금은 무려 40만 달러. 서울 강남의 30평 아파트를 몇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세계바둑계는 출렁거렸고 대회 방식 등 정보를 얻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한국기원은 대회 방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손을 놓고 주최 측의 결정만 기다렸다.

    ** 잉창치가 세계대회를 발표하자 최초라는 타이틀을 내주는 것이 아까운 일본이 후지쓰배를 급조해 최초의 타이틀을 가져갔다. 응씨배가 4년에 한 번인 반면에 후지쓰배는 해마다 개최하는 세계대회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후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가 대회를 계속해서 싹쓸이하자 대회를 폐지해버렸다.

    한국기원에 통보된 대회 방식은 충격적이었다. 초청방식인 16강 토너먼트인 대회의 배정된 시드는 중국 6명, 일본 4명, 대만 3명이었다. 북미와 호주에도 한 명씩 배정되었다. 한국 시드는 역시 1장이었다. 한국을 바둑 2류가 아니라 변방 수준으로 취급한 것이다. 한국기원 기사회는 격분했다. 다수의 의견은 보이콧이었다. 다급해진 주최 측은 조치훈이 한국국적이기 때문에 한국의 시드가 2장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조치훈은 엄연히 일본기원 소속이었다. 하지만 최초 세계대회를 보이콧할 수만은 없었다. 혈혈단신 조훈현이 출전했다.

    응씨배와 운마저 없는 대진표

    1차전에서 대만이나 북미 혹은 호주를 만날 수도 있었지만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상대는 중국의 떠오르는 별 왕밍완이었다. 조훈현의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을 왕밍완이 막아내며 조훈현은 위기에 빠졌다. 패색이 짙을 무렵 조훈현의 빠른 창이 전광석화처럼 반상 위를 날아다녔다. 변방 취급을 벗어나지 못할 위기를 넘어서면서 8강에 진출했다. 토너먼트의 특성상 위로 올라갈수록 강자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8강 상대는 일본바둑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고바야시 고이치였다. 일본기원의 최대기전인 기성전(棋聖戰 8연패), 명인전(7연패), 천원전(5회 우승), 작은 기성전(碁聖戰 6연패) 등 거칠 것이 없던 전성기였다. 조치훈이 가진 타이틀을 모두 회수하던 시절이었다. 중국의 녜웨이핑과 일본의 고바야시 둘 중에 누가 세계 최강이냐 하는 것이 바둑계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두 사람의 대국이 아닌 8강에 쏠린 시선은 다른 두 대국이었다. 중국기원의 최강 녜웨이핑과 조치훈의 대국이었다. 조치훈이 녜웨이핑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다른 한 대국은 일본기원의 떠오른 별 가토 마사오와 후지사와 히데유키였다.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1회 대회 우승자는 언제나 자신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을 남긴 독특한 인물이었다.

    후지사와 히데유키는 “1년에 4번만 이기면”된다는 충격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7전 4승제인 기성전은 딱 4번만 이기고 상금은 유흥과 도박으로 탕진했다. 그리고 다시 기성전이 돌아오면 술과 도박을 끊고 4번을 이기고 타이틀을 방어했다. 후지사와 히데유키가 가토 마사오를 이기고 4강에 오르자 설마 하는 이야기가 호사가들에게 나오기 시작했다. 후지사와는 4강 인터뷰에서 상대방인 녜웨이핑을 언급하지도 않고 “결승에서 조훈현과 만나지 않을까 한다. 조훈현은 최강이다”라고 뜻밖의 말을 남겼다. 후지사와는 중국 최강을 넘어서지 못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조치훈은 녜웨이핑의 벽을 넘지 못하며 4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런데 관심 밖에 있었던 조훈현과 고바야시 고이치의 대국은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 대국이 중반까지 미세하게 진행되자 대회장과 검토진(해설진)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일본기원 최강, 아니 세계 최강이 고바야시 고이치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던 시절에 조훈현은 초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그 순간, 조훈현의 치명적인 실착이 나왔다. 20집 가량을 날리는 공배를 둔 것이다.(후일 AI는 22집을 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돌을 던져야 하는 상황에서 조훈현은 창을 집어넣고 부드러운 바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물러서라. 마치 조훈현의 주문에 걸린 것처럼 고바야시 고이치는 조금씩 물러섰고 차이는 계속 좁혀졌다. 그때, 고바야시 고이치의 작은 실수(패착)가 나오자 조훈현은 빠른 창을 꺼내들어 그 틈을 찌르며 순식간에 형세를 뒤집었다.

    조훈현의 4강 상대는 아무리 공격해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중허리 린하이펑이었다. 조훈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기풍을 들고 나왔다. 전신(戰神). 조훈현은 시작부터 전투바둑으로 반상 위를 난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조훈현이 빈삼각의 묘수를 두 번씩 터트리자 린하이펑은 백기를 들었다. 결승에 오른 인물은 예상대로 녜웨이핑. 황제를 가리는 대국은 최종 5국까지 가면서 싱가폴 대첩에 세계바둑의 이목이 집중됐다. 대국은 누가 유리한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종반전이 계속됐다. 조훈현은 흑을 잡았고 검토실(해설진)은 녜웨이핑이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판단했다.(후일 AI는 녜웨이핑이 0.8집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다)

    ** 검토실. 대국이 시작되면 한국기원에서는 초일류들이 모두 모여 한 수를 둘 때마다 온갖 변화도와 형세를 판단한다. 한국기원 9단 10명이 모여 훈수를 한다면 천하의 조훈현이라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판단은 맞았지만 근소한 차이가 얼마인지는 누구도 단언하지 못했다.

    응씨배 룰 탓이었다. 대부호 잉창치는 수십 년간 바둑 룰을 연구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기존 룰과 다른 독특한 것은 세 가지였다. 우선 흑을 잡을 경우 덤이 8집(결과적으로는 7집반)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덤이 5집반이었던 시절이라 흑을 잡을 경우 덤에 대한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공배를 모두 메우고 잡은 돌은 돌려준다. 다소 복잡하지만 상황에 따라 공배가 한 집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제한시간은 세 시간이지만 초읽기가 없다. 제한시간을 소모하면 패하는 것이 아니라 1분마다 두 집을 공제한다. 덤 8집에 두 집을 더 공제하고 세계 최강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녜웨이핑이 당연한 수를 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조훈현이 살짝 비틀었다. 녜웨이핑이 흔들렸고 조훈현이 승기를 잡았다. 검토실에서는 흐름이 넘어온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바둑의 변수가 많아 얼마나 유리한지 알 수 없어 한국기원 9단 10명은 “흐름이 넘어왔다”고 표현한 것이다. (후일 AI는 조훈현이 한집 반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초일류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불리해진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녜웨이핑의 행마가 흔들리자 조훈현의 부드러운 바람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녜웨이핑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고 조훈현은 조금씩 차이를 벌리며 대국은 그대로 끝이 났다. 조훈현은 9시 뉴스에 등장하면서 카퍼레이드와 함께 화려하게 귀국했다. 정부가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할 방침을 결정하자 기사회는 난색을 표시했다. 한국바둑의 창시자인 조남철보다 먼저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정부는 선선히 두 사람의 공동수여를 결정했다. 웹툰 미생의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기보가 응씨배 최종 5국이다.

    응씨배 결승 최종5국 장면. 대국장 밖은 해설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돌부처 이창호의 등장

    조훈현이 응씨배를 우승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받은 나이가 서른넷이었다. 스포츠도 그렇지만 바둑에서도 삼십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최정상을 계속 지키는 기사는 거의 없다. 조훈현도 자신이 서서히 지는 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계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1988년 응씨배 앞서 시작된 후지쯔배을 위해 조훈현 등은 16강 시드에 배정된 기사들의 기보들을 검토하면서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조훈현와 서봉수 등 시드 배정자들이 1차전에서 모두 탈락한 것이다. 내상을 입은 조훈현에게 대왕전에서 낮선 인물이 도전권을 획득하며 칼을 내밀었다. 일지매, 유창혁이었다. 조훈현의 부드러운 바람과 빠른 창은 유창혁의 세력 앞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며 대왕전을 내주었다. 관철동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환호했다. 조훈현과 서봉수 둘만의 대결에 관철동은 지쳐있었다.

    귀천의 시인 천상병은 해가 떨어질 무렵이면 칼같이 관철동 한국기원에 나타났다. 그리고 누구를 보든 ‘백 원만’했다. 상대가 프로기사이든 임원이든 가리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천하의 김인도 공손이 백 원을 내밀었다. 누구든 백 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수금이 끝나면 천상병 시인은 팔자걸음을 걸으면서 관철동 술집골목으로 휘적휘적 사라졌다.

    전영선 프로. 샤프한 이미지에 호탕한 성격으로 주변에 사람들이 언제나 모여들었다. 전국에 마당발 인맥들이 거미줄처럼 짜여있었다. 당연히 애주가였다. 대성하지 못한 김인이 전영선이었다. 본선리그에 간간히 얼굴을 내밀기도 했지만 생계가 될 리 만무했다. 호구지책으로 연 것이 프로입단을 꿈꾸는 아마추어들의 도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정옥 프로가 자신이 가르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한 아이를 추천했다. 이창호였다. 도장으로 데리고 와서 10개월 동안 지켜보던 전영선은 무슨 생각인지 이창호를 데리고 조훈현을 찾아갔다. 지도대국이 끝난 후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 즉 집에서 숙식하며 바둑을 가르치는 제자로 들이기로 결정했다. 이창호 나이 열 살 때였다.

    전영선의 별명은 소주 두 병이었다. 수입이 좋은 기사를 만나면 “소주 두 병 사”하는 것이 일과였다. 오늘로 치면 “만원 내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 좋은 전영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수금이 끝나면 관철동 술집골목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술을 좋아하던 전영선은 50대 초반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떠나기 한해 전 이창호가 응씨배를 제패하는 모습을 본 것이 커다란 위안거리였다.

    조훈현에게 이창호는 뭔가 이상했다. 천재들에게 흔히 보이는 기재 같은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움, 현란한 변화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말수도 거의 없는데다 복기(둔 바둑을 다시 두어보는 것)에도 서툴렀다. 아마추어 강자만 하더라도 가능한 복기가 서툴다는 것을 조훈현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창호는 조훈현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이듬해 슬그머니 프로에 입단했다. 11살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입단기록이었다. 물론 첫 번째 최연소 입단기록은 스승인 조훈현이었다. 관철동의 호사가들은 황제의 제자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시작된 사제대결

    이창호는 착실하게 성적을 쌓으며 벌써부터 본선 무대에 얼굴을 나타내자 중견기사들은 난감해했다. 각 기전의 본선을 주름잡던 중견기사들은 12살 소년에게 패전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관철동이 조금씩 소란스러워기 시작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창호가 기존의 정석을 거스르는 수들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초반에 화점의 삼삼을 파는 것은 실리가 작아 나쁘다는 정설을 비웃듯이 무표정하게 삼삼을 파버렸다. 심지어 프로라면 거의 두지 않는다는 삼삼 정석을 아무렇지 않게 두는 것이 다반사였다. 문제는 이창호가 계속 이긴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도 자주 일어났다. 유리하다고 생각한 바둑이 끝이 나면 지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창호가 끝내기에 관한한 신산(神算)이라는 사실을.

    대표적인 날일자 걸침 정석. 흑5로 백2 오른쪽으로 막는 것은 흑3이 단수를 맞아 모양이 무너진다고 해서 금기시되고 있었다. 이창호는 금기를 깨고 태연하게 단수를 맞으면서도 계속 승리했다. 이른바 이창호 정석의 신호탄.

    1988년 KBS바둑왕전 결승에 이창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조용히 타이틀(세계최연소)을 가져갔다. 13살의 나이였다. 설마 하던 한국기원이 술렁거렸다. 그런데 관철동의 호사가들은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바둑왕전이 속기전이고 본선이 있는 본격 기전이 아니기 때문에 유의미한 첫 우승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결승 상대가 조훈현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쪽짜리 우승이 아니냐는 말까지 등장했다. 결승 상대는 속기에 강한 중견의 김수장이었다. 조훈현은 제자의 첫 우승이 대견하면서도 너무 이른 나이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1990년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한국기원 최초의 기전이자 최고의 기전인 국수전 본선에 오른 이창호는 서봉수 등 맹장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트리고 도전권을 획득하며 스승과의 결승전 자리에 마주 앉았다. 스승의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을 이창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두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제자가 스승의 기전을 빼앗는 역린(逆鱗)이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곧바로 최고위 본선에 오른 이창호는 뚜벅뚜벅 본선을 지나 결승에 올라 다시 스승과 마주 않았다. 최고위까지 손에 넣은 1990년, 이창호는 41연승(현재까지 한국기원 신기록)이라는 가공할 성적을 내며 역사를 써내려갔다. 이듬해는 명인, 왕위, 대왕전 등을 쓸어갔다. 스승은 이제 도전자로 제자를 찾아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수많은 기전의 우승으로 거액을 번 조훈현이지만 두 가지가 없었다. 운전면허와 신용카드였다. 운전사는 아내였고 지갑에 현금을 넣어두면 조훈현이 알아서 쓰는 식이었다. 술을 할 줄 모르는 조훈현은 관철동 뒷골목에 출몰할 일이 없었고, 밥값과 담배를 사는 것이 지출의 전부였다. 체인스모커인 조훈현은 대국 중에도 담배를 자주 피우는 것이 조금씩 신경 쓰였다. 접전 중인 상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하는 것도 일이었다. 어느 날 담배 가게에 들른 조훈현은 문득 긴 담배가 눈에 들어왔다. 장미였다. 맛을 덜 하지만 자주 불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날마다 대국 중에 맛나게 장미를 빨며 기전들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장미모델로 발탁됐다.

    조훈현이 운전면허가 없는 것은 아내 정미화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대국장에 데려다주면 조훈현이 대국에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해 국수전 결승이 있던 날 정미화는 여느 때처럼 조훈현과 이창호를 태우고 관철동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차 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하지만 천하의 조훈현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듬해 조훈현은 도전권을 획득하고 제자에게 한 수 가르침을 보여주며 다시 국수전을 차지했다. 그때부터 거의 모든 기전에서 둘만의 전투가 10년간 이어졌다. 제3회 동양증권배 세계대회에서 이창호가 우승(세계대회 최연소 우승, 17세)하자 정미화는 조훈현에게 이제는 이창호가 독립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꺼냈다. 그동안 둘만의 전투가 계속되자 정미화의 속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