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그들이 이 순간
    지금 광주에 살고 있다면
    [청년칼럼] 5.18 항쟁과 518 버스
        2022년 04월 14일 05: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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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일, 광주광역시가 지역 언론사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올해 광주시는 교통약자를 위한 저상버스 45대를 추가 도입한다. 이에 대해 광주일보는 ‘광주시, 교통약자 위해 저상버스 45대 추가 도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행했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광주시가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힘쓰게 됐다고 믿을 뻔했다. 그러나 올해 광주에서 운행을 시작하는 저상버스 45대는 이미 지난해 말 도입이 확정된 상태였다.

    최신 이슈에 편승한 홍보라는 의심의 마음을 안고 광주시의 대중교통 현황을 면밀히 살펴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광주시에 ‘이동 평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올해가 끝날 무렵, 앞서 언급한 저상버스 도입이 완료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올해 말이면 광주 구석구석에서 시민의 발이 되어 주는 시내버스 999대 중 348대가 저상버스로 운행된다. 광주시는 보도자료에서 “연말이면 전체 시내버스의 34.8%가 저상버스에 해당하게 된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조금만 바꾸어 생각해 보자. 2022년 말, 휠체어에 탑승한 장애인을 비롯한 광주의 교통약자들은 시내버스의 65.2% 가량을 이용하지 못한다.

    2021년 전장연의 시위 모습(사진=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며칠 전 지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장애인 이동권 이야기가 나왔다. 한 분이 지난해 5월 18일 이야기를 꺼냈다. 2021년 5월 18일, 그러니까 5.18 민주화운동 41주년 기념일이었던 역사적인 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를 비롯한 장애인 활동가들이 광주 금남로 거리에 섰다. 바로 이 거리에서, 1980년 5월의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위대한 저항의 역사를 썼다.

    1980년 5월 18일, 학내 진입을 제지당한 전남대 학생들이 금남로로 진출했다. 광주시민들은 금남로에 나타난 학생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곧 무장한 특전사 군인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실상 폭행이 아닌 학살에 가까웠다.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은 학생들이 하나 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금남로에는 지인들과 함께 딸의 돌잔치 뒤풀이를 마치고 귀가하던 김경철씨가 있었다. 김경철은 청각장애인이었다. 군인들은 젊은 그를 학생으로 여기고 폭행했다. 전신에 타박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진 김경철은 다음날 새벽 사망했다. 5.18 민주화운동, 광주의 첫 사망자는 장애인이었다.

    다음날, 학생 시위는 민중항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쓰러져 가는 광경을 보고도 함께하지 못했던 이들이 느낀 미안함은 고스란히 항쟁 동력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광주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응답한 연대의 역사가 되었다. 정확히 41년 후인 2021년 5월 18일, 금남로 거리에 나타난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광주 518번 버스를 막아섰다. 이 버스는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들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다. 현장을 목격한 지인이 전장연 박경석 대표가 자신의 휠체어와 518 버스 앞문을 쇠사슬로 묶어둔 광경을 묘사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문득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간호감독이었던 안성례 씨를 떠올렸다. 5.18 당시 수술방 4곳을 오가며 어떤 날에는 23번이나 수술에 참여했다는 그는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을 이야기할 때면 늘 척추에 총을 맞고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그 ‘15명’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 15명의 입에서 후회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늘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면, 저는 이 불편한 몸이라도 끌고 나가 싸우고 싶습니다. 신경과 통하는 민감한 곳에 깊은 상처를 입어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몸부림쳤지만, 그 어떤 신체적 고통도 그들의 긍지만은 꺾지 못했다. 안성례씨는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며 떳떳해 하던 그들의 모습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고 했다.

    지난해 시위 당시 518 버스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버스 뒤에 드러누웠던 광주 전장연 배영준 활동가는 518 버스를 볼 때마다 5.18이 비장애인들만의 상징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날, 목숨을 잃고 장애를 얻은 시민들을 언급하며, 배영준은 518 버스에는 5.18이 없다고 말했다.

    나도 마음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5.18 당시 부상을 입고 5.18 보상법에 따라 장해등급 판정을 받은 5.18 부상자 2,252명, 그날의 첫 사망자 김경철씨를 비롯한 오월의 장애인 당사자들, 그리고 그날 이후 장애를 입게 되었음에도 끝내 떳떳함을 잃지 않았던 광주시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들을 생각하며 지금의 광주를 바라보면 한 없는 수치심이 밀려온다. 그들이 만약 살아있다면, 그들이 지금 이 순간 광주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만나 무어라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우리는 그들에게 이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는 시내버스의 65.2%에 당신들은 탑승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이 도시가 5.18을 기리기 위해 만든 518 버스가 죄다 차별버스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종종 그들의 질문을 마주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나는 답을 찾지 못했지만, 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수도권 지하철과 광주 금남로에서 그들에게 들려줄 대답을 찾아냈다. 마치, 학생들의 시위에 응답했던 1980년 5월의 광주시민들처럼.

    * 지난 칼럼 링크 <ILO 사무총장 선거,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필자소개
    광주청년유니온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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