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권이냐, 재건이냐?
    진보운동 앞의 두 갈래 길
    [기고]문 5년, 윤 5년과 사회운동④
        2022년 04월 09일 01: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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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원 씨의 기고 글 <문재인 5년, 윤석열 5년, 그리고 사회운동 과제> 마지막 4번째 글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견과 토론 글은 환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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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민주당 면죄부는 안돼, 윤석열 비판은 정확해야”

    어디 가서 진보 사회운동가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시대다. 요즘 진보는 위선의 대명사고, 사회운동가는 무능과 무용의 상징이다. 솔직히 반박할 말이 없다. 참여연대, 민변, 민주노총 같은 네임드 진보단체의 거물들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거 들어갔다. 진보단체들은 소득주도성장, 대북정책, 검찰개혁 등 정부 핵심 정책을 지지했다. 문재인 정부와 함께 진보가 쓸려 내려가는 게 이상치 않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에서 진보는 어떨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문 정부와 공유했던 정책과 지향을 그대로 가지고 윤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오욕의 평가를 뒤집는 ‘복권’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문 정부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냉정하게 평가한 후에 이전과 다른 지향과 정책으로 윤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지향과 정책의 토대를 다시 쌓는 ‘재건’ 프로젝트라 부를 수 있다.

    갈래 길은 당장 두 달 후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등장한다. 윤 정부는 인상 수준을 최저임금위원회에 맡겨두고, 암묵적으로 물가나 기업 사정을 강조하는 말만 흘릴 것이다. 노동계를 포함한 진보 진영은 당연히 대폭 인상을 요구할 것이다. 여기에 호응하지 않는 정부를 향해 ‘반노동 정권’ 프레임도 들이밀 것이다.

    하지만 진보 진영의 “무조건 최대 인상” 전략은 문 정부에서 이미 실패로 검증되었다. 지난 5년간 인상률은 로켓처럼 치솟았다 자유낙하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였다. 결과적으로 이전 정부보다 많이 인상되지도 않았다. 노동분배율을 높여서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소득주도‘성장’도 없었다. 최저임금제도의 무리한 운용으로 제도의 안정성만 훼손했을 뿐이다. 진보운동도 이런 잘못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그랬기에 지난 몇 년간 ‘최저임금 1만원’ 주장이 쏙 들어갔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보수 정부를 상대하려면, 왕년의 그 ‘진보’의 진영을 모으는 것이 수월하다. 2022년과 비교되는 2017년을 복권하려 들 것이다. 진보 진영의 관성은 갈래 길의 첫 번째 길로 향한다. 물론 이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진보 진영에 필요한 건 국민경제 전반의 사정을 아우르는 최저임금 캠페인이다. 최저임금과 직접 맞부닥치는 자영업은 2년간의 코로나 사태로 그로기 상태다. 다만, 최근 십수 년간 볼 수 없었던 물가 상승률로 인해 최저임금의 실질 구매력은 크게 하락해 있다. 제약 조건이 더 강해졌는데, 인상 필요성은 도리어 커졌다. 무슨 의미일까? 최저임금제도만으로 저임금 계층의 실질 소득을 증가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제도를 남용하기보단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마이너스 근로소득세라 할 근로장려금(EITC)부터, 임금 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일자리를 늘리는 상위 소득 노동자의 연대임금/연대고용 정책까지, 복합적 방법이 논의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방식의 해법을 찾는 것이 ‘재건’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대북 정책과 한미일 동맹을 두고도 올해 확연하게 두 갈래 길이 나뉠 것이다. 윤 정부는 북한 핵무기에 관해서는 완전한 폐기(CVID) 원칙을 강조했다. 반면 북한은 올해 곧바로 핵실험이나, 핵탄두 미사일 실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 이전 보수 정부에서 다섯 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바 있다. 윤 정부의 대응 전략은 전통적인 한미일 동맹 강화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전략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중심축인 일본과의 관계 회복이 필수적이다. 미‧중 갈등에서도 문 정부 때와 달리 미국 측에 더 우호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진보 진영은 전통적으로 이런 정부 대응에 비판적이었다. 민족주의 운동은 “반통일 정권 규탄”이란 구호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 민주당 친화적 지식인들은 ‘NO 재팬’ 운동 시즌2를 반정부 반보수 투쟁으로 이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문 정부가 방치한 위안부, 징용노동자 문제는 새 정부가 일본과 관계 변화를 모색할 때 화약고가 될 수 있다. 민주당과 사회단체들은 문 정부의 정책을 복구해 윤 정부를 비판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문 정부 식 반일 친북 외교가 국익이든, 민주주의든, 아니면 세계평화든, 어떤 점에서라도 사회에 이바지한 바가 있었을까?

    문 정부 대북정책은 파탄지경이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남북연락사무소 폭발 같은 만행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대일 외교도 마찬가지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폐기된 것도 아니고 유효한 것도 아닌 상태며, 징용노동자 소송은 판결대로 하라는 무책임한 이야기만 던져두었다. 한일 관계는 말 그대로 최악이다.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문 정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민족주의 열광에 여러 나라의 시민들만 피해를 봤을 뿐이다. 윤 정부를 상대로 문 정부의 대북정책, 대일정책을 복권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진보 진영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세계화 시대의 국제 규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대외 정책을 이야기할 때가 됐다. 우선, 북한이 ‘백두혈통’ 권력을 지키겠다고 핵무기에 집착하는 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반미’ 관점에서 북한을 옹호할 게 아니라, 유엔이 정한 규칙 정도라도 준수하라고 북한에 요구해야 한다. 미‧중 갈등 대응에도 전통적 ‘반미’ 관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냉전은 끝났고, 과거의 사회주의 진영은 문명적으로 진보하지 못했다. 시진핑의 중화 민족주의에 입각한 대외팽창은 중국 내부의 독재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홍콩 사태나 대만 압박에서 나타났듯 동아시아 민주주의까지 위협한다. 미국의 질서가 대안은 아니지만, 중국의 질서는 현재보다 퇴보다. 이런 상태에서 반미가 우선이란 주장은 세계를 더 위태롭게 만든다. 진보의 ‘재건’은 냉전 시대의 반미 관념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두 갈래 길은 민주주의 관련한 여러 쟁점을 두고도 나타날 것이다. 다시 촛불 집회를 열 것인가, ‘검수완박’ 식의 검찰 개혁을 요구할 것인가 등등. 나는 이 쟁점들을 앞선 세 기고 글에서 살펴본 바 있다. 진보 진영은 여론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행하는 게 민주주의라고, 대통령이 마음껏 권력을 휘둘러 개혁 정책을 집행하는 게 진보라고, 검찰을 대통령의 부하로 만드는 게 민주적 통제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론의 지배, 제왕적 대통령, 사법을 이용한 통치는 민주주의를 도리어 타락시킨다. 문 정부는 이런 타락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날 것 그대로 보여줬다.

    윤석열 정부는 진보의 전통적 정부론과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나 법치주의는 그렇게 깊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윤 정부를 문 정부와 민주당 식의 민주주의, 진보 진영이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를 가지고 비판할 수는 없다. 문재인‧민주당 정부의 복구는 진보가 아니라 퇴보다. 앞선 세 기고 글에서 주장했듯 진보의 민주주의관을 쇄신하는 ‘재건’이 절박하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진보의 관성은 문재인‧민주당의 복권이다. 사회운동은 그 복권의 선봉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의 자유, 평등, 풍요는 그만큼 후퇴할 것이다. 벌써 그럴 조짐이 보인다. 진보의 관념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재건’의 필요성은 진보 내부에서 아직은 인정받지 못한다. 오히려 조롱이나 억압의 대상이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15년 가까이 일했던 단체에서 나와야 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기존의 진보에 환멸을 느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수 탓’이란 명분으로 진보의 결함을 봉합할 단계는 한참 지났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나라를 재건하면서 일군의 지식인들이 ‘회한의 공동체’라 불리는 집단적 반성 작업을 했다. 그들은 일본의 진보적 재건을 위해서는 군국주의화를 막지 못한 무능과 비겁함을 먼저 자책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회한의 공동체’는 더 강한 제국으로 복권해 원한을 ‘복수’로 갚으려는 극우적 흐름을 견제했다. 전후 재건이 평화헌법 아래서 이뤄지도록 만든 중요한 힘이기도 했다.

    나는 2022년의 한국 사회에도 이와 같은 집단적 회한(뉘우치고 한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의 결함이 문재인 시대를 거치며 처참할 정도로 드러났다. 장기적 시야에서 한국 사회의 제대로 된 진보를 재건하려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그 결함을 해결하지 못했는지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은 이전과 달라야 한다. 지금까지 네 편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상의 내용은 졸저 <대통령의 숙제> 일부였다. 책을 참조하면 좀 더 다양한 분석을 접할 수 있다.

    필자소개
    연구 활동가, <대통령의 숙제>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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