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인을 만나다
    [컬렉터의 서재] 의미와 가치의 공유, 사인 수집
        2022년 04월 05일 10: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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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우연히 알게 된 컬렉터가 있다. 그는 부산에서 50년간 떡살을 수집해왔는데, 그간 수집한 떡살이 1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떡살을 꾸준히 공부하여 이미 몇 권의 책을 출간하는 등 지금 한국 최고의 떡살 전문가가 되었다. 최근에는 목각 인형 수집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고 있다.

    이 ‘천 개의 떡살로 남은 사내’처럼 수집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 물건들을 수집한다. 컬렉터라고 모두 같은 컬렉터가 아니라서 다 자신의 전문 수집 분야가 있다. 이렇게 사람들 취향이 다 다르다 보니 수집 대상이 되는 품목 종류도 생각보다 다양하다. 토비 월른(Toby Walne)은 자신의 책 『101 Extraordinary investments』에서 수집 물품을 101가지로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수집에 대해 지나치게 투자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집 목록에는 대략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만화책, LP판, 박제품, 우표, 바비 인형, 올드 카, 사인, 카메라, 담배카드, 레고, 영화 포스터, 훈장, 화폐, 시계, 러시아 인형, 만년필, 지도, 사인, 월석, 흔들 목마, 부족 예술품, 와인, 밀리터리 물품, 청바지, 초판 책, 축음기, 영화 소품, 지팡이, 스피커, 빈티지 엽총, 엽서, 분재, 돌(수석), 오래된 변기 등……

    도대체 수집 대상이 안 되는 게 뭐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래된 변기’를 모으는 사람도 웃기지만, 101가지 목록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유명 인사의 머리카락’이었다. 이런 것들도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책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유명 인사 머리카락 컬렉터로 코네티컷 대학의 대학기록보관소장 레즈니 코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나폴레옹, 링컨 대통령, 아인슈타인, 마릴린 먼로를 포함해 115명 이상의 머리카락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심지어 유명인사의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조언해 주고 있다. 이런 식이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머리카락 수집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투자용 머리카락을 수집하려면 교활함과 속임수가 있어야 한다. 유명 인사의 이발사와 친구가 되거나 스타에게 머리카락을 조금만 달라고 직접 부탁하라.

    이 책에서 소개한 수집 물품 목록을 보면 접근하기 쉬운 것이 있는가 하면 매우 어려운 것들도 섞여 있다. 이중 아무래도 일반인들이 비교적 손쉽게 입문할 수 있는 것은 구하기 쉽고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일 텐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표, 수석, 엽서 그리고 사인 정도가 될 것이다. 이번 글은 이런 대중적인 수집품 중 하나인 ‘사인’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집에 유명인의 사인 한두 장쯤은 다 있을 것이다.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고 가자. 흔히들 ‘사인’과 ‘싸인’을 섞어 쓰는데, 표준어는 ‘사인’이다. 그래서 펜도 ‘싸인펜’이 아니라 ‘사인펜’이 맞다. 우리 말 ‘사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얼핏 생각하면 ‘sign’같지만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sign’은 동사이기 때문이다.

    “Would you give me your sign?” 혹은 “May I have your sign?”

    이렇게 쓸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걸 콩글리쉬라고 한다. ‘sign’의 명사형으로 쓰이는 단어로는 두 개가 있는데 ‘sign’에서 파생된 ‘signature’와 ‘autograph’라는 단어이다.

    그럼 ‘signature’와 ‘autograph’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이렇다. ‘signature’는 보통 계약서나 청구서 등에 사용되어 법적 효력을 가지는 사인을 말한다. 서류나 편지 말미 등에 하는 사인을 말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autograph’는 연예인, 가수, 작가 등 유명인의 사인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signature’는 서명에 가깝고, ‘autograph’는 사인에 가깝다. 물론 요즘엔 서명과 사인을 구분하지 않고 다 ‘사인’이라고 써버리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signature’와 ‘autograph’의 차이를 보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어떤 유명 스타가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때 호텔 카운터 직원이 체크인 서류를 내밀며 ‘여기 사인해 주세요’라고 할 때는 ‘signature’가 되는 것이고, 그 직원이 그 스타를 알아보고는 ‘영광입니다. 저에게 사인 하나 해 주실래요?’라고 할 때는 ‘autograph’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인을 왜 받는 것일까?

    몇 년 전 ‘현석’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수업 종강 후 찾아와서는 쭈뼛거리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웬 사인?

    현석이는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들 사인을 자기 수첩에 다 받고 있다며 그걸 나에게 보여준다. 수첩에는 이미 여러 장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사인을 해주고 나서 물었다.

    “이런 거는 왜 모으니?”

    현석 답.

    “저는 기록 남기는 걸 좋아해요”

    그렇게 사인을 받은 현석이는 고맙다며 자기가 수집한 1970년대 우표 한 장을 답례로 주고 돌아갔다. 사인에 답례품이라니…..

    [사진] ‘현석이’의 사인첩(왼쪽)과 사인을 받은 후 답례품으로 주고 간 기념우표 한 장(오른쪽). ‘현석이’는 왜 이런 사인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도대체 사람들은 왜 사인을 받는 것일까?

    인증샷 같은 것일까?

    기록을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일까?

    컬렉터 중에는 사인 컬렉터들도 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사인을 받을 수 있도록 A4 크기의 두방지와 네임펜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왜 사인을 수집하는지 그들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인터넷에 유명한 사인 컬렉터로 검색되는 이들이다.

    사인 컬렉터 A는 원래부터 수집을 좋아해서 TV, 라디오, 전화기 등 생활사 물품 등을 수집하다가 사업이 망해 돈이 없어 더 이상 수집이 어려워지니, 돈이 들지 않으면서 수집할 수 있는 것을 찾다 사인을 발견하게 된 경우이다. 수집 DNA는 어떤 불리한 조건에서도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그는 “사인을 받는데 필요한 것은 버스비 정도의 돈과 튼튼한 다리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인 수집이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시간을 모으는 것이자 역사를 쌓는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또 사인 컬렉터 B는 유명인 사인을 수집하는 보통의 경우와 달리 평범한 이들의 사인을 수집하고 있다. 그는 사인을 통해 개별 개별의 존재들이 가진 사연과 스토리를 수집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사인 밑에 좌우명이나 인생 지침 같은 것을 같이 써달라고 한단다. 그런 다음 그 사인을 한 사람이 자신의 사인을 든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렇게 그는 국내외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숱한 사람들에게 사인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수집이 단순히 ‘사인’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지침’을 수집하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인류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사인 수집의 이유인 셈이다.

    tvN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한번은 출연자들이 사인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유시민 작가가 물었다.

    “사람들은 사인(sign)을 왜 받으려고 할까요?”

    유현준 교수가 답했다.

    “그 사람의 인생에서 사인을 쓴 시간만큼은 자기만을 위해 쓴 시간입니다. 사실 사인을 선물한다기보다 시간을 선물하는 거죠. 저 사람이 나를 위해서 30초, 1분의 시간을 썼다 이거죠.”

    [사진] tvN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사인을 왜 받으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패널들. (방송화면 캡쳐)

    사인을 받고 싶은 이유가 정말 그 사람의 시간을 선물 받고 싶어서일까?

    사인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역사 컬렉터의 생각은 이러하다.

    사인이 그 사람의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라 중요한 뜻을 가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인을 통해 그 사람의 ‘의미’와 ‘가치’를 나누고 싶어서가 아닐까?

    사인은 글이나 기호를 통해 드러난 그 사람 자신, 즉 기호적 분신(分身)이자 그 사람 삶과 인격을 담고 있는 증표이다. 그러므로 사인을 받고자 행위는 그 사인을 통해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공유하고 싶은 열망 같은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이 누구를 지극히 존경하거나 흠모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 사람은 존경·흠모의 대상이 되는 이의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흔적이 담긴 물품들을 가지고도 싶을 것이다. 이것이 지나치면 집착이 되겠지만 말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가 쓴 『모르는 여인의 편지』라는 소설이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열세 살 때부터 앞집에 사는 어떤 작가를 흠모했다. 그녀는 수줍음으로 단 한 번의 애정 표현도 못한 채 문구멍으로만 그를 몰래 관찰하고 가슴 설레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감격한다. 그가 쓴 작품은 모조리 사다가 몇 번이고 읽었고, 나중에는 작품 내용으로 잠꼬대를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데, 임종 직전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마지막 편지를 작가에게 보낸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 고백인 셈이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는 이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나는 당신의 손이 닿았던 문의 손잡이에까지 키스했습니다. 또 당신이 문으로 들어가실 때 내버린 담배꽁초를 주워 가졌습니다. 당신의 입술이 닿았던 물건이니 내게는 소중했던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무슨 구실이든 만들어서 골목으로 뛰어나가, 당신 방의 어느 창가에 불이 켜져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처럼 당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는 당신의 존재를 더 확실히 느끼기 위해서 몇 백 번이나 거리로 뛰어나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작가를 흠모했는지 그 마음이 절절하다. 물론 ‘스토커’라고 그녀를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여인이 보인 집착과 애정 수위를 조금만 덜어내고 낮추면 왜 사인을 받고 싶어하는지의 이유도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이거나 혹은 존경할만한 인물을 만났다고 해보자. 그래서 그의 인품과 가치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방법이 있을까? 제일 손쉬운 것으로는 손을 잡고 악수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가치와 인품을 공감하고 공유한다는 추상적인 의미는 가벼운 신체 접촉을 통해 구체적인 물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잠시 체온을 느끼고 나누는 것, 그것은 공유의 첫 번째 방법이다. 어떤 유명 인사와 악수를 한 후 며칠 동안 손을 못 씻었다는 이야기도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같이 사진을 찍는 방법이 있겠다. 지금 이 만남을 박제해서 길이 간직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 자신이 그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 단계 더 나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가 평소 아끼던 물건, 예를 들면 열쇠고리, 만년필, 안경, 옷 이런 것들을 기념으로 얻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 말고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가장 부담이 안 되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 바로 사인이다!!

    종이 위에 이름과 의미를 담아 써 주는 간단한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이 작은 사인을 통해 ‘해 주는 이’와 ‘받는 이’는 그 크기만큼의 삶과 가치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인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열렬한 팬심으로 받은 사인은 받은 이에게는 큰 감동이 되겠지만, 그것을 써 준 사람의 분신이자 삶과 인격의 총체가 담긴 것이기에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역사가 된다. 사인 하나에는 사람의 인격과 삶만 녹아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집 동기는 비록 다 다를지라도, 사인 컬렉터, 그들은 궁극적으로는 역사를 모으는 사람들이다.

    사인의 내용과 형식

    사인은 불가피하게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담게 되므로, 사인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사인을 받는 형식과 재료 역시 중요하다. 가장 적확하게 인격과 삶의 총체를 표현하고 의미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사인을 종이 위에만 쓰라는 법은 없다. 사인은 자신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과 만났을 때 그 의미나 가치가 배가(倍加)될 수 있다.

    몇 년 전 어떤 사인이 경매에 나온 적이 있는데,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에서부터 선수 전원이 한 사인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인은 어디에 담겨야 사인의 의미가 극대화될까?

    당연히 축구공이다. 그들은 축구 국가대표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인은 축구공에 담겼을 때 그들의 존재 의미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랬을 때 이 축구공은 단순히 팬심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대한민국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이기도 한 것이다.

    [사진]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에서부터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축구공(왼쪽), 팬들이 내민 테니스 공 모양의 사인볼에 사인해주고 있는 정현 선수의 모습(오른쪽)

    몇 년 전 호주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파란을 일으킨 정현에게 테니스팬들이 사인을 요청했을 때 무엇을 내밀었던가? 테니스공 모양의 사인볼이었다. 똑같은 이치로 야구선수에게 사인을 받으려면 그가 투수라면 글러브나 야구공에, 홈런왕이라면 배트와 야구공에 사인을 받아야 한다. 우승한 마라토너에게는 신발이 가장 좋은 사인용지가 될 것이고, 양궁 선수에게는 표적지가, 훌륭한 저술가에게는 그가 쓴 책이 가장 좋은 사인용지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사인 내용과 형식의 아름다운 조화이다.

    지금 뇌물 수수 혐의로 실형을 살고 있고 신구 권력 교체기 사면(赦免)을 둘러싸고 논란이 되고 있는 이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2007년 대선 당시 그가 한나라당 후보로 계명대에서 했던 사인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강연을 전후해 군중들에 둘러싸인 이 후보는 누군가 건넨 1만원권 지폐에 스스럼없이 검정색 사인펜으로 ‘이명박, 5월 25일’이라고 썼던 것이다. 누군가가 종이가 없어 급하게 지폐라도 내밀었을 수도 있었겠고, 후보 역시 대선 기간 중이라 그런 사인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하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물론 이것이 지폐를 위조나 변조한 경우가 아니라 단순히 낙서한 것이므로 현행법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돈에 사인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그것도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돈에 사인하는 것은 품위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1만원권 지폐에 남겨진 이명박 사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삶과 치세기를 돌아봤을 때 가장 완벽한 형식미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이권을 잡은 것이었다’는 비판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 사인이 그 지폐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이명박스러운 사인이다. 어설프게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사인보다는 더 솔직하지 않은가?

    [사진]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지지자가 내민 1만원권에 사인하는 장면.

    나의 사인 컬렉션

    사인에 대한 원론적 이야기는 이만하고, 여기서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사인 몇 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인을 전문적으로 수집하지는 않지만, 역사 자료를 수집하다가 몇 장 섞여 들어온 것들이다. 사인 컬렉터 수준에서 보자면 민망한 수준이다.

    첫째는 마라토너 손기정의 사인이다. 이 사진은 역사컬렉터의 책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에서 이미 한 챕터를 빌어 쓴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만 소개한다.

    손기정의 이 사인은 1936년 8월 9일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 3일 뒤인 8월 12일 현지의 독일인에게 해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인에는 손기정이 경기 종목인 마라톤, 우승 날짜, 그리고 경기 기록까지 꼼꼼히 쓴 다음에, 참가 당시 자신의 공식 이름인 ‘Kitei Son’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쓰고 그 위에 영어로 ‘Kijung Son’이라고 썼다. 이 사인이 더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한글 이름 밑에 영어로 가장 큰 글씨로 ‘KOREAN’이라고 써 놓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일본 대표로 참가하긴 했지만, 이 사인을 통해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외쳤다.

    “나는 누가 뭐래도 한국인이요!”

    손기정 전체 인생에서 이 사인만큼 식민지하 마라토너 손기정의 슬픔과 고뇌를 드러낸 사인이 있을까. 게다가 이것은 한 개인사적 의미뿐 아니라, 당시 식민지 시대 고난과 저항의 한국사 한 단면을 스냅샷처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울림은 더욱 커진다. 시상대에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던 챔피언의 비애와 슬픔이 고스란이 담긴 ‘명작’ 사인인 것이다.

    [사진] 마라톤 우승 후 열린 시상식에서 고개 숙인 챔피언 손기정(왼쪽), 우승 3일 후 현지인에게 해준 손기정의 친필 사인이다. (오른쪽)

    두 번째 사인은 1945년 해방 직후 발행된 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독립행진곡’ 악보에 담긴 사인이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로 시작하는 가사와 악보가 선명한 ‘독립행진곡’은 총 4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악보 뒷면에 편집인 박용구는 “이 곡은 광복 직후 발표된 민족적 가곡”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악보도 나름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은 그 표지에 이승만 박사의 “Syngman Rhee”라는 영문 사인과 작곡가 현제명의 미국명 ‘Rody Hyun’의 사인이 친필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날짜는 1946년 8월 2일로 되어 있다. 당시 정세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으로 열린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미소의 의견 대립으로 1946년 5월 무기 휴회된 직후, 이승만 박사가 6월 4일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이에 대응하여 7월 여운형, 김규식 선생이 좌우합작운동을 갓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국가냐 통일국가냐 양 갈래 길 앞에 서 있었다.

    이 악보도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 현제명 사인보다 백범 김구 사인이 같이 있었다면 그 역사적 가치는 훨씬 컸을 것이다. 1945년 12월 말부터 시작된 반탁운동 당시 같은 배를 탔던 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의 길을,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의 길을 걸으며 결국 화해할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리게 된다. 1948년 단독선거를 앞두고 김구가 남북협상을 추진할 당시, 이승만은 “크레믈린궁의 신봉자”라며 노골적으로 김구를 ‘빨갱이’ 취급했고, 김구는 이승만과 같은 단독정부 수립론자들을 “태양을 싫어하는 박테리아”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을 퍼부었다.

    둘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갈라지기 전의 시점이었으므로 이승만과 김구 두 인물의 사인이 이 악보에 담겼다면 더욱 의미가 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그러나 김구가 아니라 현제명의 사인이 담긴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해방 정국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인 이승만이 독립행진곡 악보에 쓴 이 사인 하나는 희망과 우려가 교차했던 해방 정국의 그 시대상을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당시 이승만은 해방의 감격을 담은 이 노래 악보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사인을 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사진] 해방 직후 제작된 독립행진곡의 악보이다. 악보 표지(왼쪽)에 이승만 대통령과 현제명의 영문 친필 사인이 적혀있다. 오른쪽은 악보의 첫 장이다. (박건호 소장)

    역사 컬렉터가 소개할 마지막 사인은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을 선고했던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사인이다. 이 사인이 다른 사인보다 특별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과거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당대의 역사를 증언하기 때문이고, 더더욱 특별한 것은 보통의 경우처럼 이 사인은 컬렉터로서 사인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코디네이터로서 사인을 기획해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사인은 다른 수집품과 달리 코디네이트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유명인들은 자신의 고유한 문구를 그대로 써주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무엇을 써줄지를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

    때는 2017년 12월 30일.

    어찌 어찌 인연이 되어 그를 한 까페에서 만났다. 두 시간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질 무렵에 나는 사인을 정중하게 부탁드렸다.

    만나기 전부터 많은 생각을 했다.

    컬렉터로서 그분의 사인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 후대에 남기고 싶은 욕심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그리고 어떤 문구를 써야 역사적 가치를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먼저 그분의 사인을 받기에 가장 좋은 곳은 어딜까?

    한번 생각해보시라.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어디다 받고 싶으셨겠는가?

    내가 선택한 것은 두 장의 신문이었다. 하나는 2017년 3월 10일 헌재 판결일 경향신문에서 발행한 특별판(일종의 호외), 그리고 또 하나는 3월 11일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신문이었다. 중앙일보는 그날 1면 전체에 판결문 요지를 실어 디자인 측면에서 나름 신선함을 주었다. 이 신문 위에 사인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곳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헤어 롤에다 받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정한 다음 고려해야 할 것은 문구이다.

    어떤 문구가 좋을까?

    “뭐라고 써 드릴까요?”

    그분이 물어왔다.

    여러분들이라면 무슨 글을 청하고 싶으신가?

    빙고!

    여러분 생각과 역사 컬렉터 생각이 통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주저 없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을 써 달라고 청했다. 그래야만 이 사인은 하나의 완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인물, 사인 문구, 사인 용지가 삼위일체가 되어 서로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 끝에 사인 받은 두 장의 신문은 얼마 후 액자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컬렉터의 다락방에 잠자고 있다. 이 사인은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후의 촛불혁명 역사를 당당히 증언하는 사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5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난 후 어느 현대사 박물관에 걸려 전시되더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현대사 자료가 될 것이다.

    [사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이를 크게 보도한 신문들이다. 이 신문지는 탄핵 당시를 증언해 줄 사인지로는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인

    말 나온 김에 우리나라 사인 역사를 잠시 살피고 글을 마무리하자. 역사 문외한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도장만 썼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림이나 서예작품을 쓰고 낙관을 찍긴 하지만, 일상적인 관문서라든지 토지나 노비 매매문서라든지 일상생활 속에서 사인을 무수히 사용하였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사인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사인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signature’로서의 사인이지 ‘autograph’로서의 사인을 말하는 것은 아님은 분명히 하자.

    ‘autograph’로서의 사인은 아니지만 ‘signature’로서의 사인 역시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흥미롭게도 조선시대에도 사인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게다가 그 종류도 하나가 아니라 크게 세 종류였다.

    첫째는 ‘수결(手決)’이라는 이름의 사인(Sign)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인과 가장 모양이 유사하다. 양반 신분 이상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 자신만의 독특한 서명으로, 이 수결은 ‘一心(일심)’ 두 글자를 자기식대로 쓴 것이다. 즉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의 기호를 더하여 자신의 수결로 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결은 곧 사안(事案) 결재에 있어서 오직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아니하는 공심(公心)에 있을 뿐이라는 의미로 사인한 것이다. 그래서 이 결재를 ‘일심결(一心決)’이라고도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런 방식의 결재는 없고 서압만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결은 조선시대에 한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흥미로운 낙서가 실려있다. 낙서같이 일(一)자를 반복적으로 쓴 페이지가 있는데, 이것은 낙서가 아니라 수결을 연습한 흔적이다. ‘일심’이라는 글자로 수결을 연습했던 장군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사진] 왼쪽은 조선 기 양자 입양 문서로 붉은색 테두리한 부분이 이조 참판과 이조 좌랑이 한 수결이다. 일심이라는 한자를 자기 개성에 맞게 쓴 것이다. (박건호 소장). 오른쪽은 난중일기의 한 부분으로 장군의 수결 연습 흔적이다. (현충사 소장)

    두 번째는 ‘수촌(手寸)’이다. 수촌은 주로 글을 모르는 평민이나 노비들이 사용했던 사인으로 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대고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의 길이를 그림으로 그린 다음 가운데 한자로 ‘左寸(좌촌)’이라 썼다. 드물게는 오른쪽 손가락을 이용한 ‘右寸(우촌)’을 같이 표기한 경우도 있다.

    [사진] 왼쪽은 조선 후기 문서로 붉은색 테두리 부분에서 수촌(좌촌)과 수장(우장)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붉은 테두리 왼쪽에는 수결도 보인다. (광산 김씨 후조당종가 소장) 하지만 왼쪽 문서에 보이는 수촌처럼 손가락 모양을 직접 그리기보다는 오른쪽 사진처럼 우물 정자 모양으로 단순히 길이만 나타낸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수장(手掌)’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평민 이하 남성들이 수촌을 주로 사용했다면, 수장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이 경우 오른손을 사용하여 손바닥을 대고 그리거나 먹물을 묻혀 손바닥을 찍기도 했다. 이런 손그림을 보고 역사 문외한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낙서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낙서가 아니라 사인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수장이 실제 손 크기에 맞게 그리는 것이 원칙이었다면, 문서 위에 그려진 손 크기가 어쨌든 실제 사람의 손 크기와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문서들에서는 유난히 작게 손이 그려진 경우들이 있다. 무슨 이유일까?

    보통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수장이 형식화되면서 실제 손을 대고 그리지 않고 손모양을 대충 그려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심지어 개 발바닥, 고양이 발바닥 크기로 그려진 것들도 있다.

    [사진] 옛 문서 속 수장 중에는 터무니없이 작게 손이 그려진 경우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 손이라기보다는 그냥 형식적으로 손을 그려 놓은 것이다. 사람의 손이 저렇게 작을 수는 없다.

    손이 작게 그려진 두 번째 이유는 성인이 되기 이전의 어린 소녀들이 문서에 수장을 했기 때문이다. 즉 어른이 아니라 어린 소녀들의 손이기 때문에 그 수장도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런 문서들을 여럿 소장하고 있다. 아마 이 소녀들의 수장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인일 것이다. 소녀 수장이 담긴 문서 하나를 소개한다.

    [사진] 왼쪽은 1805년 생활고로 스스로를 노비로 파는 문서이다. 붉은색 테두리 부분에 ‘자매소녀 순심’이라는 이름이 보인다.(박건호 소장) 오른쪽은 문서 속의 손의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필자의 손을 순심이 손 옆에 견주어 본 사진이다. 순심이는 10대 초반의 소녀였을 것이다.

    때는 1805년 가경10년 을축년이었다. 정조가 1800년 급서하고 왕위를 계승한 순조 연간이었다. 흔히 세도정치기로 분류되는 시기로 ‘삼정의 문란’이라고 표현되는 지배층의 수탈이 극심하여 민생이 어려웠다고 하는 그때다.

    이 문서에서는 소녀 순심(順心)이의 생활고를 ‘餓死(아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아사지경(餓死之境)’의 준말이다. 이런 생활고의 이유는 순심이의 엄마가 얼마 전에 아기를 낳았기 때문인데, 그 다음 부분은 해석이 딱 떨어지지 않는다. ‘母今方解胎救療無路餓死(모금방해태구료무로아사)’에서 ‘구료(救療)’를 ‘궁핍에서 벗어나 허기를 달램’으로 해석해 ‘어미가 지금 막 출산을 하여 가난을 벗어나고 허기를 달랠 길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으로 볼 수도 있고, ‘구료(救療)’를 ‘가난하여 병을 치료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돌보아 병을 고쳐줌’ 정도로 해석하여 ‘어미가 출산 중 병이 들어 몸져 누워 치료받지 못해 굶어 죽을 지경’이 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엄마가 애기를 낳은 직후 순심이 집안이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소녀 순심이는 부득이 이성원(李聖元)이라는 양반집에 자기를 팔게 된다. 이렇게 경제적 처지 때문에 평민이 노비가 되었을 때 이를 ‘구활노비(救活奴婢)’라 하고,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노비로 파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자매문기(自賣文記)’라고 부른다. 그 가치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순심이가 팔린 가격은 ‘7관전(柒貫錢)’이라고 적혀있다.

    이 문서 왼쪽에 쓴 ‘자매 소녀 순심’이라는 이름 밑에 순심의 수장이 보인다. 이 손의 크기는 실제 손을 대고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가 정말로 어린 소녀의 손 크기다. 이 문서에서 순심의 아비는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의 강요나 주위의 부추김 때문인지 자신의 결단인지 알 수 없지만, 어린 소녀 순심이는 이렇게 자기 가족의 생존을 위해 노비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문서에 찍힌 수장 사인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인이라고 한 것이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자신을 노비로 팔면서 찍었던 수장 사인을 보면서 삶이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또 가난이 무엇인지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사진] 가난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노비로 팔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꽤 많았다. 그래서 이런 자매문기들을 보면 슬퍼진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선후기 안랑이(安娘伊), 복쇠(福釗)와 복섬(福蟾 부부, 박종숙(朴宗叔) 가족, 장수옥(張水玉)의 자매문기이다. (순서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대전시립박물관, 재령 이씨 영해파 문중 소장)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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