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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樹話)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컬렉터의 서재] 생계형 컬렉터로 살아가는 방법
        2022년 03월 18일 10: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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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집하려면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수집은 부자들이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것이 궁금한 모양이다. 컬렉터에게 늘 따라다니는 질문들인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수집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건 맞다. 누군가가 귀한 자료를 거저 주지는 않을 것이고, 길 가다 우연히 줍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수집이 부자들만 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하고 고급진 취미인 것은 아니다.

    돈 없이도 수집을 한다?

    잘 이해가 안될 것이다.

    수집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 주변에 생각보다 많은 수집가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경제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컬렉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컬렉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관심과 열정이지 경제력이 아니다. 경제력이 충분치 못하다면 용돈을 최대한 줄여서 수집하면 된다. 담배 끊고, 술 덜 마시고, 골프 안 하고, 친구 덜 만나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생활비를 아끼고 아끼면서 오랫동안 자료들을 수집해 왔다. 그러면 당장은 표가 나지 않겠지만, 한해 두해 시간이 쌓이면서 컬렉션이라고 부를만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결국 컬렉션을 완성해 가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되는 세월의 힘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컬렉션이 비록 재벌가 삼성 리움미술관이나 전형필 간송미술관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수집가 자신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하나의 우주가 되는 것이다.

    [사진] 모든 수집가들은 자신들만의 컬렉션을 구축해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긴다.

    컬렉션은 결코 완성된 형태로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컬렉터 자신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컬렉터이다.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궁핍은 괴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다. 어느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세계에는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이 쉬며 치유 받고 꿈꾸며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또 궁핍한 삶의 괴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오직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몰입하는 인간의 순수함이 자리한다. 컬렉션의 세계는 바로 그런 곳이다.

                                                      -김치호, 『오래된 아름다움』(아트북스, 2016) 중에서

    이번 글은 나와 같은 생계형 컬렉터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글이다. 마른 수건을 쥐어 짜듯 컬렉터가 어떻게 비용을 마련하는지에 대한 것인데, 이를 읽어보면 컬렉터의 생활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 컬렉터가 무조건 수집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자료들을 팔면서 어떻게 자신의 컬렉션을 능동적으로 꾸며 나가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컬렉터는 비어있는 땅을 일구어서 자신의 꽃밭을 만들어가는 정원사와 같다. 하나의 완성된 생태계를 위해서 이쪽 나무들을 저쪽으로 옮기고, 어떤 수종은 새롭게 사서 심기도 하고,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나무는 때로는 베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서 땀 흘리고 가지 치고, 물 주고, 잡초 뽑으며 자신이 꿈꾸는 대로 정원을 디자인해가는 것이다. 처음에 만든 모양이 비록 어설프고 보잘것없을지라도, 끊임없이 사랑을 쏟으며 가꾸고 노력하면 어느덧 최고의 정원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이런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모든 컬렉터들에게 경의를!

    그리고 그들의 노력과 인내에 축복을!

    박물관에 유물 팔기

    박 선생이 한양 잠실에 살 때였다. 그는 옛날 물건이나 종이쪼가리들 모으기를 좋아하여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점차 세월이 흘러 방 하나가 그런 것들로 채워지고 어지럽혀지자 그의 아내는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쓸모도 없는 그까짓 종이쪼가리를 모아서 무엇하오?”

    박 선생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나중에 조그만 역사 자료관을 하나 만들고 싶으나 아직 수준이 보잘 것 없소”

    “그것들을 모으면 밥이 나와요? 옷이 나와요?”

    “허허, 이것이 재미있는데 어쩌겠소.”

    “그 돈으로 맛나는 음식이나 하늘하늘한 새옷이라도 한 벌 사주면 좋을 텐데…..

    그것이 원망스럽소”

    이 말은 들은 박 선생은 살펴보던 자료를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수집가로 30년을 기약했는데, 이제 고작 15년인 걸…..”

    하고 문 밖으로 휘익 나갔다. 그는 종이쪼가리를 모으는 것이 꽤나 의미 있는 일이고, 돈을 낭비하는 것이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먼저 친구 변 부자(富者)를 찾아가 돈을 좀 빌리고자 했으나 변 부자는 친구 사이에 돈 거래는 우정을 상하게 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박 선생은 골똘히 돈벌이할 일이 없을까를 생각하였다. 제주도로 내려가 말총이라도 살까, 안성에 내려가 제수용품들을 사 모을까.

    그러나 그는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고민을 거듭하던 차에 박 선생은 우연히 신문에 실린 광고 하나를 보게 되었다. 광화문통에 무슨 박물관을 새로 짓는데 유물을 많이 사들인다는 것이었다. 무슨 결심을 했는지 박 선생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때는 이명박 치세기가 끝나가는 2012년 봄이었다…..(하략)

                                                                   -『허생전』의 이본 중 하나인 『박선생전』에서

    내가 그동안 많은 자료를 수집했던 이유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역사 자료들을 직접 보여주는 재미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업이 훨씬 알차고 풍부해진다. 어쩌다가 수업 중 학생들에게 “이 자료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는데 박물관에 팔아버려서 지금은 보여줄 수가 없어 아쉽네.” 이렇게 말하곤 하는데, 그러면 학생들은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박물관에 자료를 판다고?

    사실이라고 해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어떻게 박물관에 자료를 팔 수 있단 말인가?

    학생들에게 박물관은 자신들과 멀리 동떨어진 곳에 있는 신비로운 성전(聖殿)이다. 그러다 보니 국립이나 공립 박물관의 경우 정작 그것들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박물관은 공공시설로, 국민들의 유물을 보관하고 관리해주는 곳 아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유물을 보러 박물관을 찾는 것은 박물관 ‘그들의’ 유물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이 관리해주고 있는 ‘우리의’ 유물을 보러 가는 것이다. 유물의 주인은 국민 모두이다. 그러므로 박물관 가는 것은 일상이 되어야 하고, 그 자세 또한 매우 당당해야 하는 것이다.

    [사진] 역사 컬렉터는 수업에 활용할 목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수업을 위해 수집을 하는 건지 아니면 수집을 위해 수업을 하는 건지 헷갈리는 지경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역사 컬렉터가 박물관에 역사자료를 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강의 중 학생들이 가졌던 궁금증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박물관에서 유물이나 사료들을 획득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번째 기증이 있을 것이다. 어떤 수집가가 평생 수집한 유물이나 자료을 흔쾌히 기증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박물관은 기증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박물관의 특정 공간에 새겨준다. 다수의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있는 ‘기증자의 벽(Donation Wall)’이 그런 곳이다. 기증자가 맡긴 자료들의 수준이 높고 그 수량이 많으면 아예 따로 방을 마련해 전시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박병래 기증실, 이홍근 기증실같은 것이 예가 되겠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위탁이 있다. 소유권은 위탁자가 가지되, 그 자료의 보관과 관리 혹은 전시를 박물관이 맡아 하는 방법이다.

    그 다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구입이다. 기증이나 위탁만으로 박물관이 채워질 수가 없으므로 박물관들은 상당량의 유물을 경매를 통해서나 공개 구입을 통해 직접 사들인다. 오래된 박물관도 그렇지만, 새로 신설되는 박물관의 경우에는 유물 대부분은 구입을 통해 획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물관은 정기적으로 유물 구입 공고를 홈페이지나 신문에 낸다. 이 유물 구입을 위해 매년 일정한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 자료나 유물은 소장자가 자주는 아니지만 관심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박물관에 팔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자료들이 박물관이 원하는 수준의 가치를 가져야 하는 건 기본 전제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자료를 수집한 것은 오로지 수업 시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수집의 주대상은 수업 시간에 보여줄 수 있고, 관심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자료 중심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자료라도 수업내용과 관련이 없으면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자료들을 판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원래 컬렉터들은 수집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났다. 그런데 살다보면 꽤 큰 돈 필요한 일이 종종 생기기 마련이다. 자식 학업 비용이라든지, 대출금을 갚는다든지, 집을 구입한다든지…..

    마침 그때 나는 새로 신설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유물을 구입한다는 신문 공고를 보게 되었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였다.

    기증을 한다면 그만큼 좋은 그림은 없겠지만, 살림이 그리 넉넉지 못한 생계형 컬렉터 처지라 결국 자료 일부를 매도하기로 결심했다. 아내에게 이런 종이쪼가리를 수집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고, 돈을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한번 보여주고도 싶었다. 내가 관리하기 힘든 자료나 비슷한 자료가 두 개 이상 있는 경우, 수업 시간에 활용하기 힘든 자료, 내게 있는 것보다 박물관에 가는 게 낫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며칠이 걸렸다. 자료 선별 끝난 이후의 과정도 차근차근 따라가보자.

    자료 선별이 끝나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박물관이 정한 양식에 따라 자료매도신청서와 매도대상자료명세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 문서에는 매도하고자 하는 자료의 이름과 수량, 크기, 시대, 소장 경위, 그 자료 내용, 요구액 등을 적고 사진자료도 첨부해야 한다. 수백 점 자료 각각에 대해 이런 명세서를 작성해야 했으니 나는 다시 몇날 며칠 이 일에 매달렸다. 힘들다는 생각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했는데, 판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다시 살피며 정해진 형식에 맞추어 정리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명절을 맞아 자식들에게 새옷을 사 입힐 때의 뿌듯함 같은 것이랄까. 어쩌면 입양 보내는 자식에 대해 갖는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사진]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자료를 매도할 당시 제출한 자료명세서 일부이다. 이런 식으로 자료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작성해 박물관에 제출하면 박물관은 그 자료들에 대한 검토를 시작한다.

    명세서와 신청서 작성이 끝나면 이를 이메일로 박물관에 접수시킨다. 물론 서류를 우편으로 접수할 수도 있다. 박물관은 마감일까지 접수된 서류들에 대한 검토작업에 들어간다. 구입할만한 자료들을 1차로 거르는 작업인데, 일종의 서류심사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1차로 선정된 자료의 소장자에게 박물관은 실물 접수 대상을 통지해주게 되고, 소장자는 정해진 시간에 실물자료를 챙겨 박물관에 가서 실물 자료를 접수하고 접수증을 받게 된다.

    이후 박물관에서는 자료구입평가위원회 및 자료구입심의위원회가 실물 자료를 놓고 그 자료를 평가하고 심의해 최종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구입 가격도 결정된다. 이 결정 내용을 놓고 매도 희망자와 박물관은 전화로 의견을 조율한다. 매도자는 박물관이 제시하는 구입 희망 가격을 보고 최종 매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박물관이 제시하는 가격에 팔겠다고 하면 최종 매도가 결정되는 것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격과 너무 차이가 나 그 가격에 팔지 않겠다고 하면 매도가 무산되는 것이다.

    이렇게 매도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난 다음 마지막으로 박물관을 방문한다. 이번 방문은 매도가 최종 결정된 자료에 대해서는 매도 계약서를 작성하고, 매도가 성사되지 않은 자료는 반환받기 위해서이다. 계약서를 쓰고 이제는 단순 자료가 아니라 유물로 신분이 바뀐 자료들을 두고 박물관을 나설 때의 마음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서운함과 섭섭함이 있다. 이로써 몇 달간 이어진 매도 과정이 완결되고 얼마 후 매도한 자료에 대한 돈이 통장 계좌로 입금된다. 나는 이때 받은 돈의 일부로 아내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남편의 자료 수집에 대한 아내의 잔소리도 현저하게 줄었을 것이다. 그때 매도한 비용이 궁금하실 것이다. 대략 새 차 한 대 가격 정도라고 해두자.

    이때 매도한 자료 수백 점 중에 기억나는 것으로는 해방 직후 찬탁과 반탁 전단지들, 소위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 직후 일제가 만든 기념 사진첩,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들,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이 제작한 태극기, 한국전쟁 중 미군이 제작한 포스터, 한국전쟁 중 박동기에게 발급된 야간통행 허가증,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벽보, 1986년 보도지침을 폭로한 『말』 특집호 등등….

    2013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개관한 직후 관람차 박물관을 찾았다. 얼마 전 매도했던 자료들이 전시실 곳곳에서 나를 맞았다. 반가운 자료들을 보면 나는 마음속으로 인사를 던지고 이런 저런 말들을 중얼거린다.

    박동기씨!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박동기씨는 내가 박물관에 매도한 한국전쟁 중 야간통행 허가증의 주인공이다. 그는 한국전쟁 중 부산에 주둔하던 미육군 병기대대 수송부에서 근무했던 22세의 청년이었다.)

    이제는 너희들이 유리창 안에 갇혀서 볼 수는 있으나 만질 수는 없구나. 사물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는가. 너희들이 우연히 나에게 와서 그리 허투루 대접 받다가 이제는 좋은 데 입양 갔으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미를 뽐내거라. 보고 싶으면 또 오마. 속으로 되뇌인다. 찬찬히 박물관을 다 둘러본 후 생계형 컬렉터는 이제 저 자료들이 나만의 자료가 아니라 이 나라 국민 모두의 역사 자료가 되었음을 위안 삼으며 터벅터벅 박물관을 나섰다. 내일은 또 내일의 수집이 있는 것이다.

    [사진] 역사 컬렉터가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매도한 자료들은 지금 이렇게 박물관 도록 중간중간에 당당하게 실려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소월(素月)이 사주는 밥을 먹고, 수화(樹話)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조선시대 최고의 독서광이라면 누가 떠오르시는가?

    생소하시겠지만 먼저 정희교(鄭希僑)·정윤(鄭潤) 부자를 꼽을 수 있다. 유재건이 쓴 『이향견문록』에는 이 부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다.

    정희교는 일찍이 아내를 잃고 아들 정윤과 함께 살았다. 이 정씨 부자는 함께 속리산(俗離山) 기슭에 숨어 살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책을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그들의 집에는 천여 권의 책을 쌓아두어서 책이 차지한 공간이 사람 사는 곳보다 배나 되었다. 정윤이 어릴 때 어떤 이가 정희교에게 책을 팔아 아들을 장가 보내길 권하자, 아버지는 손을 내저으면서  “그만 두시오. 나는 차라리 자손이 없는 것은 괜찮지만, 이 책이 없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다. 정희교가 책을 좋아하는 벽(癖)이 있을 뿐 아니라 조상에게서 내려온 것임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윤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아버지를 봉양하며 살았다. 정윤도 아버지처럼 책을 좋아하여 밭 갈고 나무 하고 고기 잡을 때에는 반드시 책을 휴대하였으며, 밤에는 섶으로 불을 밝혀 책을 읽었다. 80세 쯤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정윤은 아버지를 위해 책을 모두 순장해 주었다. 죽어서도 책을 보시라는 지극한 마음이었다. 이후 10여년 뒤 정윤도 죽게 되는데, 조카와 생질들에게 아버지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책과 함께 두 부자가 같이 묻힌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자연인’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인물들인 정희교 부자는 이렇게 속리산 자락에서 평생 책을 벗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책과 함께 했다. 얼마나 책을 사랑했으면 책을 순장했을까. 그들의 지극한 책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정희교·정윤 부자 못지않게 책을 사랑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덕무(李德懋,1741∼93)이다. 살았던 시기도 정씨 부자와 비슷하다.

    이덕무 역시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그는 남들이 욕을 해도 따지지 않고 칭찬을 해도 우쭐하지 않으며, 오직 책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아서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병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아이 때부터 시작하여 스물한 살이 되도록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아본 일이 없었다. 그의 방은 지극히 협소했지만 동쪽에도 창이 있고 남쪽에도 창이 있고 서쪽에도 창이 있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쫓아가며 햇볕 아래서 책을 읽었다. 사람들은 그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는 그 별명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가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는 그의 사후 박지원이 쓴 행장(行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덕무는) 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읽으면서 뽑아 적었는데, 읽은 책이 수만 권을 거의 넘고 뽑아 적은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 길을 떠날 때도 반드시 책을 소매 속에 넣어 갔고, 심지어 붓과 벼루까지 가지고 다녔다. 여관에서 묵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책을 덮은 적이 없었다.

    [사진] 조선후기 이덕무는 ‘간서치’로 불릴 정도로 책을 좋아한 인물이다. 왼쪽은 그의 초상화, 오른쪽은 그의 문집인 『청장관전서』이다.

    이덕무에게 책은 단순히 지식의 보고(寶庫)만이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이덕무에게 책은 실용적인 도구이기도 했다. 그에게 책은 추운 겨울날 때로는 이불이자 병풍이기도 했다. 가난한 선비의 겨울나기에 책이 어찌 사용되었는지를 들어보면 자못 짠한 느낌이 든다. 그의 전집인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난 경진년(1820), 신사년(1821) 겨울에 내 작은 초가집이 너무 추워서 입김이 서려 얼음꽃이 되고 이불깃에서 바삭바삭 소리가 났다. 내가 게으른 성격이지만 한밤중에 일어나 급히 『한서(漢書)』 한 질을 이불 위에 비늘처럼 덮어서 추위를 조금 막았으니, 이러지 않았으면 거의 뒷산에 묻힌 귀신이 될 뻔했다. 어젯밤에는 집 서북쪽 구석에서 독한 바람이 활 쏘듯이 들어와 등불이 몹시 흔들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노론(魯論)』 한 권을 뽑아 세워서 바람을 막고 스스로 변통하는 수단을 자랑하였다. 옛사람이 갈대꽃으로 이불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기이한 것을 좋아한 경우이고, 금과 은으로 짐승과 상서(祥瑞)를 조각하여 병풍을 만든 이도 있으니 이것은 너무 사치스러워 바랄만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어찌 경서와 역사서로 만든 나의 『한서』 이불과 『노론』 병풍만 하겠는가?

    혹독하게 추운 겨울밤 『한서』는 이불이 되고, 『노론』은 병풍이 된 것이다. 이렇게 책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애서가이자 책벌레인 이덕무도 가난만은 어쩔 수 없었던지, 호구지책으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책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특유의 재치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덕무가 친구 이서구(李書九, 1754~1825)에게 쓴 편지이다.

    내 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단지 『맹자(孟子)』 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엽전 2백량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冷齋) 유득공(柳得恭)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다네.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지. 이는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러고는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칭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을까?

    책을 그토록 사랑했던 이덕무와 그 친구 유득공이 가난 때문에 『맹자』와 『좌씨전』을 팔아 그 돈으로 밥과 술을 사먹으면서 맹자와 좌구명이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술까지 먹여 주었다고 호기롭게 칭송하는 그날의 떠들썩한 술자리 풍경이 선연히 떠오른다.

    가난을 해학으로 반전시킨 그들의 기개에도 경의를!

    수집에는 돈이 꽤 든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집품이 주는 아름다움과 향기에 몰입하는 즐거움이라면 궁핍한 삶의 괴로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컬렉터의 마음이다. 지극한 사랑에서 지극한 즐거움이 오는 것이다.

    제한된 비용 내에서 수집을 하기 위해서 컬렉터는 선별에 선별을 거듭하며, 많은 경우 수집을 포기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수집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물건이 나왔을 때 컬렉터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가끔 그런 물건들이 있다.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한 물건. 저것이 있어야 내 컬렉션이 완성되는 그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라.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컬렉터는 과감히 궁핍한 삶의 괴로움을 선택하는 것이다.

    수집은 돈 있는 자의 호사나 사치가 아니다. 이건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골프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와인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등산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냥 하나의 취미일 뿐이다. 그러니 수집을 하는 사람은 다른 데에 돈을 아끼고 수집에 그것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특별한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아주 특별한 컬렉터들도 가끔씩 있다.)

    가난한 컬렉터는 새로운 수집 비용 마련이나 아니면 생활비가 궁해지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컬렉션 일부를 팔기도 한다. 박물관에 유물을 매도하는 방법은 이미 언급했고, 그것 이외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보다 손쉬운 방법은 경매를 통해 파는 경우이다. 경매 시장은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 형성되어 있다. 이런 경매의 방법이 아니면 그 물건에 관심을 보이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파는 경우도 있다.

    나도 가끔 수집품을 팔아 그것으로 생활비를 쓰거나 다른 컬렉션 비용에 쓴 적이 있다. 한번은 1951년 한국전쟁 중 숭문사에서 발간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을 직장 동료 Y에게 판 적이 있다. 6년 전 일인데 Y는 국어를 가르치므로 나보다는 더 적절한 소장자라 생각했고, 관심을 보이기에 팔았다. 나는 이 돈으로 밥과 술을 사먹었다. 4년 전에는 달항아리 한 점을 직장동료 K에게 넘겼다. 조선후기 것은 아니고 인간문화재의 최근작으로 아담한 것이 보기 좋은 도자기였다. 지금은 꽃병으로 쓰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에는 수화 김환기의 판화 [달밤의 화실]을 친구 P에게 팔았다. 김환기미술관에서 한정판으로 제작한 이 판화는 색이 화사해서 집안을 장식하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판화 판 돈은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는 데 썼다. 쇠귀 신영복선생의 붓글씨 ‘나무야 나무야’도 후배 J가 어찌나 탐을 내던지 넘겨준 일도 있었다. 그 직후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셔서 그 작품은 지금 몇 배가 올랐을 것이다. 작년 9월에는 세금 낼 돈이 좀 부족해 거산 김영삼 대통령이 1984년 가택연금 중 쓴 붓글씨 ‘克世拓道(극세척도)’라는 작품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해서 팔았다.

    미처 알지 못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동안 내 생활비를 대주시는 분들이 꽤 많았다. 시인 김소월, 화가 김환기, 쇠귀 신영복 그리고 인간문화재인 어느 도공, 심지어 거산 김영삼 대통령까지……그러므로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든든한 뒷배경을 가진 사람임을 나는 수집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계형 컬렉터인 나 또한 이덕무식으로 이렇게 껄껄 웃으며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소월(素月)이 사주는 밥을 먹고,
    수화(樹話)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쇠귀가 사준 책을 읽고,
    거산(巨山)이 세금을 내주고….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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