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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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09일 0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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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에서 차베스 혁명을 표현하는 ‘볼리바리안 혁명’이란 용어를 인용했다. 그런데 한 댓글을 보면 오타인지 모르지만 볼리바리안을 볼리비아로 혼동하는 분이 계신 것 같아 약간의 언급을 더하고자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차베스 혁명의 이념적 잣대를 그 중요성의 순서대로 보면 시몬 볼리바르,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의 순서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국영 텔레비전(Venezolana de Television)의 인기 정치 시사프로인 ‘면도날'(la Hojilla)의 진행자 책상 위에도 이 세 사람의 두상이 위의 순서의 크기대로 놓여 있다.

시몬 볼리바르의 두상이 제일 앞에 있고 또한 제일 크다. 이 프로그램은 굉장히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신나게 그리고 날카롭게 진행된다. 무엇보다 고졸 학력의 진행자로 ‘학력파괴’의 상징적 존재인 마리오 실바가 반 차베스 진영의 민영 TV의 왜곡과 중상의 편향적 보도내용을 놓고 개그맨처럼 마음껏 풍자하면서 동시에 진지하게 관련 전문가를 참석시켜 토론을 통해 비판을 가한다.

여기서도 풍자/진지함의 긴장이 유지되고 있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편파 방송의 대표격인 RCTV의 인가권 연장을 차베스 정부가 거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남미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시몬 볼리바르는 두 가지 점에서 차베스 혁명의 뿌리가 되고 있다. 하나는 국내적으로 가장 가난한 사람을 포용하려는 사회정의와 형평성 추구의 철학을 실천한 점. 볼리바르는 1819년의 앙고스뚜라 연설에서 “가장 완전한 정부체제는 가능한 한 가장 큰 행복과 사회보장과 정치적 안정을 만들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국제적으로 북쪽에 있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꿀리지 않는 중남미 대통합의 비전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점. 볼리바르는 1815년 자신이 쓴 <자메이카의 편지>에서 “미국이 하나의 연방으로 커가고 있는데 이에 대항하여 중남미도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하였고 “…전체가 하나의 연방국가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 강력한 자유주의 국가들을 건설한 뒤 이들 국가간의 연합을 이를 것”을 역설했다.

역시 역사에 크게 남는 영웅은 무언가 달라도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여기에 체 게바라가 추구한 인간적 순수성과 라틴적 열정의 이상주의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체제 비판의 이론을 차베스 혁명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무엇 때문에 차베스는 자신만만하게 현재의 베네수엘라 혁명을 ‘21세기 사회주의’로 호명하고 있을까? 무엇인가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긴 한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마르틴 구에데스에 의하면 “제기하고 싶어하는 문제는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가(정치)에 있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이룰수 있는가(전략)에 있다”. 이 언급이 현재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고 본다.

여기서 잠깐 시선을 우리에게로 돌려보면 우리는 정치과잉의 사회라서 그런지 ‘어떻게’보다는 ‘무엇’을 훨씬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우파는 끊임없이 ‘선진화’를 부르짖고 있고 좌파는 ‘진보’를 주장하여 왔지만 지금까지 ‘어떻게’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던 것 같다.

최근에 와서 전략적 대안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사실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은 쉽다. 더구나 거기에 ‘근본적인 해결’이란 수사를 붙이면 비장하게 거의 목표가 달성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기도 한다.

마르틴 구에데스에 의하면, 맑스의 노동착취이론에 바탕하여 계급 없는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 소련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그 목표를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인 방법의 귀결은 역사상 초유의 전지전능한 국가체제의 등장이었고, 공산당 최고 엘리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고도의 관료사회의 출현이었다. 그 후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결국 민중은 소외되었고 사회주의 건설에 실패하고 말았다.

현재의 차베스 혁명이 이런 역사의 교훈에 얼마나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에데스도 “목표가 분명한 것만으로는 안되고 어떤 경우에도 민중, 대중, 시민이 주역의 자리를 잃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해방의 과정에 대한 주권을 잃지 않도록 경로를 분명히 정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은 남미 독립영웅인 시몬 볼리바르와 쿠바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의 철학과 그 궤도를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랫동안 우리는 노대통령의 거친 어법 또는 막말 사용이 불러온 시비에 시달려 왔다. 차베스도 거침없이 대중적인 어법의 심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양국 정상의 발언을 살펴보면 그 구조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노대통령의 경우에는 주로 막말의 상대가 엘리트 그룹 즉 군 장성 또는 조중동 등 보수 언론에 향한 것이다. 반면 차베스는 일반 대중을 상대하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사진=연합뉴스)과 차베스 대통령
 

마르가리타 로뻬스에 의하면 “차베스는 이제까지의 엘리트 담론에서 배제되어왔던 대중과 가난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머가 많고 비형식적인 문화적 상징의 화법을 사용하고 특히 기득권층이 지녀온 주류적 가치에 도전하는 과단성 있는 어법을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과 어떤 야성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외모도 유럽인의 후손이 아니라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로서 길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강한 호감을 준다”. 물론 차베스의 거친 화법이 기득권층과 지식인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의 차베스 혁명은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중남미 통합 및 비서구 국가들과의 연대 강화 외교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차베스는 연설 및 기자 회견 등에서 강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자신감에 더해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비형식적인 유머를 즐긴다. 공식 기자 회견 중에도 농담을 즐겨 참석자들을 웃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자의 더 큰 차이는 단순한 어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신념의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노대통령은 한미 FTA에서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와 미국식 삶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차베스는 다국적 기업들이 포위하고 있는 기존 세계의 정치 경제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대안적 체제를, 단순한 비전 제시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하나씩 실천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의 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이를 위해 필요한 약간의 변화를 시도하는 정치세력과, 혁명을 과감하게 실천하고 잇는 정치세력 사이에는 단순한 거친 화법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형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노대통령이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한 교수의 “친미, 친일 해양문명론자가 미래 한국의 주도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들의 문명사관이 모든 역사인식의 기준을 ‘문명’과 ‘비문명’으로 나누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들은 정말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것으로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 아르헨티나에는 도밍고 사르미엔토(1811년 생)라는 저명한 작가, 언론인,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문명에 심취하여 1845년 <문명과 야만: 환 화꾼도 끼로가의 삶>이란 소설을 발표한다. 그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면서 계몽적 시각에서 근대적 교육과 자유민주주의 이념 전파에 헌신한 것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는 특히 1880년대 초까지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 확장에도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근대적 도시를 ‘문명/민주주의’로 전통적 시골을 ‘야만/독재’로 보는 이분법을 보였다. 이로 인해 1960년대부터 중남미 현실의 문제에 깊이 분석해 들어간 현대소설 작가들의 시각으로부터 비판 받게 된다.

이들 새로운 작가들은 중남미 문화의 참 모습은 유럽 문명과 원주민 문명 중 어느 한쪽이 지배적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병렬하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경계(혼혈)문화라고 인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사르미엔토는 원주민 문화와 아르헨티나의 문화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목동(가우초)을 경멸하면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집권 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약자를 무시하는 파시즘적 정치 행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문제는 정상적 주권국가의 근대화 과정을 추진한 인물도 오늘날 강력하게 비판 받고 있는데 하물며 식민지 상태에서 식민 종주국의 착취와 이익을 위해 추진된 일부 근대화를 높이 평가하고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왜곡하려는 태도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상층 기득권층에는 이런 사르미엔토식 유럽 편향의 의식이 알게 모르게 계속되어 왔는데, 2001년 경제 위기 이후에야 제대로 된 현실인식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1967년에 출판된 중남미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의 경우, 마꼰도(가상의 땅으로 콜롬비아와 중남미 혹은 보편적 인류를 상징할 수 있음)에의 철도 부설을 둘러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진보적 혁명군 사령관이었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암살당한 후 그의 많은 아들들은 대부분 사업가로 변신하여 근대화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된다. 그 중의 한 아들인 아우렐리아노 트리스테는 철도를 들여온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는 ‘노란 기차’가 마꼰도에 수많은 ‘불안, 불행, 격변, 불운, 아부, 향수’등을 가져 왔다고 표현한다. 트리스테는 스페인어로 ‘슬픔’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기계적 이분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이 근대화에 대해 호의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빠른 속도로 발전해온 과학기술과 산업화 앞에서 우리의 관습적 의식과 문화는 미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양자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가로 놓여있는 것이다.

전 근대적 공동체의 연대적 삶의 문화는 경쟁 위주의 산업 문명 앞에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르께스의 소설은, 달리 보면, 산업 문명의 지나친 발전 앞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대안적,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는 소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약 40년이 지난 현재,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혁명이 베네수엘라를 기점으로 중남미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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