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감수성의 진화,
    혐오·차별의 언어와 관용·포용의 언어
    [컬렉터의 서재] 내가 '맹인'이라는 말을 버린 이유
        2022년 03월 01일 1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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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통화 모습을 손으로 어떻게 지어 보이는가에 따라 세대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나이로 대략 20대 중반 정도가 그 기준이 되는데, 20대 중반 이상 세대는 손 가운데 세 손가락을 접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세워 수화기를 든 모습을 표현하는 데 비해, 20대 중반 이하의 젊은 혹은 어린 세대는 손 전체로 전화기를 쥐는 모양을 취하거나 아니면 손바닥을 편 채로 얼굴에 댄다. 어린 세대들은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을 사용했고, 선 달린 옛 전화기를 보지 못하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에 이 사실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늘 문화와 관습이라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어린 세대들 중에는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통화’ 아이콘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도 많다고 한다. 수화기 모양의 이 아이콘(📞)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귀 아니냐?’고 반문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다이얼을 돌려 통화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여전히 통화 아이콘이 수화기 모양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옛 전화기의 수화기를 ‘통화’를 상징하는 이모티콘으로 계속 사용되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아이콘은 휴대폰 모양의 다른 아이콘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TV프로그램에서 통화하는 손모양을 보면 세대 차이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위는 소위 ‘라떼 세대’, 아래는 요즘 젊은 세대의 통화 모습을 나타내는 손 모양이다. 그들의 경험에 따라 손 모양이 뚜렷하게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인터넷 사진)

    문서 작성 프로그램에서 저장 아이콘으로 사용되는 네모 모양의 아이콘(💾)도 이와 비슷하다. 20대 이하에게는 이것도 수화기 이모티콘만큼이나 난해한 아이콘이다. 이 ‘네모 모양’은 오래 전에 저장 장치로 주로 사용하던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형상화한 것이다. 1980년대 개발된 이 디스켓은 용량 1MB 정도의 저장 매체였다. 이후 저장 매체는 빠르게 진화를 거듭해 CD, USB 그리고 유클라우드까지 다양한 변화를 거친다. 이런 진화에도 불구하고 저장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플로피 디스크는 그 모양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낯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플로피 디스켓을 보여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와! 정말 대단해요. 저장 아이콘을 3D 프린트로 만들었네요!”

    이렇듯 관행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일단 한번 만들어지면 그것의 연원은 점차 잊히고, 뒷사람들은 그냥 써왔던 대로 쓰는 것이다. 관행은 익숙하고 편하며, 변화는 귀찮고 두려운 것이다.

    명태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번씩 패야 제맛?

    역사 컬렉터가 페이스북을 갓 시작했을 때 후배 P는 페북을 하다 보면 마음을 다치는 일이 종종 생길 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해 주었다.

    이전에 페북에 이런 표현을 썼단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관용적으로 흔히들 쓰는 표현이다.

    국어사전에는 “벙어리가 안타까운 마음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 속만 썩이듯 한다는 뜻으로, 답답한 사정이 있어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만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페친이 이 표현을 쓴 P에게 따졌다는 것이다. ‘벙어리’라는 말 자체가 ‘언어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과 함께. 좀 애매하긴 하다. 그 표현을 쓴 후배가 딱히 언어 장애인을 비하할 의도로 그런 표현을 쓴 것도 아닐 테고, 그걸 지적한 이도 관용적 표현이라도 시대에 맞지 않는 잘못된 표현은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니 그 항의를 억지라고 보기에도 힘든 측면이 있다.

    최근 어떤 페친이 올린 글도 이와 유사하다. 사무실에 전화를 건 민원인이 여직원에게 ‘아가씨’라는 표현을 써서 언쟁을 했다는 이야기. ‘아가씨’의 사전적 정의는 ‘젊은 여성을 일컫는 호칭’이다. 그리고 친족어로서는 손아래 시누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 역시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을 부르는 칭호로 많이 쓰이면서 그 의미가 부정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서 최근에는 여성을 함부로 아가씨라고 부를 경우 불쾌하고 무례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일반 직장에서 여자 동료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은 금기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이렇게 관행으로 무심코 써 온 표현들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차별적 언어로 비판받는 경우는 수두룩하다. 결국 말이라는 것은 생각과 사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타인종, 장애인 등 소수자를 비하하고 멸시하는 표현들이 많다. 동물들에 대한 표현도 그렇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부터 보자. 우리 말에는 유난히 이런 표현들이 많다.

    앉은뱅이, 절름발이, 곰보(꼼보), 째보, 귀머거리, 외팔이, 난쟁이, 병신, 저능아, 바보, 멍청이, 등신, 벙어리, 장님, 맹인, 봉사, 소경, 외눈박이, 애꾸, 언청이, 지랄병…….

    이 용어들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배려하지 못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속에는 배제, 편견, 차별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런 말을 쓰는 이들은 장애인 비하 목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가담한 것이다. 이 말 자체가 그런 차별과 편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관행적인 용어라고, 또 고의 없이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이름이 호명되는 대상이 불편하고 모욕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차별과 편견의 언어인 것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동물에 대한 다음 표현도 보자.

    ‘개 패듯이 팬다.’

    원래는 ‘오뉴월 개 패듯이’, ‘복날 개 패듯이’로 쓰였는데, 길어서 생략해 쓰는 말로 ‘함부로 때리고 치다’는 듯으로 옛날부터 써 온 말이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는 말도 있다.

    동물 복지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에 개는 오늘날 반려동물과 개념이 같을 수가 없었다. 마당에 풀어 놓고 키우다가 적당히 자라면 복날 보신탕으로 잡아 먹고들 했다. 옛사람들은 개를 잡을 때 나무에 매달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잡아야 고기 맛이 부드러워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대였으므로 ‘개 패듯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지금 이 표현은 쓰면 안되는 용어가 되었다. 개를 반려동물로 키우든 그렇지 않든 다른 생명을 이유없이 학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범죄 행위로 간주되어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따져보면 ‘개’는 마구 때려도 되는 동물로 인식되어서인지 ‘개’가 들어간 단어치고 긍정적 단어가 별로 없다.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개소리, 개털, 개발새발, 개뿔, 개발싸개, 개새끼, 개망나니, 개뼉다구, 개코, 개지랄, 개나발, 개죽음, 개고생, 개망신, 개판, 개쪽, 개수작 그리고 최근에 개사과까지.

    패야 되는 대상에 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마누라와 명태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제맛이다.’

    마른 명태, 즉 북어는 부드러운 맛을 위해 몽둥이로 두들겨야 제맛이다. 이건 죽은 것이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마누라를 패다니? 이건 가정 폭력을 옹호하는 말 아닌가?

    혹자들은 저 야만적 표현을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상징과 비유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바로 사흘마다 한 번씩 남편의 ‘몽둥이(성기)’로 성생활을 해주라는 뜻이란다. 그래야 마누라가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나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가부장적 가족 질서 속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때려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때릴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성리학적 질서가 확립되어가던 조선 전기 성종 때 인수대비가 쓴 [내훈(內訓)]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인수대비가 오늘날 이런 책을 냈다면 그녀는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만일 남편이 몹시 화를 낼 경우에는 기다렸다가 기분이 풀렸을 때 다시 간하며, 비록 채찍질을 당한다 하여도 어찌 감히 원망하거나 한탄할 수 있겠는가? 남편의 직분은 마땅히 존중하여야 하며, 아내는 모름지기 나직이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내용인데, 심지어 채찍질을 당해도 원망이니 한탄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는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사회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마누라를 팬다’는 말이 관용어나 속담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종 차별적 관념이 반영된 용어들도 무심코 사용되었다.

    먼저 퀴즈부터 하나 풀어보자.

    해리엇 비처 스토가 1852년 발표한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이라는 미국 소설이 있다. 흑인 노예의 참상을 그린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몇 차례 번역된 적이 있다. 이광수가 1913년, 계용묵과 정비석이 1954년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세 편의 번역서는 모두 동일한 제목을 달았다.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모두 ‘검둥이의 설움’이다.

    정확하게는 이광수는 ‘검둥의 셜음’, 계용묵은 ‘검둥이의 서름’, 정비석은 ‘검둥이의 설음’이다.

    그냥 직역해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고 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더라도 지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말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검둥이’라는 표현이다. 이 ‘검둥이’라는 표현은 단지 피부색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 속에는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과 멸시가 깔려있다. 애초에 백인들이 만든 말이었겠지만, 우리 역시 이런 표현을 통해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내면화해왔던 것이다. 비슷하게 사용되는 표현으로는 ‘흑국놈’, ‘깜디’, ‘시커먼스’, ‘흑형’, ‘흑누나’ 등이 있는데 약간씩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사진] 엉클 톰스 캐빈의 국내 번역서들. 왼쪽부터 이광수, 계용묵, 정비석의 번역서인데 이름은 모두 비슷하다. (인터넷 사진)

    인순이 5집 앨범 [아름다운 우리나라]

    역사 컬렉터가 수집한 음반 중에는 1984년 4월 발매된 인순이 5집 앨범 [아름다운 우리나라] 가 포함되어 있다. 초반(初盤) 앨범 1장, 재반(再盤) 앨범 1장 모두 2장이다.

    이 앨범은 1980년대 한국 사회를 두 가지 측면에서 증언해주는 기념비적 앨범이다.

    컬렉터가 주목한 이 앨범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이 부분의 컬렉터의 이전 글(레디앙 역사의 한페이지 2020년 10월 13일 글 ‘광주 5.18을 담은 노래와 음악가들’)에서 이미 소개한 바가 있다. 복습 삼아 그 내용을 다시 소개한다.

    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앨범에서 주목해야 할 노래는 A면 3번 트랙곡 ‘여기가 어디냐(광주)’와 B면 1번 트랙곡 ‘여기가 어디냐’다. 동일곡이 A,B면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다면 B면에 실린 노래는 제목에서 ‘광주’라는 표현을 뺐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1980년대 전반기는 누구도 ‘광주’를 대놓고 말할 수 없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 앨범은 대담하게도 ‘여기가 어디냐(광주)’라는 노래를 통해 광주를 노래했다. 그 이전 가수 김원중이 계엄군에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비유해 노래한 ‘바위섬’과 달리 인순이의 이 노래는 ‘광주’를 직접 호명했다.

    전두환 정권의 집권 중반기였던 1984년 어느 날이었다. 가수 인순이가 광주 MBC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다. 이 방송에서 인순이가 부른 노래를 듣고 광주 시민들은 두 귀를 의심했다. ‘여기가 어디냐’라는 바로 그 노래였다.

    여기가 어디냐 꿈속에 그리던 곳 / 꿈을 버리고 무엇을 찾아 나 여길 떠났던가
    광주 광주 다시보자 눈물이 앞을 가리네 / 나 떠난 뒤에 누가 너를 이렇게 아껴 주었냐
    여기가 어디냐 추억이 숨 쉬는 곳 / 정을 버리고 누구를 따라 나 여길 떠났던가
    광주 광주 다시 보자 너도 많이 달라졌구나 / 나 떠난 뒤에 누가 너를 이렇게 아껴 주었냐 여기가 어디냐 어머님 계시던 곳 / 정이 그리워 꿈이 그리워 나 여기 다시 또 왔네
    광주 광주 다시 보자 내 어찌 너를 잊으랴 / 나 떠난 뒤에 누가 너를 이렇게 아껴 주었냐

    ‘광주’를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찬동하면 죄가 되던 시대에 대놓고 절규하며 ‘광주 광주’라니……. 당시 광주 시민들은 인순이가 광주를 방문한 기념으로 노래 가사 일부를 개사해 그렇게 부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원래 가사가 그랬다. 인순이의 ‘여기가 어디냐’는 광주의 아픔을 위로하는 노래임이 분명했다. 5.18이 끝난 지 채 3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임을 상기하자. ‘광주 광주 다시 보자 눈물이 앞을 가리네’라는 인순이의 노래에 광주 시민들은 말할 수 없는 위안과 감동을 받았다. 광주에 연고를 둔 해태 타이거즈가 그랬듯이.

    그런데 ‘여기가 어디냐’는 왜 이렇게 비장하게 광주를 외쳤던 것일까?

    이 노래 작사가 서판석(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의장)은 뒷날 이 노래가 5·18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얘기한 것이라고 밝혔다.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김대중을 내란죄로 체포해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결국에는 레이건 미 행정부와 가진 협상으로 그를 석방해 미국 망명에 오르게 했다. 이 노래가 처음 공개된 당시에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다. 망명 중인 김대중을 화자로 내세워 핍박과 상처로 얼룩진 광주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았던 것이다. 이후 전두환 정부 엄혹한 시국 하에서 ‘광주 광주 다시 보자’라는 가사는 ‘정든 내 땅 다시 보자’로 바뀌어 불리다가 결국은 방송국 자체 검열로 사실상 금지가요가 되면서 이 노래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혀지고 말았다.

    이런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음반은 80년대 엄중한 시기 ‘광주’를 직접적으로 노래한 첫 대중가요라는 점에서 충분히 수집 가치를 가진다.

    이 음반이 기념비적인 두 번째 이유는 정치적 것과는 다른 측면이다. 그것은 이 음반이 가진 사회사적 의미, 즉 1980년대 인권 감수성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컬렉터는 앞에서 이 앨범 초반과 재반 2장의 앨범을 소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왜 2장이나 소장하고 있을까? 이 두 장의 앨범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차이가 있다. 먼저 두 앨범의 앞면 재킷은 동일하다. 그런데 뒷면 재킷 디자인이 큰 차이를 보인다. 초반 뒷면에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인순이의 노출 사진이 들어 있는데, 재반은 그 사진이 빠져있다. 1984년 초반 자켓이 나왔을 때, 당국은 인순이 사진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판매 금지했고, 이후 인순이 사진이 빠진 앨범이 새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군부 하의 엄격한 사회 통제 하에서 노래가 금지곡이 된 경우는 흔했지만, 자켓 사진 때문에 발매 금지가 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당시 초반이 얼마나 제작되어 판매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량 회수되어 폐기 처분되었고, 이후 뒷면 사진을 교체한 음반이 새로 제작되어 발매되었으므로 두 음반의 가격 차이는 상당하다. 살아남은 극소량의 초반 앨범은 현재 상당히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데 비해 재반은 현존 수량이 많아 초반에 비해 10분의 1 정도 가격이면 구할 수 있다.

    [사진] 위 사진은 인순이 5집 앨범 초반의 앞뒤면이고, 아래 사진은 5집 앨범의 재반이다. 앞면은 재킷이 동일하지만, 뒷면은 초반에만 인순이 사진이 있고, 재반에서는 이 사진을 삭제했다. (박건호 소장)

    그렇다면 초반 자켓에 인순이의 파격적 노출 사진은 왜 뜬금없이 실린 것일까?

    역사 컬렉터가 이 앨범을 수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인순이가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지만, 이 자켓 사진은 인순이가 주연으로 출연한 [흑녀(黑女)]의 주인공 이미지다.

    1978년 그룹 ‘희자매’로 데뷔한 인순이는 많은 차별 속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 때문에 첫 방송 땐 출연을 거부당해 어쩔 수 없이 모자를 쓰고 노래를 해야만 했고, 이후에도 머리에 천을 둘러야 했다. 대중들은 출중한 댄스 실력과 파워풀한 가창력을 가진 가수로서의 ‘인순이’보다는 ‘흑인 혼혈’이라는 외적 이미지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는 흑인 혼혈인을 ‘튀기’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차별하던 그런 시대였다. 인순이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후 그녀는 1982년 10월 김인순이라는 이름으로 강대선 감독의 영화 [흑녀]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인옥, 장혁과 함께였다. 그러나 배우 김인순보다는 흑인 혼혈녀라는 외적 이미지에 주목한 것은 영화 [흑녀]도 마찬가지였다.

    인순이는 영화 속 흑인 혼혈녀 ‘난’을 연기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난은 장래를 약속했던 남자친구 현석이 떠나자 윤락가의 여인으로 전락한다. 뛰어난 몸매와 매력으로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큰돈을 벌어들인다. 하지만 공허감에 휩싸이고 옛 애인을 찾아 나선다. 두 눈을 실명한 현석의 사죄에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한 난은 현석을 용서한다. 관객은 옛사랑을 찾은 두 사람의 행복한 삶을 기대했지만 두 연인은 함께 목숨을 끊는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에로티시즘에 배신과 치정이 얽힌 멜로물이지만 ‘혼혈’에 대한 당시의 사회상을 꼬집는 도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인순이도 “어린 시절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차별과 소외를 많이 받았다. 나의 어두운 과거를 들추기 싫어 처음엔 거절했지만, 단순히 혼혈녀에게만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니라 출연하게 됐다.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생활상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데 정열을 쏟겠다.”는 말과 함께 영화 촬영에 열성을 다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인순이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 대중, 언론의 수준은 그보다는 훨씬 낮았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사회 문제를 읽어내기보다는 흑인 혼혈 여성에 대한 호기심과 차별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소비했다. 이는 당시 이 영화의 광고 카피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진] 1982년 10월 영화 [흑녀] 개봉 당시의 신문 광고들이다. (인터넷 사진)

    “검은 성(性)의 신비(神祕)!”
    “흑진주, 진주 중 더욱 값진 진주”
    “흑녀가 부르는 사랑의 비가(悲歌)!”
    “검둥이라고 배신당한 충격적인 흑녀의 복수!”
    “육신은 새까맣습니다. 그러나 피는 당신같이 붉습니다”
    “전 열이 많아서 이렇게 새까맣게 탔어요. 누구든 내 몸에 닿으면 나같이 까맣게 타요”

    [흑녀]라는 영화 제목도 이상하지만, 광고 카피로 쓰인 이런 표현들은 오늘날 인권 감수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노골적이고 자극적일 뿐 아니라 대단히 인종 차별적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84년 발매한 인순이의 독집 [아름다운 우리나라] 뒷면 자켓에 실린 인순이 사진은 바로 영화 [흑녀] 주인공 이미지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영화 [흑녀] 주인공을 마케팅 소재로 삼아 영화 주인공 캐릭터처럼 속살이 비치는 에로틱한 옷을 입은 인순이 사진을 실어 대중의 눈길을 잡아끌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 컬렉터가 이 음반을 수집한 이유는 이것이 1980년대 대한민국의 인권 감수성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개 패듯이’ 개를 때리고, ‘명태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 번씩 때려야 제맛이다’는 말을 무심코 했듯이, 그리고 그것이 그 시대의 문화 감수성을 대변하듯이, 이 음반 역시 1980년대 인순이라는 한 여성 가수를 그 노래나 댄스 실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 혼혈이라는 외적 이미지만 주목해 끌어내서는 노골적으로 차별했던 그 시대 인권 감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80년대의 인권 감성 지수를 이 앨범만큼 잘 보여주는 자료도 드물 것이다.

    이런 편견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대를 당당하게 버텨낸 인순이는 오늘날 한국 가요계에 큰 나무처럼 우뚝 서 있다. 편견과 차별에 맞서며 ‘대한민국 최고의 디바’라는 명성을 얻은 인순이의 삶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늘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가수로서의 삶을 뛰어넘어 2013년부터는 강원도 홍천에 다문화가정 특성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비온 뒤 맑은 하늘’이라는 뜻을 가진 이 해밀학교를 건립하면서 밝힌 김인순 이사장(인순이)의 인사말은 이랬다. 해밀학교를 세운 취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제의 결핍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저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자랑스러운 한국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다문화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쓸 것입니다. 사람을 키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자식 하나도 제대로 키우기 힘든 시기에 어쩌면 제 능력 이상의 것에 도전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제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기 위해 제가 선택한 길이기에 기꺼이 가려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여러분과 함께 멀리 가고 싶습니다.

    – 해밀학교 홈페이지, 이사장 인사말에서

    자신이 겪은 차별과 가난과 외로움을 이 사회에 사랑으로 되돌려 주고자 하는 숭고한 그녀의 도전과 삶에 경의를 표한다. 또한 해밀학교가 재정적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그녀가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이 새로운 희망의 증거가 되기를 빈다.

    컬렉터가 봉사, 맹인이라는 말을 안쓰는 이유

    인권 감수성 이야기 나온 김에 내달아 ‘심학규씨 눈뜨는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역사 컬렉터는 시각장애인에 대해 ‘봉사’, ‘맹인’이라는 말을 결코 쓰지 않는다. 인권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2007년 즈음 겪었던 어떤 경험 때문이다.

    그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한때 역사 컬렉터는 음향과 소리, 노래 자료를 열심히 수집한 적이 있다. 수업에 쓰기 위해서 음향자료를 모은 것이다. 수업 중 필요한 대목에 노래나 음악을 들려주면 나름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정리하여 전국역사교사모임을 통해 [노래와 소리로 보는 우리 역사]라는 자료집을 CD와 함께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당시 운영하던 개인 홈페이지에도 올려 관심 있는 이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했다.

    2007년 어느 날 KBS 제3 라디오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프로그램 제작팀에서 연락이 왔다. 이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 게스트로 참여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역사 컬렉터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 프로그램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이었는데, 진행은 김태규 아나운서였고, 내가 게스트로 출연할 방송 꼭지는 ‘노래와 소리로 보는 우리 역사’였다. 역사와 관련된 음향 자료를 들려주면서 우리 역사를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으로 2007년에서 2008년까지 만 1년을 방송했다. 1주일에 하루씩 여의도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의미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즐겼다.

    그런데 2007년 5월 26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잡은 방송 주제가 ‘부처님 오신 날 눈뜨는 이야기’였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열심히 불공을 드려 시각장애인이 눈 뜨는 이야기가 방송 소재로 괜찮을 것 같아 에피소드 2개를 골라서 원고와 음향자료를 미리 보내고 녹음을 준비하였다.

    두 개의 에피소드 중 하나는 향가 ‘도천수대비가’였다. 이 부분의 방송 내용은 이랬다.

    사회자 : 불공을 드려서 눈을 뜨고자 했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있다고 하던데 어떤 이야기죠?.

    역사 컬렉터 : 삼국유사를 보면 희명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주 한기리의 여인 희명의  아들이 생후 다섯 해 만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희명이 분황사에 있던 관음보살 벽화 앞에서 [도천수대비가]라는 향가 노래를 지어 아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관음보살은 불교에서 자비의 보살입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잘보고 잘 도와야 되겠죠. 그래서 관음보살은 손이 많거나 눈이 많게 표현이 됩니다. 석굴암 본존불 뒤에 가면 11면 관음보살은 얼굴을 11개를 표현한 것입니다. 또 천수천안 관음보살이라는 것은 손이 천 개고 그 손에 눈을 하나씩 가진 그런 관세음보살인 것이죠. 그러니까 희명은 자비의 보살인 당신은 눈이 천 개나 되는데 우리 불쌍한 아들은 볼 수 있는 눈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둘도 아니고 눈 하나만이라도 주어 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 향가를 현대어로 번역해보면 대략 내용이 이렇습니다.

    “무릎을 곧게 하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 천안 관음보살님께 비옵나이다.
    천 손의 천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덮으사 둘 없는 저입니다.
    하나를 그윽히 고치기 바라나이다.
    아아, 놓아주신, 자비(慈悲)야말로 클 것입니다.”

    사회자 :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사 컬렉터 : 네. 이 노래를 부르게 했더니 아이가 눈을 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 2007년경 KBS 라디오 시각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 [우리는 한가족] 방송 당시의 모습이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두 번째 에피소드였다. [심청전]에서 심청의 아버지가 심청의 효성으로 눈뜨는 이야기였는데, 판소리 대목 중 “심봉사 눈 뜨는데”라는 대목을 소개해야 하는데, 이 방송 대상이 시각장애인이라 원래 ‘맹인’, ‘장님’, ‘소경’과 함께 ‘봉사’라는 표현은 금기어였다. 시각장애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비하 용어들이다. 원래 이 프로그램에서는 공식적인 표현은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심봉사’란 표현이 익숙할 뿐더러 준비한 판소리에서도 ‘심봉사’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원래 원고는 이랬다.

    아나운서 : 그럼 심청이와 아버지가 만난 뒤 심봉사 눈뜨는 하이라이트 부분을 한번 들어볼까요?

    역사 컬렉터 : 네. 보통 판소리의 가장 하이라이트 부분을 눈대목이라고 하는데요. 바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이 장면이 심청전의 눈대목입니다. 여기에서 눈을 뜨고 심봉사가 지팡이와 혜어지는 장면이 참 재미있습니다. 지팡이한테 “너도 나 만나 고생 많이 했다. 이제는 너 갈데로 잘 가거라.”라고 인사하고 지팡이를 버립니다. 또 우리가 보통 아는 것과 달리 여기에서는 심봉사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그날 잔치에 온 시각장애인들 모두가 눈을 다 떴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긴급히 회의가 열렸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다.

    첫째. ‘심봉사’는 쓰지 말고 ‘시각장애인 심학규씨’, 혹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씨’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다만 손 댈 수 없는 판소리 부분은 그냥 그대로 내보내기로 했다. 즉 ‘심봉사 눈뜨는 내용의 판소리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이런 표현은 ‘시각장애인 심학규씨가 눈뜨는 내용의 판소리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이렇게 바꾸게 된 것이다. 매우 낯선 표현이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이므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컬렉터는 이 방송 이후 절대로 ‘봉사’나 ‘맹인’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는 1년 동안 지속적으로 ‘시각장애인’이란 표현을 썼던 훈련도 한몫 했지만, 방송을 통해 당사자 입장에서 듣기에 불편해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집 세계는 이렇게 나의 인권 감수성도 키워주는 역할을 했다. 벌써 15년이나 지난 에피소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첩첩산중이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어찌할 것인가?

    백설공주와 일곱 키 작은 사람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는 어찌할 것인가?

    지적장애인 온달과 평강 공주?

    겨울에 끼는 ‘벙어리장갑’은 어찌할 것인가? (최근 초등학교에서는 ‘손모아장갑’으로 배운다 한다.)

    참 어렵고도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4년 11월 “과거로부터 답습해오던 부정적 용어와 표현 행위로 불특정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화할 수 있어 인간 고유의 인격과 가치에 대해 낮게 평가할 수 있다”며 공적 영역에서 장애와 관련된 속담 등 관행적 표현을 자제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우리 사회는 장애, 약자, 소수자들을 포용하는 사회로 점차 나아가고 있다. 그 진전과 함께 이런 용어들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듣는 모두에게 거부감이 없도록 진화하길, 그리하여 이 사회에 혐오와 배제, 차별의 언어가 아니라 관용과 배려, 포용의 언어가 넘쳐나길 소망해 본다.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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