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친구들 노사모로 민노당으로
    2007년 01월 05일 04: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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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민주화의 열기는 거리에 직접 섰던 이들은 물론 동시대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전과는 다른 공기를 숨쉬게 했다. 그 공기는 억눌렸던 사회 전반에 ‘민주화’를 퍼뜨렸다. 지금이나 그 때나 입시교육에 짓눌린 중·고등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87년 당시 일부 고등학생 개인이나 ‘지하서클’이라 불리던 학내 소모임의 학생들이, 대학생과 노동자 사이에 끼어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명동의 계성여고생들이 명동성당 앞 시위대에 도시락을 전달했던 일도 감동적인 사연으로 전해진다.

물론 87년 6월의 거리에서 이들의 조직적인 대열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 다른 학생들도 수업시간 중 소리없이 뱉어내는 일부 교사들의 탄식과 분노를 통해, 당시 도심 거리에 널린 이른바 ‘찌라시’를 통해 변화를 직감하고 있었다. 현재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는 권혜진(35)씨도 그런 다수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 권혜진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87년 열기, 학생회 직선제 중고생 운동으로 싹터

“87년 당시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선생님들이 시위에 나갔다 왔다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흥분해서 한 마디로 피를 토해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꼭 풍물을 치고 노는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나중에 그게 전교조의 전신인 평교사협의회였다는 걸 알았다. 미리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면 시위에 동참했을 텐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억눌렸던 느낌이 이제 풀어져도 되겠다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게 혜진씨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85, 86년 일부 고등학교에서 시작된 자율학습 거부, 두발 자유화 등에 대한 요구와 시위는 87년 봄 이미 학생회 직선제라는 요구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특히 6월 항쟁을 통한 대통령 직선제의 쟁취로 중고등학생들의 직선제 요구는 수업거부부터 가두시위까지 다양하게 급속도로 전국에 확산됐다.

혜진씨는 개인적으로 87년 13대 대통령선거 포스터에서 ‘군정종식’이란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특히 그는 김대중 후보를 “이런 시대에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용기 있어 보였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그게 용기가 됐는지, 객기였는지(그는 ‘순진해서’라고 말했다) 혜진씨는 “대통령도 직선제하는 데 우리 학교 회장 이름도 모른다는 게 비상식적”이라며 뜻 맞는 친구와 당시 그가 다니던 석관중학교 학생회 직선제를 이루자고 한 장짜리 사업계획서까지 만들었다.

평교사협의회 선생님의 비장한 표정 “지금도 선하다”

“3학년 올라가면서 ‘통한다’는 선생님 1명을 찾아가 사업계획서를 보여줬다. 사실 상당히 겁이 났다. 선생님이 불순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갔다. 그 때 선생님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굉장히 비장한 얼굴로 ‘알았다’, ‘열심히 해보자’ 하셨다.”

혜진씨는 이후 친구 10여명과 함께 석관중 민주화와 학생회 직선제를 위한 ‘민주돌곶이회’를 만들었다. 직선제 도입을 위한 투표 거부 운동을 펼쳐 한 차례 학생회장 선출을 저지시키기도 했다. 당시 근처 석관고에서도 ‘석민투’ 등 소모임이 만들어져 직선제 운동이 진행됐다.

석관고에서는 종이비행기 날리기, 시간을 정해 아침이슬 부르기 등 집단행동을 펼쳐 석관중 학생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 88년 말 서울에서만 100여곳, 전국 400여곳의 학교가 학생회 직선제를 쟁취했다.

또한 87, 88년 각 학교에서 직선제 운동을 이끌었던 소모임의 학생들은 지역별로 ‘서고협’, ‘광고협’ ‘부고협’ 등 학생조직을 만들었는가 하면,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나 기독교단체인 KSCM(한국고등학생운동총연맹) 등 공개단체에서 교류를 갖기도 했다. 현재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혜진씨는 이때부터 흥사단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근신 30일, 하지만 결국 “이기는 싸움”

하지만 혜진씨가 다닌 석관중은 결국 학교측이 2학년 때 학생부회장이었던 학생을 간선제로 학생회장에 선출해 직선제 도입에 실패했다. 더불어 혜진씨를 포함해 직선제 운동을 주도한 학생 4명에게 근신 징계를 내렸다. 87년, 88년 고교 직선제 운동을 주도했던 많은 학생들이 학교로부터 정학과 퇴학 처분을 받았으니 근신이면 ‘조용히 넘어간’ 셈이다.

“정학을 받으면 빨간 줄이 생기는 거라 생각했다. 징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상황을 이야기하면 그리 친하지 않았던 친구들도 징계 주면 가만 있지 않겠다, 들고 일어나겠다며 지지를 보내줬다. 당시 입시와 맞물려 있어서인지 정학이 아니라 각각 근신 30일과 일주일을 받았다. 저는 근신 30일 동안 하루 3시간씩 교장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89년 4월. 혜진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어느 날, 친구들 통해 석관중의 직선제 도입 소식을 전해 듣게 됐다. 그들이 징계를 받고 졸업한 후 선생님들이 “우리는 뭐 했나”는 반성(?) 속에 교장실을 찾아가 직선제를 요구하고 얻어냈다는 내용이었다.

혜진씨 등이 직선제 운동을 펼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때마다 “미안하다, 열심히 해라” 또는 “참아라, 지금 운동하지 말고 힘 있는 사람이 되서 세상을 변화시키면 되지 않냐”는 말로 설전을 함께 벌였던 대상은 다름 아닌 평교사협의회 선생님들이었다.

혜진씨는 학생들이 스스로 얻어내지 못해 학생 의견을 수렴하는 학생회가 아니라 단순히 직선제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에는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충격이 더 컸다고 한다.

“이게 운동이구나. 이게 승리하는 거구나. 이게 이기는 게임이구나. 뭉쳐서 하면 되는 거구나. 무력하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것 같다. 소중한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운동에서 “승승장구했다”

운동의 승리를 맛본 혜진씨는 한성고에 진학해서도 학내 민주화 운동을 고심했다. 학내 유일한 소모임인 방송반에 들어가 운동을 도모(?)하려던 그는 “선배들한테 매일 맞기만” 했고 중학교 때처럼 도움을 청할 선생님도 찾지 못했던 모양이다. 89년 전교조 출범 당시 한성고에서는 1명의 선생님만 참여했었다는 설명이 뒤따라 왔다.

그는 대신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다. 1학년 때 ‘학습’시켜 2학년 때 학생회에 들여보내는 학내 운동 지원 활동이었다. 당시 그의 기억의 한 단편. “퇴학 당하고, 정학 당하고. 당시 흥사단이나 KSCM에도 퇴학 당한 친구들이 많이 와 있었다. 안타까웠다. 선생님들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 직선제 하자 해서 맞고, 직선제 되고 나서도 학생회 전단지 허락 없이 뿌렸다고 맞고 벌 서고.”

87, 88년 학생회 직선제 운동에 이어 89년 전교조 사수 투쟁, 90년 참교육 운동이 이어졌다. 혜진씨는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에서 노래패로 활동하며 각종 집회에 참석하고 아카데미 회장을 맡아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생 운동에서 승승장구했다”고 말했다.

책만 보고 세상도, 운동도 다 아는 ‘돌아이’

“고등학생 운동에서는 항상 중심에 서 있었다. 노래도 만들어서 내 노래가 불리고 하면서 승리감에 ‘나는 잘 났어’ 이런 거에 도취돼 내가 가는 게 곧 길이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무서울 게 없었다. 그 때 계속 그렇게 갔으면 나도 ‘돌아이’가 되지 않았을까.”

혜진씨는 운동을 하며 만난 일부 동기들의 모습을 서슴없이 ‘돌아이’라고 불렀다. 당시 고등학교 소모임 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주로 대학생들이 보던 철학서, 경제서 등 책을 통해 학습했다. 그 역시 중 3때 석관고와 교회 대학생 선배들에게 추천받은 철학이나 경제학 책 등을 섭렵했다.

“책을 보고 이미 세상을 다 아는 거다. 그때부터 (고등학생들도) NL, PD를 정확히 가리고 노선투쟁을 했다. 대학에 간 일부 친구들도 자기가 고등학교 때 이미 운동을 했기 때문에 다 아는 거다. 대학생 운동이 수준 낮아 보이고 1~2년 선배들은 우습게 보이고 적응을 못하기도 했다. 그안에서 왕따가 되고 ‘돌아이’가 되는 거다.”

김귀정 열사 사망 ‘현장인물 1호’

   
 

혜진씨가 스스로 ‘돌아이’가 되지 않고 “철저하게 반성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가 고3 때이던 91년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씨의 죽음이었다. 김귀정씨는 당시 ‘공안통치와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3차 범국민대회’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

“충무로에서 토끼몰이로 200명 정도를 가둬놓고 백골단이 최루탄을 쏟아 부었다. 숨이 막혀 ‘아 이게 죽는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 한참 쏟아 붓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1시간 가까이 닭장차를 기다렸다. 1대가 왔다 가더니 더 이상 안 왔고 집에 가도록 해주었다. 알고 보니 사람이 죽은 거였다.

다음날 한겨레신문에 보도됐는데 그 자리가 내 자리였다. 변호사들이 수소문 끝에 김귀정 열사 죽음을 조사하기 위한 ‘현장인물 1호’로 나를 찾아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내가 죽을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죽었구나’였다. 그 때만 생각하면 더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 누나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 때도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혜진씨는 진로를 고민했다. 그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가들 사이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용납됐지만 노동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며 당시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노래패로 활동하며 문화운동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을 변하시키는 유일하고 중요한 운동은 노동이었다. 반면 문화운동은 감상적이고 핵심 운동이 아닌 변두리 운동, 아주 개인적인 운동으로 취급돼 그런 식의 ‘압력’이 많았다.” 

노래문화 운동, ‘참교육의 함성으로’를 아시나요

혜진씨는 그래도 문화운동을 하겠다며 음대 작곡가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바로 노래문화운동을 시작했다. “어차피 음대 가면 돈도 많이 들고 음악 공부도 늦게 시작해 쉽지도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고등학생 때 같이 노래모임을 했던 친구들과 함께 노래패를 만들었다.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도 많았다. ‘참교육의 함성으로’, ‘다시 또 참교육 햇살로’ 등이 그의 작품이다. ‘다시 또 참교육 햇살로’는 광주에서 분신한 김철수씨를 추모해 만든 곡이다. 그는 “저와 동기더라”며 직접 “밤이 깊어갈수록 별은 더욱 밝게 비추니~”라며 한 소절을 불러주기도 했다.

그는 청소년 집회, ‘어화둥둥 우리들’이라는 스승의날 행사, 학생의날· 4.19 행사 등 집회에 나가 공연을 하고 고등학생들에게 작사·작곡법, 노래법도 알려주면서 그렇게 1년 반을 보냈다. “자꾸 경직되어갔다. 소위 시위 문화에 활용되는 노래들, 김철수-김귀정 열사 추모곡 이런 게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기에는 힘들겠다. 이런 생각에 더 이상 자신이 없어졌다. 돈도 안됐고.”

어쩌면 이미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래문화 운동을 시작하던 그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91년 구소련의 붕괴 이후 가치관의 대혼란과 세상의 빠른 변화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3당 합당으로 대선에 승리한 김영삼은 더 이상 ‘군부독재’는 아니었다. 87년 ‘군부종식’ 포스터에 가슴 떨며 자신도 모르게 운동을 시작했던 그는 당시를 “세상이 공허해졌다”고 회고했다.

결국 그는 노래문화운동을 포기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모든 걸 다 잊겠다고 갔지만 제대할 때가 되니까 다시 대학에서 노동현장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동기들이 보였다. 잠시 중·고등학교 때는 ‘리더’였던 자신이 한참 밀려난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첫 승리의 기쁨, 학생회 직선제가 도입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의 열정, 그것을 잊고 살았다는 점에서 그는 “너무 창피했다”고 말했다.

   
 

첫 승리의 열정으로, “평생 청소년 운동하겠다”

혜진씨는 고등학교 시절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 앞에서 “청소년 운동을 평생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 지도위원으로 5년간 일했다. 하지만 달라진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고등학생들에게, ‘춤추고 싶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민주화 운동을 요구할 수 없었다.

90년대 중반 고등학생들이 통일운동을 할 것이냐, 고등학생 스스로 운동을 고민할 것이냐로 고등학생 운동판이 나뉘기도 했지만 그는 학생들의 자치, 복지 문제를 강조했다. 그리고 고민은 학생인권문제로 이어졌다. 자치운동에서 자연 두발, 복장문제 등 점점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로까지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청소년 인권 세미나, 사회참여프로그램, 인권교육 지도자 과정을 만들고 두발 자유 공동캠페인을 벌이는 등 ‘청소년 인권’은 지금까지 그에게 이어지는 화두다.

하지만 지도위원은 월급이 없다보니 백화점 아르바이트,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 사무직 아르바이트 등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연명해야 했다. 더구나 흥사단내에서 청소년 운동을 부차적으로 치부하는 시각도 그를 힘들게 했다. 심지어 흥사단에서 다른 사람에게 고등학생 아카데미를 맡기면서 “3개월 만에 다 말아 먹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혜진씨의 평생을 다짐한 운동에서 한 4년 ‘외도’를 했다. 평소 민주시민 교육방법론 등 교육 방법론을 배워두고 투명사회운동본부에서 교육 매뉴얼을 만들었던 경험 덕에 리더십 강연 요청이 많았다. 프리랜서로 처음엔 힘겨웠지만 참여식 프로그램 방식으로 인정을 받았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지난해 1월부터 다시 흥사단 교육운동본부에서 청소년 인권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혜진씨는 “설움을 받다가 사무처장으로 돌아왔다”고 웃는다. 간사 1~2명과 함께하는 그리 화려할 것도 없는 ‘환향’이지만 그의 운동에 ‘마음의 고향’을 일깨워주는 공간이다.

전교조 선생님들 학생인권 결단 있어야

혜진씨는 지난해 학생인권법 통과를 위한 활동과 5.31 지방선거 과정에서 41개 단체들이 ‘5.31 청소년운동본부’를 만들어 만 18세 선거권 인하 등 청소년인권 관련 정책 제안을 한 것을 주요한 활동으로 꼽았다. 청소년 단체들이 청소년보다는 청소년 지도자를 위한 정책을 더 고민하는 것에, 또 청소년 단체라면서 청소년 인권으로 ‘장사’를 하는 것에 분개하기도 했다. 그는 “배신자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최근 도마에 자주 오르는 전교조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혜진씨는 “학생 인권 문제라면 두발 자유, 체벌금지, 학생회 직선제,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0교시 타율학습 폐지 등 이런 것들인데 전교조 일선 선생님들이 지지할 수 있나”고 되물었다.

이어서 그는 “지지해야 한다”며 “선생님들이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학생들은 교사를 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고 교사들과 싸움으로 받아들여지면 그건 인권문제의 퇴보”라고 강조했다. 학생의 인권이 선생님의 인권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얻어질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혜진씨는 “전교조가 힘을 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전교조 전임 집행부가 학생인권 지지를 표명했지만 일선에서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교조가 퇴보된 입장을 고수한다면 계속 고립되고 보수와 권력 집단으로부터 문제제기만 받다가 좌초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새 집행부에 대한 우려와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20년 전 동기들 노사모로, 민노당으로

지난해 말 혜진씨는 고등학교 시절 운동 동기들과 송년회를 했다. 30~40명의 동기가 있는데 30여명이나 참석했다. “매년 송년회나 결혼식, 애들 돌이다 해서 일년에 몇 차례는 얼굴을 보게 된다”는 혜진씨는 “이름 석자 대서 알 만한 사람은 그다지 없네요”라며 웃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들 중 20~30명은 대학에 진학했고 10여명은 노동현장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은 한총련을 비롯해 “워낙 패가 많이 갈려서” 학생운동을 이어갔고 지금은 민주노동당 등 정당에 들어가거나 대학교수가 된다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다.

노동현장에 간 친구들은 3~4년 길게는 5년 안에 현장에서 “금방 나왔다”. 혜진씨는 “현장에서 개인적인 한계를 많이 느꼈던 것 같다”며 “자기 삶이 노동자가 아니었던 것이 90년대 중반 다변화된 사회에서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도 노동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그들 역시 일부는 민주노동당에 들어갔다.

30대 중반의 그들이 만나면 20년 전 그 시절을 회고할까? “운동 이야기는 잘 안 한다. 그 때 나 좋아했냐? 이런 이야기서부터 누가 출마했다더라, 또 떨어졌냐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런 친구들은 후원금을 내라고 하기도 하고.”

현실정치 이야기도 가급적 삼간다. 노사모를 했던 친구도 있고, 민주노동당에 들어간 친구도 있고,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 등 정치적 성향이 달라 “일부러 꺼내서 논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운동하며 ‘잊지 않아야 할 열정’, ‘마음의 고향’을 한번씩 일깨워주면 될 일이다.

87년 세력이 이 시대 민주화운동 걸림돌 되지 말아야

2007년. 포스터 한 장에 전율했던 중학생이 어느새 서른다섯 시민단체의 활동가가 됐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혜진씨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상당히 진전된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뤘고 의회 권력이 바뀌고 진보정당이 들어서고 노동운동도 “일부 문제가 있지만” 성장했다. 다수의 약자와 노동자의 권익, 국민 참여가 향상됐다는 말이다.

혜진씨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권위주의 향수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다양한 이익집단의 다양한 의견들이 폭발적으로 나오는 상황에 대해 그는 “갈등은 민주화의 척도로 잘 관리하면 되는 문제”라며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이 시대의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갈등이 사회적 혼란으로 인식되면서 다시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보수의 득세에 “그 책임은 수구세력 뿐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87년 항쟁의 주도세력들에게도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87년 6월 항쟁에서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과 그 운동으로 파생돼 나왔던 운동가들의 지금 현재 모습은 그 때 당시 독재자와 별 다를 게 없이 비쳐진다”고 주장했다.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직성’, 일상이나 조직 운영에서의 ‘비민주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비하 등이 바로 혜진씨가 말하는 “독재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는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운동 선배들이 오히려 현장에서 ‘이 시대 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시민운동을 하든 노동운동을 하든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하는데 어느 순간 사람은 빠져버리고 껍데기와 옛날 추억만 남아버렸다. 그러면서 감동이 사라져버렸다. 이는 변화를 거부한다와 맞닿아 있다. 가슴떨림이 없는데 어떻게 변화가 되나. 고객만족을 이야기하던 백화점이 어느 순간부터 고객 감동을 이야기한다. 자본도 못 따라가는 우리 운동의 수준이 가슴이 아프다.”

혜진씨는 “87년 6월 항쟁이 기념의 대상, 정체된 추억거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 민주주의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평가해 민주화 운동 세력이 새로운 전환점을 찾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을 현실사회의 주체로서 동반자로서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선배들이 결단을 내리고 지지하고 지원해 주는 것이 87년 6월 항쟁을 완성시키는 게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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