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집과 컬렉터의 안목 : 안중근·이완용
    [컬렉터의 서재] 수집품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나?
        2022년 02월 15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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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6월 인터넷 경매에 오래된 유언장 하나가 올라왔다. 무슨 유언장인가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았더니, 일제 강점기인 1945년 7월에 작성된 것이었다. 가로 40cm, 세로 19cm 크기 한지에 일본어로 정성스럽게 쓴 이 유언장은 안동에 살던 김태봉(창씨명 금강태봉)이 징병제로 전쟁터로 나가면서 아내에게 남기고 간 글이었다. 어린 딸 명자(明子)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잘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당부로 시작하여 “대일본 제국 만만세”로 끝을 맺고 있는 이 유언장은 민족 말살 통치기 역사의 한 단면이 담긴 의미있는 자료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이와 비슷한 유언장 하나가 전시되어 있는데, 징병 가는 남편 수일(修一)이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아내에게 남긴 유언장이다. 이런 유언장은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자료가 아니다.

    경매에 나온 유언장이 일본어로 쓰여 그 내용 해독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을까? 예상과 달리 이 유언장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역사 컬렉터 혼자 입찰하여 낙찰 받은 가격은 시작가인 2만원! 역사 컬렉터는 이 정도 자료라면 50만원 이상의 가치는 충분히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정도면 거저 주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징병 관련 유언장은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2만원인가? 아니면 그 25배가 되는 50만원인가?

    [사진] 김태봉이 아내에게 남긴 유언장. 2만원에 수집한 자료이다. (박건호 소장)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설립될 때였다. 박물관 설립에 필요한 자료를 매입한다는 공고를 보고 역사 컬렉터는 당시 소장 자료 중 일부를 박물관에 매도한 일이 있다. 그중에는 동학농민운동 관련 문서 한 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라도 지역 동학 농민군 동향에 대한 한 장짜리 보고서로 지방 관아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자료였다. 당시 매도 가격은 20만원. 이 자료는 그 몇 년 전 인터넷 경매를 통해 수집한 것으로 문서 속에 적힌 “東徒(동도)”라는 표현과 전라도 지명들이 심상치 않아서 수집했던 것이다. “東徒”는 ‘동학 무리’라는 뜻으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東匪(동비)”와 함께 동학 농민군을 지칭할 때 쓰던 용어였다. 당시 수집 가격은 단돈 5천원이었다.

    그렇다면 이 동학 관련 문서 한 장의 가치는 얼마인가?

    5천원인가? 그 40배가 되는 20만원인가?

    역사 자료를 수집하다보면 자료의 가치와 가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동일한 자료라도 시기나 조건에 따라 가격 편차가 아주 크다. 자료들 가격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료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리고 자료들의 적정 가격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적정 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경매의 세계

    오래 전 수집의 세계에 입문한 역사 컬렉터는 주로 경매를 통해 자료들을 수집한다. 인터넷 경매와 현장 경매 방식이 있지만 그 원리는 동일하다. 일반적인 경매 절차는 물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값을 올리면서 매수 청약을 하고 가장 높은 액수를 제시한 이가 물품의 최종 낙찰자가 되는 방식이다. 보통 매수인들은 입찰 전에 미리 그 물품을 볼 수 있다. 현장 경매의 경우에는 직접 볼 수 있고, 인터넷 경매에서는 매도자가 올린 설명과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물품을 파악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물론 모든 경매가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서 정반대 방식으로 이뤄지는 경매도 있다. 소위 ‘네덜란드식 경매'(Dutch auction)라고 하는 것인데, 낮은 가격에서 점점 가격이 높아지는 일반적인 경매 방식과 달리 여기에서는 높은 가격에서 시작하여 가격이 점점 낮아진다. 즉 매도인이 처음에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 가격을 먼저 제시한 후 점점 더 낮은 값을 불러 매수인이 그 값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가격이 너무 떨어져 매물을 회수해야 할 정도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값을 깎아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경매 역시 시장의 한 형태이므로 ‘수요-공급의 법칙’이 작동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어떤 물건이 지나치게 비싼 가격으로 경매로 나온다면 구매자들은 경매에 입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유찰이 되는 것이고, 판매자는 그 물건의 판매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가격을 더 낮추어 다시 시장에 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좋은 물건이 싼 가격에 경매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입찰에 참여하게 되고 가격은 점점 올라가면서 제 가격을 찾게 된다. 이렇게 경매에서 팔고자 하는 사람이 원하는 가격과 사려는 사람들이 지불하겠다는 가격이 상호 작용하면서 적정 가격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 자료의 경매에서는 농산물, 부동산 등 다른 경매 시장과 다른 특수성이 존재한다. 역사 자료는 한정적인 수량이 존재하고 때로는 매우 희귀한 물품을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적정 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크게 보면 역사 자료들이 거래되는 경매 시장에도 시장 원리가 작동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숱하게 존재한다. 변수가 많다는 뜻이다. 자료의 희귀도, 보존 상태, 그리고 수집가들의 선호도, 자료 속에 내재된 역사적 혹은 예술적 가치 등에 따라 예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자료인데도 이전에는 낮은 가격에 거래되었던 것이, 몇 년 뒤에는 몇 배, 혹은 몇 십배의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주식시장의 테마주처럼 한때는 인기있는 수집 품목으로 각광 받다가 얼마 후에는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것들도 있다.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매우 가치있는 물건이 우연히 눈썰미 있는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그 물건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는 운명을 맞는다. 이런 경우 시작가 정도의 싼 가격으로 낙찰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물품 가격이 안정적이지 않고, 그때그때 변수에 따라 심하게 요동을 치는지라 그 적정 가격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이 시장의 얄궂은 특징이다. 오랫동안 수집을 해왔던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오히려 이것이 이 시장이 가진 오묘한 매력이기도 하다.

    가격이 합리적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는 그것 말고도 종종 수집가들의 욕심이 충돌해서 생기기도 한다. 열정적인 수집가 2∼3명이 우연히 한 물품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경우 그 가격은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수집가의 수집욕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듯이, 그에 연동되어 수집 가격도 추정가의 몇 배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집가의 광적인 열정이 초래한 참혹한 결과이다. 물품의 가치에 집중해서 경매에 참가해야 하는데, 과도한 경쟁심과 상대를 누르고 말겠다는 헛된 승부욕이 평정심을 흔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풍차 돌리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집가들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미친 가격을 나중에서야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했던가? 높은 수준의 컬렉터가 되는 것은 이 평정심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휩쓸리는 순간 평정심을 잃을 수 있다. 화수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수집가들도 비용을 아껴서 수집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

    이상 뒤죽박죽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고 이야기를 이어가자.

    경매를 통해 옛 자료를 수집할 때, 그 가격은 전체적으로는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다른 시장보다 의외의 변수가 더 많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경매에 나온 자료들이 공산품처럼 다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희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으면 제 가치보다 더 높게 거래되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아주 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렇게 수많은 돌발상황과 우연성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이 세계의 특징이다. 그래서 경매 시장의 이런 의외성과 우연성에 눈을 뜰 때 수집은 훨씬 더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좋은 물건을 의외로 낮은 가격에 구할 수도 있는 세계이며, 실제 가치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살 수도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생리이다. 너무 높은 가격에 물건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고도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집품의 가치와 수집가의 안목

    그럼 평정심만 갖추면 적정 가격에 물품을 수집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경매에 참여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이지 그것이 가격을 결정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여기에 추가로 필요한 것은 자료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안목이다.

    수집 세계에서 가치나 가격 결정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 원리에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자기 주관과 가치 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학습과 수집품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계속 ‘감(感)’을 익혀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시행착오는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므로 이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도전 정신도 이 세계 입문 초기에 갖추어야할 덕목 중 하나이다. 약간의 수업료라고 해두자.

    수집 세계에는 수집가의 안목이라는 능동성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 이 능동성을 점점 키워 나가야 훌륭한 컬렉터가 될 수 있다. 물건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굳건한 중심과 기준이 되는 것이다. 얼핏 듣게 되면 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지금 현재 경매 가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기에 비싼 가격이면 그것은 비싼 것이고, 내가 보기에 싼 가격이면 그건 싼 것이다.

    역사 컬렉터가 겪은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1940년대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각 문중에서는 문중회의를 개최하여 문중 전체의 의견을 모아 대응하고자 했는데, 여기에서 창씨를 할지 말지, 한다면 어떻게 창씨를 할지를 논의하였다. 역사 컬렉터는 이 창씨 논의와 관련된 문중 회의 개최를 알리는 통문 3장을 소장하고 있다. 모두 1940년에 열린 문중 회의 자료였다. 창씨개명 정책에 대응하여 1940년 전국적으로 수많은 문중회의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 속에는 자신의 원래 성씨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논의 주제가 기록되어 있다. 수집 시기는 2018년, 19년, 20년으로 3년에 걸쳐 매년 한 점씩을 수집했다.

    독자들께서는 역사 컬렉터가 이 통문들을 얼마에 수집했을지 먼저 추측해 보시라. 그게 어렵다면 독자들이 수집가라면 이 통문을 어느 정도 가격에 수집할 의향이 있으신가?

    역사 컬렉터가 처음 수집한 자료는 2018년 8월 4일 자료로 1940년 경주 김씨 대보공파 문중에서 발행한 문중회의 개최 통문이다. 이 문중에서는 시조 대보공이 경주 계림에서 탄강(誕降)하였음에 착안하여 계림을 약간 변형한 ‘대림(大林)’으로 성씨를 설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시작가는 50만원, 입찰자는 아무도 없었다. 컬렉터는 이 자료가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과 관련하여 유의미하고 가치있는 자료라고 판단하여 5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혼자 입찰하였다. 그리하여 이 ‘경고문(敬告文)’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를 50만원에 낙찰받았다.

    [사진] 1940년 경주 김씨 대보공파 문중이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대응하여 성씨를 ‘대림(大林)’으로 결정하고자 개최한 문중회의 통문 자료(박건호 소장)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2019년 4월, 위 자료와 매우 흡사한 통문 자료가 경매에 나왔다. 평전(平田) 신씨 전첨공파(典籤公派) 문중에서 창씨개명과 관련한 문중 회의를 개최할 때 통문이었다. 위의 경주 김씨 대보공파 문중 회의 자료와 동일한 성격을 지닌 자료였고, 회의가 열린 시기도 동일하게 1940년이었다. 평전 신씨는 새로 만들 씨명으로 원래 자신들의 본관을 그대로 활용하여 ‘平田(평전)’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당시 본관을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창씨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경매 시작 가격은 1만원. 이 정도 가격이면 수많은 수집가들을 흥분시킬만했고, 뜨거운 경합이 벌어져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차가웠고, 역사 컬렉터는 어렵지 않게 1만원에 이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사진] 1940년 평전 신씨 전첨공파 문중이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대응하여 성씨를 ‘평전’으로 결정하고자 개최한 문중회의 통문 자료(박건호 소장)

    그로부터 1년 7개월이 지난 2020년 11월에 위의 두 자료와 유사한 자료가 다시 경매가 나왔다. 이번 자료는 백천(白川) 조씨 문중에서 새롭게 사용할 씨명으로 역시 본관을 그대로 활용한 ‘白川(백천)’으로 할 것을 의논한다는 내용의 통문이다. 앞의 두 장 자료보다 보존 상태가 더 좋은 자료였다. 시작가는 6,000원이었다. 6만원 혹은 60만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입찰자는 없었다. 역사 컬렉터는 이 자료 역시 단독 입찰하여 6,000원에 수집할 수 있었다.

    [사진] 1940년 백천 조씨 문중이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대응하여 성씨를 ‘백천’으로 결정하고자 개최한 문중회의 통문 자료(박건호 소장)

    이렇게 하여 역사 컬렉터는 동일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문중 회의 자료를 3점이나 수집하게 된 것이다. 그 가격은 각각 50만원, 1만원, 6천원이었다. 그렇다면 컬렉터가 수집한 3장 자료는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는 것인가? 어느 정도가 적정 가격일까? 세 점의 수집 가격을 합해 3분의 1로 계산한 172,000원이 적정 가격인 것인가? 경매에는 수수료가 추가로 들어가니 대략 18만원 정도로 보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컬렉터가 50만원으로 수집한 자료는 18만원 이상이므로 비싸게 수집한 것이고, 나머지 두 장은 그 이하이므로 싸게 수집한 것인가?

    컬렉터는 이 자료 3점 모두 적정 가격 이하로 수집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자료들이 가진 역사적 가치는 50만원 이상이라고 처음부터 마음속에 가치 평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0만원으로 수집한 첫 자료는 적정 가격으로, 1만원과 6000원으로 수집한 2장의 자료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수집한 것이다. 최고가와 최저가의 차이는 숫자상으로는 80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역사 컬렉터에게 이 자료들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닐 뿐이다. 시장에서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이 자료들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자료들이다.

    공산품 시장에서는 가치와 가격이 비교적 비슷하게 수렴하지만, 위 사례처럼 역사 자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수집가가 스스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능동성을 뒷받침하는 힘이다. 물건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줄 세울 수 있는 힘!

    수집가가 자료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수집의 세계는 매우 불가사의한 세계로 보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동일한 의미를 가진 3장의 자료 중 상태가 제일 좋은 것이 6000원이 되고, 상태가 더 안 좋은 자료가 무려 80배가 넘는 50만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수집의 세계에서 이런 일은 매우 흔하다. 어쩌면 변수가 아니라 디폴트 값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정도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런 불가사의한 경매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하는 힘은 오로지 컬렉터의 안목이다. 컬렉터의 높고 빛나는 안목은 어두컴컴한 수집의 세계에서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끊임없는 공부와 단련!

    이것은 꼭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닌 것이다.

    [사진] 창씨개명과 관련한 문중회의 통문 자료 수집 당시 경매종료 시간 기준 낙찰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50만원, 1만원, 6천원으로 가격 편차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중근과 이완용, 붓글씨로 자웅을 겨루다

    창씨개명 관련 문중회의 자료 3점처럼 얼핏 보면 비슷한 자료로 보이지만, 수집 가격이 천양지차인 경우는 수집 세계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안중근과 이완용 붓글씨의 가격 차이는 그중 가장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독자들께서는 안중근 의사 붓글씨가 경매에 나온다면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살 용의가 있으신가? 또 친일파의 상징으로 통하는 이완용 붓글씨가 나온다면 살 의향이 있으며, 산다면 얼마의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으신가?

    먼저 안중근 의사 붓글씨부터 가격을 어림잡아 보자.

    남아있는 작품 수가 적어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는 경매에 아주 드물게 나오는 편이다. 경매에 작품이 나올 때면 언론에서도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곤 한다. 근래 안중근 의사 유묵(遺墨)이 경매에 나온 것은 5년 전이었다. 2017년 12월 열린 K옥션 경매에 나온 안중근 의사의 ‘세심대(洗心臺)’라고 쓴 붓글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 붓글씨는 일본인 소장으로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으로 추정가는 1억 8천만∼4억원으로 책정되었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어내는 곳’이라는 뜻이다. 1910년 경술년 3월에 쓴 것인데, 1910년 3월 26일이 안 의사가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날이므로 이 글씨는 안중근 의사가 형 집행을 앞두고 그 직전에 쓴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가겠다는 그의 의연하고도 초탈한 심정을 담고 있다. 경매 결과 이 세심대 유묵은 최대 추정가인 4억원에 낙찰되었다.

    안 의사의 유묵은 그 1년 전인 2016년 9월 K옥션 경매에 나온 적이 있었다. ‘황금백만량 불여일교자(黃金一萬兩 不如一敎子)’란 유묵인데, 이 글귀는 명심보감 훈자편에 나오는 것으로 “황금 백만량도 자식 하나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이다. 이 글씨는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가 감옥의 경수계장이던 나카무라에게 써 준 것이다. 당시 경매에서 이 유묵은 2억 8000만원에 시작해 최종 낙찰가는 7억 3000만원이었다. 낙찰자는 개인이 아닌 정부 기관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었는데, 박물관은 이 유묵을 이듬해 3월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한 바 있다.

    그 3년 전인 2014년 서울옥션 경매에도 안 의사의 붓글씨 ‘경천(敬天)’이 나와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 글씨는 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처형 직전 안 의사가 뤼순 감옥소장의 요청으로 남긴 것이다. 그후 뤼순 감옥소장 손자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박삼중 스님이 일본을 몇 차례 오가며 소장자와 접촉한 끝에 2004년 이 글씨를 기증받아 한국으로 들여왔다. 그 후 이 글씨를 보관하던 삼중 스님이 안의사 유해 발굴 사업 비용 마련을 위해 2014년 3월 서울옥션 경매에 내놓았던 것이다. 예상 체결가는 7억 5000만원 내외. 시작가 7억원으로 경매가 시작되었지만 입찰자가 없어 결국 유찰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서울 잠원동성당 평신도 모임인 사목회가 이 글씨를 박삼중 스님으로부터 5억9000만 원에 사들여 서울대교구에 기증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 의사의 글씨가 104년 만에 천주교 품에 안긴 것이다. 유묵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천주교가 금하는 살인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 직전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로부터 마지막 고백성사와 미사요청을 거부당함으로써 천주교로부터 사실상 파문을 당했던 안 의사가 천상에서 이 일을 보았다면 매우 기뻐하셨을 것이다.

    [사진] 2014년 8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유묵 ‘경천’ 기증식 장면.(노컷뉴스 사진)

    이상 경매 기록을 통해 안중근 의사 붓글씨의 금전적 가치는 대략 감을 잡으셨을 것이다. 소품 정도가 아니라 큰 작품들은 보통 10억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와 대척점에 서있는 이완용 붓글씨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다음 참고사항 두 가지를 참고하여 한번 추측해보시라.

    참고사항1. 이완용의 붓글씨 솜씨는 당대 최고로 평가되었다. 정치 행적과는 관계없이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안중근의사의 붓글씨보다 글씨 자체의 완성도는 뛰어나다.

    참고사항2. 역사 컬렉터는 이완용의 붓글씨를 4점 소장하고 있다.

    정답! 이완용 붓글씨는 몇 억도 아니고, 몇 천만원도 아니다. 심지어 몇 백만원도 아니다. 몇 십만원대 더 정확히 말하면 20∼50만원대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완용은 안중근보다 뛰어난 명필인데 왜 가치가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말이다.

    미술품의 경우 예술적 완성도가 작품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서예작품의 경우는 미술품과는 다른 특수한 가치 평가 기준이 작동한다. 이것은 동양의 오랜 서예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書如其人(서여기인)’이라 하여 글씨를 글씨로만 보지 않았다.

    ‘書如其人’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때 ‘그 사람’의 의미는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재산수준, 관직의 높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 교양, 기개, 학문 등을 포함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붓글씨는 글을 쓴 사람의 인격적 총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송나라 소동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에 글씨를 논함에 겸하여 그 생평(生平)도 논하면서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비록 글씨가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청나라 주화갱의 말도 소동파의 말과 동어 반복이다.

    글씨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하나 품격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므로 도덕이나 공훈을 세운 사람, 또는 문장이나 절개로 뛰어난 사람은 대대로 그 사람을 깎아 내리지 않고 가면 갈수록 세상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면서 더욱 그의 글씨를 소중하게 여긴다. 따라서 그 사람과 글씨는 함께 천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고 전해지는 것이다.

    이런 글씨에 대한 전통적 인식 때문에 이완용의 글씨는 아무리 명필이라도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고, 안중근의 글씨는 비록 기교가 다소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가치는 빛나는 것이다.

    [사진] 왼쪽은 안중근, 오른쪽은 이완용. 그들 삶의 궤적이 극단적으로 달랐듯이, 그들이 남긴 붓글씨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흥미롭지 않은가?

    120년 전 당시 현실의 승자는 이완용이었고, 패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안중근은 역사 속에서 영원한 승자가, 이완용은 영원한 패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붓글씨 가격처럼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기교보다는 영혼이 아닐까 싶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사람들이 우르러 본다. 그 유묵 속에는 그의 치열한 삶 전체가 반영되어 있다. 의병장으로서 살았던 군인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을 설파했던 사상가 안중근의 삶이 모두 녹아 들어있다. 그래서 안중근 글씨는 그 기교를 떠나서 무겁고 장중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이에 반해 이완용의 글씨는 누구도 찾지 않는다. 이완용의 유묵에 대해서는 그저 침 뱉고 싶어할 뿐이다. 메이저 경매에는 언감생심 얼굴도 못 내밀고, 인터넷 경매에만 가끔 나온다. 그나마 나 같은 컬렉터들이 있어서 이완용의 붓글씨가 살아남을 수 있지, 그것이 아니었다면 벌써 다 태워 없어졌을 것이다.

    [사진] 왼쪽은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보물 제569-9호)로 내용은 “五老峯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삼상의 물로 먹 갈아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라는 호방한 기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완용 붓글씨로 “山中何事奇 石上多松柏 夷險不移心 四時靑一色 산속 무엇이 기특한고. 바위 위에 소나무 잣나무가 많구나. 평탄하거나 험난하거나 마음은 한결같아 사철 푸르러 한빛이로다.”라고 썼다. 내용은 절개를 노래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왼쪽은 소장처 미상, 오른쪽은 박건호 소장)

    그렇다면 역사 컬렉터는 왜 이런 친일파의 붓글씨를 수집하는가?

    더러운 역사라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가에 세워져있는 삼전도비(‘청 태종 공덕비’)가 그렇지 않은가?

    이 비석만큼 한국사의 굴욕을 상징하는 유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비석을 산산조각내서 호수 속에 던져버려야 분노가 풀릴 것인가? 좋고 빛나고 화려하고 영웅적인 것만 기려서 남기고 보존하고, 나쁘고 더럽고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역사를 다 지워버린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언젠가 우연히 친일파 이두황을 다룬 TV프로그램을 보았다. 거기에서 관군 지휘관 이두황으로부터 즉결 처형을 당했던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차치구의 후손이 이두황의 붓글씨를 수집한 내용이 나왔다. 그는 자신이 이두황의 붓글씨를 수집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차치구 할아버지는 저의 증조할아버지십니다. 그분을 살해한 사람이 이두황입니다. 가족사로 보면 이두황이 우리 가족을 치명적으로 가슴 아프게 한 사람이죠. 이것이 조선 정3품 이두황의 글씨들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사람에게 아부하는 글이 쓰여 있기 때문에 친일적인 의미보다는 일본에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운 역사라고 해서 무조건 다 없애기보다는 어떤 부끄러운 짓을 했는가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의미에서 부끄러운 역사지만 꼭 보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차치구의 후손이 이두황을 존경해서 그 글씨를 수집한 것이겠는가?

    역사는 아름다워도 역사이고,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컬렉터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더러운 것은 더러운 대로 수집하는 것이다. 어차피 안중근의 글씨야 수집하고 보존해줄 사람이 많아서 나설 바는 아니지만 이완용 글씨는 나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보존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있어서 수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수집할 경제력이 안된다.

    설마 역사 컬렉터가 이완용을 존경해서 그 글씨를 수집하는 것이겠는가?

    오해하지 마시길….

    덧붙여 이건 그냥 여담이다.

    2020년 8월 ‘유퀴즈 온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광복절 특집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수집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방송 직후 대중과 언론이 제일 주목한 것은 컬렉터가 수집한 이완용 붓글씨를 유재석이 ‘안 보고 싶다’고 분노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언론에서는 “‘유퀴즈’ 매국노 이완용 붓글씨 공개, 유재석 ‘이걸 왜 모으냐’ 분노”로 제목을 뽑았다. 방송 당일 ‘이완용’이 갑자기 실시간 검색어 2위로 오르기도 했다. 왜 이걸 모으느냐는 유재석씨의 질문에 역사 컬렉터는 위에서 밝힌 것과 비슷하게 그 취지를 설명했다. ‘나라도 모으지 않으면 이런 것들은 다 소멸할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역사도 역사다. 이런 자료들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같이 전시했을 때 안중근 의사의 기개와 삶이 한결 더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역사 컬렉터는 여기서 큰(?) 실수를 범했다. 당시 이완용은 부와 권력을 얻었고, 안중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역사의 평가는 정 반대다. 그래서 그 붓글씨의 가격이 ‘100배’ 차이가 난다고 했다. 붓글씨 가격을 비교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를 제일 낮은 쪽 기준으로 5억원, 이완용 붓글씨를 제일 높은 가격 기준으로 50만원 정도로 대략 잡아서 계산한 결과였다. 다음 날 언론 기사들은 역사 컬렉터의 이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한결같이 “안중근 붓글씨, 이완용과 100배”라는 제목을 내걸었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아 다시 계산해 보니 ‘100배’가 아니라 ‘1,000배’였다. 숫자에 밝지 않은 역사 컬렉터의 무지는 그렇다치더라도 그 많고 많은 기자, 방송 작가나 PD, 심지어 댓글을 단 대중 그 누구도 100배가 아니라 실제로는 1000배 이상의 차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도 ‘안중근과 이완용의 붓글씨 가격이 100배 차이’라는 그 기사들은 그대로 박제된 채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다. 그래서 대중 앞에서는 항상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 또 절감했다.

    [사진] 안중근 의사와 이완용 붓글씨의 가격 차가 100배라는 자막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1,000배 이상 차이가 난다. (tvN 유퀴즈온더블럭 2020년 8월 방송 화면)

    * 컬렉터의 서재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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