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로에 서다, 비상이냐 침몰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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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03일 0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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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에게 2007년은 커다란 시험의 한 해다. 올해 12월의 대통령 선거 후 불과 몇 달 뒤에 18대 총선이 있다. 만약 이 선거에서 당이 17대 총선을 상회하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아마 대다수 평자들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실험은 일단 ‘실패’한 것 아니냐는 평가를 내릴 것이다. 비록 원내에 몇 개의 의석은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최근 한 언론과의 대담에서 노회찬 의원은 당이 대선에서 5백만 표까지 얻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당의 성적은 100만 표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 몇 배의 득표를 하자는 것이다. 가슴 뛰는 목표가 아닐 수 없다.

    5백만표 얻어야 08 총선에서 현재 위상 유지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그 만큼의 지지는 얻어야, 대선 후 곧 있을 총선에서 당이 현재의 위상과 규모 정도는 유지할 수 있다는 진실이다. 지금 우리 실력으로는 상당히 벅차 보이는 목표를 대선에서 쟁취해야만 이후 총선에서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것. 말하자면, 비상(飛上) 아니면 침몰이라는 이야기다. 그 중간은 없다.

       
      ▲ 2002년 9월 8일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
     

    사실 대통령 중심제이면서 보수 양당 구조가 뿌리 깊게 정착한 나라에서 신생 좌파정당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상황의 어려움이 우리들의 역사적 책임을 가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의 이후 삶의 방향이 올해에 판가름 날 것이고, 그것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마주한 시간의 이러한 엄중함과 절박함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우리는 올 한 해를 뚫고 나가야 한다. 필자는 5개의 키워드를 지형지물 삼아 나름대로 그 앞길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용들의 전쟁

    첫 번째 키워드는 좀 빤한 말이다. ‘용들의 전쟁’. 언제부터인가 언론은 대선 주자들을 파충류로 비유해왔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연초부터 파충류들 사이의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1월이 가기 전에 이른바 ‘4룡’이 모두 출마 선언을 끝내리라는 전망도 있다.

    당으로서는 지난 3년간의 원내 활동이 난생 처음 겪어본 일이었던 것처럼 대선 후보 경선이란 것도 전에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가 하면, 정반대로 엄청난 기대를 거는 이들도 많다. 걔 중에는 지방선거 이후의 당의 침체 상태가 대선 후보 경선으로 단번에 역전될 것이라는 야무진 꿈도 있다.

    과연 대선 후보 경선이 그 정도의 폭발력을 보일지, 필자로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번 경선이 기적 같은 반전의 기회는 고사하고 당의 또 다른 위기 요인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다음의 두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정파 대립, 조직 선거 최대한 막아야

    첫째는 대선 후보 경선의 경쟁 구도가 민주노동당의 오래된 정파 대립 구도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자주파’와 ‘평등파’가 특정 후보를 배타적으로 지지하고 그 후보의 당선을 위해 조직표를 동원하는 양상이 되어선 안 된다.

    이런 조직 선거는 여러 모로 당의 생명력을 갉아 먹을 것이다. 우선 민주노동당의 당내 예비 경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격감시킬 것이다. 한 마디로, ‘빤한’ 싸움에 누가 무슨 재미를 느끼겠는가?

    조직 선거는 또한 당내 경선이 끝난 뒤 당 안에 커다란 후유증을 낳을 것이다. 그 후유증의 양상과 정도는 당직 선거 때와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어쩌면 반쪽짜리 당으로 대선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조직 선거를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것은 이번 당내 경선에 요구되는 또 다른 전제 조건과도 직결된다. 그것은 대선 후보 경선이 비전과 영감(靈感)이 격돌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만약 당내 경선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면 그게 정말 당의 일대 회생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의 17대 국회 활동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던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의원들이 ‘정치가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을 들겠다. ‘정치가 정신’이란 무엇인가? 시대와 교감하고 대중과 소통하면서 먼저 앞서서 쟁점과 제안을 던지는 것이다.  

    당내 후보들 ‘정치가 정신’을 보여라

    그 제안은 처음에는 많은 비판을 불러올 수도 있고, 허황된 것으로 철저히 무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로 시대의 방향을 철저히 자각하고 있다는 신념만 있다면, 그런 위험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일정 기간 동안의 시행착오와 외로움과 비난은 어느 시점엔가 대중들 사이에서 시대정신의 개화(開花)로 돌변한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은 ‘홍준표’를 배우라고 할 때 그들이 염두에 둔 것은 결국 이런 역할 아니겠는가?

       
      ▲ 죄로부터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권영길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 심상정 의원, 문성현 당 대표
     

    이른바 ‘4룡’ 중 셋은 다름 아닌 17대 의원들이다. 따라서 그들 자신 ‘정치가 정신’의 부재에 깊은 책임을 갖고 있다. 그 책임만 놓고 본다면,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 자격이 없다는 힐난을 받아야 할 처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시험은 몇 십 년을 내다보는 긴, 긴 과정이다. 자꾸 단기적 평가와 단죄의 악순환에 빠져들 게 아니라 치열한 재시험의 기회들을 더 갖는 게 낫지 않을까? 즉, 문제의 당사자들이 재응시하는 것 자체를 트집 잡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다만, 그들이 지난 3년의 실패의 근저에 놓인 게 무엇인지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지, 과연 그에 대한 해답은 준비해놓았는지, 철저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당내 의견 그룹들은, 흔히 ‘정파’라 불리는 과거의 퇴행적 양태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의지를 정말 갖고 있다면, 이번 당내 경선에서는 당원들이 시험관의 역할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돕는 데 치중하는 게 좋겠다. 이를테면 시험관들에게 주요 평가 항목들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역할 말이다.

    이런 전제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당내 의견 그룹들이 공개 협정을 맺는 것도 한 번 생각해볼만 하다. 조직 선거 양상을 막고 대선 예비 주자들 사이의 담론․정책 경쟁이 활발히 벌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공동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약속은 민주노동당이 80년대의 낡은 변혁 노선과 과거 연줄 중심의 정파 구도에서 벗어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변혁

    스스로를 바꾼다는 것, 이게 바로 우리의 두 번째 키워드다. 즉, ‘자기변혁’. 사실 이런 뜻이라면, ‘혁신’이나 ‘환골탈태’ 쪽이 더 익숙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말들 대신 ‘자기변혁’이라는 좀 낯선 단어를 고집하고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이에서는 ‘새롭게 된다’는 말조차도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좌파정당의 목표는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함정이 있다. 좌파정당 자신도 그, ‘바꿔야 할’ 세상의 일부라는 점이 그것이다. 좌파정당은 자신이 바꿔야 할 그 세상에 포위돼 있다.

    아니, 더 나아가 당의 모든 구성 요소들 속에 낡은 세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따라서 좌파정당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그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선 자기 자신부터 끊임없이 바꿔야 한다. 변혁은 오직 변혁 주체의 끊임없는 자기변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좌파 정당도 ‘바꿔야 할 세상’의 일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는 창당 이후의 정통 노선(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을 스스로 부정한 뒤에야 집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모스크바 유학파 중심의 지도부를 청산하고 농촌 근거지에서 성장한 마오쩌둥의 신노선을 채택하고 나서야 역사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 정치위원회로 출발해 자유주의 전통에 짓눌려 있던 영국 노동당은 1929년 한 차례의 붕괴와 사실상의 재창당을 겪은 뒤에야 역대 노동당 정부 중 가장 ‘노동당’스러웠던 애틀리 정부의 수립을 준비할 수 있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좌우연정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이제까지의 당 노선과는 다른 야심찬 슬로건으로 1932년 총선에 도전하고 나서야 50년 장기 집권과 복지국가 건설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2007년은 민주노동당에게 그러한 자기변혁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시험의 결과가 과연 비상일지 아니면 침몰일지는 오직 당이 자기변혁을 감행하고 그것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지금 그 자기변혁의 구체적인 선택 지점들은 무엇인가? 역시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일단 두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이 둘 모두 민주노동당의 이후 행로뿐만 아니라 한국 진보진영 전반의 행로,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미래 진로와 직결된다.

    민주노동당은 이념정당 성격을 강화해야 한다

    첫째는 민주노동당의 정당 성격이다. 민주노동당은 여러 모로 영국 노동당의 초기와 비슷하다. 혹자는 당의 이러한 특성을 현실로 인정하고 그것을 오히려 더 발전시키자고 주장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정반대다.

    민주노동당은 이념정당의 성격을 강화해야 한다.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그 이념을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접목시킨 강령으로써 승부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유교 경전(대학. 大學)에서 연유한 이 ‘강령’이라는 한자어가 싫다면, ‘프로그램’이라는 또 다른 외래어를 써도 무방하다. 민주노동당은 프로그램 정당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2007년 대선만큼 이런 자기변혁에 착수하는 데 좋은 기회도 없을 것이다. 대선에서 우리가 신나게 떠들어야 할 게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념과 정책의 중첩영역인 이 프로그램을 벼리고 확정하는 과정에서 당의 활동 구조나 패턴 전반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단, 이것이 당과 대중조직 사이의 관계가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관계의 성격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 관계가 청산되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 그 관계는 새로운 각도에서 더욱 밀접해지고 굳건해져야 한다. 새로 등장하는 산별노조운동과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지지 기반 확대 위한 일대 모험을

    두 번째는 민주노동당의 지지 기반이다. 현재 당의 지지층은 조직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일부로 제한되어 있다. 굳이 말하면 노동계급 상층이다. 그런데 이것은 열린우리당의 지지 기반과 상당히 겹친다. 즉, 이제까지 민주노동당은 상대적 중간 계층의 지지를 놓고 열린우리당과 경쟁하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진보개혁 선수교체’론의 발상은, 어리석기는 했지만, 영 뜬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공세적으로 확장하는 일대 모험에 나서야 한다. 단순히 지금의 지지층을 동심원적으로 확대하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집단에 말을 걸고 모든 노력을 다해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들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로 인한 양극화의 최대 희생자들, 즉 비정규직, 영세중소사업장 노동자들과 도시 빈곤층(영세자영업자들을 포함한)이다.

    보수 지배 체제의 가장 큰 피해자인 이들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모순적인 사실이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 지배구조의 가장 핵심적인 고리다. 민주노동당이 만약 이들의 일부에게라도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낸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참으로 심대한 방향 전환을 겪게 될 것이다.

    먼저 기존의 민주노동당 지지층과 저소득 노동자․빈곤층 사이의 동맹이 구축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고 그 대안을 모색할 대중적 실체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최대 희생자들이 한나라당,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이 모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홍세화 선생의 표현)을 밑뿌리부터 뒤흔들게 될 것이다.

    대선 예비 주자들을 비롯해서 당의 모든 구성원들은 과연 이러한 모험에 모든 것을 걸 용기를 갖고 있는가? 그 설득의 이야기꺼리들은 확보하고 있는가? 혹은,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할 그 ‘언어’는 도대체 알고나 있는가?

    -사회연대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세 번째 키워드에 이른다. ‘사회연대’. 지난 연말부터 민주노동당은 ‘사회연대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일련의 제안들을 내놓았다. 1단계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방안을 제안해 노동조합운동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이 사업은 올 연초에 당과 노동조합들의 공동 발의로 입법안을 제출함으로써 한 매듭을 지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진보정치연구소>가 제안한 ‘소득연대전략’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듬은 ‘조세 확대-공공서비스 확대-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연계 프로그램을 2단계 방안으로 제안할 예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회연대전략’에 대해서는 아직도 찬반이 분분하다. 이 글에서는 그 논란에 대해 하나하나 다루기보다는 2007년 당의 행보에서 이 사안이 갖는 중요한 의미만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사회연대전략’과 노동자 빈곤층에 ‘말 걸기’

    필자는 ‘사회연대전략’의 핵심이, 위에서 말한, 저소득 노동자, 빈곤층에 말 걸기에 있다고 본다. 이 ‘말 걸기’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 문제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자본주의의 최대 피해자인 이들이야말로 급진적 선동에 가장 쉽게 반응할 것만 같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념이나 가치, 거대 담론의 선전에 호응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적 중간 계층이다.

       
      ▲ 지난 11월 9일 정기국회 정당 대표연설을 통해 사회연대전략을 발표한 권영길 의원단 대표 (사진=판갈이 이치열 기자)
     

    저소득 노동자나 빈곤층은 지금 눈앞에서 현실이 실제 바뀔 가능성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선뜻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떤 확실한 개혁의 성과를 통해서만 선전과 설득, 조직화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난 3년 가까이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러한 ‘개혁의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7대 총선에서 약속한 것과는 달리 의료, 교육, 주거 등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거대한 소수’ 전략은, 비정규직법, 로드맵 등 정부, 여당이 제출한 법제안에 대한 반대 투쟁에서 극히 수세적으로 작동했을 뿐, 그 밖의 영역에서는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연대전략, 그 중에서도 그 1단계인 국민연금을 통한 연대 전략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저소득층에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다가갈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물론 내년 안에 실제 법안이 관철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당의 주도로 노동조합운동의 결의를 이끌어내는 데 일정하게 성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다른 방향이 가능하다"는 신선한 충격을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이 사회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 어떤 실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체에 동참할 의지를 북돋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 변혁 전략 그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변혁의 주체를 형성하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사악한 점이 무엇인가? 대중의 삶을 나락에 빠뜨리면서 또한 그런 상황을 바꿔낼 대중의 역량 자체를 파괴한다는 점 아닌가?

    무엇보다도 대중들 사이에 분열과 반목을 전에 없이 북돋음으로써 이런 악순환을 조장한다. 민주노동당은 우선 이 악순환의 고리부터 끊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사회연대전략의 긴급한 당면 과제가 있다.

    어쩌면 ‘사회연대’는 올해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제출할 중기적 구상을 대표하는 핵심 어구로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말에 담긴 철학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제시할 더 나은 표어를 찾아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정작 중요한 것은 특정한 제안이나 문구 자체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급박한 과제가 낯선 대중에게 우리의 진심을 전하는 것이라는 데 공감하고 이 공감의 지점에서부터 모든 고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정계개편, 그리고 ‘반한나라당 연합’론의 마지막 유령

    2007년 민주노동당의 행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나머지 두 개의 키워드는 당 바깥의 변수들이다. 그 하나는 ‘정계개편’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는 필자도 타블로이드 신문의 정계개편 시나리오들을 능가하는 뭔가를 제시할 능력이 없다. 보수정당의 구성원들 자신도 잘 모르는 걸 우리가 어떻게 예측하겠는가?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앞길에 가장 신경 쓰이는 가능성이 뭔지는 미리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노무현 신당의 등장이다. 노무현 지지 세력이 참여정부의 참혹한 실패로 재기불능의 타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쉽게 예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평통자문회 상임위 연설에 대한 이른바 386세대의 반응에서도 드러나듯이, 노무현 지지 세력은 여전히 실체와 저력을 가지고 있다.

    통합신당과는 분리된 친노 세력의 독자 정당이 등장한다면 이 당은 민주노동당에게 심각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현재 이들의 지지 기반은 민주노동당 지지층과 겹친다. 협소한 공동의 지반에서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필자가 누누이 지적한 것과 같은 민주노동당의 자기변혁 노력이 일정하게 결실을 맺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선 결과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 내부의 취약성을 자극할 수 있는 마지막 키워드가 남아 있다. ‘반한나라당 연합’론이 그것이다. 통합신당을 향해서든 아니면 노무현 신당을 향해서든 혹은 둘 사이의 ‘막판’ 통합 후보를 향해서든 민주노동당 내부에서(여기에서 ‘내부’라 함은 단지 당원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광범한 당 지지층을 포함한 것이다) ‘반한나라당 연합’ 류의 주장이 재등장할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다수냐 소수냐 보다 중요한 건 ‘명확함’

    특히 민주노동당 후보가 2002년 대선 때보다는 더 많은 지지를 받지만, 그렇다고 10% 이상의 지지를 받는 유력한 제3후보로까지는 부상하지 못할 때 이런 압력이 당 내외에서 가중될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경향과는 오직 투쟁이 있을 뿐이다. 구구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누구와의 연합이든 이리 저리 끼워 맞추기 식의 세력 연합은 더 이상 한국 정치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주류 정치평론가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식의 덩치 불리기나 이합집산이 아니다.

    미래는 오직 독자적이고 선명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뭉쳐서 그것을 관철시킬 의지에 충만한 핵심 대오에 있다. 그 세력이 지금 당장 소수냐 다수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다만 ‘명확함’이다. 일종의 ‘일반화된 레닌주의’야말로 우리가 지난 수년간의 정치 경험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보수 세력의 정계개편이 어떤 방향으로 이뤄지든 동요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데만 몰두해야 한다. 어지러운 짝 맞추기의 한 복판에서 그 판 자체를 이념 내 이념, 계급 대 계급의 대결 구도로 전혀 새롭게 갈아 엎어버릴 한 치의 틈도 놓치지 않고 그 기회를 단호히 부여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다시 난동을 부릴지 모르는 ‘반한나라당 연합’론이라는 우리 내부의 유치하고 저열한 요소는 가장 첨예한 자기정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정말 혹시라도 그런 움직임들이 재연될 가능성이 일부나마 존재한다면 말이다.

    * 이 글은 <전진> 신년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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