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의 ‘고도’를 기다리며
    [국방칼럼] 미-러 갈등, EU-나토 그리고 우크라이나
        2022년 02월 07일 10: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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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엄 촘스키는 작년 12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인터뷰에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문제는 조금이라도 합리적이라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했던 우크라이나 사태의 해결책은 2015년 2월 프랑스, 독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정상이 합의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만장일치로 승인한 ‘민스크II의정서’의 충실한 이행에 있다. 민스크II의정서는 ① 휴전 ② 중화기와 외국 무장조직 철수 ③ 관련자 사면 ④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 자치 허용 ⑤ 우크라이나 주권 회복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합의사항은 그동안 제대로 이행된 적이 없다.

    2021년 들어 돈바스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격화하자, 3월말부터 러시아군이 국경지대에서 ‘전투훈련·연습’에 들어갔고, 훈련·연습기간이 지나고도 러시아군이 복귀하지 않은 채 주둔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 정보기관은 이같은 행위를 ‘우크라이나 불안정화 노력’으로 간주하고, 미국 행정부와 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한 러시아 측 전술의 일환으로 분석했다. 미 행정부도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하고, 미·러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등 일찍부터 상황 관리를 하던 와중이었다.

    이렇듯 작년 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의 러시아군 움직임은 11월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 대만 문제로 중국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인한 정치적 위상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일부러 부각시켰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해결책이 옆에 있는데도, 8년이 지나도록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있는 우크라이나 해법을 풀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복합적인 역사∙문화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신채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역사학자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는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핵심 요소로 ‘키예프공국, 우크라이나어, 동방정교회, 코자크’를 꼽았는데, 이같은 정체성은 러시아 역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신적 가치이다.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두 나라가 과연 다른 민족인지를 두고 학자들 사이의 견해차도 커서 정재원(국민대)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러시아 측 주장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했고, 구자정(대전대)은 우크라이나 민족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양측 입장을 절충하여 형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정재원에 따르면 동슬라브어군에 속하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어법은 둘 다 벨라루스어와 가까우며, 두 언어 사이의 어법 차이는 벨라루스어와의 그것보다는 크다고 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는 한국사의 단군조선에 비견되는 ‘키에프공국’의 역사적 계승자를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볼히니아공국으로, 러시아는 모스크바공국으로 생각한다. 우크라이나가 만일 모스크바공국을 그 계승국가로 인정하게 되면, 러시아와 한겨레임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어서, 러시아의 재통합사관에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 된다. 1654년에 키예프 남쪽 ‘페레야슬라브’에서 코자크 공동체의 중요한 라다(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를 두고 러시아는 회의를 기점으로 코자크가 러시아에 재통합되어 짜르의 신민으로 팽창정책에 앞장섰다고 생각하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코자크가 ‘헤트만시나(수장국가)’ 건설 과정에서 반폴란드 친러노선을 펼쳤던 것이고, 1764년 러시아 예카테리나2세가 헤트만제도를 폐지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의 독자성을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이미지 :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마제파’ – 이반 마제파는 코자크 헤트만(수장)으로 스웨덴과 연합하여 러시아 표트르1세에게 맞서다가 1709년 폴타바전투에서 패했다. 19세기 여러 나라 예술작가들이 마제파를 다뤘으며, 제정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를 마제파주의자라고 불렀다. 현재 우크라이나 지폐에 얼굴이 그려져 있다.

    1991년 탈소비에트(독립) 이후 이들 국가 국민은 같은 과거에 대한 기억도 완전히 달리하게 되었다. 2021년 베를린 소재 동유럽 및 국제연구센터(ZOiS)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스탈린에 대한 평가에서 우크라이나 응답자 중 60.7%가 스탈린에게는 수백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죽인 책임이 있다고 답했으나, 러시아인의 22.3%만이 이에 동의했다. 반면에 러시아인의 52.2%가 스탈린이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다고 응답한 반면, 그렇게 생각한 우크라이나 응답자는 19.4%에 그쳤다. 우크라이나는 1932~1933년에 벌어진 대기근을 굶주림에 의한 살인이라는 뜻의 ‘홀로도모르’라고 부르는데, 우크라이나인의 55.1%가 이 사건을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겨냥하여 계획적으로 벌인 인위적 기근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러시아인의 불과 5.1%만이 이에 동의한다. 러시아인의 45.5%가 대기근을 당시 소련 전역을 휩쓸었던 자연재해(가뭄)로 이해한다.

    역사적으로 중동부유럽은 연합왕국체제로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던 공간이었다. 우크라이나를 통치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연합왕국은 왕권이 미약하고 지주 계급이 강했기 때문에 지역별로 분권화된 발전이 이루어졌다. 1654년 ‘페레야슬라브 회의’ 이후 ‘좌안 우크라이나(드네프르강 동쪽)’에서부터 러시아화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우안 우크라이나(드네프르강 서쪽)’는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 러시아계가 많이 거주하는 이유는 이 지역의 러시아 편입 시기가 빨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동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러시아의 역사∙문화와 그 성향이 가까워진다. 예컨대 동부 분리주의세력은 1917년 10월혁명 이후 동부산업지대를 기반으로 탄생한 ‘도네츠크·크리비리흐 소비에트공화국’을 자신들 역사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사실들에 기반하여 유사시 러시아군이 일단 드네프르강까지만 진출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이미지 : 폴란드 삼국분할 – 삼국분할 이전 드네프르강 동쪽은 이미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다. 헝가리 위의 GALICIA가 우크라이나의 할리치나를 말하며, 18세기말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편입되어 우크라이나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출처-브리테니커사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역사∙문화관계는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그 성향이 약해진다. 서부 우크라이나지역인 할리치나(폴란드어 갈리치나, 현재 리비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소련에 편입된 곳으로 다른 지역과는 종교(우크라이나가톨릭)가 다르고, 러시아의 영향이 미미하며, 유럽 전통에 익숙한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 독일, 소련의 영토적 야심이 이 지역 민족정서를 자극해 왔고, 폴란드인 지배층과의 갈등으로, 할리치나는 파시즘의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변모했다.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이 지역 파시스트들은 자발적으로 유대인과 볼히니아의 폴란드인에 대한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대중의 지지와 미∙영의 지원 아래 1950년대 초반까지 반소련 무장투쟁을 이어나갔으며, 소련군은 철저한 보복과 강제이주로 응답했다. 따라서 홍석우(한국외국어대)는 이와 같은 인종청소와 소련 편입을 둘러싼 갈등이 우크라이나의 민족정체성을 구체화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한다.

    2015~2016년에 걸쳐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당시 독일 외무부 장관은 ‘민스크II의정서’의 세부 평화계획으로 ① 모든 무장조직이 무조건 철수하고 ②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회복시킨 후 ③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감독 아래 지방선거를 실시하자는 내용의 제안을 했다. 2019년 10월에 드디어 우크라이나, 러시아, OSCE, 분리주의 무장조직이 이같은 ‘슈타인마이어공식’을 수용하는 데 합의한다. 이에 대해 극우∙민족주의세력은 ‘항복하지 않는다(Ні капітуляції!)’라는 슬로건으로 항의 시위를 하며 강력하게 반발했고, 분리주의세력은 ‘우크라이나에게 승리했다’라는 입장을 불필요하게 표명함으로써 상대 측을 자극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해법은 국가가 과거의 역사경험에서 파생된 두 개의 극단적인 정치성향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고, 조율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탈소비에트 공간으로 무대를 옮긴 모든 국가들의 공통된 과제이기도 하다.

    탈소비에트 이후 우크라이나는 1990년 화강암혁명, 2004년 색깔혁명, 2014년 마이단(광장)혁명 등 모두 세 차례의 변혁을 겪었으나,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실질적인 사회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소련의 정부관료, 테크노크라트 출신들이 탈소비에트 이후 ‘올리가르히’라는 특권계층으로 변신하여 사회 전반을 장악한 데서 출발한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단행된 국유자산 사유화의 수혜를 ‘올리가르히’가 독점함으로써 자유주의 개혁의 핵심주체인 중산층 육성에 실패하였고, 사유재산권 개념이 확립된 후에는 서구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영향까지 받게 된다.

    표 : 우크라이나 대 폴란드 국가 GDP 비교- 1990년에는 우크라이나가 폴란드보다 잘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폴란드 국가GDP가 우크라이나의 4배이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을 선택하면 임금과 연금, 직업과 교육 등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출처-세계은행)

    우크라이나는 공산당 출신 대통령들에 이어 2004년부터는 유센코, 포로셴코, 야누코비치가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올리가르히’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접수하게 된다. 따라서 2004년 ‘유코스사건’을 기점으로 국가기간산업에 대해서 올리가르히의 독점과 전횡, 국부 유출을 차단한 러시아의 보수적 개혁조치마저도 우크라이나에서는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이들 내부의 정치권력 다툼에는 서구자본과 유착한 올리가르히와 전통적으로 러시아 산업구조와 연결된 동부공업지대 올리가르히 간의 갈등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동부는 제조업 경쟁력 상실에 대한 우려로 EU와의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해 왔는데, 이같은 동부의 고민을 반대파는 반러 성향으로 포장한 뒤 대중을 자극하는 소재로 활용해 왔다. 올리가르히가 정치권력까지 장악하자, 이들 권력에 결합한 극단적 성향의 정치조직들이 지지율을 넘어선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2014년 마이단혁명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는 폭력을 동반한 시위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들 조직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올리가르히’는 시급한 개혁과제이다.

    2019년 대통령에 당선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올리가르히와 관련이 없는 최초의 대통령이다. 당선자의 75%가 정치신인일 정도로 선거혁명이 일어난 의회선거에서 국민들은 그에게 우크라이나 역사상 처음으로 과반 의석까지 선사하며 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당선은 올리가르히의 전횡과 내전에 지친 국민들의 반사적인 지지에 힘입은 것일 뿐, 그가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철학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고, 올리가르히가 건재한 이상 지지기반도 취약하며, 여당은 다양한 분파의 연합체라는 한계를 가진다. 그는 돈바스분쟁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으나, 이 문제는 ‘민스크II의정서’에 따라 젤렌스키 행정부가 무장조직에게 점령된 지역에 ‘특별자치권’을 부여하지 않는 한 러시아의 참여와 합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반대로 국내에서는 이 같은 합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날 극단적 민족주의자들과 반대파의 과격시위에 밀려 젤렌스키 행정부가 국정운영 동력 상실이라는 역풍을 맞을 확률도 크다. 따라서 그는 현재 평화 정착이라는 꿈과 대통령 재선이라는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유럽과 러시아에 끼어 있다고 해서 ‘사이 국가(In-between states)’로도 불린다. 서로 맞닿아 있는 프랑스,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연결만 해봐도, 이들 국가들이 명실공히 유럽의 척추라고 불릴 만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 자본가계급이 1917년 ‘10월 혁명’의 혼란을 틈타 독일제국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을 만큼 우크라이나는 인구, 식량, 자원 등 모든 것이 풍족한 나라이다.

    러시아는 예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왕관의 보석’에 비유해 왔다. 러시아가 19세기 나폴레옹과 20세기 두 차례에 걸친 독일 침공을 받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평원은 외부침략으로부터 러시아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전략적 깊이(종심)’를 더하는 곳이다. 더불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세력권에 더하게 되면, 모스크바 코앞에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가 배치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오데사와 크림반도를 통해 흑해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해양세력의 대륙 접근을 차단할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강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도 큰 성과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유럽권에 편입함으로써, 벨라루스-우크라이나-몰도바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외부 방어선에 균열을 낼 수 있다면, 미국에게는 최상의 결과일 것이다. 나폴레옹이 벨라루스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했던 역사적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경우, 카스피해에 접한 카프카즈지역까지 불안해진다는 점에서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는 사활이 걸린 지역이다. 꿈과 같은 이야기이겠지만, 보리스 옐친의 시절이 그리울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지렛대로 삼아 러시아의 정권교체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천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은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도움을 줄 것이며 미국에 대한 중동부유럽 국가들의 신뢰를 제고할 수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폴란드∙루마니아동맹이 소련에 대한 방패 역할을 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2004년에는 루마니아와 발트삼국의 나토 가입으로, 발트삼국-폴란드-루마니아로 이어지는 라인이 나토와 러시아 간의 경계선이 됨으로써, 중동부유럽의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복귀했다. 20여년 전에 설정된 경계선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현 경계선에 변화를 줄 것인가를 두고 현재 미∙러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 대결은 정치∙경제부문에서는 EU 대 ‘유라시아경제연합(EEU) 가입 경쟁으로, 군사부문에서는 ‘나토 동진’에 따른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라, 우크라이나 위기가 자국 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러시아에 가장 강경할 수밖에 없으며, 발트삼국과 유일하게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발트삼국은 러시아가 만일 폴란드를 제압할 경우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신세가 되어 고립이 불가피하다. 2016년부터 이어진 나토군의 발트3국과 폴란드 배치, 주독일미군의 폴란드 전진 배치, 작년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에서 벌어진 난민 위기는 이 같은 상황을 담고 있다.

    이미지 : 하얀선 안의 지역이 유럽과 러시아의 완충지대인 ‘사이국가군’이다. 이 지역을 놓고 미∙러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지역을 위해서는 중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연합왕국 같은 중심국이 출현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출처- Emad Kaddorah, Flashpoint Ukraine).

    EU는 러시아(41.9%), 노르웨이(35.9%), 알제리 등으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러시아가 EU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통과국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의 갈등으로 수송안정성에 문제가 생기자, 독일은 ‘노드스트림1’을 완공해서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직접 공급받고 있고, 노드스트림2’를 추가로 ‘건설 중에 있다. 이 계획으로 독일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① 저탄소경제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고 ② 독일이 북∙서부유럽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허브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③ 러시아경제와의 상호의존으로 유럽의 안정에 기여함으로써 독일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데 있다.

    미국과 폴란드, 발트삼국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이 확대됨과 동시에 유럽에 러시아의 지정학적 영향력이 증대될 것으로 보고 강한 불만을 제기해 왔다. 에너지안보를 위해 수입국 다변화를 추구해온 EU 정책과 러시아에 대한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이 서로 부합되지는 않지만, 카스피해 지역에서 천연가스를 수입하기 위한 나부코계획이 실패함으로써, EU의 에너지수입국 다변화 정책은 사실상 실패했다.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천연가스 수출의 수송안정성 확보는 대단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유럽에 편중된 수출은 러시아경제의 유럽 의존도가 높아지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우려하는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와 상쇄되는 측면이 있다. 유라시아주의에 입각한 러시아 신동방정책은 이같은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프랑스는 노드스트림2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EU에서 프랑스 중심의 서부유럽, 독일 중심의 중부유럽과 탈소비에트 이후 EU에 합류한 중동부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정서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의견 대립은 결국 미국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신호일 수 있다(폴 테일러, 폴리티코유럽). 그러나 리처드 사콰(영국 켄트대)는 노드스트림2가 ’유화정책’으로 비춰질 만큼 유럽에서 다양한 의견 표출이 억제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미지 : 노드스트림계획- 천연가스의 원활한 공급을 넘어서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일종의 ‘관여(Engagement)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에 대한 유럽화 시도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개성공단∙금강산관광과 비슷한 연관성을 갖는다. 미국이 방해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출처-비비씨).

    러시아는 진작부터 ‘나토’에 대한 거부감을 미국에게 표현해 왔다. 1994년 발발한 체첸과의 전쟁에서 고전함으로써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러시아 옐친 정권은 미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동력이 부족했다. 러시아는 결국 ‘나토 해체’전략을 포기하고, 나토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협상전략을 변경했다.

    1996년 프리마코프 외무부 장관은 미국 클린턴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① 나토에 대한 법적 구속력의 문서화 ② 옛 소련 국가(특히, 발트삼국)의 가입 불허 ③ 유럽안보에 대한 공동 결정 등 5가지 사안을 요구했다. 러시아가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미국이 100% 수용할 것으로 예상한 것은 아니었고, 클린턴 행정부도 옐친 정권의 지속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국은 ‘나토확장촉진법(NATO Enlargement Facilitation Act)’을 제정함으로써 러시아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존 샬리카슈빌리 합참의장은 나토확대 정책에 반대했으며, 냉전을 설계한 조지 케넌도 나토확장 결정을 ‘가장 운명적인 실책(the most fateful error)’으로 묘사하며, 러시아의 민족주의, 반서구주의, 군사주의를 자극하고, 러시아 외교정책을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J. E. 랜드럼은 탈냉전 이후 미국이 러시아를 포용하지 않은 이유를 ‘손실회피개념(loss aversion)’으로 설명한다. 행동경제학에서 ‘손실회피’는 이익을 얻기보다는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말한다. 미국의 나토확대 정책에 ‘손실회피’를 대입해 보면,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오는 국가이익보다는, 나토를 확대함으로써 러시아의 ‘리벤치즘(revanchism, 무력으로 옛 영토를 회복)’으로부터 중동부유럽을 지키는 현상유지정책이 원금 보장을 가능케 한 정책이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손실회피’는 현재 상황에서 최소한의 변화를 선호하는 강력한 보수주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행정부는 지금까지 러시아를 포위하고 봉쇄하는 기존 정책을 크게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왔던 것이다.

    미국의 일극지배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견해는 200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시점을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로 보는 견해도 존재하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러∙중 관계가 더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탈냉전 이후 ‘나토확대 정책’을 견지해 왔으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러 ‘아시아로의 회귀’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새 전략이 성공하기 위한 여러 전제조건 중의 하나가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였다.

    미국은 과거 소련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와 현재 러시아와 중국과의 국력 차이를 감안했을 때, 이들 나라의 관계 발전이 제한적일 것으로 예측하고, ‘나토 동진’과 ‘아시아로의 회귀’를 동시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먼저 파열음이 나타나 러시아가 ‘크림반도 병합’을 단행했고(러시아는 재통일이라고 부른다), 중국이 고립된 러시아를 지지함으로써 미국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로를 이용해서 미국이 친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2022년 현재 러시아의 옆에는 중국이라는 미국의 전략적 경쟁자가 존재한다. 중국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깊숙이 빠져있는 것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러시아군이 국경지대에 대대적으로 배치된 것을 제외하고, 러시아가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징후는 나타난 것이 없으며, 러시아는 이미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영국 가디언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에서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좀 비슷한 느낌이라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 희곡의 핵심은 ‘고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이먼 티스달은 전쟁할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무력시위’만 고집하다가는, 패배를 맞보게 될 것이라며 러시아에게 대화에 나설 것을 점잖게 타이른다.

    리처드 사콰는 러시아를 설득할 대안으로 우크라이나의 오스트리아식 중립국화를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는 러시아에게 결코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불가능해지는 만큼 유라시아경제연합(EEU)에도 가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볼로디미르 이첸코(베를린자유대 동유럽연구소)와 아나톨 리벤(미국 퀸시연구소) 모두 우크라이나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다원성이 인정되는 연방국가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이첸코는 탈소비에트 이후 세 차례의 혁명을 통해서도 국가의 통일성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위기가 심화됐던 이유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문화적, 정치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서구와 소련의 국민국가 건설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이른바 ‘동화(assimilation)’를 통한 통합 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며, 이는 현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우크라이나인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국가여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1954년 제네바회담처럼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평화 정착이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세력권에 넘겨주지 않겠다는 강대국 게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위기는 끊임없이 재점화할 것이고, 그때마다 우크라이나는 ‘고도’라는 오지 않는 평화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크라이나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내부 구성원 간의 ‘대타협’뿐이며, 부디 한반도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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