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천명' 나이에 역사 공부를 시작하다
        2007년 01월 02일 10: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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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광우는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인에 든다. 전두환 치하에서 나왔던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로부터 몇 명인가의 대통령이 바뀐 오늘의 『철학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책들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지식인연 하는 자들에게는 “안 읽어도 돼”라는 자위와 ‘읽어는 둬야지’ 하는 채무를 함께 안겨줬다.

    유식(有識)에 대한 인정과 인간(人間)에 대한 세평은 다르다. 고등학생 황광우를 ‘반체제 좌익 분자’로 분류하여 잡아가뒀던 대한민국은 20년 가까이 그를 뒤쫓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를 포섭 대상 ‘HWANG’으로 지목했고, 민주노동당 당기위원회는 ‘당헌 당규를 현저히 위반한 당원’으로 판정했다.

    불가해한 낮도깨비, 당신은 누구냐?

    그가 빠진 술자리에서 황광우의 친구들은 “지가 시인인 줄 알아”라고 성토한다. 시인이니까 어떤 일을 해도 된다거나, 시인이라서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과거에는 냉철한 혁명가였고, 지금은 합리적 생활인인 그 친구들에게 예나제나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낮도깨비 황광우는 불가해한 인물이며, 당최 풀리지 않는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제자들에게 제가 누구인가를 말할 때는 네 가지로 설명해줘요. 첫째, 학생. 배우는 걸 즐기는 사람이죠. 둘째, 선생. 배우면 가르쳐야죠. 셋째, 작가. 가르치려면 써야죠. 넷째, 노동계급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정치인.”

    학부 졸업장도 없는 주제에 『경제학 사전』까지 냈던 황광우는 제 후배들이 가르치는 대학에 복학하여 21년 만에 경제학과 졸업장을 땄다. 그런 그가 한국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단다. 주대환은 그가, “바이칼 같은 데 다녀오며 민족적 세례를 받은 모양”이라고 귀뜸해줬다.

    “‘민족적’이라는 표현보다는 ‘토착적’이라는 말을 쓰고 싶어요. 우리 스스로 서구 중심적 세계관으로 사고해오면서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죠. 보편성을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고유한 특질, ‘토착’ 같은 것도 있잖아요. 우리가, ‘겨울연가’의 배용준처럼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기억상실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조선족, 조선인, 조선민중은 자신들의 뿌리를 망각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이예요.

    1958년생인 저는 전쟁을 모르고, 1985년생인 제 아들은 광주민중항쟁을 몰라요. 아무도 우리의 지난 20년을 우리 아이들에게 온전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잖아요. 우리의 지난 삶이 역사의 지층에 침잠할 경우, 제 딸 진이는 자신의 현존을 모를 수밖에 없어요.

    조선왕조실록을 드문드문 읽었는데, 모르겠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맑스의 보편적 역사관이 대체로 맞겠지만, 한국에서도 그러했는지 의문스러워요. 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관계, 사대부와 종의 관계 같은 걸로 논문을 쓰고 싶어요.”

    “시류 때문에 하지 못한 공부를 하고 싶고, 나이 오십에 하고 싶은 것 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하필이면 ‘한국사’인가?

    왜 하필이면 ‘한국사’인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보면, 이두로 쓴 ‘고구려’의 우리말이 ‘가우리 : 가운데 나라’라는 내용이 있어요. 그럼 ‘조선’은 뭐냐? ‘해가 뜨는 밝은 곳’이라는 풀이가 있기는 한데, 아직은 별 설득력이 없어 보여요. ‘단군’은 ‘당골네 : 무당’으로, ‘아사달’의 ‘아사’는 일본어에 남아 있는 ‘あさ : 朝’로, ‘달’은 ‘땅’이나 ‘벌’로 맞춰보면 되는데, ‘鮮’은 또 어디서 온 거죠?”

    ‘장미의 이름’을 찾는 윌리엄 수사의 질문을 수련사 아드소가 어찌 금방 알아듣겠는가? 윌리엄을 따라 장서관으로 들어서는 도리밖에.

    “2년 전에 블라디보스톡, 이르쿠츠크를 거쳐 바이칼에 갔었어요. 국외로 탈출한 박헌영과 주세죽이 1928년 들렀던 블라디보스톡은 아직도 거칠고 우울한 곳이더군요. 데카브리스트 귀양객들이 세우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유배되기도 했던 이르쿠츠크는 고풍스럽고 단아한 도시였어요.

    바이칼에서 묵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통나무집의 풍광은 닭 모이 먹고 개 조는 우리네 옛 시골의 모습이었어요. 소나무에는 무당 오방띠가 걸려 있고, 해 뉘엿뉘엿 지는 신작로에 뛰노는 아이들은 천상 제 어릴 적을 빼다 박았고, 양 모는 목동이나 옹색한 술집에 모여 앉은 사내들은 1960년대에 완도에 사시던 사촌형의 얼굴과 거친 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요.

    1만 리 떨어진 그곳에서, 또 다른 고향에 찾아온 것인지, 고향을 떠나 한반도로 잠시 내려온 것인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어요.”

    뭔가 세례를 받긴 받은 모양인데, 바이칼이 황광우에게 세례를 준 것인지, 언제 어디서든 그렇듯이 황광우가 영감을 찾아든 것인지는 꽤 오래 두고 봐야 한다. “상상하고, 가설 세우고, 자료 찾고, 입증하는 걸 즐기는” 황광우에게 새 거리가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백석은 시인이자 교사였고 광산노동자이자 혁명가였다.  
     

    그가 역사를 거슬러 공부하겠다는 소식은 반갑고도 슬픈 일이다. 그 역사를 파느라 조금이라도 술자리가 뜸해질 것이니 “어이, 한 잔 하세나”라는 전화에 경기 일으키는 술친구들에게는 반가운 일이고, 가끔 그 역사를 들어주며 맞장구치자면 슬픈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공부로, 공부로 파는 또 다른 이유를 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

    강준만에게 황광우는 ‘1267표밖에 못 얻은 호남 후보’이지만, 지난 20여 년의 시간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숫자는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니다. 황광우로서는 섭섭한 말일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황광우에게 그런 걸 기대하지는 않는다.

    언제던가, 민주노동당 글쟁이 중에 하나가 “황광우는 멘셰비키가 옳았대”라고 일러바쳤다. 아니, 어쩌면 그 글쟁이가 애당초 없었고, 내 상상이 만들어낸 환각일지도 모르겠다.

    레닌이 봉기를 제안했을 때,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합리적,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봉기를 거부했다. 멘셰비키도, 볼셰비키 간부들도 봉기를 피하고 싶었지만, 멘셰비키 당원들과 볼셰비키 당원들과 사회혁명당 당원들과 가두의 인민들은 봉기를 원했고, 레닌은 거기 영합했다.

    나는 세상과 잘 안맞는 반쪽 정치인

    어떤 실존적 정치세력도 이런 상황을 회피할 수 없다. 이것은 객관조건에 기초하는 과학자나 철학자의 합리성과 실낱같은 개연성에도 의존해야 하는 정치인의 합리성, 도덕적 합리성과 이념적 합리성이 같지 않음을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그 글쟁이가 해독한 ‘황광우’는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고, 정치인이 아니므로 혁명가가 아니다.

    “아니예요. 비슷한 글을 쓰기는 했는데, 그런 식은 아니었어요. 맑스의 역사관에 충실해서 보자면, 역사발전 단계에 대한 멘셰비키의 인식이 옳았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멘셰비키는 그런 부조화를 정치적으로 풀 수 없는 무능한 사람들이었죠.

    반면 레닌은 멘셰비키와 같은 냉정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예요. 레닌의 NEP(Novaya Ekonomicheskaya Politika : 신경제정책)가 경제조건과 정치권력의 통일을 추구한 거잖아요.”

    이럴 때 오독은 즐겁다. 황광우는 민주노동당 연수원을 ‘기지’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 실험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내가 황광우의 당 생활을 짜게 평하면, 열혈분자들이야 비분강개해 하겠지만, 그의 뒤에 남은 황 모, 김 모, 이 모 같은 이들은 으슥한 밤 함께 혁명을 노래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동무들이되, 살갑지 못한 그 이들과 진짜 혁명을 준비하고 수행해야 한다면, 많은 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망명을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황광우의 민주노동당 혁명은 운문에서 산문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무엇이 되고 싶거나, 제가 이기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일하는 동료들이 이기게 하고 싶어서 민주노동당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반(半)만 정치인이예요. 그래서 제가 세상과 잘 안 맞는지 몰라요.”

    황광우를 만난 날은 올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이었다. 책 예닐곱 권은 들었을 묵직한 쇼핑백을 맨손으로 들고 있길래, 장갑을 주었더니 손사래를 친다. 누군가 술자리에서, 마포에서 굶어죽은 서른 살 처자 이야기를 흘렸고, 술에 젖어 흐리멍덩하던 황광우의 안광은 다시 형형하게 빛나고, 어깨가 흔들렸다.

    황광우 가슴 속의 가득 찬 답답함

    제3세계형의 거대한 복부와 비듬 뽀얗게 내려앉은 둥근 어깨를 가진 중늙은이가 아직도 남들을 불편하게 한다. 황광우의 삶이, 양복 입은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당혹스런 도전이기 때문이다.

    당은 세상을 바꿀 수는 있지만, 사람을 알게 하지는 못한다. 다만 사람을 알 수 있는 세상을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황광우의 가슴에 담긴 답답함들은 그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황광우가 친절한 사람이라면, 제자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전에 ‘산골’에서 나와 세속의 친구들에게 자신을 말해야 한다. 또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동북아시아인의 2만 5천년 궤적을 대강 훑고 나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잘 안 팔리는 책을 써야 한다.

    광우(狂牛)가 쓰는 아이디는 madox다. 미쳤으되, 거세된 소다. ox는 세상의 질시와 타협하려는 황광우의 생존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타협을 종용하는 나 역시, 그가 진정 거세된다면 아주 오랫동안 슬플 게다. 정주(定住)하는 황광우는 슬프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신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백석, 「북방에서」,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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