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낭만파 농부] 혼술을 그만둔 내력
        2022년 01월 25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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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창밖으로 앞산 자락이 희뿌윰하게 비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 속에 묻혔다. 잠은 싹 달아나 버렸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대고립의 시간이 펼쳐지겠지. 달밤에 체조할 일도 아니고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 밤 시간이 거의 이 모양이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서도, 번뇌에 짓눌려서도 아니다. 이를 불면증으로 보아야 할지 아닌지도 좀 헷갈린다. 분명한 사실은 이게 술에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술에 취한 탓이 아니라 술 마시기를 그친 데 따른 ‘부작용’이라는 얘기다.

    창문에 어른대는 새벽 풍경

    ‘혼술’을 그만둔 지 이제 두 달이 되어 간다. 저녁을 먹고 나면 으레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홀짝이던 버릇을 떼쳐버린 것이다. 10년 넘게 그래 왔더랬다. ‘월하독작’이란 그럴 듯한 이미지로 분칠을 해왔지만 실은 시답잖은 사정이 있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담배를 끊고 보니 밀려드는 금단현상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술기운을 빌어 넘겨오던 것이 그만 버릇이 되고 말았다.

    니코틴의 해악으로 위쪽 어금니를 거의 다 잃고 나서 얼마 전 인공치아를 심었는데, 치과의사 말이 그렇게 계속 술을 달고 살면 재수술을 피하기 어렵다는 거다. 병원을 찾을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나니 시술부위가 조금이라도 욱신거리면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담배가 골칫거리더니 이번에는 술인가. 언제까지 이런 근심을 달고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 그뿐이라면 그러려니 귓등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몇 달 동안 겪어보니 아무래도 “술 담배 하지 말고, 짜고 맵게 먹지 마라”는 입에 발린 경고인 듯도 하고, 적당히 조절하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보다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스스로 가벼운 알콜중독이거나 심한 알콜의존이라고 진단해온 터라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혼술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겹친 덕분이다. 바로 깨달음의 길, 구도를 향한 일념 말이다.

    농한기 하면 마냥 가슴이 부풀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반년 남짓한 그 자유시간을 어찌 꾸려갈지 궁리하다 보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어떤 해는 여기저기 싸돌기도 하고, 나름 일을 꾸미기도 했으며, 갑갑증이 일 때마다 훌쩍 떠나기도 했더랬다. 그렇게 10년을 지나고 보니 이 또한 싱거워지더라 이 말이다.

    문득 남은 세월을 헤아려보다가 이제는 슬슬 삶을 갈무리해가야 때가 되었다는 자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벌이고 펼치는 일을 그만둘 건 아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욕망을 허겁지겁 좇기만 하다가 마침내 삶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맥없이 스러져갈 순 없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적어도 태어나서 겪은 세계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이며, 꾸려온 삶이란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었다.

    유일신교 또는 아브라함 신앙으로 일컬어지는 종교라면 절대자의 계시에 순명함으로써 죄 사함을 얻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에 견줘 적멸을 향해 스스로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는 불가의 수행은 꽤 매력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주류를 이루는 선불교 전통은 선뜻 공감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요컨대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기치 아래 화두를 붙들고 선정에 들어 한 순간에 몰록 깨치는 확철대오나 돈오를 좇는 수행 말이다.

    어느 해부턴가 농사철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면 농한기 구상에 들뜨는 대신 ‘동안거’에 들거니 여기게 되었다. 불가의 수도승처럼 도량을 찾아, 선지식을 따라, 도반과 함께 도 닦을 처지가 못 되니 확철대오란 그림의 떡이요, 그럴 일도 아니지 싶다. 면벽수행이되 화두 대신 책을 붙드는 그런 수행이라고 할까.

    그러니 내 동안거 수행에서 ‘불립문자’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설정인 셈이다. 오히려 활자를 파고드는 것이 유일한 방편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시원찮은 몸뚱이. 해가 갈수록 기억력이 눈에 뜨게 떨어짐을 절감한다. 노트를 하면서까지 새겨 읽어도 돌아서면 가물가물 하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다. 더욱이 마냥 술잔을 끼고 불콰한 상태에서 책을 대하니 볼 장 다 본 것 아니겠나.

    혼술 그만둔 내력을 늘어놓자니 무척 장황한 얘기가 되었다. 물론 독작을 그만둔 것이지 대작까지는 아니다. 돈오를 좇아 용맹정진할 것도 아니고, 속계를 떠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 술하고 척질 까닭이 없다. 다만 스스로 나서 술판을 벌이는 일은 삼가자는 정도.

    안 그래도 핑계가 지천이다. 이런저런 지역현안을 놓고 머리를 싸맸는데 맹숭맹숭 흩어지는 건 예가 아니고, 고민거리 싸들고 오는 이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고, 벼농사두레에 새로 가입하는 이들 맨입으로 맞을 순 없는데 이 와중에 줄줄이 자원방래 하는 벗들. 이 시절인연을 당최 어찌하란 말인가.

    오늘도 기별이 왔다. 그래 만행하는 셈치고, 못 이기는 척 산문을 나설 밖에.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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