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청와대→벤처→뉴라이트
    2007년 01월 02일 08:17 오전

Print Friendly

20년 동안 그의 두뇌와 발걸음이 움직이고 향한 곳은 각각 어떤 내적 연관성을 맺고 있을까. 사람은 변화 발전 한다고 했다. 적어도 변화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20대, 분노의 열정으로 뜨겁게 살았던 그가 40대에 이르러 당시에 상상할 수 없었던 곳에 발딛고 있다는 건 축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에게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지난 20년을 열심히 살아온 김성회씨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개인사 이상의 어떤 흐름을 드러내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먼저 경청한 후 나중에 평가할 일이다. <편집자 주>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가, 사는 대로 생각하는가. 내 주변의 경험은 압도적으로 후자를 지지한다. 삶의 어느 우연한 갈림길에서 취한 선택지-대개 밥벌이와 관련된-에 따라 한 사람의 철학과 가치관이 조정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본다.

물론 이 과정은 아주 감쪽같아서 나중엔 생각의 변화가 제 삶의 변화를 불러왔다고 스스로 믿게 된다. 사람은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동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쓸쓸해진다.

이인제 의원실 김성회 보좌관은 현재 자신의 이념적 좌표에 대해 "중도보다는 조금 왼쪽에 있다"고 했다. ‘학생운동→노동운동→전국연합→청와대→이인제 의원실’을 거치는 동안 그의 이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완만하게 이동해 왔다. 그런 변화를 그는 일종의 ‘진화’로 여기는 듯했다. 특히 "이인제 의원과 함께 있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어졌다"고 그는 말했다.

전두환 시절 노동현장에 들어가다

김씨는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82학번이다. 최근 일심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손정목씨와는 같은 과 동기사이다. 그는 연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85년 4월 집시법 위반으로 처음 구속돼 이듬해 5월 출감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5월에 출소해보니 학교 내부가 논쟁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연대 운동권은 민민투 중심이었다. 그 때 민민투를 이끌던 친구가 손정목이나 천호선(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이다. 민민투는 제헌의회를 주장하면서 지나치게 과격하게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후배들과 노선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다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시점에 현장으로 들어갔다. 86년 여름이었다."

86년 여름, 그는 대우자동차가 있던 인천 효성동에 자취방을 구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수원으로 거점을 옮겨야 했다. 당시 인천은 활동가가 숨어있을 만한 곳이 못되었다. ‘후리가리’ 때문이었다.

"경찰이 수시로 한 동을 포위한 다음 집을 싹 뒤지는 거다. 영장이고 뭐고 없다. 그걸 ‘후리가리’라고 한다. 한 구역을 정해서 싹 뒤진다. 자취방이건 일반 가정집이건. 그러다보면 어느 집에선가 책이라도 나올 것 아닌가. 그걸 가지고 사람을 덥친다. 그래서 잡히면 바로 구속이다. 86년 10월 건대사태부터 4.13 호헌조치까지가 최악이었다. 도저히 인천에는 못 있겠더라"

수원에서는 금성전자에 취직했다. 사무직으로 일하던 대학 선배의 추천이 있었다. 그러나 1년 정도 일하다 위장취업인 게 들통나 구속됐다. 87년 5월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6월항쟁을 맞았다. 그 해 7월 22일 풀려난 그는 3주만에 다시 구속됐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개입한 혐의였다. 이른바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약 1년여 옥살이 끝에 88년 출소한 그는 다시 현장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오산. 체중계를 만드는 조그만 중소기업이었다. 그러나 1년 정도 일하다 그만 뒀다. 별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 수 120명의 그 회사는 노조를 만들면 회사가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좀 더 큰 회사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현대종합목재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뿔사! 하필 옛날 금성전자 파업투쟁할 때 지원나왔던 금성전기 노무과장이 그 곳 노무과장으로 와 있었다. 그는 즉시 해고됐다.

그리곤 오산, 화성지역의 노동자 상담소에서 잠시 일하다 ‘사람과 일터’라는 노동잡지의 기자로 들어갔다. 김금수 선생과 노동교육협회에 있던 사람들이 만든 노동자 종합교양지였다. 그리곤 90년 봄 복학했다. 90년이면 운동의 위기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던 때다.

"북한의 관료주의와 부패가 나를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복학한 이유는 돌아가신 어머님 때문이었다. 난 막내였다. 학교를 마치지 않으면 어머님이 자살하시겠다고 했다.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계속 했겠지. 복학 후에는 운동을 떠났다. 고시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8개월간 영어책 보며 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경대라는 명지대 학생이 백골단에 맞아죽는 일이 터졌다. 91년 4월이었다. 정국은 격랑에 빠져들었다. 강경대의 시신은 학교 근처 세브란스 병원에 안치됐고, 사수대로 나선 후배들은 병원에서 날밤을 새웠다. 하숙집과 도서관을 시계추같이 오가던 고시준비생의 마음에도 폭풍이 일었다.

"정말 고민이 되더라. 하루는 도서관에 있는데 ‘노태우정권이 나를 편히 못살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뛰쳐나가 사수대가 됐다" 그의 운동은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이후 93년 범민족대회 때 노동자추진위원회 간사직을 맡게된 그는, 그 인연으로 93년부터 98년까지 전국연합에서 교육선전국장 일을 하게 된다.

전국연합에서 "다른 친구들 다 떠나도록 남아" 운동하는 동안 그는 ‘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특히 북한을 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하면서 북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이념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킨 주요 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북에 지원품을 보내는 과정에서 북한의 관료주의와 부패에 대해 알게 됐다. 무척 실망을 많이 했다. 김일성 주석이 동구라파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유는 관료주의와 부패 때문이라고 했다는데, 내가 본 북한은 동구라파 사회주의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북한도 무너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관료주의와 부패를 보면서 북에 대해 결코 우호적인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전국연합에서 일할 때도 북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김영환과 홍진표에게 ‘너희들도 옳다. 우리처럼 북한과 화해협력하자는 것도 옳고, 너희처럼 끊임없이 북한 인권 부르짖는 것도 옳다’ 이렇게 말했다."

"부채의식이 강경론자를 만든다"

그는 정부 차원의 대북 화해정책과 북 인권에 대한 민간부문의 문제 제기가 병진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전국연합 집행부로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면, 아닌게 아니라 통일운동의 주류와 마찰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전국연합은 이창복 의장, 황인성 집행위원장 체제였는데, 반은 눈치보고 반은 적당히 무시하면서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갔다"고 했다.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과거 운동을 떠났던 친구들이 복귀하는 경우 열 가운데 아홉은 원칙론자에 강경론자로 변해있더라는 것. 그는 이것을 운동을 먼저 떠난 이들이 갖는 부채의식으로 설명했다.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할 즈음 전에 운동 떠났던 친구들을 한두 번인가 봤는데, 원칙적이고 강경하게 변해 있었다. 쉽게 말해 친북적으로 변해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 친구들과 대판 싸운 적이 있다. 내가 죽어라고 운동할 때는 유학 가고 사업하던 너희들이 왜 지금 와서 현실을 무시하면서 좌편향으로 기우는지. 나는 거기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깨닫고 이제 나오는 중인데…

결국 ‘너는 너대로 살아라’ 그렇게 말하고 헤어졌다. 그 친구들의 변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해가 되더라. 먼저 운동을 떠난 사람이 갖는 부채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정치권에 일찍 진출한 친구들에게도 그런 게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 뿐만 아니다. 한나라당 고진화, 원희룡 의원도 마찬가지다. 부채의식 때문에 역편향을 보이는 것 같다."

그가 이인제를 택한 이유

운동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정부 조직에서 일하면서 더욱 깊어진 듯 하다. 99년 6월, 그는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청와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전국연합 집행부로 있으면서 민화협 활동을 했던 게 계기가 됐다. 보통 재야에 있던 사람이 공무원 조직에 들어가면 적지 않은 시각의 교정을 경험한다. 흔히들 하는 말로 "우리나라 공무원들 대단히 똑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천하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야에서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씩이나마 정부 내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나는 옴부즈만 제도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들어가보니 고충처리위원회에서 이미 10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었다. 관료들이 진취적이진 못해도 성실하고 뛰어나다. 운동권은 이들과 중탕이 돼야 한다. 그게 운동권의 발전에 바람직하다."

인터뷰를 통해 받은 개인적인 느낌으론 청와대 경험과 뒤 이은 이인제 캠프(2002년 대선 당시) 합류가 그의 인생에 중대한 분기점이 되지 않았던가 싶다. 그는 "들판에 있을 때 산이 보이고, 산에 있을 때 들판이 보인다. 운동권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내가 속했던 운동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특히 이인제 캠프로의 합류는 ‘운동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이 제도정치권 내 ‘운동권 출신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의 문제의식이 ‘이인제’를 택하게 했는지, 이인제를 택한 것이 그의 문제의식을 ‘확장’시켰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도 (이인제 의원처럼) 충청도 출신이고, 당시만 해도 이인제가 대세였다. 그러니 민주당 후보는 당연히 될 줄 알았다. 또 이인제 의원이 그렇게 개혁적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이념적으로 노무현보다는 이인제 쪽이 운동권의 발전과 운동권이 서서히 변화하고 배우면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성질대로 운동권끼리 같이하면 다 잘 될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판단 때문에 이인제 의원을 택하게 됐다"

벤처, 잠깐 하다 손 털고

위 인용문에서 말줄임표의 앞 구절과 뒷 구절 사이엔 어떤 단절이 있다. 앞 구절이 이인제를 택하게 된 현실적 이유라면 뒷 구절은 이념적 배경이다. 둘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둘 중 하나가 보다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시 내 주변의 경험을 통해 보자면 이런 경우 절대적인 규정력을 행사하는 건 전자다.

이인제 캠프에 합류하기 전 약 1년간 그는 벤처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2001년 상반기에 지금으로 말하면 ‘미니홈피’ 아이템을 갖고 있던 회사에 스카우트됐다. 청와대에서 ‘신지식인’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인사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장사가 별로 안됐다. 2001년이면 벤처붐이 꺼지기 시작할 때다. 그는 "너무 앞서가는 아이템이었다"고 했다.

회사는 장사가 안 되면 내분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가 속한 회사도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고 그를 스카웃한 사장과 함께 그도 퇴사했다. 그리곤 직접 사업을 해보려고 이런 저런 아이템을 갖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러다 손을 털고 나왔다. "세상에는 돈을 잘 버는 사람과, 번 돈을 잘 써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말했다.

노무현 정부와 여당 386의 ‘끼리끼리’

그가 노무현 정부와 여당 386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건 자연스럽다. 짐작컨데 이념적이고 현실정치적인 이유에서 노무현 정부와 그 주변의 386 정치인들은 그에게 적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끼리끼리’. 그가 노무현 정부와 여권의 386을 비판하면서 가장 많이 동원한 어휘다. 흔히 하는 ‘코드인사’에 대한 비판과 비슷하다. 정책이나 이념에 대한 지적은 아니다.

"운동권일수록 대중 속에 함께 있어야 빛이 난다. 운동권 끼리끼리만 있어선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가르치려고만 들게 된다. 일반 국민들과 함께 해야 한다. 운동권 출신들이 세상 물정을 뭘 알겠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노무현 정권과 386 정치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함께 해야만 뭔가를 배울 수 있다. 배우면서 반성하고 참회하고. 끼리끼리해서는 못 배운다. 평화개혁세력 대통합을 말하는 사람들, 일차적으로 떠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운동권을 도매금으로 망쳐먹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뭔데 거기에 함께하지 않는 운동권 사람들의 인생까지 망쳐먹느냐. 그래놓고선 또 자기들이 뭔가를 주도하겠다고 한다. 기본 자세가 안 돼 있는 사람들이다."

"평화개혁세력 대통합을 말한다. 아마 자기들끼리는 합리적이고 정당한 얘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저처럼 한 걸음 떨어져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자기들끼리 손바닥 뒤집듯이 이랬다 저랬다 해가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이 떠드는 레토릭은 10년전에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류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할 뿐이다. 국민과 함께 하면서 변화하는 모습은 없다."

말도 안되는 짓거리들을 자기들끼리 하는 사람들

   
 

그는 주로 운동의 방식, 혹은 정치의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운동할 때도 자신은 대중성과 현실성을 중시하는 경향이었다고 했다. 그가 86년도에 연대 민민투 조직을 바꾸는 작업을 했던 것도 후배들이 대중성을 잃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작업’ 이후 연세대 운동권의 주요 구호는 ‘헌법제정민중회의’에서 ‘직선제 쟁취’로 바뀌었다고 한다.

95년도에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심지어 지난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의원측에 결합한 이유도 대중성과 현실성을 중시하는 성향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대중성이나 현실성이란 가치의 실현 방식과 관련된 문제다. 그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 운동의 가치는 여전히 그에게 유효한가.

그는 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김대중 정부의 탄생으로 민주주의의 내실화는 완성됐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면서 ‘선진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박세일 교수가 제안한 선진화 담론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다소 맥이 풀렸다.

그는 우리사회에는 대처(전 영국 수상)식의 역동성과 독일식의 안정성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참조할만한 사회모델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여기저기서 좋은 것 취해서 우리가 먼저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노회한, 그러나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답변이 돌아왔다.

"운동에서 멀어진 후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게 됐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부작용을 묻는 질문에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세계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자주적 세계화’란 조어를 만든 적도 있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박정희를 높이 평가한다는 말도 했다. "근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게 물었다.

–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오래된 건가?

= 오래됐다.

– 운동할 때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나?

=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그 때는 공보다는 주로 과를 많이 봤다. 그래서 싫어했다. 운동에서 멀어진 후 박정희의 공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정하게 됐다. 능동적인 산업화를 위해 국민적 힘을 모았다. 굉장한 것이다. 박정희의 국가동원 능력은 대단했다.

– …..

= 이승만에 대해서도 과거와는 다른 평가를 하게 된다. 이승만에 의해 토지개혁이 강도높게 이뤄졌다. 또 국민 너나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선진화를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 여기는 듯 했다. 그가 이제 우리 사회의 운동 진영도 ‘선진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곤혹스러움도 느꼈는데 그건 짧은 미소로 표현됐다.

"운동단체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있는 것 같다. 이제 총선연대 활동 같은 것은 먹히지 않는다. 그건 힘이 약한 자가 힘이 센 자를 상대할 때 인정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시민단체는 정치권보다 힘이 세거나 적어도 비슷한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아젠다는 선진화다. 경제, 사회, 정부 부문의 선진화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서 시민단체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문국현 사장이나 이형모 ‘시민의 신문’ 전 발행인이 얘기한 뉴패러다임과 비슷한 문제의식이다."

쇼핑백을 든 사회주의자?

그가 모종의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운동의 가치인지는 확실치 않다. 난 운동이란 그 정신적 바탕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와 단단히 결박되어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운동은 운동의 입각점에서 대안을 기획할 필요가 있지만, 대안의 기획 그 자체가 운동의 전유물은 아닐 테다. 정부도, 기업도, 저마다 대안을 기획하고 제출한다. 그것은 사회적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자연스런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요컨데 대안의 기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입각한 어떤 대안이냐가 중요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안의 기획 그 자체를 운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 노동운동에 대한 그의 평가는 신랄했다. 그는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무척 분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민주노총은 대기업과 공기업의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상층 노동자 집단 가운데서도 상층이다. 예전의 한국노총보다도 훨씬 귀족화되어 있다"고 했다.

또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도 ‘저 인간이 회사다니는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사람이 월급 타먹고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이 민주노총 간부 행세하고 다닌다. 비정규직을 포괄하지 못하는 민주노총은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는 노동계 내부의 분단과 관련, 기존 노동운동 진영의 책임을 주로 추궁했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사회 구조에 대해선 동일한 질량의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좌에서건 우에서건 균형 감각이란 중요하다.

그는 40대 중반이다. 그와 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 가운데는 지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는 다른 40대 가장들처럼 자신의 친구들도 교육, 증권, 부동산 문제가 주요 관심사라고 했다. 그는 예전 동료들 가운데 ‘생활’과 ‘생각’이 따로 노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유체이탈’이란 표현을 썼다.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다른 중산층과 똑같다. 사고방식, 화제거리…그런데 정치나 이데올로기 얘기만 나오면 급진적으로 바뀐다. 내가 한 두 번은 지적했다. 그거 유체이탈 아니냐. 현실생활하고 틀린 것 아니냐. 현실에선 아이들 어떻게든지 학원 많이 보내서 공부 많이 시키려고 하고, 부동산 미등기전매라도 해서 돈 많이 벌려고 하고, 분양받으려고 하고, 증권투자해서 돈 벌려고 하고.

그게 불로소득이라는 것도 다 알고 거기에 집착하고 살면서 정치, 사회시스템 얘기만 나오면 서민을 위한 정책이 어쩌고 저쩌고 그런 얘기를 하느냐. 이렇게 말하면 대꾸를 못하던가 아니면 정치 편싸움을 하게 된다. ‘노무현 정권 비판하려고 그런 소리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반응한다."

87년의 자식들

올해는 87년 6월항쟁 20주년 되는 해다. 그는 ‘참회하는’ 87항쟁 20주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와 386 정치인이 우리사회에 미친 악영향과 상처가 크다"면서 "참회를 통해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아젠다를 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끼리끼리’를 벗어나 ‘선진사회’를 추구하는 모습이 그의 바람일 것이다.

그는 뉴라이트 계열의 ‘자유주의연대’ 출범에 일부 관여하기도 했다. 과거 함께 활동했던 홍진표씨 등이 도움을 청해서 응했다고 한다. 그는 "올드라이트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으로 뉴라이트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운동권 출신 뉴라이트 인사들을 보면, 과거 자신이 했던 얘기를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다만 내용만 뒤집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종종 받곤 한다. 어제 ‘종북’을 강변했던 그들은 오늘 ‘반북’을 강변한다. 그들은 일관되게 자신의 경험과 열정을 절대화한다.

우리가 과거의 실패로부터 정말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자기 바깥의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는 당구공의 당점만큼이나 무수한 입장들이 있고, 내가 가진 입장이란 별무리같은 무수한 입장들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좀 더 겸손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저마다 겸손할 때 ‘대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대저 참된 인식의 전환이란 삶의 태도를 바꾸면서 온다. 운동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김성회씨에게서 운동권적 편향의 ‘음화’를 봤다면 나의 오독일지 모른다. 김성회씨도, 뉴라이트도, 여권의 386도, 또 진보진영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87년의 못난 자식들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