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의회 장악한 그때 그사람들
    By
        2007년 01월 01일 09:33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20년이 지났다. 오랜 군사독재 붕괴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시민항쟁과 노동계급의 본격적, 역사적 진출을 의미하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던 그 해 87년. 하나의 ‘체제’-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발시킨 의미를 가진 것으로도 평가되는 그 해. 그때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어져 살고 있는 2007년.

    사람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 해를 기억하고 있고, 서로 다른 수단으로 87년을 불러내 이용하고 있다. 20년의 세월은 거기에 몸을 싣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주었을까. 사람들은 어떤 몫을 거기에서 찾아냈을까.

    87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현재를 살고 있는 몇 사람을 만나 20년 세월을 타고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혼돈과 고통의 2006년 한 해가 가고 이제 2007년 새해가 밝았다. 2007년은 8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벌써부터 행사 준비를 위한 요란한, 그러나 힘없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기억/망각과의 투쟁사라고 할 때, 87년 6월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난 20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 이제 ‘짧은 시간, 긴 여행’을 함께 시작하면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1987년 6월, 그 때 그 자리

    80년대의 한국, 그것은 어떤 시대였을까? “종속적인 자본주의 산업화와 권위주의 독재통치로 인한 내적 긴장과 갈등의 요소들이 응집되어 표출되면서 고도의 불확실성을 가지게 된 전환기적 시기”라는 시대 규정은 왠지 너무 거창한 것 같다.

    그것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기억과 단상의 조각들을 모아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통금 해제, 여행 자유화, 컬러 TV, 프로야구, 졸업정원제, 쌍쌍파티와 고고장, 최루탄과 꽃병과 백골단, 대동제, 사당동과 상계동의 철거 현장, 박종철과 이한열, 권용목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80년 5월의 핏빛 광주.

    물론 사람들마다 기억의 편차는 존재할 것이며, 하나의 단면이 한 시대의 모든 것을 표상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가수 정수라는 1983년 <아, 대한민국>을 통해 80년대의 시대상을 이렇게 노래한다.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우리가 살아온 80년대의 세상이 노랫말과 같았다면, 아마도 87년의 6월은 역사 속 실체로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87년의 6월을 태동시킨 시대 상황은 정수라의 노랫말과는 너무나 달랐다. 오히려 1990년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 고단한 민중의 역사 /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 아~대한민국 아~저들의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탄생할 수 있었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1987년 6월의 그 뜨거웠던 거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대학 캠퍼스와 도시의 거리, 노동 현장은 오랫동안 억눌려온 집합적 열정의 폭발과 희망의 분출을 보여줬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엄청난 시위와 함성의 물결은 “오늘은 기쁜 날, 찻값은 무료”로 이어졌고, 한국 사회가 거대한 변화의 문턱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예상하더라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그로부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나타난 결과는 예상과는 크게 다른,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저항했던 구체제와 구질서가 별 손상 없이 이름만 바뀐 얼굴로 대체되었을 뿐이긴 했어도 말이다.

    87년 6월과 ‘영양실조에 걸린 민주주의’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의 문턱을 넘고 있다고 느꼈던 바로 그 순간이 사실은 안티 클라이막스의 시점이 된 역설적 전환, 그 당혹감과 좌절감을 다시금 느껴보면서 “왜 그 때 우리는 보다 더 현명하지 못했을까?”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한다.

    아무튼 당시 운동의 현장에서, 민주주의의 목마름 속에 희망을 외쳤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 10일 규탄국민대회에 참여하여 박종철의 죽음과, 그 죽음의 은폐 조작에 분노한 수많은 사람들,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여 장사진을 친 수십만의 인파들이 바로 87년 6월 민주항쟁의 이름과 얼굴 없는 주역들인 것이다.

       
       ▲ 87년 6월 항쟁 당시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주역들은 역사의 파고가 가라앉자 말없이 일상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20년이란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어떻게 흘러왔으며, 그것을 보는 나의 눈은 어디에 맞춰져 있는 것일까? 아래 두 개의 발언을 비교해보자.

    “87년 6월 우리 국민은 맨 주먹은 막강한 물리력에 대항해 이겼습니다. 이 승리를 통해 우리 국민은 자신의 민주역량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자각과 자부심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굳히는 데 있어 결정적 쐐기가 될 것입니다. 이제 또다시 민주화에 대한 반동세력이 준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6월 민주항쟁 직후 한 좌담토론에서 고 조영래 변호사의 발언)

    “(민주화가) 어떤 형태로든 실질적 개혁을 수반하지 않고 절차적 수준에서 어떤 변화를 모색하게 될 때, 그 체제는 오히려 퇴행적이기 쉽다. 이 체제는 민주적 정권이라는 사실 때문에, 정권과 이 정권이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경제적 질서는 안정성과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개혁이 소멸한 이후에 남는 것은 권위주의가 그의 모습을 닮은 모습으로 구축한 시민사회를 개혁함이 없이, 이를 그대로 사익추구의 장으로 개방하는 결과를 갖는다.” (최장집 교수의 글 가운데)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 경로와 그 이후 20년이라는 세월, 그것은 한 논자가 지적하듯 그저 ‘지루한 민주혁명’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상유지의, 아니 영양실조에 걸린 민주주의의 지루함 속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억압과 성장 속에서 모순과 갈등이 누적적으로 잉태되고, 여기에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가세된 격변의 상황과 함께,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시작되었다. 복잡한 함수를 그리면서 이행은 정치적 지배방식과 사회적 갈등의 규제방식, 그리고 저항의 방식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변화된 세상과의 조우 속에서 서로 다른 질감을 지닌 두 개의 민주주의가 운동의 깃발 아래 긴장과 충돌을 반복하면서 민주주의의 역동성의 불씨를 살려왔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20년의 시간은 군부의 병영으로의 신속한 퇴장과 함께, 권위주의 독재의 시절 주요 반대와 도전세력들이 집권정부를 새로이 구성한 시기였다. ‘민주’ 정부라는 이름 아래 자유주의 정치권력이 성립되면서 국가의 억압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자유민주적 기본권도 신장되어 왔다.

    또한 제도정치 공간과 시민사회 공간이 확장됨에 따라 지역, 환경, 성, 소수자 등 그동안 억눌려왔던 다양한 적대들도 표출되었다. 다른 한편 자유주의 정치권력은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그 요구를 선택적으로 포섭하면서 이른바 ‘변형주의적 재편을 통한 지배의 재생산’을 도모해 왔다. 운동정치의 급진화와 혁명화의 저지, 민중투쟁의 체제내화는 그 동전의 양면이었다.

    혜택 받은 사람들

    민주화와 정치변동의 과정에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87년 6월의 반독재 민주연합에 참여한 다수의 상층 엘리트들에게 혜택과 보상이 돌아갔다. 김영삼 세력과 김대중 세력 등 제도권 반대정당은 물론, 이른바 재야 민주화세력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정치적 지도 구심을 자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발기인(2,191명), 공동대표(65명), 상임공동대표(10명), 집행위원(506명) 등 이들 모두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민주’정부 하에서 대통령을 지냈거나 지내고 있는 세 사람 모두 87년의 주역이었다. 양 김씨는 국본의 고문이었고, 노 대통령은 부산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이었다.

    김근태(열린우리당 의장)는 국본 공동대표로 청년부문을 책임졌고, 청와대 왕수석으로 일컬어진 문재인 변호사는 부산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이었다. 이와는 약간 다른 결이긴 하지만, 국본의 대변인이었던 인명진 목사는 현재 한나라당의 윤리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보다 큰 흐름으로 보면, 87년 대선국면에서 후보단일화 세력 다수와 독자후보세력 일부는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문민정부 속으로 흡수되었다. 노무현과 이인제의 의회 진출이 이 때 이루어졌으며, 과거 활동에 대한 부정과 반성 속에서 신한국당의 문을 두드린 김문수(현 경기도 지사), 이재오(현 한나라당 최고위원) 등은 후자 흐름의 대표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비판적 지지 세력의 절대 다수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결합했다. 원내 교두보 확보라는 기치 아래 87년 대선 후 제도권으로 들어간 이해찬(전 국무총리,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이상수(노동부 장관) 등 98명의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 멤버들이 있다. 이부영과 유인태와 박계동 등 민연추와 통추회의 출신들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가 마침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서 각각 새로운 삶의 둥지를 찾게 된다.

    그 연속선상에서 노무현 참여정부는 사실상 제도권 밖의 운동적 요소를 전면적으로 흡수, 제도권 영역과 비제도권 운동영역의 분자적 융합을 거의 전면적으로 확대해냈다. 집단적 탈주의 흐름이 가속화된 것이다.

    예컨대 잔존 후보단일화파, 비김영삼-비김대중 노선을 지향했던 운동권 출신, 이른바 386으로 불리는 반독재 민주화 세대 활동가들의 다수는 노무현 정부와 직간접적으로 결합했다. 전대협의 의장 출신인 이인영(1기), 오영식(2기), 임종석(3기), 우상호(1기 부의장) 등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 17대 총선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이를 계기로 운동권 출신은 청와대라는 집행부 권력뿐 아니라, 여야를 막론하고 의회권력의 최대 다수집단으로 부상했다. 그렇다면 혜택받은 이들은 세상을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는가?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되어 KTX 여승무원 죽이기에 앞장서고 있는, ‘돌아온 사형수’ 이철(열린우리당 고문)의 모습은 그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87년 6월과 그 후 20년, 위기의 민주주의

    나는 혜택과 보상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인센티브 없는 절대적 희생과 헌신의 강요 속에서 운동의 발전을 꿈꾸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권력에 대한 개인적 욕망과 욕구를 완전히 제거할 수도 없다.

    ‘출세주의, 기회주의’라는 말로 일방적으로 이들을 낙인찍는 것은 잘못된 번지수 찾기이며, 도덕을 제1의 가치로 앞세울 때 그것은 정치를 죽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접근은 조심하는 것이 좋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개인적 혜택을 당연한 보상인 것으로 여기면서 무위도식하거나, 또는 약자에 대한 배려나 고통의 나눔 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87년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은 도대체 변한 게 뭔지에 대해 실망과 회의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들의 눈으로 볼 때 민주화의 과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거나 아니면 운동의 경력을 앞세웠지만 “그 놈이 그놈일 뿐”인 자들에게 돌아간 게 문제의 본령인 것이다. 이른바 IMF 위기 이래 형성된 ‘1997년 체제’, 그 핵심으로서 거대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동맹에 의한 민생정치의 파탄과, 노동자와 서민들의 가중되는 사회경제적 삶의 고통과 위기는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의 구호는 한결같이 ‘개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 서민들의 생활은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많은 보통사람들은 상황의 지속적인 악화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남이 인정하든 말든, 자칭 ‘민주화 투쟁의 적자’라던 이들 정부가 남긴 최대의 해악은, 땀흘려 일하면서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빼앗아 갔다는 데 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절망의 사회, 그것은 곧 죽은 사회를 의미한다. 이 희망 부재의 세상에서 독재자 박정희가 힘찬 부활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과연 누가 주범이고 누가 공범일까?

    민주주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이다. 민주주의는 억압적 사회통제의 기제들을 제거하거나 또는 그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그동안 억눌려 온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긴장이 분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주’정부를 자임한 자유주의 정치권력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균열의 표출에 대해, 그것을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과정이 아니라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죄악시하는 분위기를 조장했다. 쌍방향 소통의 부재는 그 당연한 결과였고, 참여의 위기와 대표성의 위기의 반복적 악순환은 그 필연적 귀결이었다.

    민주화 이후 정부는 책임과 신뢰 부재의 정치의 전형을 보여왔다. 기성 정당들은 사회적 요구에 기반한 정책 대안과 역사적 비전 제시를 스스로 거부해왔다.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은 정치적 대의에 대한 헌신보다는 개인적인 정치적 자산을 키우는 데만 관심을 쏟았다.

    민주화 이후 부활한 지방자치도 오히려 지역 토호들의 이권 다툼장이 되면서 민주주의에 역행해왔다. 이처럼 사익추구의 무책임 정치가 만연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정치의 실현이 지체되는 상황에서 정치 일반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와 반감이 더욱 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민주화 이후 정치경제체제는 민중적 기초로부터 계속 멀어져 갔다. 그 위에서 그나마 민주주의의 퇴행을 제어해왔던 제도권 밖 정치적 다이나믹스의 사회적, 운동적 원천은 점점 더 소진되어 갔다. 그 무주공산의 빈 틈을 각종의 자칭 뉴라이트들이 점거해 들어오고 있다.

    이처럼 2007년을 맞이하면서 여전히 우리는 민주화의 배반과 역설의 사태 속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울하고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민주화나 민주주의라는 말은,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말은 사람들의 열정과 감동을 불러내는 언어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오히려 그것은 불신과 분노와 경멸의 다른 말일 따름이다.

    87년 체제가, 87년 민주화 이후 20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 대목에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어떠한 민주주의 체제라 하더라도 민중적 동력과 신뢰를 상실한 경우 체제 속으로 지배엘리트의 기득이익들이 쉽게 침투, 확대, 강화되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약화되면서 이내 민주주의는 그 내적 역동성을 상실한 채 위기화의 경로를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87년 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386세대임을 자랑스럽게 외쳐온 부류의 성공 담론과는 달리, 그다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일부의 자기충족적 진단일 따름이었으며 결국은 자기파괴적 예언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일종의 허구적 신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도대체 왜?…보수독점적 정당체제가 문제의 근원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우스꽝스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기득권 수구세력의 ‘포위된 개혁’ 탓으로, 행정부 권력과 의회권력의 불일치를 뜻하는 분할정부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멀리 나왔다. 남 탓을 하면 할수록, 책임을 전가하면 할수록 오히려 개혁을 자임한 세력의 문제점들이 더욱 돋보일 뿐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를 자임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개혁 사망은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자살의 강도와 빈도는 참여정부에 들어와 더욱 높아졌고 많아졌다.

    뿌리가 허약한 개혁성의 한계, 사상적 결손과 정체성 빈곤의 반사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이자 권력기회주의 집단으로서의 자기 한계가 주체들의 무능력과 도덕적 해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표피적인 ‘스펙타클의 정치’와 연출된 파격성의 과잉 전시는 이제 정체성의 빈곤함과 개혁의 피곤함을 보여줄 뿐이었다. 정치의 희화화와 정치적 신뢰의 상실, 국정의 공백은 그 자연스런 결과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사들과 386세대가 87년 민주화의 주역에서 ‘오명의 화신’이 된 것은 자업자득인 면이 크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할, 새로운 정치적 힘의 조직화를 이루어내는 데 실패했거나 그것을 애써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시금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한국적 특성을 고려해볼 때, 사실 어떤 면에서 1987년 이후 한국사회가 직면해 온 최대의 이슈는 갈등의 민주적이고 정상적인 표출과 그 해소의 문제였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정치적 대표의 체계로서 정당체제와 관련된 것으로, 즉 경쟁하는 이익갈등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사회의 이해와 갈등이 폭넓게 대표될 수 있는 정상적인 경쟁에 기초한 정당체제의 틀을 만드는 문제인 것이다.

    정당이란 “한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표출하고 대표하며 이에 기반을 둔 대안을 조직하여 선거에서 경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완화시키고 통합하는 민주주의의 중심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정치 영역은 오랫동안 자유로운 경쟁에 개방되지 않은 일종의 독점적 보호산업이었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제도화되지 못한 채 변화무쌍의 ‘인스턴트 정치’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폭넓게 대변하지 못하는 허약한 체질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정당과 정당체제는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의 생명선으로 정당 없는 대의민주정치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며, 정당정치의 수준은 곧 민주주의 발전에 직결된다. 민주정치 발전의 핵심적인 병목지점은 바로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의 온존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87년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이른바 ‘좋은 정치’의 실현을 위한 계기를 창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정치의 실현이라는 문제영역이 정당체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때, 이른바 ‘87년 체제’를 추동해낸 운동세력이 새로운 정당의 결성으로 힘을 조직화해내는 데 실패한 것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이 지지부진하게 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민주화 이후 체제에서 민주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핵심적 연결고리는 좋은 정당의 창출과 이를 통한 정당체제 전체의 변화이다. 사실 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 운동주체들이 꿈꿔온 이상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현실과 만나게 되었을 때, 그에 부합하는 정당의 건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하여 정당정치와 운동정치의 생동감있는 소통의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꿈의 실현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87년 체제를 추동해낸 운동세력은 새로운 정당의 결성으로 힘을 조직화해내지 못한 채, 시기상조나 적전 분열 등을 이유로 기존의 반합법 전선체운동을 고수하거나 또는 재야입당파의 이름 아래 기성 정당 안으로 흡수통합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 대안의 부재라는 미명 아래 비판적 지지가 신종과 변종의 형태로 계속 출현하고, 재야입당파와 ‘수혈된 386’ 현상 등이 이어졌다. 지역주의 정당체제의 위력적인 형성과 ‘진보정치의 잃어버린 10년’은 그것의 다른 결과였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운동의 성장을 놓고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변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

    보통사람들을 대변할 정당을 만드는 것을 보통사람들 스스로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시대, 그리고 운동의 주체들이 설득력 있는 대안 헤게모니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진보니 민주개혁이니, 민중적인 것들에 대한 환멸은 바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지난 20년의 시간은 정치와의 소통 없이 운동만으로 어떤 비전이나 가치를 구체화해 헤게모니 지배질서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기성 헤게모니의 구조에 흡수된 민주화 세대들은 새로운 엘리트들로 등장하여 때로는 헤게모니의 충실한, 그러나 어설픈 전달자로 화했다.

    시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내기 위해서는 정당정치의 정상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에 따라 진보정당의 역사적 역할과 그 책임의 몫은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현 실태는 그 역할 수행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킨다.

    2004년 17대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이 보여준 정치 궤적은 가능성의 전략적 공간과 정치적 기회구조의 확장이 아니라, 대중적 영향력을 확산하는 데 실패로 점철되어 왔음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의 주요 관심사는 보통사람들의 삶과 직접 관련된 사회경제적 이슈 제기와는 동떨어진 채, 오히려 관념적 자기정당화를 위한 낡은 행위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대중들에게 비춰지고 있는 실정이다. 성찰과 혁신 없는 정파의 낡은 깃발과 노선 고수, 소모적 정쟁과 일시적인 갈등봉합적 타협의 반복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은 87년 민주항쟁 20주년이자 17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어떤 흐름에 몸을 실을 것인가? “낡은 것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만들어지지 않은” 위기의 시대 상황 속에서 ‘보수적 대중혁명’으로서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엄청난 파괴력을 동반한 채 고통의 파고를 더욱 더 높이고 있다.

    “변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No Change, No Future)"고 할 때, 누가 누구와 함께 무엇을 어떻게 변하게 할 것인가? 나는 지금 그것을 듣고 싶다. 과연 누가 대답해줄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정치조직을 준비하는 이런저런 흐름들은 이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