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베스보다 욕을 더 먹은 헐리우드 배우
        2006년 12월 30일 02: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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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 보수진영들에게 ‘지구의 적’ 또는 ‘라틴아메리카의 후세인’으로 간주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2006년 9월 UN총회 연설을 위해 뉴욕에 발을 디뎠을 때, 보수파들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정작 분노의 화살은 차베스가 아니라 엉뚱한 인물에게 집중됐다. 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할리우드 배우 대니 글로버를 향해 이성을 잃은 미국 우익들은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쏟아냈다.

    차베스보다 욕을 더 먹은 미국 배우

    발단은 차베스 대통령이 뉴욕의 흑인빈민가인 할렘을 방문했을 때 대니 글로버가 자청해서 안내를 맡았기 때문이다. 글로버는 이날 차베스를 ‘친구’라고 부르며 베네수엘라 민중과 미국 빈민의 연대를 이야기했다. 보수진영의 매체와 블로그에는 대니 글로버를 ‘배신자’, ‘수치스러운 미국인’, ‘위험한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 2006년 9월 뉴욕 할렘가를 방문한 차베스 대통령을 안내한 대니 글로버  
     

    대니 글로버는 이미 지난 1월 미국의 진보적인 가수인 해리 벨라폰테가 이끄는 미국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네수엘라를 방문해 차베스 대통령을 만났었다. 이 방문을 통해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변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대니 글로버라는 이름만으로는 그가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리쎌 웨폰” 시리즈에서 멜 깁슨과 함께 짝을 이루었던 흑인배우가 바로 대니 글로버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주연을 맡을 수 있는 많지 않은 흑인배우들 중의 한명이다.

    인기배우로서의 삶과 함께 그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삶은 바로 정력적인 활동가로서의 역할이다. 여전히 미국의 일반적 기준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전통이 강한 할리우드지만 그 안에서도 대니 글로버는 유독 ‘실천지향’적인 인물로 소문이 나있다.

    현재 할리우드 진보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진 것은 팀 로빈스, 수잔 새런든 부부지만 사실 글로버는 이들 부부를 합친 것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미국 안의 사회문제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내는 다른 할리우드 자유주의자들과 다르게 그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의 이런 면모는 2003년 뽀르뚜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출석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세계사회포럼에서 글로버는 제3세계의 경제문제와 함께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강하게 비난했다. 글로버는 이전부터 아프리카, 카리브해 연안,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지원하고 연대하는 미국흑인들의 단체인 “트랜스아프리카 포럼TransAfrica Forum”의 의장을 맡고 있다.

    또한 2005년부터는 반전운동가인 타리크 알리, 정보공유운동가인 리처드 스톨만 등과 함께 베네주엘라에 기반한 진보적인 라틴아메리카 위성방송인 “텔레수르teleSUR”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가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흑인민권운동을 넘어 제3세계 연대를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대니 글로버의 용기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영화배우’의 수준을 뛰어 넘은지 오래다. 미국인들에게 9/11 테러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던 2001년 11월 프린스턴 대학 캠퍼스에서 열린 ‘사형폐지촉구집회’에 연사로 참석한 그는 군중들을 향해 “평범한 죄수건 오사마 빈 라덴이건 사형이 비인간적이라는 나의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외쳤다. 미국정부가 빈 라덴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놓은 지 얼마 안 지난 때였다.

       
     ▲ 대니 글로버 주연의 <리쎌웨폰 3>
     

    같은 시기 미국에서 아랍인에 대한 증오가 넘쳐났을 때 그는 아랍인들과 아랍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종주의를 경고하고 나섰다. 이후 부시 정권이 저지르고 있는 전쟁에 대한 반대는 그의 주된 활동이 됐다.

    2002년 쿠바에서 열린 ‘국제라틴아메리카영화제International Festival of New Latin American Film’에 참석해 “우리(미국) 정부는 스스로를 경쟁자가 없는 제국으로 선언하고 전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수년간의 경제제제로 고통받아온 이라크의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미국의 전쟁을 비난했다.

    대니 글로버는 가장 활동적인 미국반전운동단체인 ‘앤서A.N.S.W.E.R.’의 지지자로 이라크 전쟁 이후 열린 주요한 반전집회에는 반드시 참가하고 있다.

    "부시는 제국주의자다"

    이미 부시 행정부를 비롯해 미국 내 보수파들에게는 미운 털이 박힐 데로 박힌 대니 글로버에 대한 보복으로 우익들은 2003년 그가 광고출연 계약을 맺은 미국 통신업체 MCI에 계약파기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우익의 논리는 대니 글로버는 카스트로와 테러리스트를 지지하는 자로 그를 광고모델로 쓰는 MCI는 쿠바의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반미국적인 기업이라는 것이었다. 우익들의 캠페인이 시작되자 앞서 이야기한 트랜스아프리카포럼을 비롯해 미국흑인공동체와 진보적인 사회단체들이 반박성명을 내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니 글로버와 함께 싸울 것을 선언했다.

    모든 미국인은 대통령에게 반대할 권리가 있고 이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보복을 당해서는 안 되며 이는 매카시즘과 블랙리스트의 재현이라고 맞섰다.

    우익들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지만 이후 우익 논객들은 정치칼럼과 블로그를 통해 대니 글로버 깎아내리기에 힘을 쏟았다. 글로버로서는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겠지만 부시 정권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전쟁지지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이런 사회분위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미국 대중들에게 알린 사건이었다.

    진보적인 독립정당을 건설하자

    대니 글로버의 참여는 사회운동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녹색당 후보로 나선 랄프 네이더의 선거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할리우드 배우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에 힘을 보태는 것은 뉴스거리도 안 되지만 당선 가능성도 없는 제3당 후보의 선거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줄기차게 민주당의 한계를 지적하는 진보주의자 중의 한명이다. 그가 랄프 네이더의 선거운동에 뛰어든 이유도 민주당을 대체할 새로운 진보정당의 출현을 위해서였다. 글로버는 네이더 선거운동에 뛰어들며 “네이더에게 던지는 한 표는 두 정당을 놓고 누가 덜 나쁘냐를 고민하는 투표를 이제는 집어치우겠다는 의미”라고 선언했다.

    2004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지원했지만 이는 어찌 되었든 부시를 떨어트려야 한다는 절박함과 함께 네이더가 녹색당의 지명을 ‘거부’하고 독자 출마한데 대한 불만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가 민주당후보를 지원했다고 해서 기성 정당, 특히 민주당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의 출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대선 직후인 2005년 1월 그는 빌 플렛쳐와 공동명의로 진보적인 주간지 ‘네이선The Nation’에 기고문을 실었다.

    이 글에서 글로버는 “민주당의 ‘바깥’에 다양한 사회운동영역이 힘을 합해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는 ‘신무지개연합neo-rainbow coalition’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기고 원문http://www.thenation.com/doc/20050214/glover )

    기고문을 보면 글로버가 정치세력화 없는 사회운동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베네주엘라에 가서 어떤 감명을 받았을지도 이 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2006년 9월 뉴욕 할렘가를 방문한 차베스 대통령을 안내한 대니 글로버 (TV화면촬영)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

    물론 대니 글로버의 역동적인 활동과 급진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글로버 자신이 자신을 좌파나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독립파 사회주의 잡지인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가 창간 50주년을 맞았을 때 그가 보낸 축사를 보면 대니 글로버라는 진보적 배우가 가진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적은 너무 강해서 이길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행동에 나서게 해주고, 불가능이란 단지 어려움일 뿐이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잡지의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 잡지가 바로 먼슬리 리뷰다.”

    같은 이야기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침묵할 때 행동에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배우의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가 바로 대니 글로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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