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정계 역사 담긴 지도 이야기②
    [컬렉터의 서재] 동일한 내용의 지도 세 장을 비교
        2022년 01월 21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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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백두산 정계 역사가 담긴 지도 이야기-1’

    누구나 그렇겠지만, 컬렉터에게 이사는 고역이다. 하나하나 자료를 정리해야 하니 시간도 무척 많이 걸린다.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수집했는지는 그것들을 한 번에 꺼내 놓았을 때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수집 당시에는 저건 꼭 수집해야겠다고 목숨 걸 듯 달려든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설렘은 퇴색하고 심지어 망각의 강을 건넌 것들은 또 얼마였던가. 수집이란 것도 어찌보면 허망한 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1년 11월 중순,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컬렉터는 다락방 한 켠에 잠들어 있던 ‘임진목호정계시소모(壬辰穆胡定界時所模)’와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수집 당시의 흥분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되게 비싸게 주고 구했던 지도구나 하는 추억 정도를 떠올리며 무심히 짐을 꾸렸다. 지도 입장에서는 자신을 무람없이 시큰둥하게 대하는 컬렉터가 퍽이나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놈의 촉이 또 발동한다.

    관심 영역으로 재소환된 백두산 정계 지도를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 이름으로 검색을 해봤다.

    ‘임진목호정계시소모(壬辰穆胡定界時所模)’

    특별한 기대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뜬다.

    지도 수집 후 6년이 지난 2012년 10월 18일 서울신문 기사였다.

    “백두산정계비 여정 그린 지도 첫 발견”

    눈이 둥그레진 컬렉터는 기사를 유심히 살폈다.

    1890년 프랑스 공사관 통역서기관으로 조선을 방문했던 프랑스 동양학자 모르스 쿠랑(Maurice Courant)이 당시 수집해 갔던 한국 고서가 프랑스의 한 연구 기관에서 대량 발견됐다는 기사였다. 국립중앙도서관이 해외 한국고서 디지털화 사업의 일환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가 소장하고 있던 한국 고서를 조사하던 중 모리스 쿠랑이 수집했던 한국 고서 254책을 확인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모리스 쿠랑은 자신이 쓴 『한국서지』 서문에서 “서울의 책방을 모두 뒤지고 그 장서를 살펴 나갔다. 가장 흥미 있을 것 같은 책들을 사들이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을 써 놓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모리스 쿠랑이 대략 130여년 전 수집해 갔던 고서들이 2012년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것이다.

    이 고서 중에 [천하제국도(天下諸國圖)]라는 제목의 지도책이 있었다. 필사본으로 만든 이 지도책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책이었다. 지도책에 실린 여러 지도 중 단연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임진목호정계시소모(壬辰穆胡定界時所模)’라는 제목을 가진 지도(이하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였다. 2006년 컬렉터가 수집했던 지도와 동일한 제목이다. 발견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측은 “정계비 여정 지도는 아직 유사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지도는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와 제목만이 아니라 지도 내용도 거의 똑같이 닮아 있다. 다만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는 제목 부문에 네모 테두리를 따로 둘렀고, 제목의 ‘목호’ 오른쪽 아래에 작은 글씨로 ‘克登(극등)’이라는 목극등 본명을 부기해놓은 점 정도가 달랐다. 크기는 가로 35cm, 세로 30cm로 컬렉터 소장 지도보다는 다소 작다. 50cm인 컬렉터 소장 지도보다 가로 길이가 15cm 정도 짧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좌우가 빽빽한 느낌이다.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으로부터 꼭 300년이 되는 2012년 이 지도가 확인된 것도 우연치고는 흥미롭다.

    [사진] 왼쪽은 모리스 쿠랑이 수집해 갔던 고서 중에 포함되어있던 [천하제국도] 표지, 오른쪽은 이 지도책 11∼12면 두 면에 걸쳐 실려 있는 ‘임진목호정계시소모’(콜레주 드 프랑스 소장)

    천하제국도(天下諸國圖)와 여지도(輿地圖)

    컬렉터는 이 지도를 보고 몹시 흥분했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쌍둥이 형제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기분이라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무엇보다 컬렉터를 흥분시킨 것은 이 지도를 통해 2006년 수집한 정계 지도가 최소한 위조꾼들이 근래 제작한 위작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정계 지도가 흔한 지도라면 여기저기서 베끼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이 지도는 베낄 모본(母本) 구하기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컬렉터의 지도 수집 시점이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의 존재가 알려지기 6년 전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가 알려진 2012년 이후에 비슷한 지도가 경매에 나왔다면 위작이라 의심할 수 있겠지만, 컬렉터가 수집한 시점은 2012년 보다 6년이 빠른 2006년이었다. 분명한 것은 목극등이 김지남을 통해 조선에 넘겨준 원본 지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당시 그 지도 모사본이 일부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 확인되는 것이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 한 장,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 한 장 이렇게 해서 두 장인 것이다.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 존재를 확인한 후 다시 옛 열정을 되찾은 컬렉터는 ‘임진목호정계시소모’라는 이름의 지도를 맹렬하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두 장의 지도가 존재한다면 또 다른 지도가 없으리란 법이 없다.

    이 과정에서 또 한 점의 ‘임진목호정계시소모’가 등장한다. 이 지도 역시 한 장짜리 단독 지도가 아니라 [여지도(輿地圖)]라는 지도책 속에 편집되어 있는 지도였다. [여지도]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알려진 지는 꽤 되었으나 컬렉터가 미처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책이다. [여지도]는 가로 21.2cm, 세로 31.8cm 크기의 40쪽 짜리 지도첩으로, 안에는 ‘천하제국도(天下諸國圖)’, ‘중국도(中國圖)’, ‘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圖)’, ‘팔도도별도(八道道別圖)’, ‘유구도(琉球圖)’, ‘일본도(日本圖)’, ‘성경여지도(盛京輿地全圖)’, 도별 지도 등과 함께 ‘임진목호정계시소모’ 지도가 실려 있다. 양면에 걸쳐 그려진 지도이므로 이 [여지도] 속의 ‘임진목호정계시소모’(이하 ‘규장각 정계 지도’)의 크기는 가로 42.2cm, 세로 31.8cm이다.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가로 50cm, 세로30cm)보다는 작고,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가로 35cm, 세로 30cm)보다는 크다. 지도 내용은 앞에 언급한 두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가운데 접힌 부분이 일부 훼손되어 있어 나머지 두 지도에 비해 상태는 다소 나쁜 편이다.

    [사진] 지도책 [여지도] 속에 실려있는 ‘임진목호정계시소모’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 규장각 정계 지도, 이렇게 세 쌍둥이를 확인한 컬렉터는 이 지도들을 꼼꼼히 비교해 보기로 했다.

    먼저 제작 시기이다. 어느 지도가 제일 먼저 제작된 것일까? 제작 시기는 지도 가치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일단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는 나머지 두 지도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한 장 짜리 지도이고 안타깝게도 지도 위에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특별한 단서가 없다. 일단은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이후에 제작된 것 정도로만 규정해 놓고, 먼저 나머지 두 지도의 선후 관계부터 따져 보자. 다행히 백두산 정계 지도가 실린 두 지도책([여지도], [천하제국도])은 정계 지도 외에도 여러 지도들이 같이 실려 있어 제작 연도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을 몇몇 가지고 있다.

    [여지도], [천하제국도] 두 지도책 모두 지도 제작자와 제작처를 표기하지 않아, 정확한 편찬 경위를 알 수 없다. 다만 선명하고 화려한 색감과 정선된 글씨체, 지도에 담긴 내용들이 일반인들이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점을 통해 볼 때, 관청에서 제작하여 사용한 지도책, 즉 관찬(官撰) 지도책으로 보인다. 또한 두 책의 본문 구조나 내용이 전체적으로 유사하여, 분명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참고해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대영 교수는 모리스 쿠랑이 수집해 간 [천하제국도]의 존재가 알려진 직후인 2013년 ‘콜레드 주 프랑스 소장 천하제국도 연구’라는 논문에서 [천하제국도]와 [여지도]를 비교한 바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여지도]에는 경상도 지도에 안음(安陰), 산음(山陰) 지명이 표시되어 있어 1767년 이전에 제작된 지도로 볼 수 있다. 안음에서 안의(安義), 산음에서 산청(山淸)으로 지명이 바뀐 것이 1767년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도에 덧붙인 인구 통계 기록에서 ‘금상을묘경외민인구총수(今上乙卯京外民人口總數)’라는 대목의 ‘을묘’을 가지고 추론하면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에서 제작 하한선인 1767년 사이의 을묘년은 1735년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규장각 소장의 [여지도]는 1735년에서 1767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는 영조 재위 기간이었다.

    모리스 쿠랑이 수집해 간 [천하제국도]는 지명 변화를 반영한 것을 빼면 [여지도]와 거의 같은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제작된 것일까? 정대영 교수는 위의 논문에서 이 지도가 1767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 지도책에는 [여지도]와 달리 경상도 안의, 산청 지명이 보이기 때문이다. 안음과 산음을 표기한 [여지도]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천하제국도] 제작 하한선은 1795년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지명이 보이기 때문이다. 금천은 1795년(정조 19년) ‘시흥현(始興縣)’으로 명칭이 바뀐다.

    정리하면 [여지도]는 1735년∼1767년경 제작되었고, [여지도]를 대폭 참고하거나 모방한 [천하제국도]는 1767년∼1795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두 지도책 속에 포함된 2장의 백두산 정계 지도의 제작 시기 역시 책의 선후 관계와 동일하다. 규장각 정계 지도가 먼저이고,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가 뒤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국왕을 대입해 보자면 규장각 정계 지도는 영조 때,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는 영조 후반∼정조 연간에 제작되었다.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하나 더 부연하자면, 두 지도 중 먼저 제작된 규장각 정계 지도가 최소 숙종 재위 시 제작되지 않았음은 지도 제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두 지도가 제목을 ‘壬辰穆胡定界時所模’라고 간단히 쓴 것과 달리 규장각 정계 지도만 제목을 세 줄로 썼다. ‘壬辰穆胡定界時所模’라는 본 제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각각 한줄을 덧붙인 형태다. 본 제목의 왼쪽에는 “박권 정계사(朴權 定界使)”라고 써 놓았다. ‘壬辰穆胡定界時所模’라고 쓴 본 제목 부분을 보면 ‘목호’라는 이름 밑에 작게 목극등의 본명을 썼는데 ‘극등(克登)’ 대신 ‘극징(克澄)’이라고 잘못 써 놓은 것이 눈에 띈다. 이어 본 제목 오른쪽에는 “康熙五十一年 我肅宗三十八年”이라하여 정계비 건립 시기를 청 황제와 조선 국왕 재위 연도 기준으로 써 놓았다. 여기서 쓰인 ‘숙종’이라는 표현은 이 지도가 최소 숙종 사후에 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숙종’은 절대 숙종 재위시에는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왕의 묘호는 국왕 사후에 정해지기 때문이다. ‘숙종’은 1712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8년 뒤인 1720년 사망했다.

    토문? 옥문? 옥관?

    규장각 정계 지도와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의 선후 관계는 확인했다. 그렇다면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는 언제 제작된 것일까? 그 부분도 추론해 보자.

    규장각 정계 지도를 보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규장각 정계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면 치명적 오류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백두산 정계 지도라면 그 지도 속에 정계비 주변 지형과 지세, 물길 흐름도 담아야 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은 조선·청 양국이 경계로 정한 압록강, 토문강 표기이다. 그런데 이 규장각 지도에는 백두산 정계비 부근에 ‘토문’은 없고 ‘옥문(玉門)’만 있다. 정계비 옆에 토문강(土門江)이라고 써야 할 부분에 ‘옥문(玉門)’이라고 써 놓은 것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 규장각 정계 지도보다 뒷날 제작된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에는 ‘옥문(玉門)’ 자리에 ‘옥관(玉關)’이라고 써 놓았다. ‘관(關)’은 ‘문(門)’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한자이므로 ‘옥관’은 ‘옥문’과 같은 뜻이다. 컬렉터는 혹시나 하여 백두산 일대에 ‘옥문’이나 ‘옥관’으로 불린 물길이나 지명이 있나 두루 두루 검색하였으나 따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지도를 모사하면서 규장각 정계 지도는 ‘토문’을 ‘옥문’으로,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는 ‘옥문’을 다시 ‘옥관’으로 잘못 베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두 번의 변용을 거치다보니 원래 이 물줄기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기 어렵게 해 놓았다.

    [사진] 백두산 정계 지도 3장 중 백두산 천지와 정계비 주변부를 잘라 비교한 지도이다. 제일 왼쪽은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 가운데는 규장각 정계 지도, 오른쪽은 모리스 쿠랑 정게 지도인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순서가 지도 제작 순서로 보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토문강을 각기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제일 왼쪽은 ‘圡门江’, 가운데는 ‘玉門’, 오른쪽은 ‘玉關’이라고 써 놓았다.

    유일하게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만이 정계비 오른쪽의 물줄기에 ‘토문강(土門江)’ 표기를 해 놓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圡门江’이라고 써 놓았는데, ‘土’에 점 하나를 더 찍어 쓴 ‘圡’는 ‘土’의 속자(俗字)로 ‘土’와 같은 글자이고, ‘门’은 ‘門’의 약자이다. 이중 ‘圡’는 얼핏 보면 ‘구슬 옥(玉)’자로 혼동하기 쉽다. 규장각 정계 지도가 ‘토문’을 ‘옥문’이라고 쓴 이유는 이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규장각 정계 지도와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의 선후 관계는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럼 컬렉터 소장 지도도 집어넣어 세 지도 제작의 선후 관계를 따져보자. 지도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의 뇌피셜 추론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토문강을 ‘토문강(圡门江)’이라고 쓴 컬렉터 소장 지도와 ‘옥문(玉門)’이라고 쓴 규장각 지도와 ‘옥관(玉關)’이라고 쓴 모리스 쿠랑 지도 중 어느 지도가 가장 사실에 부합되고, 또한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컬렉터 소장의 지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백두산 정계비에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는 내용이 있고, 정계비 왼쪽에 ‘압록강’이 표기되어 있다면, 오른쪽에는 반드시 ‘토문강’이 표기되어야만 한다. 토문강이 정확히 표시되지 않은 백두산 정계 지도는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통속적인 비유로 그건 앙꼬 없는 찐빵이다.

    ‘토문’을 기록하는 대신 ‘옥문’이나 ‘옥관’으로 바꾸어 쓸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것은 명백히 지도 모사 과정에서 발생한 와자(訛字)라고 볼 수밖에 없다. 컬렉터 정계 지도는 속자와 약자로 쓰긴 했지만, 분명히 ‘토문강’이라고 썼다. 그런데 나머지 두 지도는 아예 글자를 잘못 썼다. 규장각 지도에는 실수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문’을 ‘옥문’으로 잘못 썼을 뿐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바 목극등의 이름도 ‘극등(克登)’이 아니라 ‘극징(克澄)’으로 잘못 썼다. 백두산 정계한 때로부터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지도를 모사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실수이다. 정계 직후의 시점이었다면 목극등 이름이나 토문강을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수가 많기로는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가 실린 [천하제국도]도 만만치 않다.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 속 잘못 쓴 ‘옥관’을 다시 언급하자는 것이 아니다. [천하제국도]에는 오늘날 우리가 두만강이라고 부르는 강을 표기한 지도가 3장 들어있는데, 강의 이름을 모두 제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순서대로 보면 먼저 5∼6면에 실려있는 ‘성경여지전도(盛京輿地全圖)’에는 ‘土門江(토문강)’이라고 표기했다. 이어 나오는 11-12면의 우리가 이미 살펴 본 ‘壬辰穆胡定界時所模’에는 ‘玉關(옥관)’이라고 썼고, 바로 다음 장인 13-14면에 실린 ‘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道)’에는 ‘豆滿江(두만강)’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도대체 일관성이 없다. 이는 [천하제국도]를 제작한 인물이 이런 부분을 치밀하게 비교 검증하지 않았음 반증해주고 있다.

    ‘옥문’, ‘옥관’ 표기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토문’을 ‘옥문’이나 ‘옥관’으로 쓴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글자를 바꿔 썼거나 고친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 글자의 오류를 가지고 선후 관계를 따지는 건 무리가 아닐까?

    컬렉터는 동의할 수 없다. 먼저 글자를 자세히 보면 원래 ‘토문(土門)이라고 쓴 것을 뒷날 고쳤거나 변형시킨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미 제작 당시부터 ‘옥문’이나 ‘옥관’으로 쓴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 지도 제작 당시에 의도적으로 토문강을 회피하고자 한 노력일까?

    그리 보기도 쉽지 않다. 왜나하면 이 지도들이 제작된 것이 영·정조 때라고 추정했을 때, 그 때는 간도를 둘러싸고, 다르게 말하면 백두산 정계비 토문강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이 청과 분쟁을 벌이던 시기가 아니었다. 만약 청과 국경회담을 하던 1880년 대 전후에 제작된 지도라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 지도들은 1700년대 제작된 지도이므로 그렇게 글자들을 일부러 다르게 써 놓을 필요성이 없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오류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런 사정을 종합해 보건대 컬렉터 소장 지도의 제작 시기는 규장각 정계 지도 제작 이전으로 추정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컬렉터 소장 지도가 규장각 정계 지도의 모본(母本)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관찬 지도책으로 제작된 [여지도], [천하제국도] 속에 실린 두 장의 백두산 정계 지도 역시 관찬 지도가 맞다면, 그리하여 목극등이 조선에 그려 준 원본을 모사한 지도거나 또는 모사본을 다시 모사한 것이라면, 컬렉터 소장의 정계 지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된 3장의 지도 중 ‘토문강’이 정확히 표시된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가 ‘토문’을 ‘옥문’이나 심지어 ‘옥관’으로까지 발전시킨 나머지 두 지도보다도 시기적으로 가장 이르고, 원본에 가장 가까운 지도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 역시 가장 높다. 이것이 세 장의 비슷한 백두산 정계 지도를 검토 비교하고 내린 결론이다. 자신의 소장품이라고 자화자찬한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옥문’이나 ‘옥관’이라 쓰지않고 정확히 ‘토문강’이라고 쓴 점도 그렇지만, 그림과 글씨 수준 역시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가 가장 뛰어나다. 컬렉터 소장 지도는 그림이나 글씨도 가장 세밀한 편인데, 백두산 천지 표현만 보더라도 먹으로 대충 칠한 두 지도와 달리 천지 물결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

    과연 목극등이 조선에 전해준 그 지도는 현존하고 있을까?

    모사본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지도라고 스스로 평가한 컬렉터 소장 지도가 혹여 그 원본 지도일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일단 형태상으로는 긍정적인 조건이 있다. 규장각 정계 지도, 모리스 쿠랑 정계 지도는 모두 다른 지도들과 함께 묶여 편찬된 지도인 데 비해, 컬렉터 소장 지도는 한 장짜리 단독 지도이다. 만약 목극등이 조선측에 전해 준 지도가 남아 있다면 그 지도 역시 컬렉터 소장 지도처럼 낱장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는 이 지도가 나머지 두 지도보다는 원본 지도에 더 가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원본으로 보기 어려운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지도 원본은 박권을 통해 숙종에게 보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국왕에게 올려진 지도로 보기에는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는 내용을 떠나 형식상 고급성이 떨어진다.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 의궤 정도로 고급스럽게 만들지는 않았더라도, 원본으로 추정하려면 그래도 왕에게 올려질 정도의 외형적 품격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격을 갖춘 도장 한 두 개라도 찍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김지남 비갈(碑碣) 기록과 컬렉터 소장 지도 상태가 서로 호응하지 못한다. 컬렉터가 지도를 수집한 후 2년이 지난 2008년 8월 정계비 건립 당시 활동했던 역관 김지남의 묘가 고양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묘 앞에 세워진 비갈은 4면에 가득 글을 새기고 있는데, 특히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과정과 의미도 함께 새겨 놓았다. 비갈의 한 구절에 이 지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목극등이 박권을 통해 조선에 전해 준 그 지도를 숙종에게 바쳤을 때, 숙종은 그 지도를 보고 감격해 하며 직접 시를 지어 지도 위에 썼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이러했다.

    繪畵觀猶壯 / 登山氣若何
    向時爭界慮 / 從此自消磨

    그림을 보니 오히려 장엄한데, 산에 오른 기상은 어떠했을까?
    지난날 경계를 다투던 근심이 이로부터 저절로 사라졌다네.

    당대 쓰인 이 비갈 기록이 맞다면 목극등이 조선에 준 지도 원본 위에는 숙종이 쓴 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컬렉터의 지도 어디에도 숙종이 썼다는 어제(御製) 시가 보이지 않으므로, 원본 지도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실록 등 어디에도 그 원본 지도 행방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찾을 수 없다. 원본은 유실되었을 수도 있고, 왕실 문서 더미 속에 묻혀 있을 수도 있겠다.

    기록이 없어 명확하지는 않지만, 목극등으로부터 백두산 정계 지도를 한 부 받은 당시 조선 정부는 따로 모사본을 제작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의 동일한 형식의 정계 지도가 세 장이나 발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지도는 몇 점 더 추가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더 이상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끝으로 덧붙일 내용이 하나 있다.

    컬렉터 소장 지도에는 다른 두 지도에 없는 흥미로운 글씨가 하나 쓰여 있다.

    제목 왼쪽 옆에 ‘五’라고 써 놓았다.

    왜 ‘5’라는 숫자를 쓴 것일까?

    조심스럽게 유추해본다.

    혹시 목극등이 준 지도를 정부가 처음 모사할 때 써 놓은 에디션 넘버는 아니었을까?

    원본의 다섯 번째 모사본?

    [사진] 컬렉터 소장 정계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제목 옆에 의문의 숫자 ‘五’(붉은 원 테두리)가 쓰여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박건호 소장)

    16년간 이어진 컬렉터의 지도 탐구는 여기까지다. 이 분야 전문가가 있다면 감(感)과 뇌피셜로 하는 이런 유추와 해석의 잘못을 질정해주시기를 앙망한다. 지도는 역시 컬렉터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그들의 지도가 필요하다. 제일 비싸게 수집한 자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이 너무 멀리와 버렸지만, 백두산 정계 당시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이 지도 속에는 500만원의 돈으로 다다를 수 없는 그 너머의 가치가 담겨 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수집의 즐거움!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지적 탐구!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역사의 가치!

    덧붙여, 간도 귀속 분쟁

    지도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진 간도 귀속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요점을 정리해 본다.

    1712년 정계비를 세운 후 170년이 지나서야 왜 두나라는 토문강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되었던가?

    이미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청과 조선이 국경선으로 합의한 것은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이었다. 이 ‘토문강’은 당시 그린 지도를 보면 두만강이 분명하다. 이는 비단 지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등 거의 모든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록들이다.

    먼저 『비변사등록』 숙종 38년 즉 1712년 2월 30일자 기록이다. 이조 참의 이광좌가 임금에게 아뢴 대목.

    “저들(청국)의 자문(咨文)에 이른바 토문강(土門江)이라 한 것은 곧 중국 음(音)의 두만강(豆滿江)입니다.”

    그 해 3월 8일자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 이미 토문강과 압록강 두 강을 경계로 해 왔으므로 물의 남쪽은 모두 마땅히 우리 땅이 되어야 하니, 마땅히 접반사 하여금 이로써 변명하여 다투게 하여야 합니다.”

    심지어 정계비 건립 당시 조선 대표였던 박권이 숙종에게 올린 보고(『조선왕조실록』, 숙종 38년 5월 23일자)에도 토문강과 두만강을 같은 강으로 규정하고 있다.

    역사를 강의하는 다수의 유튜버들은 정계비의 토문강이 애당초 두만강과 다른 강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심지어 국사 교과서에서도 두 강이 원래 다른 강이었던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200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국사교과서의 한 대목과 교과서에 실린 지도이다.

    비석을 세울 당시 두나라가 동쪽 경계로 합의한 토문강이 두만강이 분명하다면 이후 분쟁이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정계비가 세워진 장소 때문이다.

    백두산 정계 당시 목극등 일행은 백두산 정상이 아닌 약간 아래쪽인 동남쪽 약 4km, 해발 2,200m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여기에 서쪽 경계를 압록강, 동쪽 경계를 토문강(두만강)으로 한다는 내용을 새겼다. 그런데 압록강의 근원은 명확히 식별할 수 있었는데 비해, 토문강(두만강) 물줄기는 잠류(潛流)하는 구간이 있어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목극등이 토문강(두만강)으로 지목한 물줄기는 흐르다가 얼마 후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목극등은 그 물줄기는 저 멀리에서 다시 지표로 나와 동해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이 강 하류를 좀 더 살폈어야 했다. 그는 강 하류를 제대로 답사하지 않고, 그 상류 물줄기를 토문강(두만강) 원류로 속단한 후 서둘러 비석을 세워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조선측에 땅 속에 흐르는 그 물줄기를 알아볼 수 있게 땅 위에다가 석퇴(石堆;돌무더기), 토퇴(土堆;흙무더기), 목책(木柵) 등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정계비 건립 후 석퇴, 토퇴, 목책 등을 세우는 공사가 벌어지는데, 이 현장 작업 중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다. 목극등이 토문강(두만강)이라고 지목한 그 물줄기를 따라가보니 그것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쪽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당시 백두산 정계가 잘못된 것을 아뢰는 겸문학 홍치중의 상소 중 일부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목극등)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8년 12월 7일 기록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정부 내에서는 이 사실을 청에 보고해 다시 바로 잡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이럴 경우 목극등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새로 오게 될 청나라 대표가 목극등보다 다루기 더 힘든 인물일 수 있다는 점도 걱정이었다. 사실 목극등이 왔을 때 조선은 내심 압록강-토문강(두만강)선 보다 더 아래쪽으로 국경선이 획정될지 모른다고 내심 걱정했는데, 압록강과 토문강(두만강)선으로 국경선이 정해졌을 때 내심 선방했다고 판단했다. 만약 목극등보다 더 쎈 사람이 오게 된다면 압록강-토문강(두만강)선을 못 지키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결국 희한한 해결책을 찾게 된다.

    조선이 찾은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목극등이 토문강(두만강)의 원류라고 생각했던 물줄기가 실은 송화강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일단 청 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덮어 버리기로 결정한다. 대신 석퇴, 토퇴, 목책 등을 설치하면서 원래 물길 방향을 쓸쩍 틀어 두만강쪽으로 연결해버렸다. 현실의 물줄기를 비문 내용에 꿰맞춘 나름 절묘한 미봉책이었다.

    정리해보자. 정계비에 동쪽 경계라고 써놓은 것은 토문강(두만강)이었는데, 실제로 그 강은 송화강으로 흐르는 것이었고, 이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조선은 지표 위에 경계선을 설치하면서 정계비에서 시작된 물줄기를 실제와는 다르게 두만강쪽으로 연결시켜 버린 것이다.

    [사진] 위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 백두산 부분이다. 붉은 사각 테두리 안에 정계비가 보인다. 그리고 둥근 테두리 부분을 보면 정계비에서 시작된 동쪽 물줄기를 따라가 보면 석퇴와 목책이 보이고 이 물줄기는 두만강에 연결된다. 아래 지도는 조선 후기 신경준이 그려 영조에게 바친 [팔도지도] 속 함경도 지도의 백두산 부근 세부이다. 1770년에 제작된 지도로 백두산 정계비(붉은 사각 테두리)의 오른쪽으로 뻗어나가는 석퇴와 목책(붉은 원 테두리 부분)이 보인다. 이를 보면 정계비에서 물길을 따라가던 석퇴, 목책이 송화강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두만강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는 국립중앙박물관, 아래는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소장)

    이렇게 여러 조건이 뒤죽박죽이 된 상태에서도 170년간 양국간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은 만주가 봉금지역이라 어차피 국경 근처에 사는 청나라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청이 1880년대 들어 만주 개발을 시작하면서 이 지역은 조·청간 분쟁 지역으로 떠 오르게 된다. 간도에 그 직전부터 조선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서 터 잡고 살고 있던 상황에서 양국은 간도 귀속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때 양국은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주장을 펼치는데, 각자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정계비 건립 직후 쌓았던 석퇴나 목책이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흩어지거나 썩어 없어져 경계가 흐릿해진 것도 쉽게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85년 열린 1차 국경 회담(을유감계회담)에서는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토문강’을 두고 청은 두만강이라고, 조선은 송화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1차 국경회담이 끝난 후 조선측 대표 이중하는 청측과 국경 지역을 답사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흐릿하게 남아있던 목책, 석퇴 등을 찾아 따라가 보았더니 두만강의 홍토수 쪽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백두산 정계비에서 지목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것. 조선 측의 송화강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사실이 청측에 발각될까 크게 우려한 이중하는 국왕에게 비밀 보고서(추후별단)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목극등은 단지 비석 동쪽의 물길을 두만강의 발원지라 생각하고, 비석을 세워 동쪽은 토문이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목극등이 돌아간 다음 수년 동안의 공사를 거쳐 비석 동쪽에서부터 흙무더기와 돌무더기를 쌓아 동쪽으로 두만강 원류에 연결시키고자 하였으나, 두만강의 원류는 이 물길에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평한 언덕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두만강 원류가 비석 동쪽의 물길로까지 연결되게 하고, 마침내 그것을 토문강 발원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수백 년이 흘러 나무 울타리가 모두 썩어 문드러지고 잡목이 울창하여, 예전에 경계를 표시한 것을 저쪽이나 이쪽 사람 모두 자세히 알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논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백두산에 들어간 다음 은근히 그 형세를 살펴보니, 과연 예전의 표시가 여전히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은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만, 이 일은 매우 위태롭고 두려운 일이라 그 실상에 대해서 감히 상세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2차 국경회담(정해감계회담)에서 조선은 ‘토문강=송화강’ 주장을 접고, 청의 ‘토문강=두만강’ 주장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제는 두만강의 여러 물줄기 중 제일 위쪽 지류인 홍토수와 제일 아래쪽 지류인 홍단수 중 어느 물줄기를 경계로 할 것인가를 가지고 다시 청과 다투게 된다. 조선은 홍토수를 주장했고, 청은 홍단수를 주장했다.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신경전이었다. “차라리 내 목을 쳐라. 그러나 국경선은 한 치도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이중하의 그 유명한 말은 이때 나온 것이었다. 강경한 조선의 자세에 청은 한발 양보하여 홍토수와 홍단수 사이에 흐르는 ‘석을수’로 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았지만, 조선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데 양국은 의견 일치를 보았으나, 그 상류를 두고 합의에 실패,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국경회담은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동쪽 경계는 두만강으로 잠정 합의된 상태에서 그 상류 부분만 이해를 달리하여 회담이 결렬되었으나, 이후 상황은 조선이 더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쪽으로 전개되어갔다.

    이 국경 회담 결렬 후 얼마 뒤에 벌어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후 세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승인’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은 소멸되었고,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표방했다.

    “대한국은 세계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 제국이다.”

    대한제국 헌법격으로 선포된 [대한국국제]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런 입장에 따라 이전에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간도를 적극적으로 대한제국 영토로 편입하려 시도한다. 1900년경 의화단의 난으로 청나라 정국이 매우 불안해지자 간도에 살던 한국인들은 정부에 군대를 파견해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범윤이 1902년 간도 시찰원, 1903년 간도 관리사로 파견되어 간도지방의 한인 보호에 힘썼던 것은 이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간도에 다수의 조선인(대한제국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이 간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 직후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9년 대한제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청과 간도협약을 맺는다. 여기에서 정한 국경선은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하되 두만강의 지류는 홍토수와 홍단수 사이에 있던 석을수였다. 이렇게 해서 간도는 우리가 운 좋으면 차지할 수 있었던 땅에서, 차지할 수 없는 영토가 되고 말았다. 만주사변 즈음인 1931년 7월 일제는 백두산 정계비마저 철거해버렸다. 우리 역사에서 간도가 사라지고, 석퇴·목책이 사라졌듯이 마침내 백두산 정계비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진] 대한제국은 간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제작된 대한전도 중 붉은 원 부분이 함경북도이다. 이 지도에는 두만강 이북인 간도(지도에는 ‘북간도’라고 표기)까지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지도에는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토문강을 표시하고 있다.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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