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정계 역사가 담긴 지도 이야기
    [컬렉터의 서재] 컬렉터의 가장 비싼 수집품 사연
        2022년 01월 18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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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집은 왜 합니까?”

    “수집이란 무엇입니까?”

    컬렉터가 받는 질문 중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이렇게 존재론적이거나 근본을 묻는 질문이다. 반면 제일 답하기 쉬운 질문은 이것이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하다.

    “지금 그 유물은 얼마입니까?”

    이 쉬운 이 질문에 대한 컬렉터의 대답은 단호하다. 잘 모른다거나 아니면 말씀드릴 수 없다라고 한다. 질문자가 학생이라면 왜 그런지 그 이유까지 이렇게 설명한다.

    수집 가격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컬렉터는 그 수집을 직접 한 사람으로 가격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얼마라고 내뱉는 순간 자료가 가진 모든 의미나 이야기들은 단순한 숫자로 치환되어 버린다. 수집 자료가 하나의 화폐 가치로 특정되는 순간 수집품을 둘러싼 모든 가치의 총체들은 소거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수집은 근본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모으는 행위여야 하는데, 수집품에 가격표가 붙는 순간 수집은 신성한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시장판에서 매매되는 상품의 세계로 편입된다.

    [TV쇼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가 가진 긍정적인 요소를 충분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가 끼치는 해악은 출품된 역사 문화 자료들을 모두 얼마의 추정 가격으로 규정해 버린다는 데 있다.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해야 할 것들을 가격표라는 족쇄를 채워 세속의 땅에 긴박시켜 버리는 것이다.

    “수집품 중 제일 비싼 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도 답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다 비슷한가보다. 그나마 이것은 수집품 중 제일 비싼 것의 가격을 말하지 않아도 되므로 나름 배려를 담은 질문이다. 이와 비슷한 질문 중에는 그 가격을 유도하는 것도 있다.

    “수집품 중 제일 비싼 건 얼마나 합니까?”

    질문자가 정말로 진지한 표정으로 물으면 ‘중고차 가격 정도’라고 에둘러 말한다. 모른다거나 말할 수 없다고만 하는 것도 너무 무성의하고, 야박한 거 같아서 그리하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그동안 스스로 금기시했던 답변을 하고자 한다. 내 수집품 중에서 가장 비싼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주제로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므로 귀를 쫑끗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어찌하다 보니 글이 무척 길 것이니 긴 호흡 준비하시기를 미리 당부드린다.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 귀속 분쟁

    “간도, 간도. 대관절 그 간도라는 게 무얼 두고, 어디를 보고 말허는 것인고?”
    “흔히 연변 일대를 그렇게들 부르지요.”
    “연변이라…….”
    “왜 그 두만강 너머 길림성 동남부, 연길, 훈춘, 왕청, 화룡, 네 개 현을 통칭 그리 말허지 않습니까?”
    “거기라면 내륙인데 그 복판에 무슨 섬이 있어서 간도란 말인가. 그게 사이 간, 섬 도, 그렇지 아마? 그 명칭에 어떤 연유 래원이 있을 것 아니라고?”

    최명희, 『혼불』 8권 중

    만주(현 중국 동북지방)에 ‘간도(間島)’라는 땅이 있다. 대략 두만강 위쪽 지역을 일컫는데, 더 구체적으로는 북간도 혹은 동간도를 말한다. 압록강 위쪽 지역을 뜻하는 서간도와 구별되는 지역이다. 이론적으로는 간도라 하면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을 합쳐 부르는 말이지만 보통은 북간도 지역을 가리킬 때 쓴다. 간도는 19세기 후반 이래 우리 동포들이 많이 이주해 터잡고 살아온 지역이다.

    한자로만 보면 무슨 섬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실제로는 섬이 아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들이 있다. 청나라가 이 지역을 ‘봉금지역’으로 정한 후 청·조선인 모두 들어갈 수 없는 ‘섬과 같은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 곳 황무지를 조선인들이 개간했다 하여 처음에 ‘간토(墾土)’라고 했는데 그게 변해서 간도가 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의 강의 동쪽이라는 뜻의 ‘강동(江東)’이라는 말이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 간도의 귀속을 둘러싸고 1880년대 들어 갑자기 조선과 청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조선과 청은 1712년 국경 답사 후 세웠던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중 특히 ‘토문(강)’의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원래 그들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을 그들의 발상지라 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런데 조선인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 심지어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등 청과 종종 갈등했다. 이에 양국의 국경을 명확히 하고자 청의 요청으로, 1712년 조선 대표 박권(朴權)과 청 대표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정계비를 세웠다. 이 해는 임진년으로 청 강희제 51년, 조선은 숙종 38년이었다.

    그런데 정계비가 세워지고 상당 기간 별 문제가 없다가 170년 정도가 지난 1880년대 접어들면서 갑자기 간도가 양국 간 분쟁 지역이 되었고,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백두산 정계비가 소환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청의 만주 개발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청은 그간 금지해왔던 만주를 1880년대 들어 본격적인 개발을 하게 되는데, 봉금 지역 간도에는 이미 많은 조선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청은 자신들 땅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퇴거를 명하게 되고, 조선 정부는 이에 반발 그곳이 조선땅이라고 맞서게 된 것이다.

    결국 이 문제로 조선과 청은 1885년,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국경 회담을 벌이게 되는데, 여기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선 부분이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상의 ‘토문강(土門江)’을 어디로 해석할 것인가였던 것이다. 조선은 토문강을 백두산 천지에서 북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라 주장했고, 청은 동해로 흘러가는 두만강이라고 주장했다. 토문강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간도가 조선땅이 될 수도, 청의 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분쟁을 간도 귀속 분쟁이라고 한다.

    [사진] 왼쪽은 백두산 정계비의 그래픽 복원도이다. 백두산 정계비에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내용을 새겼다. 오른쪽은 1880년대 조선과 청의 국경 회담 당시 양측의 주장을 표시한 지도이다. 당시 쟁점은 두만강과 송화강 사이에 놓인 간도가 누구 땅인가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사진)

    “차라리 내 목을 쳐라. 그러나 국경선은 한치도 결코 양보할 수 없다.”

    당시 조선 대표로 회담에 참석한 토문감계사 이중하(李重夏)가 청 대표에게 했다는 말이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결국 이중하는 청에 양보하는 척하면서도 현명하게 대처, 협상을 결렬시켰다. 이 두 차례의 국경회담에서 공식적인 결론을 내리거나 새로운 국경 조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이렇게 2번의 국경 회담으로 청과 조선의 협상이 무위로 끝났던 것. 이후 청과 조선(1897년부터는 대한제국)은 각기 간도와 간도 주민에 대한 관할권 행사를 시도했고, 이로 인한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제3자인 일본이 개입하게 된다.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1909년 9월 4일 청과 간도협약을 맺어 대한제국과 청의 동쪽 경계로 두만강으로 공식화함으로 간도는 청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현재 역사 관련 유튜버들의 간도 관련 영상을 보면 거의 동일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이다. 간도는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이 가서 일군 땅이다. 백두산 정계비 설립 당시 토문강은 송화강의 지류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만강과 별도로 토문강이 있었다. 간도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아니면 청과 분쟁 지역으로 어쩌면 우리 땅이 될 수 있었다. 대한제국 때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한 적도 있다. 그런데 간도를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놈들이 우리를 배제한 상태에서 자신의 만주지역 이권 획득을 위해 중국측에 넘겨 버렸다. 을사늑약에는 고종의 도장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무효이므로 간도협약도 무효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간도는 언젠간 되찾아야 할 우리의 영토이다.)

    그런데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질 당시 비에 새긴 ‘토문강’은 실제 어디였을까? 그리고 왜 이것이 나중에 해석상 문제를 일으킨 것일까?

    미스터리한 한 장의 지도

    흥분할 만한 지도 하나가 나왔다. 꽤 오래 전인 2006년 4월 하순에 열린 어느 경매에서였다. 지도의 이름은 ‘壬辰穆胡定界時所模(임진목호정계시소모)’라고 적혀 있다. 지도에는 백두산 주변의 산세가 그려져 있고, 정상 부근에 백두산 정계비로 보이는 비석도 그려져 있다. ‘백두산 정계비’라는 이름 대신 ‘강원비(江源碑;강의 근원을 밝히는 비)’라고 써 놓았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50cm*세로30cm, 한지에 그린 채색 필사본이었다. 지도 위에는 백두산 일대 답사 당시 지나간 경로를 나타낸 듯한 붉은 선도 표시되어 있다.

    경매 시작가는 220만원.

    컬렉터는 단박에 범상치 않은 지도라고 느꼈다.

    제목 ‘壬辰穆胡定界時所模’을 해석하면 ‘임진년 목호가 정계 시 기준(또는 표준)으로 삼은 지도’ 또는 ‘기준(또는 표준)이 되었던 지도’라는 뜻이다. ‘所模之圖(소모지도)’에서 ‘之圖’ 두 자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첫 부분 ‘임진’은 ‘임진년’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1712년을 뜻한다. ‘목씨 성을 가진 오랑캐’라는 뜻으로 쓰인 ‘穆胡’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당시 청나라 대표 이름이 목극등(穆克登)이었으므로 그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지도 제목은 조선측에서 썼을 것이다. 청측이 ‘목호’라는 표현을 썼을 리가 없다. 지도가 그려진 유래는 차치하더라도 제목은 조선이 써넣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지도가 정계 당시 그려진 것이라면 목극등이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당시 조사한 백두산 주변 지리와 그들이 지나간 경로를 고스란히 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뒷날 간도 귀속 분쟁의 원인이 되는 ‘토문강’의 위치를 백두산 정계비 건립 당시에는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정확히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컬렉터는 이 지도와 관련하여 검색을 해보았으나 이 지도와 유사한 지도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전에 알려진 바 없는 지도 같았다.

    그렇다면 백두산 정계 당시 여정을 그린 지도 첫 발견?

    결국 이 지도 진위 여부는 오롯이 컬렉터가 판단해야 할 몫이었다.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가장 즐겁고도 흥분되는 순간이다. 이런 탐구의 시간, 이런 몰입의 순간 컬렉터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수집의 즐거움!

    [사진] 2006년 4월 경매에 나왔던 ‘임진목호정계시소모’.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세울 당시의 백두산 일대의 산세와 물줄기를 충실히 그린 것으로 보인다.

    컬렉터는 이 지도가 위작이 아니라 진품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도 위에 유려한 달필로 쓴 글씨가 요즘 사람들의 글씨체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전혀 어설픈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한자를 생활도구로 항시 사용한 사람들만이 풍기는 문자향과 아우라가 담겨있다.

    둘째. 백두산 주변의 산 이름이나 물길 이름이 아주 상세해서 뒷날 위작으로 만들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셋째. 종이의 재질이나 그 얼룩 자국 등이 육안으로 얼핏 보아도 200∼300년 이상은 족히 돼 보인다는 점이다.

    넷째. 지도 위 표시된 두 줄의 붉은 두 줄 중 한 줄은 백두산 정상까지 간 것으로 보아 청나라 대표측의 경로로 보이고, 실선 위에 작은 점들을 찍어 구분한 또 한 줄의 경로는 백두산 정상을 가지 않고 산 중턱 부분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아 정상에 오르지 않았던 조선 대표 박권 일행의 경로로 보인다. 이 선들을 검토해보니 실제 문헌 기록에 나오는 두 나라 대표단의 이동 경로와 거의 일치한다. 이 붉은 선 위에 간혹 그려진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는 그들이 중간 중간 유숙(留宿)한 곳들이다.

    다섯째. 지도 제목에 ‘목극등’ 본명이 아니라 ‘목씨 성의 오랑캐’라는 뜻의 ‘목호(穆胡)’라고 표현한 점도 의미심장하다. 당대 사람들이 관행적으로 불렀던 명칭은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고 익숙하겠지만, 한참 후세대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 된다. 만약 지도가 최근 만들어진 위작이라면, 지도 제목에 ‘목호’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위작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냥 ‘목극등’이라고 써 버리는 것이 더 안전하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지도 가치를 눈치챌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유리하지 않았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목극등’이란 이름이 들어간 기사가 총 21건 검색된다. 그런데 ‘목극등’ 대신 ‘목호’라는 비칭(卑稱)으로 그를 언급한 기사는 단 2건만 검색된다. 숙종 38년 즉 1712년 5월 12일 기사와 그 이듬해인 숙종 39년 즉 1713년 윤 5월 16일 기사다. 일부 기사에는 목극등을 ‘목차(穆差)’라고 쓴 기록도 몇 군데 보이는데, 이는 ‘차관(差官)’혹은 ‘차사(差使)’라는 직책을 붙여 표현한 것이다. ‘목호’는 그 당대 실제 사용된 호칭이었다.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질 무렵 조선인들이 목극등을 표현할 때 얼핏 얼핏 사용한 ‘목호’라는 표현이 쓰였다는 점은 이 지도가 당시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 준다. ‘목호’라는 표현 속에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의 반청 의식, 효종 때의 북벌 프로젝트 그리고 조선 지배층이 가졌던 소중화 의식 등 그 당대의 인식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단어 하나도 그렇게 고유한 역사성을 담고 있다. 찰나처럼 가볍게 지나갔을법한 조선 후기 사람들의 생각 조각들이 ‘목호’라는 짧은 단어 속에 스냅샷처럼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 백두산 정계비는 보통 조선에서는 ‘백두산 정계비’, 청에서는 ‘목석(穆石)’이라 부르지만, 건립 당시에는 ‘강원비(江源碑)’라 불렀다. 이 지도 속 비석 옆에는 ‘강원비’라고 써 놓았다. 이 역시 당시 사용한 표현으로, 위조했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정황 증거들이 아니더라도 오랜기간 관심을 가지고 수집을 해왔던 컬렉터의 촉이란 것이 있다. 그냥 그런 느낌이 있다. 뭐랄까 낚시하는 사람이 처음 손끝에 전해져오는 미세한 떨림으로 잡힌 고기 크기나 종류 같은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과 비슷하달까.

    컬렉터는 이 느낌을 믿고 결국 경매에 응찰!

    몇 명과의 치열한 경합 끝에 결국 이 지도를 손에 쥐게 되었다.

    마치 보물 지도를 얻은 것 같았다.

    낙찰가격은 528만원!

    내 컬렉션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이다. 중고차 가격이라고 한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무모하게 입찰하지는 않지만, 당시는 수집 세계에 입문한 초기라 물불 안가리는 도전 정신이 있었을 때다. 도전 정신은 아름다운 것이다.

    역관 김지남, 통역을 넘어 외교를 하다.

    지도를 손에 쥐게 된 컬렉터는 더욱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능성을 가지고 배팅은 했지만, 지도 진위 여부를 어떻게 밝힐 것인가?

    종이를 뜯어내 언제 것인지 전문 기관에 분석 의뢰해 볼 것인가? 그러나 위작을 만들려고 작정하면 오래된 종이를 구해서 그 위에 지도를 베껴 넣는 고급 기술도 있지 않겠는가? 그보다 먼저 밝혀야 하는 사실이 있다. 이런 지도가 어떻게 제작되고, 또 어떻게 지금까지 현존할 수 있었는지를 관련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목극등이 정계비 세울 때 표준(혹은 기준)으로 삼은 지도’라는 제목이 맞으려면 그 실증적 증거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조선과 청이 공동으로 지도를 제작했든, 청나라 측에서 자신들의 지도를 베껴서 줬던, 아니면 베끼게 했어야 되는 것이다. 컬렉터는 당시 조선 접반사 박권, 그리고 그를 동행했던 군관, 혹은 통역관 자료를 꼼꼼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조선 대표 일행에 동행한 화원(畫員)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측에서 이 지도를 그렸을 가능성은 낮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드디어 눈에 띄는 기록을 찾았다. 정계비 건립 당시 아들과 함께 역관(譯官;통역관)으로 참가했던 김지남(金指南)이 쓴 『북정록(北征錄)』에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사진] 왼쪽은 김지남이 저술한 『북정록(北征錄)』으로 백두산 정계비 건립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자세히 정리한 기록물로 평가되고 있다. 오른쪽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김지남의 묘와 비갈로 고양시 향토 문화재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지남은 뛰어난 역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하였다. (왼쪽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오른쪽은 인터넷 사진)

    『북정록』 기록을 따라가 보자.

    답사 첫날부터 목극등은 조선의 대표격이었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비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 자기 의도대로 정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에 조선측은 박권과 이선부 중 한 명이라도 동행할 수 있도록 재차 요청했다. 목극등은 그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튿날 목극등은 수역(首譯;수석 통역관) 김지남마저도 연로하다는 이유로 제외시키게 되는데, 이때 김지남은 목극등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북정록』 1712년 5월 8일자 기록이다.

    소관(小官)은 조선의 백성이요, 백두산 또한 조선의 땅으로 우리나라의 명산으로 전해져오는 곳입니다. 원컨대 그곳에 한 번 올라가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지만, 길이 너무 멀어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차에 대인께서 소관의 늙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겨 동행을 허락지 않으시니, 백두산의 진면목을 한 번 보려는 소원이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대인께서는 반드시 유윤길(劉允吉) 화사원(畵師員)으로 하여금 산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한 폭을 내려주신다면, 소관의 평생소원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대인의 은덕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이에 대한 목극등의 답.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이렇게 김지남은 목극등으로부터 지도 한 벌을 약속 받았다. 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5월 15일이었고, 다시 일주일 후인 5월 23일 청 대표 일행은 무산부 객사에서 완성된 지도를 김지남에게 보여주게 된다. 다음날인 5월 24일 목극등은 약속에 따라 무산부 풍산진에서 동일한 지도를 한 벌 더 만들어 “산도(山圖) 1본은 돌아가 황상께 아뢰어야 하고, 1본은 마땅히 국왕 앞으로 보내야 한다”라고 하면서 백두산 지도 한 벌을 김지남을 통해 조선측에 전달했다고 『북정록(北征錄)』은 기록하고 있다. 정계 당시 조선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박권의 『북정일기』 5월 24일자 기록에도 이 지도에 대한 언급이 짧게 나온다.
    “목극등이 백두산 지도 한 벌을 내주었다.”

    정리하면 백두산 정계시 청나라 화원 유윤길이 지도를 그렸고, 그 지도를 한 부 똑같이 모사하여 조선에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나라 측이 지도를 모사해 준 것이긴 하지만, 청 화원 유윤길이 동일하게 그린 것이므로 당시 정계 사실을 담은 두 장의 원본 지도가 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하나 이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역시 김지남 책에 기록된 것이다. 처음 목극등이 조선측에 그려 준 지도에는 정계비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에만 ‘압록강원(鴨綠江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압록강 근원은 그것 말고 더 위쪽에 한 줄기가 더 있었는데, 이 물줄기는 천지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었다. 문제는 백두산 정계비에서 시작하는 ‘압록강의 물줄기’만을 경계로 정하면 백두산 정상 부분은 청의 영토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더 위쪽에 있는 나머지 물줄기도 ‘압록강의 근원’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만 백두산 천지까지 조선 국경선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간파한 조선측에서는 김지남을 목극등에게 보내 천지에서 발원하는 나머지 한 물줄기에도 ‘압록강원’이라는 글을 써넣어 달라고 요청한다. 글자는 비록 네 자에 불과하지만 천지 귀속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김지남은 들고간 지도를 펴놓고 목극등에게 정중히 요청한다.

    이 지도를 보면 압록강의 근원이 처음에는 두 갈래인데, 한 줄기에는 강의 근원이라고 쓰고 한 줄기에는 쓴 바가 없으니 지금 만약 국왕 어전에 이 지도를 바치면 이 하나에는 왜 이름을 쓰지 않았느냐고 반드시 물을 것입니다. 우리들 왕명을 받들고 나온 신하의 도리로서 어찌 황공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이러한 이치와 형세를 양해해 주시어 다른 한 쪽에도 이름을 써주는 일을 화공 유윤길에게 하교해 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목극등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강의 물줄기가 어떻게 여러 개 있을 수 있냐는 논리였다. 돌아가 황제(강희제)가 강 물줄기가 왜 두 개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다는 것. 이에 김지남은 청나라 지도는 안되더라도, 조선측에 그려준 지도만이라도 재차 ‘압록강원’을 써 줄 것을 요청한다. 목극등은 이런 요청에 웃으며 “이 산에 무슨 보배라도 산출되느냐? 부득이 너의 말을 따르겠다”며 화공 유윤길을 불러 “이 서부쪽 강줄기의 머리에도 ‘압록강원’ 네 자를 써 주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들의 지도에도 똑같이 네 자를 써넣게 했다. 이로써 조선의 왼쪽 경계가 백두산 천지 부근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김지남을 ‘백두산 천지를 찾은 외교관’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컬렉터가 수집한 지도에는 백두산 정계비 바로 왼쪽 물줄기에 ‘압록강원’이 기록된 것과 함께 천지에서 발원하는 그 서북쪽 물줄기에도 동일하게 ‘압록강원’이라고 쓰여져 있다. 『북정록』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로 인해 지도에 대한 신뢰성은 더욱 높아졌다.

    [사진] ‘임진목호정계시소모’의 정계비 부분을 확대한 것으로 ‘鴨綠江源(압록강원;압록강의 근원)’을 표시한 부분(붉은 테두리 A,B 부분)이 두 곳 보인다. 『북정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A 부분에만 표기되었는데, 김지남의 요청을 받아 들여 왼쪽 물줄기인 B부분에도 표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청의 왼쪽 경계가 서북쪽으로 백두산 천지까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북정록』에서 확인했듯이, 백두산 정계시 청이 그린 지도가 먼저 있었고, 목극등이 그 지도와 똑같은 지도를 한 벌 더 그려 조선에 주었다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컬렉터가 수집한 지도 내용이 정계 당시의 여러 문헌 기록들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도 동시에 확인했다. 정말로 이 지도는 범상치 않다.

    그런데 여기까지 확인한 컬렉터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 지도에는 정계비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압록강’,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강은 ‘토문강’으로 써 놓았다. 정계비에 “서위압록,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고 되어 있으니 두 강이 지도에 표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따져보면 정계비 건립 당시 새긴 ‘토문강’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에는 정계비 오른쪽으로는 천지에서 내려오는 토문강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물줄기는 대각봉을 지난 후 잠시 땅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지도에는 이 부분에 ‘입지암류(入地暗流)’로 써 놓았다. 그리고 땅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다시 지표로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지도에서는 이 부분을 ‘수출(水出)’이라고 표기했다. 이 물줄기는 이후 대홍단수, 어윤강 등 몇 개의 지류를 품으면서 무산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앗, 두만강!

    명확히 이 강은 두만강이다.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는 것이다. 정계비 건립 후 한참 후 간도 귀속 분쟁이 일어났을 때 토문강의 해석을 두고 청은 두만강, 조선은 송화강이라 하여 크게 대립했다고 앞에서 언급한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지도가 정계 당시 그린 지도가 명확하다면 간도 귀속 분쟁과 관련해서 우리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지도가 되는 셈이다.

    [사진] ‘임진목호정계시소모’의 세부도이다. 정계비 오른쪽에서 시작되는 토문강 물줄기가 대각봉을 지난 후 ‘입지암류(立地暗流)’(왼쪽 붉은 원)했다가 ‘수출(水出)’(오른쪽 붉은 원)하여 이 물줄기는 무산쪽으로 흘러간다. 이를 통해 백두산 정계비 당시 적은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알 수 있다.

    토문강의 실체에 대해서 송화강 지류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거기에 부합되는 자료들을 제시하고, 두만강으로 보는 이들은 또 거기에 관련되는 자료들을 제시하는 상황에서 이 지도는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지도로서의 의미가 있다. 게다가 백두산 정계비가 건립되던 1712년 당시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 때문에 그 무게감은 다른 지도보다 클 수밖에 없다.

    컬렉터는 이 지도 수집 직후 수업 시간 간도 귀속 분쟁에 대한 부분이 나오면 학생들에게 이 지도를 보여주며 농담삼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지도가 진품이라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단다.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기도 하고도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우리 측 주장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야. 그래서 고민 중이야. 불타는 애국심으로 이걸 불 속에 집어 던져야 하나? 아니면 중국사람들에게 비싼 값 받고 팔아 버려야 하나?”

    크로스 체크!

    컬렉터가 재작년에 출간한 책을 읽고 어떤 제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내 책에 관련하여 쓴 리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마침 수업 시간에 보여준 이 지도 이야기가 있었다. 농담처럼 말한 것을 이 제자는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백두산정계비에 관한 수업 중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자신이 소장 중인 지도를 보여주셨다. 이 지도는 아직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는 지도이며, 나름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이 지도가 조선 또는 한국 측의 주장에 불리한 사실을 담고 있으며, 반드시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직 공개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선생님의 표정 또한 눈에 선하다. 김이 폴폴 나는 감자를 스윽 내미는 점순이의 표정이었다면 그럴듯하겠다. 오히려 여전히 부족하려나. 컬렉터에게는 수집하는 기쁨도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선보이는 기쁨도 있지 않겠는가.

    컬렉터는 이렇게 갓 수집한 지도를 보여주며 수업하면서도 미심쩍은 마음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지도 전문 위조꾼들에게 속아 괜히 거금을 낭비한 것은 아닐까? 저 지도는 실제 그때 그려진 지도가 정확한 것일까? 컬렉터는 지도 한 장을 놓고 검증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를 헤매다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이 지도가 1712년 백두산 정계 당시 제작된 지도라는 것을 명확히 증명할 자료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 자신없으면 수집하는게 아니었어. 지도는 지도 전문가에게 가는게 나을 뻔 했어.

    얼마 후 지도는 백두산 정계비 건립과 관련된 수많은 비밀을 숨긴 채 컬렉터의 다락방 깊숙한 곳에 잠들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 기약도 없이.

    (2편에 계속)

    * <컬렉터의 서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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