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인과 감옥에서 1년을 보내다
        2006년 12월 27일 1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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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은 노동운동에게 어떤 해보다고 큰 시련과 좌절은 안겨준 해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법안과 로드맵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좌절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다. 기업별노조의 울타리를 깨고 산별노조 전환이 속속 이뤄졌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등 노동운동이 한 걸음씩 전진했다.

    <레디앙>은 2006년 송년특집 기획으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일군 노동자들의 눈을 통해 2006년을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지난 12월 20일 금속산별 완성대의원대회가 속개되던 시간,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는 2차 복직자 32명의 명단을 통보받았다. 이들은 12월 30일부터 출근한다. 아직 복직하지 못한 해고 조합원 44명은 3차 시기인 6월 30일까지 복직시키기로 되어 있다.  

    세 번에 걸친 고공 크레인 점거 농성, 지역 사회의 전폭적인 연대와 격렬한 집회 투쟁. 단계적이지만 해고 조합원 전원 복직 합의!  

    올해 일어났던 많은 비정규직 투쟁의 정점에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 투쟁에서, 유일하게 세 번의 고공 크레인 점거에 모두 참가하고 감옥까지 다녀온 노동자가 있다. 바로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정경진(30) 조직차장이다.

    이번 투쟁을 거치고 나서 사회 친구한테 “완전히 미친 놈 같다”는 말을 듣고 있다는 정차장. 그와 함께 지난 투쟁을 돌아보고 ‘결사 투쟁’의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과제는 무엇인지 얘기를 나눠봤다.

    2006년 새해 첫날 받은 선물은 ‘해고 통보’ 

    2006년 새해 첫 날,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받은 새해 선물은 ‘확약서’ 이행이 아니라 해고 통보였다. 사내하청업체인 유성티엔에스는 2005년 12월 31일자 원청의 계약해지를 들어 고용계약해지를 통보하고 조합원 22명에 대해 고용승계를 하지 않고 대기발령을 냈다가 결국 해고했다.

       
     ▲ 정경진 조직차장
     

    광산업의 경우 폐업을 공고하고 비조합원들은 새 업체로 고용을 승계했지만, 조합원 9명은 1월 1일자로 해고됐다. 다원엔지니어링은 조합원 7명을, 남도전기는 조합원 1명을 불법 점거농성을 이유로 해고했다. 원청인 현대하이스코는 지난해 12월 29일 조합원 66명을 상대로 72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반면에 확약서 이행을 위해  2005년 11월부터 이듬 해 1월말까지 이어진 하청업체 대표단과 교섭은 아무런 성과 없이 형식적으로만 운영됐다.

    현대하이스코 원·하청 사용자들은 자치단체 등과 합의한 사회적 약속인 ‘확약서’를 언제 체결했냐는 듯,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현대하이스코 원·하청 사용자 대표들은 지난해 11월 3일 "사내하청업체 폐업 등으로 인한 실직자(해고자)들이 우선 취업할 수 있도록 하고, 노조활동을 보장한다"며 순천시장과 함께 확약서에 서명했었다.

    이 확약서는,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63명이 2005년 10월 24일부터 11일간 공장 내에서 고공 크레인 점거 농성을 벌이고, 10월 25일 지역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격렬한 투쟁, 지역 시민사회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겨울 삭풍, 조합원 속으로 들어가 이겨내다

    “확약서 내용에 실망감이 들었다. 우리는 결사항전으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는데 내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로 가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지도부를 믿고 동지들을 설득해서 농성을 풀고 내려왔다”

    정 차장의 말처럼 확약서의 부족한 점은 약속 파기로 이어졌다. 약속 파기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현대차 자본의 행태를 알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은 확약서를 순순히 이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대규모 해고와 함께 확약서 파기가 현실로 닥치자 비정규직지회는 겨울 삭풍을 맨 몸으로 맞은 것처럼 몸살을 앓았다.  

    정 차장은 “결사항전으로 올라간 1차 크레인 농성에서 확실하게 마무리지었어야 했는데 확약서 수준으로 끝내고 해고가 이어지자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집행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1차 크레인 농성으로 박정훈 지회장 등 13명의 핵심 간부들이 구속되어 중심을 잡아가기도 만만치 않았다.

    이 때 지회와 정차장은 어떻게 이겨냈을까?
    “힘겨웠지만 실망하거나 좌절하진 않았어요. 다시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여전히 이 투쟁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어떻게 조합원을 하나의 마음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죠.”

    답은 조합원 속에 있었다. 사업장별로 조합원 모임을 계속하며, 날마다 조합원과 머리 맞대고 설득하고 지혜를 모았다. 가슴을 열고 맘을 하나로 모아 갔다. 그리고 투쟁을 하나하나 준비해 실천으로 이어갔다.

    2차 크레인 점거와 4월 총력투쟁

    2차 투쟁의 꼭지점은 4월로 맞추었다. 5.31지방자치선거 국면으로 전환되기 전에 끝장을 보자는 것이었다. 또 지난해 1차 투쟁과 달리 2차 투쟁은 확약서 파기의 책임을 물어 현대하이스코를 넘어 현대차그룹 회장인 정몽구 회장을 상대로 ‘맞장’을 뜨기로 했다.

    1월부터 3월까지는 내부 전열을 정비하며 금속노조(광주전남지부), 민주노총 지역본부뿐만 아니라, 민중연대와 시민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4월 총력 투쟁의 꼭지점을 향해 투쟁의 수위를 높이고 연대, 지지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민중들과 끊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함께 싸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면 승리한다”는 정 차장의 생각을 실천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2, 3차로 이어진 크레인 점거 투쟁은 어느 날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한 투쟁 준비와 발품으로 실천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며 다져진 결의로 현실화한 것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정몽구 회장에 대한 그림자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3월 현대차그룹 비자금 문제가 터져 나왔다. 구속 여론이 들끓고 유리한 국면이 조성됐다.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와 함께 전국순회투쟁단을 만들어 4월 3일부터 7일까지 ‘확약서 이행 촉구 및 정몽구 회장 규탄 전국순회 선전전’을 벌였다.

    현대자동차 울산·전주공장·서울 본사, 기아자동차 소하리·화성·광주 공장, 서울 한남동 정몽구회장 자택 등 전국을 돌았다. 8일에는 귀국하는 정몽구 회장을 직접 만나기 위해 새벽녘에 인천공항으로 달려갔다.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는 7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4월 27일 지역 연대 총파업을 결의했다. 투쟁은 점차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노조의 투쟁 선포에 놀랐는지, 현대하이스코는 하청업체와 교섭에 노무이사가 참관하는 집중 교섭을 제안했다. 그러나 3월 22일부터 4월 22일까지 4차례 교섭이 있었지만 확연한 입장차만을 확인한 체 진척되지 않았다.

    결단이 필요했다. 4월 19일 새벽 비정규직지회는 다시 한번 공장 크레인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정차장의 말이다. “많은 고민을 했다. 어쨌든 끝을 봐야 했고, 4.27 지역 연대  총파업을 앞 둔 마당에 우리 내부의 결사항전이 필요했다.”    

    2차 점거는 4.19 혁명 기념일에 맞추었다. 1차 크레인 점거 때 밖을 책임진 2선 집행부를 중심으로 33명이 참여했다. 하지만 7시간 만에 경찰특공대와 구사대에 진압돼 전원 연행됐다. 1차 크레인 점거를 당해 본 회사와 경찰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패라 했는데, 농성 대오를 꾸리는 데는 집중했지만 회사 쪽의 준비에 대한 정보는 부족해 조기 진압됐다”고 정 차장은 고백한다. 2차 점거로 차행태 부지회장 등 3명의 간부가 구속됐다. 다행히 정차장은 1차에 이어 2차 점거에서도 불구속으로 풀려났다.

    2차 점거 조기 진압에 이어 4월 27일 지역 연대 총파업은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총파업에 들어간 단위사업장은 자체 임단협과 연계한 캐리어노조 뿐이었다. 선언에 머무는 총파업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천여 명의 간부와 조합원이 모여 경찰의 집회 금지에 맞서 공장 진입투쟁을 격렬하게 벌이며 결사적인 투쟁의지를 확인한 것이었다.  한편 4월 27일 정몽구회장은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결국 구속됐다.
     
    5월 1일 3차 크레인 점거

    4월 투쟁으로 꺾일 것인가? 5일 1일 투쟁으로 이어가 끝장을 볼 것인가 기로에 서게 됐다. 당시 상황에 대한 정차장의 고민을 들어보자.  

    “2차 점거가 진압당하면서 지역에서는 공장 앞에서 단식농성을 들어갔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현대차 본사를 잡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간부와 조합원 대다수가 집행유예로 전과자 신분이었다. 망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고 고민들이 필요했다. 동지들의 아픔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인 된 입장에서 당연히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동지가 있어서 마음을 굳혔다.”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는 3차 크레인 점거를 같이 한 조대익 사무차장이었다.

    2차 점거 때 “풀려나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랐다”는 정차장은 이미 정보과로 현대차 본사를 잡을 것이란 정보가 어느 정도 새 나간 상태였지만 강행키로 했다.

    5월 1일 새벽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에 올라갔는데 경찰과 회사 쪽도 올 줄 알고 대기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안 되는 부분은 창조적으로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결국 정차장과 조대익 차장은 장애물을 헤치고 18층 경비들까지 쇠파이프로 제끼고 125미터 상공의 크레인 점거에 성공했다.

    “크레인에 올라와서 둘이 부둥켜 앉고 눈시울을 붉혔어요. 과연 될까란 의문도 있었지만 한다면 해낸다는 자신감도 있었죠. 새벽 5시더라구요. 지회에 연락해서 성공했으니 오라고 했지요. ”

       
     ▲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 2명이 120m 크레인 위에서 지난 5월 1일부터 농성을 벌이고 있다.(사진 금속노조)
     

    120m 크레인에 올라 부둥켜 안고 울다

    두 사람은 침탈해 대비해 ‘올라오면 죽는다’, ‘확약서 이행하라’, ‘정몽구는 약속을 지켜라’고 신문지, 종이에 적어서 공중에 뿌려됐다. 이렇게 해서 서울 현대차 본사에 확실한 투쟁 거점이 마련됐다.

    5월 1일 순천에서는 7백여명의 노동자가 모여 2차 공장 진입 투쟁을 벌였다. 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트로 설치한 콘테이너가 불타는 등 격렬한 투쟁이 이어졌다.

    한편 1차 점거 투쟁에서 큰 힘을 줬던 가족대책위는 2차와 3차 점거 투쟁에서도 헌신직으로 활동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청와대로 달려가 직접 해결을 촉구했다. 정 차장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가족들이 해줘 큰 힘이 됐고 좋아하는 형수님들이 동지적 입장이 됐다”고.    

    결국 5월 1일 투쟁에 놀란 현대차 그룹은 현대하이스코 부회장이 참여하는 집중 교섭을 제안했다. 5월 2일 교섭이 열려 5월 13일 현대차 본사 ‘진격 투쟁’을 압두고 13일 새벽 5차 교섭에서 합의서를 체결했다. 현대하이스코는 합의서를 통해 △해고조합원 108명을 3단계(2006년 6월 30일까지 30%, 2006년 12월 31일까지 30%, 2007년 6월 30일까지 40%)에 걸쳐 채용하고 △손배소 취하 △자유로운 노조활동 보장과 조합 사무실을 두기로 약속했다.

    정몽구 회장과 같은 감옥에 갇히다

    5월 13일 크레인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서울 구치소에는 이미 비자금 문제로 정몽구 회장이 수감돼 있었다. 사동은 달랐지만 졸지에 ‘적군의 우두머리’와 감방 동기가 된 것. 밥도 안 먹고 혼자서만 지내며 힘들어하는 정 회장을 보면서 연민과 함께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들더란다.

       
     

    감방에서도 돈 없어 숱하게 들어오는 사람을 보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더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는 정차장은 “알아야 발전이 있고,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조합원을 조직할 수 있다”며 학습과 운동으로 맘 편히 감방 생활을 했단다.

    감방에서도 전경들과 싸움을 하는 꿈을 꿔 옆 사람을 때리고, 쟁의 대책을 마련하는 꿈을 많이 꿨다는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렸을 때 “막말로 놀았으면 놀았다”는 그.  요즘 사회 친구들한테 “완전히 미친 놈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변한 모양이다. 그는 “내 생각이 과거보다는 비교적 발전해 있고, 계획을 잡아서 생활하고 있다”며 노동운동에 대한 보람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에 지회 노총각들이 연대투쟁에서 만난 여성동지들과 연인이 되고, 결혼 계획도 잡고 있는데 본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오면 소개시켜 준다더니 감감 무소식이네요. 지금은 여자 친구가 있어도 지회 일에 소홀 할까봐 자제할 것 같아요.”

    있던 연인도 정리해야 할 80년대의 완고함을 가진 이 총각. 하지만 젊은 혈기에 연대투쟁에서 맘에 드는 여성 동지를 보고 있노라면, 지회 동지들한테 “어지간히 눈탱이 돌려라”는 핀잔도 듣는다.

    완고함은 여성에 대한 것만 아니었다. 합의서에 대한 그의 평가는 어떨까?
    “개인적 생각으론 원직복직이 되지 않았고 일시에 복직되지 않아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양보와 타협은 안된다. 이후엔 그렇게 해선 안 된다.”

    투쟁에 대한 그의 완고함이 묻어났다. 지회가 만들어지기 전인 지난해 4월 현장투쟁으로 업체 폐업과 함께 해고돼 세 번에 걸친 결사투쟁을 실천한 목소리인 만큼 그 완고함이 진정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합의서 이행과 현장 투쟁 준비

    합의서 체결 이후 현대하이스코 원·하청 사용자는 1차 복직자에 대해 면접 등을 사유로 6월 30일이 아닌 7월 14일에야 복직시켰다. 하지만 32명 중 10명을 기존 생산 현장이 아닌 경비직으로 채용했고 아직까지 생산직으로 전환하지 않고 있다. 조합 사무실은 지난 10월에 마련해주었지만 하청업체 사무실까지 공장 밖으로 이전하면서까지 공장 밖에 두었다.

    1차 복직자 이후 일부 신규 채용까지 해 노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차 복직자 명단을 발표하면서는 공식 면접도 없이 개별 접촉으로 일관하고 이번에 복직하기 어려운 사람까지 포함시켰다. 합의서 내용을 계속해서 흩트리며 조합원과 노조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대해서도 집단 교섭에 응할 수 없다고 해 교섭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차장은 “저들이 합의서를 깨려 한다면 좌시하지 않겠지만, 밖에서 투쟁을 했기 때문에 공장 안에서 활동은 많은 고민과 인내가 필요하고 전략을 짚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직 차장으로서 조합원 내부를 분열하려는 책동에 맞서 사업장 조합원 모임과 동우회를 단단히 꾸리고 기초 다지기를 꾸준히 해 나가겠단다.

    새해소망을 물어봤다.  새해소망은 민주노총의 투쟁이 끊이지 않고 어려운 현실을 잘 극복해 비정규직 악법과 산재보상법 개정을 무효로 만들어 노동자들이 행복해지는 것라고. 그런데 개인적 소망은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임단투가 잘 돼서 조합을 안착시키는 것이란다.
     
    “안에서 도를 닦는 스님보다 밖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이 더 높은 도를 닦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부심도 있다”는 그의 생각, “동지들에 대한 믿음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온 몸을 바치는 그의 실천을 볼 때, 2007년 새해에도 승리를 만들어가는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투쟁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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