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명 정부 10년동란’은 막아야 한다
    [기고] 윤소영 전 교수의 인터뷰
        2021년 12월 28일 10:05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윤소영 전 한신대 교수가 이끌고 있는 ‘과천연구실’에서 보내온 글이다. <신동아> 2022년 신년호의 인터뷰를 수정 보충한 글이다. 윤소영 전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평가되는 이다. 최근의 정세와 흐름, 대선정국을 포함하여 문재인 정부 5년을 포괄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다. 상당히 근본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에 대해서도, 세간의 비판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비판하고 있다.

    대선 정국과 관련해서는 윤석열 후보에 대한 지지, 이재명 후보에 대한 비판 입장을 뚜렷하게 밝히면서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에 대한 비판, 반대와 달리 국민의힘이라는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는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한다.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 사이에 간극과 거리가 있다는 뜻이며 이후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비교적 긴 글인데, 곳곳에 중요한 토론과 논쟁 지점들이 존재한다. 그간의 진보운동이 외면하거나 회피했던 쟁점들이다. 인민주의에 대한 규정과 그 역사적 연원, 소득주도성장과 기본소득 이론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 미중 간의 전략적 경쟁이 던지는 세계적, 한반도적 의미와 효과, 2022년 3.9 대선의 정세적 함의와 기준점, 소위 586 정치인들이 끼치는 부정적 역할, K-방역의 허구성 등의 쟁점에 대해 선명한 자기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글의 기조에는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소멸 또는 극도로 주변화되면서 지난 문재인 정부 5년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 그 진단 속에서 3.9 대선이 인민주의의 득세와 지배를 견제할 수 있는 계기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또 인민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좌파의 소멸과 무능,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에 대한 회한이 녹아 있기도 하다.

    상당한 논란을 내포하고 있는 글이기에 이에 대한 반론과 비판, 평가의 글은 언제든지 적극 환영한다. 토론과 논쟁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라진 시대이다. 윤소영 전 교수의 이번 글이 외면 혹은 냉소로 끝나지 않고 적극적인 비판과 토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

    이 글은 <신동아> 2022년 신년호에 실린 인터뷰의 원문을 수정‧보충한 것이다. 인터뷰는 2021년 12월 9일 오후 3시부터 100분 동안 과천연구실에서 박세준 기자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신동아>에 실린 것은 박 기자가 ‘기사용으로 고쳐 쓴 판본’(rewrite)이다.

     

    ‘문재명 정부 10년동란’은 막아야 한다

    윤 소 영

    진보주의인가 인민주의인가

    ― 1987년 이후 한국정치에서 보수주의와 경쟁해온 정치이념을 인민주의 또는 포퓰리즘이라고 보셨는데요. 앞서 진보 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도 그런 성격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 먼저 진보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영국식 진보주의 개념과 미국식 진보주의 개념이 아주 다르거든요. 영국에서는 19세기 자유주의가 20세기에 와서 현대화된 것을 진보주의라고 부르는데, 그런 의미에서 진보주의는 보통 사회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19세기 인민주의가 역시 20세기에 와서 현대화된 것을 진보주의라고 부르는데, 그런 의미에서 진보주의는 여전히 인민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진보주의 개념의 차이가 있고, 게다가 이 두 개념이 대결한 적도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러시아혁명사가 그 무대였는데, 그러니까 러시아혁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진보주의자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졌던 셈이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러시아혁명사에서는 사민주의자가 승리했고 그 결과 인민주의자는 소멸했어요.

    물론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인민주의자가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진보주의자는 사민주의적 입장을 취한 반면 어떤 진보주의자는 인민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이고요.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진보주의자 내부에서 사민주의적 경향과 인민주의적 경향 사이의 갈등을 발견할 수 있지요. 인민주의자라는 번역어 대신 영어로 그냥 포퓰리스트라고도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인민주의자란 역사적 계보가 있는 개념이고, 또 역사학에서는 인민주의자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세계적으로 인민주의자가 생존해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특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덕분에 정치적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2005년에 저희 과천연구실에서 집단 작업을 통해 <인민주의 비판>이라는 책을 출판했던 것은 특히 노무현 정부에 와서 인민주의가 본격화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에서였어요.

    정리해보자면, 우선 진보주의자 내부 논쟁이라는 관점에서 인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의 절정기에 군부독재와 대결하는 야권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자가 결집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중심으로 인민주의자가 결집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1980년대 이후에는 김종필 총리를 중심으로 일부 보수주의자까지 결집하여 야권에서 이른바 ‘3김 시대’가 열렸던 것이고요.

    한두 가지 보충해서 말씀드리자면,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을 경쟁자로 존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입장도 마찬가지였고요. 김대중 정부까지만 해도 인민주의자가 자유주의자를 적대시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인민주의자가 자유주의자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시하는 그런 경향이 출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적으로 말해서 인민주의의 기원은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더라도 인민주의를 본격화한 사람은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노 대통령의 인민주의는 정말 극단적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당선 직후에 김 대통령과 결별하면서 김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비서실장을 구속‧수감하여 실명의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지요. 과천연구실이 2005년에 <인민주의 비판>을 출판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어요.

    ― 이전 정부에 비해서 문재인 정부의 인민주의가 심화되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측면에서 그런 판단을 하셨는지 여쭤보겠습니다.

    ― 방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비교했듯이,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도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천연구실이 새로운 집단 작업으로 <문재인 정부 비판>과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을 출판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고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까지도 인민주의는 정치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 와서 그 정치이념이 정치체제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민주의가 한층 더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고요.

    우선 몇 가지 방증을 제시할 수 있는데, 주로 386세대 운동권 출신에 주목할 수 있겠습니다. 아시겠지만 본래 김대중 대통령이 지지한 사람은 이인제 후보였지만, 그러나 노무현 후보가 선출되는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386세대가 크게 기여했던 것인데, 당시의 유명한 구호가 바로 ‘주류 교체’였습니다. 김대중 정부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주류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런 주류를 교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인제 후보가 아니라 바로 노무현 후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지요.

    그러나 막상 당선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386세대에 대해 제동을 걸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86세대는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할 수 있거든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노무현 정부에서 인민주의는 아직까지 정치체제로 실현되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반면 문재인 정부에 와서는 인민주의가 정치체제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한 386세대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는 이미 586세대가 되었던 것이고요. 그 동안 1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적 경험과 경력이 쌓여 그들이 문재인 정부의 주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처럼 386 내지 586세대에게 의존하면서도 자기 뜻과 다를 때는 제동을 걸지 못한 것 같고요.

    이런 맥락에서 노무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과 386 내지 586세대의 관계에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386세대가 노 대통령과 결별하면서 열린우리당이 파산하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노 대통령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586세대가 문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 대통령이 견해 차이를 보이지는 않은 것 같고 설사 견해 차이가 있더라도 제동을 건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재명 후보의 당선을 위해 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얼마간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문 대통령과의 결별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인민주의 비판>의 인민주의 개념과 <문재인 정부 비판>과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의 인민주의 개념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두겠습니다. <인민주의 비판>에서는 인민주의의 최신판으로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나아가 키르치네르 부부 대통령)의 ‘정치가적 인민주의’에 주목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었기 때문인데, 특히 정치의 ‘이미지화’라든지 ‘감정화’가 그것이었지요.

    물론 문재인 대통령이나 이재명 후보에게도 정치가적 인민주의가 있겠지만 오히려 부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인민주의가 단순한 정치이념이 아니라 정치체제로 실현되었고, 이따가 또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정치체제로서 인민주의가 급기야 파시즘으로 타락하는 경향까지 보이거든요. 그래서 <문재인 정부 비판>과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정치가적 인민주의라는 개념은 유보하고 있는 것이지요.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노무현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서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수용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의견이 경제관료가 주장한 것이고 비록 386세대의 정치이념과 배치되는 것이더라도 결국에는 수용했다는 것이지요.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586세대의 주장에 따라 경제관료의 의견을 배척했는데, 그 결과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역시 이번에 대선후보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에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재명 후보가 당선된다면 이런 경향이 심화될 것은 자명한 일이겠고요.

    나아가 문재인 정부에서 인민주의가 심화되었다고 판단하는 근거로서 집권 과정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과정을 586세대가 주도한 ‘촛불혁명’이라고 특징짓는데, 바로 그 촛불혁명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세월호 침몰도 그렇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그렇고, 유례없는 비극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용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 그런 비극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온갖 데마고기를 퍼뜨렸던 사실도요.

    요즘에는 데마고기 대신 ‘프레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과 대조되는 것이 이데올로기 또는 번역하자면 이념이라는 용어이지요. 이데올로기 내지 이념은 반드시 이론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 반면 데마고기 내지 프레임은 그렇지 않아요. 어떤 이론적 근거도 없이 프레임을 구성해서 유포하는 것은 데마고기와 다를 바 없는데, 문재인 정부에 와서 프레임이라는 용어가 횡행하는 것은 정말 걱정스러운 일이에요.

    인민주의가 심화되었다는 판단은 물론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인터뷰의 주제가 되겠지만, 문재인 정부 1년차부터 4년차까지의 주요 정책이 모두 문제인데, 1년차는 소득주도성장(소주성), 2년차는 북한비핵화, 3년차는 검찰개혁, 4년차는 ‘K방역’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인데요. 또 이 모든 정책을 수립하는 데는 주류화된 586세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고요.

    문재인 정부의 주요 정책을 통해 인민주의가 심화되었다는 것이 저희 과천연구실의 주장이고, 그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 비판>이라는 책을 출판했던 것입니다. 1년차부터 4년차까지 문재인 정부의 주요 정책의 인민주의적 지향을 비판하는 동시에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특히 민주노총과 정의당이 왜 그것에 대해 대응하지 못했는가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출판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어요.

    소득주도성장 비판에서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대출 비판으로

    ― 소주성을 일종의 ‘경제학적 사기’라고 비판하셨는데 어떤 근거에서 그런 비판이 가능한지 좀 더 설명해 주시죠.

    ― 처음에는 소주성을 ‘경제학적 문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단순한 문맹, 즉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기의 혐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경제학적 문맹 내지 사기라고 한 것인데요. 간단하게 설명해보면, 소주성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아시다시피 국제노동기구(ILO)에 재직하는 이상헌 박사와 부경대 경제학과에 재직하는 홍장표 교수이지요. 두 사람 모두 제가 알던, 친하게 지낸 적은 없지만 하여튼 알고 지냈던 서울대 경제학과 후배들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긴 한데,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에서 비판해보겠어요.

    이상헌 박사나 홍장표 교수가 처음에 제안한 소주성은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을 배려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저임금노동자를 배려하는 최저임금인상과 결합되었던 것이지요. 제가 볼 때 문재인 정부에서 최저임금인상과 결합하면서도 소주성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긴 하지만 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쉽게 말해서 정책의 수혜자가 저임금노동자로 변경되면서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은 오히려 피해자가 된 셈이거든요.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 측근의 정책그룹에는 경제학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정을 고려해야 하지요. 외국에 정착한 이상헌 박사는 애당초 참여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고, 홍장표 교수의 참여도 아주 늦어서 당선‧취임 직전이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이 박사와 홍 교수의 소주성에서 내용은 기각하고 명칭만 차용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민주노총의 위세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사정도 고려해야 합니다. 민주노총이 연봉 1억원에 육박하는 현대자동차 같은 재벌기업의 고임금노동자에 대한 면피용으로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정책을 제시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본래 사회당 계열 알바생 내지 불안정노동자의 요구였는데, 재벌기업 고임금노동자에 대한 여론의 비판에 직면하자 민주노총이 임기응변으로 수용했던 것 같아요. 하여튼 문재인 정부로서는 홍장표 교수 같은 지식인에 비해 민주노총의 위세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만약 처음부터 최저임금인상을 통한 소득주도성장을 주장했더라면 임금주도성장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더욱이 경제학적으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명칭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임금주도성장이라고 불러야 했던 것이기도 하고요. 임금주도성장을 주장했던 사람이 케인즈의 직계 제자였던 존 로빈슨인데, 이것이 경제학적으로는 아주 기이한 주장이었기 때문에 로빈슨의 주장을 수용하는 경제학자를 케인즈주의자와 구별하여 포스트케인즈주의자라고 부르지요.

    반면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든 막론하고 이윤주도성장을 주장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윤주도성장을 부정한다면 경제학이라는 학문도 존재할 필요가 없거든요. 경제학적으로 볼 때 투자를 위한 저축의 원천은 이윤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임금도 저축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비를 위한 것이에요. 이윤을 저축하여 투자하는 것을 경제학에서는 자본축적이라고 부르는데, 자본축적의 과정은 동시에 기술진보의 과정이기도 하지요.

    쉽게 말해서 경제학자가 볼 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자본축적과 기술진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자 주도의 임금주도성장이라든지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주도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고요. 자본축적과 기술진보가 없는 한 경제성장도 없기 때문이지요. 소득주도성장이라고 하든 임금주도성장이라고 하든 이론적 근거가 없어요. 제가 한신대에서 강의하면서 늘 강조했던 것인데, 문재인 정부가 국민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실험이 바로 경제학적 근거가 박약한 소주성이라는 경제정책이었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처음에는 소주성이 경제학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고 생각해서 경제학적 문맹이라고 간주했었지요. 그러나 소주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된 문재인 정부 2년차 전후로도 소주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결국 소주성도 아무런 이론적 근거가 없는 프레임이자 데마고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이론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돌팔이인 셈이고 알았다면 사기꾼인 셈이고요.

    ―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나요? 소득주도성장처럼 일종의 프레임일 뿐이라고 보시는 것인가요?

    ― 그렇습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역사가 250년이 되었고, 게다가 경제학은 인문학은 물론이고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과도 달리 자연과학과 유사해서 분명한 계보(lineage)가 있습니다. 아까 영국에서는 사민주의가 진보주의를 대표한다고 했는데, 그 원조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19세기 중엽에 밀이 자코뱅주의나 마르크스주의 같은 다양한 혁명이념에 대응하여 고전적 자유주의를 현대화하는 일련의 개량을 제안한 바 있는데,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밀을 최초의 진보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밀에게서 시작한 진보주의는 마셜과 케인즈를 거쳐서 사민주의로 진화합니다. 그런데 밀 이후의 이런 계보를 특징짓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기본소득입니다. 경제학에서 경제의 성장이 멈춘 상태를 정지상태(stationary state, 定常狀態)라고 부르는데, 그런 정지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지요. 쉽게 말해서 기본소득은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제로성장이 마이너스성장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정책이에요.

    밀-마셜-케인즈의 계보를 특징짓는 기본소득은 제임스 미드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미드는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부에서 로빈슨의 최대의 라이벌이었어요. 케인즈의 ‘적자’(嫡子)를 자처하던 로빈슨은 사실 밀-마셜-케인즈의 계보에서 볼 때 정통이 아닌 이단이었는데, 폴란드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칼레츠키의 영향 때문이었지요. 마셜과 케인즈의 시대에는 케임브리지 학파가 세계적으로 경제학을 대표했지만, 그러나 2차 세계전쟁 이후 케임브리지 학파는 쇠망의 길을 재촉했어요. 그런 쇠망의 요인 중 하나가 로빈슨과 미드의 갈등이었고요.

    단적으로 말해서 임금주도성장 내지 소득주도성장과 기본소득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소주성을 더 급진화한 것이 기본소득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기본소득보다 더 급진적인 것이 소주성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어쨌든 소주성을 계승‧발전시킨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주장은 경제학자가 볼 때는 터무니없는 낭설입니다. 경제학자 중에서 드디어 사기꾼이 돌팔이를 도태시키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재명 후보가 기본소득을 넘어서 기본자산을 주장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산을 대표하는 것이 주택이니까 기본주택이라고도 하지요. 기본자산 내지 기본주택은 미드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피케티의 주장이기도 한데, 기본소득론자 중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제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피케티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소주성이나 기본소득보다도 경제학적 근거가 훨씬 더 박약한 피케티의 개인적 주장을 핵심 공약으로 채택한 셈이지요.

    관련해서 한두 가지만 지적해두겠습니다. 나라마다 노동자와 중산층이 선호하는 저축수단이 달라요. 보통 선진국은 증권을 선호하고 중진국이나 후진국은 주택을 선호하는데, 선진국 중에서도 프랑스나 독일이 예외적으로 주택을 선호하고, 중진국 중에서도 대만이 예외적으로 증권을 선호하지요. 문재인 정부는 다주택자를 투기꾼으로 비난하는데, 외국인이 증시를 지배하는 한, 정부가 아무리 위협을 해도 아파트를 팔고 증권을 살 멍청이는 없겠지요.

    최근에 집값이 미친 듯이 뛴 것은 문재인 정부의 주택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인데, 통계를 보면 집값이 항상 뛰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서울에서도 집값이 정체하거나 하락한 때가 있었는데, 특히 1997-98년 경제위기 이후에 그랬지요. 2007-09년 세계금융위기부터 2010년대 초반 유럽연합재정위기까지 그랬던 것에는 이명박 정부의 보금자리주택정책의 효과도 있었고요. 노태우 정부의 1기 신도시정책 성공 이후에도 집값이 뛴 것은 다주택자의 투기 이전에 노무현 정부의 2기 신도시정책 실패와 문재인 정부의 3기 신도시정책 실패 때문이었어요.

    이재명 후보가 기본자산을 기본증권이나 기본코인이 아니라 기본주택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아마 기본증권이나 기본코인 형태의 기본자산을 채택한다면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기본자산이란 결국 기본주택일 수밖에 없고, 대만과 달리 한국에서는 주택이 노동자나 중산층의 저축수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나아가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이재명 후보는 자신의 독창적 발명으로 기본금융을 주장하는데, 물론 저축도 있겠지만 주된 관심은 역시 대출입니다. 이 후보가 며칠 전에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강연을 하면서 부자보다 빈자에 대한 금리가 높은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했어요. 금리 이론에 대한 몰이해를 그대로 드러낸 셈인데, 금리란 중앙은행이 정책적으로 설정한 기준금리에 부도의 위험을 고려한 가산금리(스프레드)가 추가되는 방식으로 결정되기 때문이지요. 부자보다 빈자에 대한 금리가 높은 것은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는 부도의 위험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에요.

    이런 원리를 부정하는 금리이론은 이미 경제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서울대 경제학부생을 앞에 앉혀놓고 이재명 후보는 ‘경제는 과학이 아니다’, ‘경제는 정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후보가 경기도 성남에서 시민운동을 한답시고 이른바 ‘정치경제학’을 귀동냥한 때문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인데, 역시 경제학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대목이에요. 386세대 운동권이 정치경제학이라고 부르던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핵심은 ‘경제결정론’,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다’ 내지 ‘정치의 진리는 경제다’라는 명제이거든요.

    이재명 후보에 따르면, 경제학은 아무런 이론적 근거도 없이 그때그때 여론의 동향에 따라 정치적 필요에 봉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위험한 사고방식이지요. 얼마 전에 이 후보가 김동연 부총리의 후임인 홍남기 부총리를 비판하면서 ‘경제학 교과서는 잊어버려라’라고 강요했는데, 그 배후에 ‘경제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다’라는 사고방식이 있었던 것이지요.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이고 문재인 대통령조차 이런 식은 아니었어요. 물론 문 대통령도 홍 부총리에게 ‘국채 비중 40%의 과학적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질타한 적은 있지만요.

    쉽게 말해서 경제관료가 경제학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경제원리를 잊어버리고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런 맥락에서 이재명 후보의 이른바 ‘기본 시리즈’는 이 후보가 인민주의에서 파시즘으로 한 걸음 더 퇴보할 것이라는 예고인 셈이에요.

    ― 그래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달리 이재명 후보에게서는 파시즘적 경향이 보인다’고 경고하신 것인가요?

    ― 앞으로 3개월 동안 텔레비전 토론을 비롯해서 후보들 간의 정책 논쟁을 좀 더 검토해보고 최종적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이 후보의 ‘파시스트적 기질’은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습니다. 방금 지적한 기본 시리즈와 관련된 망언 이외에도 이 후보는 국민의힘을 ‘도둑의힘’이라고 비난하면서 이준석 당대표는 ‘봉고파직’하겠고 김기현 원내대표는 그에 더해 ‘위리안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야당을 경쟁자로 존중하는 대신 악당으로 처단하겠다는 망언인데, 이런 사고방식에서도 파시즘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지요. 그래서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의 서문에서 그런 경고를 했던 것이고요.

    나아가 기본 시리즈 비판과 연결해서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이재명 후보의 경우를 보면 반(反)지식인적 경향이 한층 더 심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학자에 대한 폄훼는 이미 분명해졌고, 앞으로 3개월 동안 법조인이든 의료인이든 각종 전문가에 대한 폄훼도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야당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 내지 지식인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를 상징하는 만행 중 하나로 ‘분서갱유’를 드는 것이지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말 보수언론 ‘조중동’을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당시 추미애 민주당총재비서실장이 이문열 작가의 발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한국판 분서갱유인 ‘책장례식’을 선동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선례에서도 드러났듯이, 인민주의자의 사고방식에는 반지식인적 경향이 분명히 존재하고, 이런 경향이 우연한 사건‧사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체제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제학 교과서는 잊어버려라’,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다’라는 망언을 전문가 내지 지식인에 대한 폄훼의 예고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3‧9대선의 쟁점으로서 정권교체의 진정한 의미

    ― 문재인 정부가 작년 4‧15총선까지만 해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었다가 그 후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금년 4‧7보선에서는 패배했는데요.

    ― 지난번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도 현실정치에 대해 언급했지만 자세하지는 않았는데, 이번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는 현실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한 이유가 박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현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4‧15총선은 민주당의 ‘대박’이었던 반면 4‧7보선은 민주당의 ‘쪽박’이었다면, 이런 반전 현상은 반드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설명에서 아주 위험스런 어떤 정치적 경향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요.

    아까 진보주의와 인민주의에 대한 개념적 설명을 드렸지만, ‘중도층’에 대해서도 역시 개념적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의 표준인 미국정치에서 중도층은 ‘moderate’이므로 온건층이라는 의미이지요. 중도층이 온건층인 이유는 좌우에 ‘extreme’, 과격파 내지 ‘radical’, 급진파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미국정치에서는 중간에 있는 온건파가 자유주의자이고, 우측에 있는 과격파 내지 급진파가 보수주의자이며, 좌측에 있는 과격파 내지 급진파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이 보통 미국정치를 표준으로 하여 정치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중도층 개념인데,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특히 이번 4‧7보선을 계기로 메이저 언론에서도 이런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중도층은 결국 ‘swing voter’, 부동층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되는 개념은 물론 ‘core voter’, 고정층인데, 우측에는 보수주의자가 있고, 좌측에는 진보주의자라고 불리는 인민주의자가 있지요.

    미국정치에서 중도층은 자유주의자이고 당연히 부동층이 아니라 고정층입니다. 그리고 그런 중도층을 대변하는 정당이 민주당이고요. 반면 우측의 보수주의자 고정층을 대변하는 정당이 공화당이고요. 좌측의 사회주의자 고정층은 민주당에 포섭되는데, 예를 들어 샌더스 상원의원의 지지자가 그런 셈이지요. 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라는 고정층을 토대로 미국의 선거정치가 작동한다는 것이에요.

    반면 한국정치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자유주의라는 정치이념을 견지하는 고정층 대신 경제이익에 충실한 부동층이 중도층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사회주의자 고정층을 인민주의자 고정층이 대체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고요. 4‧15총선이 4‧7보선으로 반전되었다는 것은 사실 부동층으로 인해 선거정치가 오작동한 결과였을 따름이에요.

    놀랍게도 60대 이상만 예외일 뿐 50대 이하에서는 부동층이 대부분입니다. 쉽게 말해서 50대 이하 대부분이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사회주의나 인민주의 같은 특정한 정치이념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신의 경제이익을 기준으로 해서 투표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막걸리‧고무신 선거’가 부활한 것인데, 코로나19의 대유행이라는 비상상황에서 전국민 재난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현금을 살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제가 현실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면서 심지어 윤석열 후보에 대한 지지까지 표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내년 3‧9대선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인데요. 너무 개념에 대한 설명이 많아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정권교체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요. 위키피디아를 보면, 일본에서는 정권교체가 집권여당과 정부의 교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체제전환이라는 뜻이라고 하지요. 체제는 기본적으로 정치체제를 뜻하면서 경제체제를 뜻하기도 하고요.

    3‧9대선에서는 단순하게 집권여당과 정부의 선택만이 아니라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선택도 쟁점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바이든 정부의 정책기조부터 논의를 시작했던 것이지요. 바이든 정부의 출범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제 생각도 좀 더 분명해졌는데, 미중간 ‘전략적 경쟁’이란 결국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경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미중간 전략적 경쟁의 출발은 물론 정치이념의 차이입니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의 정치이념은 당연하게도 민주당의 자유주의이지요. 중국의 시진핑 정부는 말로는 사회주의라고 하더라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래 점차 사회주의를 포기해온 결과 시진핑 정부에 와서는 급기야 권위주의로 퇴보했다고 할 수밖에 없고요.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경쟁을 상징하는 쟁점이 바로 인권인데, ‘일국양제’를 표방하던 홍콩에서의 인권 침해에서 시진핑 정부의 권위주의가 백일하에 드러난 바 있거든요.

    미중간 전략적 경쟁은 물론 정치이념의 차이만이 아니라 정치체제의 차이와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자유주의라는 정치이념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로 실현되고 중국에서는 권위주의라는 정치이념이 독재주의(autocracy, 전제주의)라는 정치체제로 실현됩니다. 시진핑 주석이 3연임을 넘어서 종신집권을 시도하는 것이 그 증거이지요.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를 비판하던 386세대 운동권 출신이 시진핑 주석의 독재를 변호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에요. 하기야 그들은 김정은 위원장의 3대 세습조차 변호하고 있지만요.

    나아가 미중간 전략적 경쟁은 경제체제의 차이와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바이든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수호하려는 것은 민간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입니다. 반면 시진핑 정부가 권위독재주의를 통해 수호하려는 것은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이고요. 최근의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시진핑 정부에서는 세계 10위권 기업인 알리바바와 텐센트의 운명조차 풍전등화일 따름입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독재의 상징으로 재계 10위권 기업인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된 사건을 들곤 했었지요. 그러나 전두환 정부라고 하더라도 삼성이나 현대를 해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진핑 정부는 알리바바와 텐센트를 해체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문재인 정부에 와서 운동권 출신 586세대가 중심이 되어 드디어 주류가 교체되었고, 그 결과 한국에서도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전환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그런 전환의 모델이 시진핑 정부의 중국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문재인 정부만 하더라도 중국 모델을 채택하는 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이재명 후보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후보가 당선된다면, ‘분서갱유’를 하면서 중국 모델을 채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걱정이 들거든요. 물론 저의 기우에 그칠지도 모르겠지만요.

    요컨대 3‧9대선의 핵심 쟁점은 미국과 친화적인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과 친화적인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선택할 것인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윤석열 후보를 당선시켜 자유민주주의와 민간자본주의를 선택할 것인지 이재명 후보를 당선시켜 권위독재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선택할 것인지라는 쟁점이 핵심이에요. 그래서 제가 ‘문재명 정부 10년동란’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요.

    김대중 정부 이후 우리나라에서 인민주의가 심화된 결과 중 하나가 ‘국익’(national interest)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소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미국정치를 보면, 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아무리 치열하게 경쟁하더라도 국내정책이 쟁점이지 대외정책이 쟁점인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 국익에 대한 합의가 있기 때문인데, 그런 것을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트럼프 대통령의 충격은 국익에 대한 합의를 부정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작년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신승했을 때 공화당 지지자 일부가 트럼프 후보가 아닌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고요.

    트럼프 정부에서 예외적으로 국익에 대한 합의가 흔들렸던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국익에 대한 합의가 흔들렸다기보다는 오히려 통째로 없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소주성도 그렇지만 특히 북한비핵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중에서도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데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요. 그렇다면 당연하게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공론화를 거친 다음 국민투표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더라도 대통령일 따름이지 제왕은 아니거든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처음에 소주성을 비판할 때만 하더라도 사실 주저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헌 박사도 그렇고 홍장표 교수도 그렇고 모르던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요. 그래서 경제학에 대한 공부가 부실한 탓이 아닌가라는 의미에서 문맹 내지 사기라는 식으로 비판했던 것인데요. 그러나 북한비핵화를 보면서, 소주성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맹보다는 오히려 사기라는 것이 아주 분명해졌거든요. 돌팔이 경제학자를 대신해서 사기꾼 정치인이 대두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강경화 장관은 물론이고 문정인 교수조차도 하수인일 뿐이었던 것 같은데, 그들을 앞세운 사기꾼 정치인의 실체는 정권이 교체된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나겠지요.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도 그렇고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도 그렇고, 저희 과천연구실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를 ‘친북-연중’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친북은 아주 분명하더라도, 아직 ‘친중’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중국과의 연합 내지 연대를 표방하고 있어요. 그런 것을 외교에서는 ‘제휴’(partnership)라고 하는데, ‘동맹’(alliance)처럼 조약을 체결하지는 않은 우호국이라는 의미이지요.

    반면 동맹국인 미국과는 거리를 두는 입장이므로 ‘비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조약 체결 여부와 무관하게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른바 ‘등거리 외교’를 시도한다는 것이지요. 나아가 ‘반일’이란 일본을 여전히 ‘전범국’으로 취급하면서 적대시한다는 것이고요. 결국 친북-연중의 뒷면은 반일-비미라는 것이고, 반일-비미의 뒷면은 친북-연중이라는 것이에요. 위안부와 징용노동자 편을 들면서 80년대 운동권의 「죽창가」를 듣는 것은 좋은데, 대신 국익과 관련된 이런 쟁점이 있다는 것은 알고서 그러라는 말이에요.

    그 다음에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제기된 것은 물론 ‘조국 사태’,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제기된 검찰개혁이라는 쟁점 때문입니다. 저희도 법에 대해서는 공부한 바가 없기 때문에 새롭게 공부하여 입장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요지는 문재인 정부 비판을 참고할 수 있지요. 문재인 정부는 현재 우리나라의 사법제도를 검찰이 지배하는 ‘검찰사법’으로 간주하면서 그 대안으로 ‘경찰사법’을 제시하고 있어요. 검찰의 권력을 대부분 빼앗아 경찰에게 주었고 심지어 국가정보원의 권력도 일부 빼앗아 경찰에게 주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본래 무관인 경찰이 지배하는 경찰사법이었습니다. 가장 노골적인 경찰사법은 물론 이승만 정부 시절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나 전두환 정부도 결국 경찰사법을 유지했습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비밀경찰인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사법제도를 지배했고, 전두환 정부 시절은 중앙정보부가 세력을 잃은 대신 군부의 비밀경찰인 보안사령부가 역시 사법제도를 지배했거든요. 쉽게 말해서 건국 이후 전두환 정부까지 40년 동안 우리나라를 특징지은 것이 바로 경찰사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노태우 정부에 와서 비로소 문관인 검찰이 조금씩 권력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찰사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사법제도에서 검찰이 복권되기 시작했을 따름이지요. 그 이후의 과정을 보면 대통령이 내무부와 경찰 대신에 법무부와 검찰을 매개로 사법제도를 장악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 같고요. 조국 사태를 계기로 제기된 검찰개혁이란 그나마 점진적으로 중립성이나 독립성을 지향하던 검찰을 애당초 그런 지향이 존재할 수 없는 경찰로 대체함으로써 제왕적 대통령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자신을 발탁해준 문 대통령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는데,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한민국의 검찰총장’이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 아니거든요. 조금 이따가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법치’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제가 윤석열 총장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은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추미애 장관과 갈등을 벌이면서 계속 법치를 강조하고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부터였어요.

    북한비핵화‧검찰개혁 비판에 이어지는 ‘K방역’ 비판

    ― 문재인 정부의 4년차를 특징짓는 ‘K방역’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보시는지요?

    ― <문재인 정부 비판>은 과천연구실의 집단 작업인데, 이 작업을 기획한 것은 K방역을 둘러싼 반전 때문이었습니다. 조국 사태를 계기로 해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회의가 상당히 확산되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굳이 저희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그러나 K방역을 계기로 분위기가 역전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도대체 코로나19는 무엇이고 K방역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1-3년차 문재인 정부의 비판과 4년차 문재인 정부의 비판을 연결시켜본 것이지요.

    K방역을 보통 ‘3T’로 특징짓습니다. 첫 번째 T는 ‘검사’(test)라는 뜻이고, 두 번째 T는 ‘추적’(trace)이라는 뜻이며, 세 번째 T는 ‘치료’(treatment)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3T가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 가장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K방역이 3T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닌데,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장기화되면서 일반 시민도 점차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목하게 되었지요.

    과천연구실이 처음부터 강조한 것처럼, 보건의료위기와 경제위기 사이에는 ‘교환’(trade-off)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보건의료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경제위기를 감수한다는 의미인데, 단적으로 말해서 K방역의 성공을 위해 소주성의 피해자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게 또다시 경제적 손실을 강요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게는 그런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결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생하는 일반 시민을 위로한답시고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여러 차례 살포했던 것 같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과 선별지급을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되었는데, 아마도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를 둘러싼 논란의 연장전으로 오해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미국처럼 손실 여부와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재난지원금은 ‘aid’, 지원이라고 하는 반면 손실 규모에 따라 선별적으로 지급되는 재난지원금은 ‘relief’, 구제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쉽게 말해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aid’와 달리 ‘relief’는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주성을 비판한 윤석열 후보가 ‘relief’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반면 소주성을 기본소득으로 ‘급진화’한다는 이재명 후보가 갑자기 ‘relief’를 주장하는 것은 당황스런 일이지요. 원희룡 지사의 부인이 이 후보를 보고 ‘소시오패스’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저로서는 그 중에서도 ‘리플리 증후군’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소개한 것처럼, 연준(Fed,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의장이었던 버냉키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가 종식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신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K방역의 가장 큰 결함은 백신에 대한 무시 내지 경시였어요. 그럴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인권 침해에 대한 감수성이 낮았기 때문이고요. 최근에 중고등학생에게도 백신을 접종하면서 학생의 인권이 운위되는 상황인데, 그 이전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일반 시민의 인권이 장기간 침해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경제적 희생이 장기간 강요되었던 것이고요.

    아까 경제학적 문맹 내지 사기에 대해 설명했었는데, 그런 사이비 경제학자가 돌팔이이고 사기꾼입니다. 그리고 그런 돌팔이 경제학자나 사기꾼 경제학자를 중용한 것이 386세대 정치인인데, 그들도 역시 돌팔이 정치인이나 사기꾼 정치인이지요.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 와서는 경제학계에만 돌팔이와 사기꾼이 출몰하는 것이 아니라 법조계나 의료계에서도 돌팔이와 사기꾼이 출몰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설명한 돌팔이‧사기꾼 경제학자는 차치하고, 정치인 중에서도 돌팔이‧사기꾼의 정체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한국정치에서 인민주의 문제는 1997-98년 경제위기를 기화로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입니다. 김 대통령 덕분에 70학번대인 이해찬 대표나 유시민 작가를 비롯해서 386세대 운동권이 대거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물론이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드러나지 않던 돌팔이‧사기꾼 정치인이나 그들에게 부화뇌동하던 돌팔이‧사기꾼 경제학자의 정체는 문재인 정부에 와서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돌팔이‧사기꾼 정치인이나 돌팔이‧사기꾼 경제학자의 정체는 이렇게 한 세대가 지나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돌팔이‧사기꾼 의료인이나 법조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문재인 정부가 중용한 의료인이 돌팔이나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이미 ‘위드 코로나’의 실패로 폭로되기 시작했습니다. 3‧9대선을 4개월여 앞둔 11월부터 ‘K방역의 피로감’ 때문에 일반 시민이 감염위험을 감수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활용한 일종의 ‘생체실험’이 바로 위드 코로나였지요.

    위드 코로나가 실패한 이유는 단지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이바이러스의 발생을 예측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초기에 보급된 백신 대부분, 특히 60세 이상의 고령층에게 접종한 백신 대부분이 아스트라제네카라는 ‘물백신’이었다는 데 있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와 접종률이 비슷한 일본에서는 요즘 신규확진자가 100명 안팎이고 사망자는 1-2명인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에 보급된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가 아니라 화이자와 모더나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청와대 비서관을 거쳐 국정상황실장으로 중용된 서울의대 이진석 교수나 청와대 방역기획관으로 중용된 국립암센터 기모란 교수를 컨트롤 타워로 하는 방역당국만이 K방역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K방역의 실패는 세월호의 침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정권교체 여부와 무관하게 차기 정부에서 K방역의 실패에 대해 추궁할 것이고 이 교수나 기 교수가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겠지요. 북한비핵화나 소주성 같은 경우는 쉽지 않을지 몰라도 K방역은 반드시 그 실패의 책임을 추궁할 것 같아요.

    검찰개혁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권이 교체될 경우, 추미애 장관이나 박범계 장관은 반드시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검찰에 개입한 것이 바로 ‘Obstruction of Justice’이거든요. 보통 ‘수사방해’라고 의역하는데 ‘사법방해’라는 직역이 더 정확하겠지요. 비록 법무부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검찰이란 사법제도의 일부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추 장관이나 박 장관이 검찰의 수사를 방해한 것이 곧 사법을 방해한 것이고요.

    추미애 장관의 사법방해는 조국 사태를 둘러싼 추-윤 갈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박범계 장관의 사법방해에 대한 설명만 추가해두겠습니다. 한국판 ‘공안위원회’로 각광을 받았다가 ‘아마추어’를 자처하면서 자멸하는 중인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고요. 저는 ‘대장동 사태’로 인해 이재명 후보가 낙마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을 방지하려는 박 장관의 사법방해 내지 선거개입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대장동 사태의 본질이 이재명 후보의 대선출마를 위한 정치자금조달에 있다는 것은 저 같은 문외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추미애 장관과 박범계 장관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정치보복이 아니라, 권위독재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처인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 책임은 문재인 대통령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문 대통령이 추 장관이나 박 장관에게 수사방해 내지 사법방해를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추 장관과 박 장관이 이낙연 후보가 아닌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것도 아마 문 대통령의 타협적 태도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을 계기로 친문이 분화되었다는 관측이 제기되었는데,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이인제 후보를 지지했던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이낙연 후보를 지지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또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386세대를 중심으로 김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이 있었던 것처럼, 혹시라도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586세대를 중심으로 문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만약 이낙연 후보가 선출되었다면 윤석열 후보로서도 얼마간 어려운 선거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윤석열 후보의 지지자와 이낙연 후보의 지지자 중에 겹치는 부분이 꽤 있거든요. 또 오늘 저처럼 ‘문재명 정부 10년동란’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얼마간 설득력이 감소했을 것 같고요. 나아가 이낙연 후보가 당선되든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후보는 문 대통령이 지지한 사람이고, 윤 후보는 철저한 법치주의자이기 때문이지요.

    ― 이낙연 후보가 선출되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 것으로 보시나요.

    ― 이낙연 후보는 기본적으로 ‘온건한’ 친문을 대변하고 이재명 후보는 기본적으로 ‘과격하고’ ‘급진적’인 친문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재명 후보와 달리 이낙연 후보가 조국 교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 이런 사실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이낙연 후보는 비록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로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합리적 기준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몇 가지 실책은 정정하고 만회하려고 시도했을 것 같아요.

    김대중 대통령이 발탁한 이낙연 후보는 제 장인과 동향인 전남 영광 출신이고, 최민희 의원이 ‘비판’한 것처럼, 광주일고와 서울법대를 나와 20여년 동안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래서 친문 온건파로서 합리적 기준을 견지하는 것이고요. 반면 이재명 후보는 검정고시출신으로 중앙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개천의 용’이에요. 따라서 친문 진영을 분열시킬 수 있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면모를 과시하면서 별다른 합리적 기준 없이 좌충우돌하는 것 같고요.

    그런데 방금 리플리 증후군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이 후보의 문제는 그 스스로 ‘자학(?)하듯이’ ‘비천한 출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유학적 전통이 유구했고,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운동권에서는 출신보다 오히려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특히 집안이 가난하거나, 고향이 두메산골이거나, 심지어 안 좋은 학교를 나왔어도, 끊임없이 ‘자기향상’(self-betterment)을 위해서 노력하는 마음이 바로 유학자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하는 교육의 본질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향상심’으로 출신의 결함, 즉 집안과 고향과 모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통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최민희 의원에 의해 광주일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것이 민주당 후보로서 결격 사유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에요. 그렇다면 민주당 후보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처럼 고졸자이든지 이재명 후보처럼 검정고시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인가요. 최민희 의원이 해온 망언 중에서 이낙연 후보에 대한 이런 비방이 압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

    ― 그런데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다면, 국민의힘이나 보수주의 정치를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시는 것인가요?

    ― <문재인 정부 비판>의 주제가 문재인 정부의 1년차부터 4년차까지의 주요 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는 그 대안이 윤석열 정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작년부터 저는 윤석열 후보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검찰총장 시절의 윤 후보에게 배운 것은 검찰개혁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법치라는 사실이었어요. 당시 윤 후보는 영어로 ‘rule of law’와 ‘rule by law’를 구별하여 설명하곤 했지요.

    실제로 제가 법학사를 공부해보니까 ‘rule of law’, 즉 법의 지배는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법치, 즉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의미에서의 법치였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통치의 주체가 법이라는 것이에요. 반면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서 추미애 장관이나 박범계 장관이 말하는 ‘rule by law’, 즉 법에 의한 지배에서 법은 통치의 주체가 아니라 수단일 따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민주의자가 말하는 법치, 즉 ‘만 명만 법 앞에서 더 평등하다’인데, 조국 교수를 옹호하면서 윤석열 후보가 ‘피아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비난한 것이 그 증거였지요.

    법의 지배와 달리 법에 의한 지배의 역사는 사실 유구한 것입니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상앙이 대표한 법가가 말하는 법치가 바로 그것이거든요. 법가의 법치에서 통치의 주체는 진시황 같은 제왕이고 그 수단이 바로 율령(律令, 형법과 행정법)이라는 제정법이지요. 문재인 정부의 법치에서도 역시 통치의 주체는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제왕적 대통령이고 그 수단이 형법‧행정법을 비롯한 다양한 제정법이고요.

    그래서 윤석열 총장에게 법치라는 개념을 배우면서 이 사람이 보통 검사가 아니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올해 초 검찰총장을 사퇴한 다음 그의 언행을 추적하고 또 그에 대한 책이 나오면 사서 읽었습니다.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대로, 윤 후보가 공부를 진척시키면서 단지 법치만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교체 자체가 문제라는 점을 점차 깨달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또 그런 과정에서 소주성이 왜 문제이고 북한비핵화가 왜 문제인가라는 점 역시 점차 깨달아갔다는 사실도요.

    윤석열 후보와 국힘 사이에 가장 커다란 차이가 바로 정권교체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힘의 의원이나 지지자 일부는 정부 내지 집권여당의 교체가 기본 목표입니다. 반면 윤석열 후보에게는 자신이 국힘의 후보로 당선하여 국힘이 집권여당이 된다는 의미에서 윤석열 정부의 출범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검찰총장에서 사임하고 4개월 만에 대권에 도전하면서 결국 체제의 선택이 쟁점이므로 윤석열 정부의 출범에는 국힘의 혁신과 동시에 ‘국민전선’의 형성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윤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만일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다면, 일차적으로 반일-비미적 성향은 약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말해서 친미-연일적 성향이 강화되어 자유민주주의와 민간자본주의로의 지향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고 저는 이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반북-비중의 성향이 강화될 것 같지는 않아요. 한국의 처지가 일본은 물론이고 대만에 비해서도 취약해서 노골적으로 반북이나 비중을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에요. 대신 친북-연중의 성향은 상당히 약화되어 권위독재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로의 지향은 자유민주주의와 민간자본주의로의 지향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겠지요.

    나중에 운동권과 관련해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과 윤석열 정부에 대한 지지는 다르다, 윤석열 정부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등등의 주장은 정말 한가하고(idle) 너무 안이한(easy)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정세는 실로 엄중한데, 우리나라가 중국 같은 체제를 지향하는가 아닌가라는 것이 쟁점이거든요. 심지어 북한과의 ‘일국양제’를 지향하는가 아닌가라는 것도 쟁점이고요. 만일 이재명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의 파시스트적 기질로 볼 때, 이런 쟁점에 대한 국민적 합의 없이도 친북-연중-비미-반일 성향을 한층 더 강화시킬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문재명 정부 10년동란’은 막아야 한다는 의도 내지 목적에서 개인적으로 윤석열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게 된 것입니다. 윤 후보에 대한 지지는 사실 과천연구실 전체의 입장도 아니에요. <문재인 정부 비판>과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 실린 글들은 일일이 그 저자를 다 밝혔는데, 윤 후보에 대한 관심이나 지지는 다른 연구원들이 쓴 글이 아니라 제가 쓴 글에서 표명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주십사 하는 부탁의 말씀이에요.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는 원칙적으로 선거정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보통선거는 부득이하더라도 평등‧직접‧비밀선거는 문제가 아주 많거든요. 그래서 과천연구실은 대선에 참여한 적이 없는데, 이전에도 몇 번 밝힌 것처럼, 일부러 대통령 선거일에 맞추어 MT를 갔던 것은 이런 사실과 관련되었던 것이지요. 마르크스주의자는 선거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과천연구실도 대선을 거부했던 셈이에요. 물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닌데, 이런 것을 신독(愼獨,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음)이라고 하지요.

    다만 저로서는 단 한 번 대선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1987년에 김대중 후보에게 투표했거든요. 당시 다른 연구원들은 투표권이 없는 미성년자여서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었고요. 제가 이번에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 것은 그 때 김대중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비록 인민주의의 광풍에는 휩쓸리지 않았더라도 역사 앞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이라는 인민주의자를 지지한 잘못을 범했으니까 이번에 윤석열이라는 보수주의자 내지 자유주의자를 지지함으로써 그런 죄과를 상쇄하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제가 앞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겠다거나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다음에도 계속 이런 책을 쓰겠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 데 대한 속죄는 차치하고서,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위험스럽기 때문에 이번에 제 입장을 밝혔던 것이에요. 또 일반 시민이나 운동권에서도 저의 이런 입장에 대해 좀 더 숙고해 주면 좋겠다는 뜻에서 오늘 박 기자님의 인터뷰 요청에도 응했던 것이고요.

    ―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은데요.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씀인데, 그럼 당시에 누구를 지지하는 것이 옳았다고 보세요?

    ― 최근에 한국지식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김성수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창당, 그 이전에 경성방직의 창업과 동아일보의 창간과 고려대학교의 창학, 이런 역사적 공적이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판단과 함께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민주의적 해석의 폐해를 절감했는데, 친일과 반일이라는 잣대에 의해 김성수 선생 같은 자유주의자를 단죄했거든요. 그런 자유주의자에는 저희 해평 윤씨의 문장(門長,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윤치호 선생도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두겠어요.

    어쨌든 김성수 선생의 한민당을 계승한 것이 민주당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주당 구파로 계승되었는데, 그 구파를 대표한 사람이 바로 윤보선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었지요. 반면 민주당의 신파는 한민당에 합류하여 민주당을 출범시키는 데 일조한 흥사단과 자유당탈당파였는데, 그 신파를 대표한 사람이 바로 장면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이었어요. 윤보선 대통령이 윤치호 선생을 잇는 해평 윤씨의 문장이라는 사실도 역시 밝혀두겠고요.

    돌이켜보면 마르크스주의자로서든 해평 윤씨의 후손으로서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해야 마땅했는데, 김대중 후보를 잘못 지지했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했던 까닭은 당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경상도 출신 중심의 ‘후보 단일화파’(후단파)보다는 오히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 전라도 출신 중심의 ‘비판적 지지파’(비지파)에게 공감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당시 저는 30대 초반으로 아직 어려서 세상을 잘 몰랐던 데다가 제가 지금도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는 박현채 선생이 김영삼 후보가 아니라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신 까닭도 있었고요.

    만일 1987년에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면, 논란이 되었던 ‘3당합당’을 통하지 않고서도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훨씬 더 완벽한 정치적 정당성을 갖고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시도하여 하나회를 해체하여 쿠데타의 가능성을 근절한 데 더해서 1997-98년 경제위기 같은 비극도 예방하여 문민화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는데, 박 기자님의 질문을 받고 즉흥적으로 대답해본 것이에요.

    ―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면 진보 정부를 지지할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요.

    ― 그러나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러시아혁명 이래 진보주의자 내부에서도 인민주의자와 사민주의자의 대립이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 사민주의자 내부에서도 ‘합법마르크스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립이 존재했는데, 전자는 개량주의를 주장하는 이단파였고 후자는 혁명주의를 주장하는 정통파였지요. 또 마르크스주의자 내부에서도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대립이 존재했는데, 전자는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분리했고 후자는 양자를 결합했어요.

    저는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를 따르고 정치적으로는 레닌을 따릅니다. 이런 것을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거든요. 러시아혁명사에서 사민주의와 대결하던 인민주의는 물론이고 스탈린의 인민주의도 비판하는 저로서는 저의 또 다른 스승인 알튀세르를 따라 마르크스와 레닌의 후예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간단하게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든가요. 레닌은 마르크스의 수제자이거든요.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자코뱅의 인민주의를 비판한 데 이어서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는 스탈린의 인민주의를 비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계기로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하면서 제가 처음으로 공부했던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소련사회주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부를 통해 레닌에게서 스탈린에 대한 대안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런 레닌의 정치적 대안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알튀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던 것이고요.

    이준석 대표와 김종인 위원장에 대하여

    ― 이준석 대표는 법치주의보다는 오히려 능력주의를 좀 더 강조한다는 느낌인데요.

    ― 윤석열 후보가 선출된 다음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이준석 대표나 김종인 위원장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는데, 저는 윤 후보와 이 대표나 김 위원장의 차이가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 대표가 지원하던 홍준표 후보나 유승민 후보가 선출되었다면, 저로서는 그들을 지지할 생각은 ‘1도’ 없었습니다. 또 앞으로 김 위원장과 윤 후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면, 당연히 김 위원장이 아니라 윤 후보를 지지할 생각이고요.

    윤석열 후보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법조인이 진보주의자 내지 인민주의자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경우 법치주의에서 일탈하여 준법성(legality)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후보가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보수주의자라는 데 그의 장점이 있지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언젠가 노벨상을 수상할 것이 확실시되는 경제학자가 애쓰모글루 교수인데, 2012년에 출판된 그의 대표작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 국역: 시공사, 2012)가 윤 후보의 애독서라고 합니다.

    애쓰모글루 교수의 소속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표자였던 새뮤얼슨 교수가 재직하던 매서추세츠공과대학(MIT) 경제학과인데, 바로 이곳이 보수주의 경제학의 대표자이자 새뮤얼슨 교수의 경쟁자였던 프리드먼 교수가 재직하던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와 쌍벽을 이루어 왔지요. 어쨌든 애쓰모글루 교수의 가장 중요한 주장 중 하나가 자본주의가 경쟁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포용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본주의를 ‘포용적 자본주의’(inclusive capitalism)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고요.

    이번에 제가 아주 심하게 비판한 바 있지만, 이준석 대표는 정말로 문제가 많습니다. 박 기자님의 질문에 국한하더라도 이 대표는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대표가 말하는 능력주의는 자신의 표현대로 ‘정글의 법칙’이자 ‘약육강식의 원리’일 따름이에요. 이 대표가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복수전공했다는데, 하버드대학 경제학과를 대표하는 맨큐 교수가 애쓰모글루 교수보다 보수적이라고 해도 이 대표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대표가 말하는 능력주의는 사실 19세기 영국의 사회진화론일 따름이거든요.

    [인터뷰 직후에 이재명 후보가 샌델 교수와 화상대담을 가졌다. 이 후보는 보수주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샌델 교수의 능력주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예를 들어 수능을 ‘대입추첨제’로 대체하는 데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와인개스트 같은 자유주의 정치학자의 ‘정치경제론’(political economy)은 정치학의 이론적 근거를 철학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모색하는데, 당연히 애쓰모글루 교수와 친화적 입장이다. 이준석 대표식의 능력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대안과 보수주의적 대안이 존재한다는 말인데, 이미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와인개스트는 윤석열 후보도 관심을 갖는 모종린 교수와 협력하여 한국사회에 대한 정치경제론적 분석을 제시한 바 있다.]

    그 다음에 김종인 위원장도 보수주의자입니다. ‘경제민주화’를 주장한다고 해서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면 착각이지요. 게다가 김 위원장도 역시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보수주의자입니다. 이번에 선대위 총괄위원장에 취임하자마자 김병준 상임위원장을 비판하면서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의 논쟁은 불필요하고, 시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국가는 아무것도 안 하는 자유주의는 잘못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정말 엉뚱한 주장이에요.

    역시 제가 자세하게 정리해둔 것처럼, 김종인 위원장은 독일에서 경제학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경제학계에서 독일식 경제학은 주변적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앵글로색슨의 학문이고 독일이나 프랑스를 대표하는 학문은 반(反)경제학적 지향의 사회학이기 때문이지요. 김 위원장이 배운 독일식 경제학은 비스마르크에게서 비롯된 국가 주도의 코퍼러티즘 또는 좀 더 간단하게 말해서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민주당과 달리 국힘은 국가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김병준 위원장의 발언에 반발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윤석열 후보는 김종인 위원장이 아니라 김병준 위원장에 공감할 것이 분명합니다. 김종인 위원장의 의원내각제론도 정치인과 달리 국민은 대통령제를 선호한다면서 거리를 두었고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후보의 선대위에서 김종인 위원장이나 이준석 대표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현실정치란 선거정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김 위원장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유권자가 있고, 이 대표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유권자가 있기 때문이고요. 어차피 윤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만으로는 역부족이고 김 위원장이나 이 대표의 영향권에 속하는 유권자까지 다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이든 대통령의 경우에도 여론조사는 낙승을 예상했으나 투표결과를 보면 신승이었습니다. 윤석열 후보의 경우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결국 선거 막판에는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가 쟁점으로 제기될 것인데, 그래서 윤 후보와 이 대표나 김 위원장의 갈등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그러나 선대위의 구성과 달리 안 후보와의 단일화에서는 윤 후보가 이 대표나 김 위원장에게 양보할 것 같지는 않고요.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 사이에 단일화가 성공하는 반면 이재명 후보와 심상정 후보 사이에 단일화가 실패한다면, 이 후보에 대해 윤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지겠지요. 그런데 이 후보와 심 후보의 단일화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정의당의 존립 기반이 완전히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난 4‧15총선을 앞두고 검찰개혁과 선거법개정을 교환했던 패착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에요.

    민주노총과 정의당에 대하여

    ― 남한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주의 때문에 타락했다는 것은 역시 민주노총 비판이었지요?

    ―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광주항쟁을 계기로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알튀세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관점에서 스탈린을 비판했는데, 가장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노동자주의(workerism)였지요.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사익(私益)을 국민 전체 또는 인류 전체의 공익(公益)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반면 스탈린은 노동자의 사익 그 자체를 추구했지요. 레닌처럼 비판하자면, 노동자의 ‘계급적 이익’(class interest)을 ‘직업적 이익’(craft interest)과 혼동했던 셈이에요.

    나아가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womanism)가 아니라고 말이에요. 페미니즘이 남녀 평등에서 출발해서 여성의 고유성 옹호에 이르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남녀 갈등을 조장하지는 않습니다. 윤석열 후보의 설화 중 하나로 ‘건강한 페미니즘’을 요구한 사실을 들기도 하는데, 저 역시도 같은 요구를 할 것입니다. 페미니즘은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여성주의에서 탈피하여 좀 더 건강해져야 한다고 말이에요.

    러시아혁명사를 공부해보면, 마르크스주의를 노동자주의와 여성주의로 퇴화시킨 사람이 바로 스탈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탈린이 독재를 했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레닌이 기각한 평등‧직접‧비밀선거를 수용한 사람이 스탈린이거든요. 그 정도로 스탈린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엄청났고, 게다가 소련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랬습니다. 나중에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고 또 소련이 쇠망하면서 스탈린이 점차 악당화된 것이지요.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자 푸틴은 오히려 스탈린을 복권시켰어요.

    스탈린은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와 여성을 중심으로 인민주의를 현대화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실증적으로 해명한 사람이 쉴라 피츠패트릭인데, 그래서 소련학에서는 그녀의 주장을 수정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다 ‘전체주의자’로서 독재를 했다고 주장해왔거든요.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스탈린에 대한 노동자와 여성의 대중적 지지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해명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튀세르는 프랑스공산당원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스탈린주의의 본질은 노동자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었어요. 물론 알튀세르가 여성주의도 비판한 것은 아닌데, 그래서 제가 뤼스 이리가레라는 페미니스트에게 주목했던 것이고요.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에서 스탈린의 인민주의를 비판하면서 386세대 운동권이 민족해방파(NL)든 민중민주파(PD)든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와 혼동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노동자주의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되었고, 심지어 여성주의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노동자주의의 관점에서 자본가를 악당으로 여기게 되었듯이,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남성을 악당으로 여기게 되었고요.

    그런데 상대방을 악당화하는 것이 바로 인민주의의 특징입니다. 알튀세르의 제자로 이미 언급했던 발리바르가 엥겔스를 비판한 적이 있어요. 말년의 엥겔스가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없어도 좋은 잉여계급’(superfluous class)이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러나 ‘착취자’로서 자본가에게 고유한 기능이 있다는 것이지요. 소주성을 비판하면서 지적한 것처럼, 저축과 투자를 통해 자본축적과 기술진보를 수행하여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 바로 그런 기능이에요.

    이렇게 자본가의 사익과 국민 내지 인류의 공익이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이론이 경제학이고 자유주의는 이런 경제학을 근거로 하는 정치이념인 것입니다. 반면 마르크스는 그런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국민 내지 인류의 공익과 노동자의 사익의 조화를 추구하는데, 공산주의라는 정치이념 아래 그런 이론적 주장을 실현하고자 시도했던 사람이 바로 레닌이지요. 그래서 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레닌의 공산주의로 설정하는 것이고요.

    요컨대 민주노총과 정의당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권과 과천연구실 사이에 형성될 수 있는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결국 러시아혁명사, 특히 스탈린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과천연구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따라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복권을 시도해온 것이고 운동권에서는 그런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쟁점에 대한 맹목으로 일관해온 것이지요. 요즘 인민주의 지식인이나 운동권 일각에서는 중국 모델을 넘어서 시진핑 주석을 추종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같은데, 저희가 볼 때는 ‘블랙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진보연대와 전국학생행진에 대하여

    ― 마지막 질문으로, 사회진보연대나 전국학생행진 등 운동권 일각에서 <문재인 정부 비판>과 <재론 문재인 정부 비판>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면서 좌파의 선택은 정권교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아마 이번에 박 기자님이 제게 인터뷰를 제안하신 것도 이 문제와 관련될 것 같고, 지난번에 경향신문에서 저와의 전화 인터뷰를 인용한 것도 역시 이 문제가 발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이나 정의당을 비롯해서 운동권 전체가 ‘촛불혁명’에 광범위하게 동참했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거나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데 아주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와중에 운동권 일각에서 과천연구실의 집단 작업을 일부 원용하여 정권교체를 주장했으니 파문이 일 수밖에요.

    문재인 정부 초기의 핵심 정책, 예를 들어 1년차의 소주성이나 2년차의 북한비핵화에 대해 운동권에서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1년차에서 2년차로 넘어가는 2018년 봄에 제가 이른바 ‘위안부 스캔들’에 휩쓸렸을 때 과천연구실이 사회진보연대와 전국학생행진에게 공동 대응과 함께 문재인 정부 비판을 제안한 바 있지요. 그러나 두 단체는 운동권의 상황과 내부의 이견을 핑계로 이런 제안을 거부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갑자기 저와 과천연구실에 동조하는 듯한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견해 차이가 크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쉽게 말해서 문재인 정부 비판과 달리 그 대안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거든요.

    운동권 일각에서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거나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이 후보 지지는 정권재창출에 동참하는 것이니 논외로 하고, 심 후보 지지만을 평가해보겠어요. 심 후보 지지를 통해서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것은 공염불일 따름이지요. 심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제로일 뿐만 아니라 설사 당선되더라도 문재인 정부나 이재명 정부와 무엇이 다를지 저로서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요. 정의당이란 본질적으로 ‘민주당 2중대’이거든요.

    물론 운동권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이재명 후보나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사회진보연대나 전국학생행진이 그렇지요. 쉽게 말해서 무당파라는 것인데, 이 역시 한가롭고 안이한 입장일 따름이에요. 오히려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여 정의당의 득표율을 조금이라도 높여서 다음 선거를 도모하는 것이 좀 더 책임 있는 태도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거든요.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무당파적 입장을 견지할 경우에는 사실 문재인 정부를 비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면 우호적 비판에 멈추어야 하는데, 러시아혁명사에서는 이런 것을 ‘비판적 지지’(critical support)라고 불렀지요. 조국 사태를 계기로 운동권 일각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것도 이런 수준이었고요. 운동권으로서는 역시 문재인 정부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촛불혁명에 동참한 이상 그 귀결인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도 ‘연대책임’(joint responsibility)을 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지요.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