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부채탕감 실행은
    아래 아닌 기득권 향하나
    [기고] <청년부채운동의 방향>토론회를 다녀와서
        2021년 12월 27일 0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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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12월 23일) 굉장히 재밌고 의미 있는 토론회가 있었다. 광주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가 청년부채를 주제로 전국 순회토론회를 기획했었는데 그 마지막 토론회를 서울에서 개최한 것이었다. 주제는 <청년부채운동의 방향>이었다.

    이 토론회는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첫째,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에서 활동하는 단체와 활동가들이 전국을 순회하며 청년부채의 현황과 정치·정책적 과제를 논하며 대단원의 막을 서울에서 내리는 방식이었다는 것. 둘째, 약 12년 동안 악전고투를 경험했던 청년부채운동의 역사가 거의 처음으로 정리되어 발표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청년부채운동의 과제로 이제까지 본격 검토되지는 않았던 ‘부채탕감운동’이 소개, 주장되었다는 것이다.

    4차에 걸쳐 전국을 순회했던 이 의미 있는 토론회는 종이 자료집을 만들지 않고 파일로만 배포했다. 아래 링크에서 전체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청년부채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꼭 다운 받아서 살펴 보시기 바란다. (토론회 자료집 링크)

    마지막 토론회 영상은 1부, 2부로 나눠져 유튜브에 업로드되어 있다. (유튜브 링크)

    사회운동단체 ‘전환’의 왕복근 활동가는 미국 청년부채 탕감운동을 소개했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사회정책의 실패로 양산된 청년들의 부채, 특히 학자금부채가 야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정책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에 참여한 일군의 활동가들이 내린 결론이었다고 소개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지난 미국 대선에서 이 문제가 정치의 의제가 되었고, 바이든은 이 문제의 해결을 약속했다.

    미국 활동가들은, 청년부채의 탕감도 중요하지만 청년들의 악성부채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사회구조 개혁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육의 비용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지는 나라라면 학자금부채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취지다.

    대선에 나선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국공립대학부터 등록금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도 같은 생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토론회 말미에 부채탕감 운동의 사례가 왜 우리나라에는 없는가 하는 이야기가 잠시 나왔는데 제대로 짚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부채탕감이나 그것을 주장하는 운동이 있었다. 이 역사를 기억해내고 오늘에 맞게 다시 되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내가 아는 범위에서 기록해 보고자 한다.

    1894년 갑오년에 봉기한 동학군은 전주성을 함락하며 세상을 바꾸는 듯했다. 그러나 조정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톈진 조약에 의해 일본군이 출동하고 말았다. 동학군과 조선조정은 외세를 물리기 위해 협정을 맺었는데, 이때 동학군은 ‘폐정개혁12개조’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요즘 말로 하면 12대 적폐청산을 조건으로 휴전하자는 것이었다.

    그 12가지 조건 중 11번째 조건이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는 것이다. 공채는 주로 조정이나 지방조정에 대한 농민들의 부채였을 것이고, 사채는 양반계급에 대한 배고픈 농민들의 채무였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의미 있는 부채탕감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집행되었다는 기록과 평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탈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차관 제공을 통한 경제적 예속이 그 중 하나였다. 1907년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조선이 일본에 진 차관부채 1,300만원을 국민들이 대신 갚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착복 논란이 일어 실패했다. 이 운동은 우리가 고민하는 청년부채 탕감운동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대규모의 기업채무를 탕감한 적이 있다. 1972년 8·3조치가 그것이다. 정확한 명칭은 ‘경제의 안전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었다. 당시에는 기업들은 은행이 아니라 사채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었다. 박정희는 경제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채동결조치, 즉 채권자들이 그 자금의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채권 회수를 못한다고 결정했다. 이 조치로 제일제당, 제일모직, 현대건설, 금성(LG), 대한항공, 효성물산 등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농가부채 탕감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1989년 농민들의 대규모 상경투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989년 보라매공원에 모여든 농민들의 핵심요구 중 하나가 정부 정책의 실패로 쌓인 대규모의 농가부채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고, 이것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때 김대중 후보가 농가부채 탕감을 주장한 근거였다. 전두환이 기업부채 7조원을 탕감한 적이 있는데, 왜 농민부채는 방치하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8년 재연된 농민들의 대규모 상경투쟁 주요 주장이 농가부채탕감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는데 이걸 보면 이 약속이 순탄하게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IMF 금융위기 당시 정부는 기업의 연쇄 도산을 막기 위해 기업에 대출을 내준 시중은행들에 공적 자금을 투입했었다. 이때 투입된 자금 규모가 무려 168조였다. 이 공적 자금은 당연히 회수 대상인데 지금까지도 회수하지 않은 공적자금이 무려 51조원에 달한다. 작년 말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은 홍남기 기재부장관에게 51조원에 대한 회수계획을 물었지만, 정부는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에 홍남기 장관은 ‘원래 이런 채권은 회수에 시간이 걸린다’고 답변했다.

    다시 말하면 사실상 정부는 은행과 기업을 위해 투입된 대출금 중 51조원에 대한 회수계획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공식화하지만 않았을 뿐 기업부채 탕감을 실시한 것이다.

    확인하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채탕감’은 그 자체로 도덕적 해이나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경제 운용 과정에서 정책적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주장하거나 실시할 수 있는 일이며, 우리 역사에서 여러 차례 실시된 바 있다.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것은, 부채의 탕감이 왜 항상 기득권 세력들, 경제적 최상층을 향해서만 실시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2018년 발표에 의하면 2017년까지 한국장학재단의 장기연체 부실채권 규모는 2,180조원이다. 물론 발표 시점으로부터 3년이 지났으므로 부실채권 규모는 더 늘었을 것이다.

    이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왜 기업부채 51조는 탕감해 주면서, 청년학자금 부채 2180조는 회수되어야 하는가? 왜 청년들의 삶은 저당 잡혀도 되는가? 이것이 정의인가?

    나는 이번 토론회에 참여하고 우리나라 사회적 경제 분야의 큰 어른이신 송경용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여러 가지 유익한 가르침을 받았다. 심상정 후보와 정의당에 대한 과분한 격려의 말씀도 주셨다. 정의당이 잘 해야 한다는 말은 함축적이었지만 책임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신부님께 밥도 얻어 먹었고, 여러 권의 책 보따리도 선물받았다.

    그 중 ‘가난한 사람들의 선언’이라는 ‘마농지’ 출판사의 책이 있었다. 숙소에 와서 서문을 펼쳤다.
    마음을 사로 잡는 말이 있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딱 이것이었다. 닥터 노먼 베순의 말이었다.

    “자선은 철폐되어야 한다. 대신 그 자리에 정의를 세워야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 박근혜, 한명숙의 사면과 복권 소식이 있었다. “무엇이 정의인가?”

    필자소개
    정의당 심상정 선대위 상임공동선대위원장. 전 관악구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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