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엽 쌓인 뒷산 오솔길
    [낭만파 농부] 겨울은 더 깊어가고
        2021년 12월 23일 01: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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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산을 타고 왔다. 그러니까 나흘 만인가, 닷새 만인가? 별일 없으면 날마다 하던 짓인데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으로 그새 쉬었더랬다. 접종 뒤 며칠 동안은 무리하거나 심한 운동을 삼가라는 지침 때문이다.

    앓고 있는 ‘기저질환’이 도질 기미를 보이면서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유산소운동’ 차원에서 집 뒷산을 꾸준히 오르던 터다. 마을을 ‘좌청룡-우백호’로 두른 산자락 능선을 따라 30분 남짓 돌아오는 코스다. 야트막하지만 높낮이가 뚜렷해 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에너지 소모가 큰 편이라 운동 효과가 없지 않았다. 땀으로 목욕을 하는 바쁜 농사철이야 달리 운동이 필요 없으니 건너뛰고.

    초겨울이라선지 오솔길에 쌓인 낙엽을 아직은 샛노란 솔가리에 덮여 있다. ‘길’이란 느낌이 너무 뚜렷해 어디론가 이끌릴 것만 같다. 프로스트는 노랗게 물든 두 갈래 숲길을 놓고 ‘사람이 덜 다닌 길’을 선택했지만(<가보지 않은 길>) 여기는 외길이다. 유산소 운동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래도 이 오솔길이 지루하게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철을 따라 식생이 바뀔 뿐만 아니라 숲속을 흐르는 공기와 흩어지는 소리, 스며나는 냄새가 그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낙엽 쌓인 뒷산 오솔길

    실은 숲의 풍광 때문만은 아니다. 30분은 ‘찰나’일 수도 있지만 때로 ‘억겁’이 되기도 한다. 억겁은 아닐지언정 숱한 상념이 넘나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의식이란 순풍을 타고 잔잔히 흐르기도 하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꼬이기도 한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오리무중에 빠질 때도 있다.

    오늘 낮에 읽기를 마친 <낭만주의의 뿌리>(이사야 벌린)가 그랬다. 이 꼭지를 맡으면서부터 ‘낭만주의’에 꽂히게 됐다. 18세기~19세기를 가로질러 유럽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그 사상적 흐름 말이다. ‘낭만파 농부’를 자처하고 보니 이 낭만이란 게 그건가 싶어서였다. 그때 그때 손에 잡히는 대로 파고들었지만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다. 한 문장이 반 페이지를 채우는 이사야 벌린의 만연체처럼 종잡을 수 없기도 하다. 사실이 그렇다 하니 그런가보다 넘어가는 수밖에.

    그렇게 가닥을 잡으며 좁은 길목을 지날 무렵 나는 보았다. 올무에 목이 졸린 채 널브러져 있는 고라니 사체를. 개체 수가 너무 늘었다 하고, 심심찮게 로드킬 당한 놈들을 지나치기도 하지만 막상 숲에서 맞닥뜨리고 보니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지난 주말에 이웃 마을 내외분과 저녁을 함께 했더랬다. 내게 논배미를 내주고 편의를 봐준 것에 감사하는 자리였다. 알고 보니 그 남편 분, 사냥이 취미란다. 그러면서 수확철 농작물 피해를 막으려 야생동물을 퇴치하는 ‘유해조수 구제단’으로 활동한다고. 이런저런 무용담을 신나게 풀어놓는데 기분이 묘하다. 사실 나만 해도 텃밭 푸성귀들을 고라니의 ‘드넓은 밥그릇’으로 바치고, 벼이삭 익어가는 논배미를 멧돼지에게 짓밟혔던지라 ‘퇴치’ 당해 싸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죽은 고라니의 흡뜬 눈을 바라보자니 꼭 저래야 하나 싶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날 저녁식사 자리는 저 교살된 고라니를 마주치기 전이었고 기분 좋게 끝났다. 식당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겨 따끈한 뱅쇼 한 잔을 곁들여 ‘아름다운 마무리’를 주제로 수다를 풀다가 밖으로 나오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수북이 쌓여가는 눈 때문인지, 적당히 오른 술기운 탓인지 쉽사리 취흥이 가라앉지 않는 거라. 가로등에 비친 창밖 풍경을 이윽히 바라보노라니 불현듯 떠오르는 싯귀.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그래, 깊은 산골도 아니고 오막살이(마가리)도 아니고 나타샤도 없지만 함박눈 펑펑 내리는 밤에 산 언저리에서 창을 내다보며 소주를 마시고는 있지 않은가. 그러면 되었지. 그랬었다.

    반환점을 돌아 산을 내려오는 사이 그 고라니는 내 의식에서 싹 사라졌다. 어제 만해도 응달쪽에 잔설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싹 녹았다. 그래도 이 겨울은 깊어갈 것이다.

    눈 오는 밤 창밖 풍경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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