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 너머의 창포, 석창포
    그리고 꽃창포의 민속적 실체(3)
    [푸른솔의 식물생태] 어떤 주관적 욕망 너머의 것
        2021년 12월 15일 01: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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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 너머의 창포, 석창포 그리고 꽃창포의 민속적 실체(1)
    욕망 너머의 창포, 석창포 그리고 꽃창포의 민속적 실체(2)

    [5] 식물분류학의 전래 시기와 우리의 민속에 대한 곡해

    1. 식물분류학의 전래와 식물명의 정착에 대한 곡해

    (1) 주장 내용

    “우리나라에서 학명과 국명을 같이 표기하기 시작한 Mori(1922)의 An Emueration of Plants Hitherto Known from Corea에 석창포라는 국명에 A. gramineus를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이후 Murata(1932), Chung et al.(1937) 등도 이러한 견해를 따랐고, 오늘날까지 이어졌기(Choi, 2011) 때문으로 풀이된다. Mori(1922)가 어떤 근거로 잎맥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수창포’나 ‘계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잎맥이 있는 종류로 보고된 ‘석창포’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Mori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신현철 외, 「식물명 창포와 석창포의 재검토」, 한국식물분류학회지 제47권2호(2017), 157쪽 참조.

    위 식물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 식물학자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가 저술한 『조선식물명휘』에서 A. gramineus를 ‘석창포’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정태현(1882~1971) 외 3인이 저술한 『조선식물향명집』(1937) 등이 이러한 견해를 따랐기 때문에 옛 문화에 대한 왜곡이 발생했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13. 창포; 2017/6/4/ 경기도 양평

    사진14. 석창포; 2018/5/12/ 전남 강진

    (2) 『조선식물명휘』와 약재 사용에 대한 민속 조사에 대한 왜곡

    사진15. 모리 다메조(森爲三), 『조선식물명휘』, 조선총독부(1922), 78쪽

    사진15에서 보듯이 모리 다메조의 『조선식물명휘』에서 A. calamus에 대한 조선명을 ‘창포(Changpo)’로 , A. graminues에 대해 조선명을 ‘셕창포'(Sokchangpo)로 하고 약재로 사용하는 식물이라는 뜻으로 ‘藥'(약)으로 기록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모리 다메조의 『조선식물명휘』에서 A. gramineus를  ‘‘石菖蒲'(석창포)로 기록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위 식물학자의 주장은 사실일까?

    앞서 살펴 보았듯이 위 식물학자가 인용한  ‘Jo et al., 2013’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의학에서 사용되는 석창포는 대한민국약전외한약(생약) 규격집(KHP)와 일본약전(JHP)에서 석창포(A. gramineus Solander)를, 중국약전(CP)에서 중국석창포(A. tatarinowii Schott)를 기원종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약전(藥典)은 각국의 정부가 한약재의 기준서를 정한 것이고, 현재 ‘중국식물지'(영문판 및 중문판 포함)에서는 Atatarinowii를 이명처리하고 A. gramineus로 통합하여 분류하고 있으므로, 위 인용된 논문 ‘Jo et al., 2013’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본 및 중국 모두 약재명 ‘石菖蒲 ‘(석창포)의 기원식물을 A. gramineus로 보아 약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된다. 실제로 동북아 3국의 약전을 살펴 보아도 이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결국 위 식물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1922년 당시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사이었던 모리 다메조라는 일본인이 지은 식물분류명집 하나가 동북아 3국의 약전을 결정한 것이 되고, 동북아 3국이 모두 이 모리 다메조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결과가 된다. 도대체 한의학, 역사와 민속을 어떻게 읽으면 이러한 내용을 정평있는 과학 논문집에다 버젓이 게재할 생각을 하며, 그러한 내용이 무비판적으로(!) 실릴 수 있을까?

    또한 위 식물학자가 모리 다메조의 『조선식물명휘』가 우리나라(!)에서 학명과 국명을 표기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한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우리나라’를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일제 식민 당국-그것을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인지?-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과 조선인들이 부르는 식물명을  수차례 조사했는데  이때 일제와 일본인들은 조선명이 있는 경우에 한해 조선명을 기록한 것일 뿐 우리나라에서 학명에다 국명을 표기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조선식물명휘』를 살펴 보아도 한반도 분포 식물로 기록된 많은 종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선명이 존재하지 않고, 그 수가 조선명이 기록된 경우보다 더 많다는 점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제 식민 당국은 이미 강제합병이 시작되기 전인 1910년 5월에 『화한한명대조표』에서 주요 수목에 대해 학명과 조선명을 조사 기록한 바 있고, 1912년과 1915년에도  3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 고시로 『조선주요삼림수목명칭표』를 발표하고 여기에서도 학명과 국명을 함께 기록하였다. 동경제국대학의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 한반도 분포 식물을 조사한 『제주도 및 진도 식물 조사보고서 』(1914)와 『지리산 식물 조사보고서』(1915)에도 일본어(히라가나)로 표기되기는 했지만 학명에 대응한 조선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외 1922년 이전에 일본인 식물학자에 의해 한반도 분포 식물에 대해 학명과 더불어 조선명을 조사하여 기록한 여러 문헌들이 있다. 모리 다메조의 『조선식물명휘』는 학명과 국명(?)을 표기하기 시작한 것이라 아니라 이러한 기존의 조사 기록을 종합한 것이며, 그 범례(凡例)에는 그러한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위 식물학자의 일제강점기의 문헌 조사와 고찰이 얼마나 허술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위 식물학자는 『조선식물명휘』에서 왜  A. gramineus에 대해 석창포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기술했지만, 이 또한 그가 얼마나 옛 문헌에 대해 허술하게 조사하고 고찰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식물명휘』의 범례와 참고 문헌에는  당시 조선에서의 약료식물에 관한한 이시도야 츠토무(石戸谷勉, 1891~1958)가 저술한 「조선의 산야에서 생산하는 약료식물」(조선휘보, 1915.3.)를 참고하였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시도야의 「조선의 산야에서 생산하는 약료식물」에서는 ‘菖蒲 石菖蒲 셕챵포’라는 이름으로 약재로 사용하는 식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진16. 이시도야 츠토무(石戸谷勉,),「조선의 산야에서 생산하는 약료식물」, 『조선휘보』, 조선총독부(1915.3.)

    이시도야는 ‘菖蒲 石菖蒲 셕챵포’라는 이름을 약재로 사용하는 기원식물(원료식물명)에 대해 일본명으로  ‘セキシヤウ'(石菖)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학명으로는  A. gramineus에 해당하는 종이다. 이시도야는 이후 1917년에 『조선한방약료식물조사서』(조선총독부)라는 책을 다시 편찬했는데 이때에는 창포 또는 석창포라는 이름으로 약재로 사용하는 식물은 A. gramineus라고 학명을 명기하였다.

    사진17. 이시도야 츠토무(石戸谷勉,),『조선한방약료식물조사서』, 조선총독부(1917)

    그런데 위 이시도야의 「조선의 산야에서 생산하는 약료식물」이라는 글은 그 서언을 읽으면 단순히 우리의 옛 문헌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채집하여 식물분류학에 따라 분류된 표본과 대전, 대구 및 경성지방의 약재시장(약령시)에서 실제로 유통되는 한약재를 대조하여 위와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옛문헌의 石菖蒲(석창포)를 A.gramineus라고 본 것은 당시 조선의 주요 약재 시장에서 실제 거래되는 약재를 기준으로 판별한 것이고, 이는 당시의 한약재의 사용과 민속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과학적 자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위 식물학자는 중국 송나라 때의 『본초도경』에 실린 “今藥肆所貨, 多以二種相雜, 尤難辨也”(지금은 거리낌없이 약재로 파는데, 대부분 두 종을 섞은 것이니, 더욱 판별하기 어렵다)라는 문구를 상기하겠지만, 이시도야는 식물학(농학)을 전공하였고 1911년부터 조선에서 식물의 식별과 식재 등에 관한 업무를 했으며, 그는 조선과 중국의 본초학에 관심이 많아 이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의 약리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그가 특별히 식별을 잘못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모리 다메조가 『조선식물명휘』에서 창포와 석창포에 대해 기록한 것은 이러한 이시도야의 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어떠한 근거로 기록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니다. 그 기록의 근거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위 식물학자가 이러한 자료를 조사하지도 검토하지도 않고 논문을 적었을 뿐인 것이다.

    (3) 『조선식물명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사진18. 하야시 야스하루·정태현 공저,『조선산 야생약용식물』,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1936). 42~43쪽

    사진19.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26쪽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식물학자 정태현(1882~1971)은 당시의 주요 약재시장이었던 대구, 대전, 평양 및 경성(서울)의 약재시장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일본인 하야시 야스하루(林泰治, ?~?)와 공저로 하여 『조선산 야생약용식물』(1936)에 실어 발표하였다. 이 내용은 앞선 이시도야의 연구보다 보다 구체적인데 한자명 石菖蒲(석창포)로 하여 대구, 평양 및 대전의 약재시장에서 거래되는 식물은 A. gramineus이며 이는 남부의 산지 계곡의 물가에 산다는 것이다. 또한 菖蒲(창포) 또는 白菖(백창)으로 불리우는 식물은 A. calamus이며 전국의 늪지 수변에 살며 경성(서울)의 약재시장에서 약재로 거래되는데, 치조(治燥), 온산제(溫散劑) 및 두풍(頭風)에는 사용하지만 석창포와 달리 소아총명(小兒總明)의 목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으며 단오절에 잎을 끓여 머리를 감는데 이용하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것이 식물분류학이 도입되어 정착되기 이전에 당시 우리의 주요 약재시장에서 확인되는 실제 약재 사용의 실태이며, 그 조사 결과에 따라 『조선식물향명집』에 A. calamus는 ‘장포’로, A. gramineus는 ‘석장포’로 반영되었고 그것이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식물향명집』은 1937년에 조선인 식물학자들이 식물분류학에 따라 새로이 분류 인식된 식물 종에 대한 우리말 이름(조선명)을 찾고자 편찬한 것으로, 식물 이름을 모아 정리한 식물명집이다.

    참고8 :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장포’와 ‘석장포’는 당시 실제로 사용하는 방언형으로 이후 표준어의 변화를 반영하여 1949년에 편찬된『조선식물명집』에서 ‘창포’와 ‘석창포’로 개칭하였고, 그것이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현재 우리가 A. calamus를 창포라고 하고, A. gramineus를 ‘석창포’라고 부르는 것은 모리 다메조의 『조선식물명휘』에서 잘못 기록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발생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조선식물명휘』는 이시도야가 조선의 약재시장을 조사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고, 이를 다시 『조선산 야생약용식물』에서 전국적인 약재 시장의 실제 거래 상황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반영한 것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2. 꽃창포라는 이름의 유래와 민속

    처음에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식물분류학에 따르면, 붓꽃과 붓꽃속의 식물인 Iris ensata에 대한 국명을 ‘꽃창포’라고 부르고 있다. 말 그대로 꽃이 아름다운 창포를 닮은 식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처음에 품어 본 의문처럼, 왜 붓꽃과의 붓꽃속 식물에 창포라는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런데 I. ensata에 ‘꽃장포'(꽃창포)라는 이름을 최초로 기록한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물학자에 의해 편찬된 『조선식물향명집』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의 범례에 따르면 저자들이 기존의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조선명이 없거나 동일한 명칭으로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에는 어두어미에 형용격의 단어를 추가하여 새로이 이름을 만들고, 이를 책의 말미 색인에 밑줄로서 이를 표시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식물향명집』 말미의 조선명 색인의 꽃장포에 관한 부분을 찾으면 ‘장포’로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결국 이것은 장포(창포)라는 전통적 명칭에 ‘꽃’이라는 형용격을 추가하여 저자들이 새로이 만든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장포’는 창포에 대한 방언형이다.

    『조선식물명휘』과 『조선식물향명집』은 I. ensata에 대한 당시의 일본명을 ノハナシャウブ(野花菖蒲)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들에서 자라는 꽃창포(ハナ)라는 뜻이다. 우리의 전통 명칭에서 I. ensata라는 종에 대한 명칭으로 ‘꽃창포'(또는 꽃장포)로 사용한 것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신칭된 ‘꽃장포’에서  형용격 ‘꽃’은 일본명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20.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 최양식 옮김, 『한국의 들꽃과 전설』, 선인(2014), 177쪽

    한편 창포(장포)라는 이름이 붓꽃속 식물에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옛 기록이 있다. 미국인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Florence Hedlestone Crane, 1888~1973)은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전라남도 순천에 정착하여 1931년에 자신이 관찰한 한국의 꽃들에 대한 수채화를 그리고 한국명(조선명)이 있는 경우 이를 한자와 한글로 표기하여 기록한 『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한국의 꽃들과 민속)이라는 책을 남겼다. 이는 이후 『한국의 들꽃과 전설』이라는 명칭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여기에서 프로렌스는 현재의 꽃창포(I. ensata)에 대한 조선명을 ‘챵포, 菖蒲’로 기록하였다. 이는 1931년 당시 전라도 지방에서는 꽃창포를 ‘창포 菖蒲’로 인식하고 부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사진21. 국립수목원, 『한국의 민속식물』, 국립수목원간(2017), 1357쪽

    또한 최근 국립수목원에서 10여년에 걸쳐 전국의 식물에 관한 민속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충북 지방에서는 꽃창포(I. ensata)를 창포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즉, 우리의 민속에 붓꽃속의 꽃창포를 ‘창포’로 인식하는 문화가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앞서 언급한 조선인 식물학자 정태현이 1936년에 편찬한 『조선산 야생약용식물』, 247쪽에는 조선에서 약용하지 않는 식물 중의 하나로 붓꽃과(鳶尾科)의 붓꽃(I. sanguinea, メ)에 대한 한자명을 ‘溪蓀'(계손)으로 기록한 것이 있다. 모리 다메조가 편찬한 『조선식물명휘』(1922), 99쪽 역시 I. sanguinea(= I. sibirica)의 한자명을  ‘溪蓀'(계손)으로 기록하였다. 이 역시 『동의보감』(1613) 및 『물명고』(1824) 등에  ‘菖蒲'(창포)라는 표제하에 ‘水菖蒲'(수창포)라는 식물과 같거나 함께 척(脊)이 없는 것으로 기록된  ‘溪蓀'(계손)을 우리 민속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했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며 유의미한 기록이다.

    3. 소결론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리가 과거가 돌아가 그 시대의 상황과 인식을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재 확인되는 위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옛 사람들의 인식을 추정할 수는 있다. 붓꽃과 붓꽃속(Iris)는 붓꽃, 꽃창포, 각시붓꽃, 금붓꽃 등 다수의 종이 있으며 어떤 종의 분포지는 창포(A. calamus)와 일치하며, 또 어떤 종은 석창포(A. gramineus)와 비슷한 지역에 분포한다. 그런데 꽃이 피기 전 옛 본초학서에서 5월경 약재나 식용 등에 사용하는 창포속(Acorus) 식물은 잎과 뿌리를 채취하는데, 그 시기에 뿌리와 잎의 형태만으로는 창포속 식물과 붓꽃속 식물과 식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옛적에는 붓꽃속 식물의 일부에 대해서도 이를 (넓은 의미의) 창포로 보고 함께 논의를 했으며, 脊(척)이 없다는 것은 이러한 식물을 분리하여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옛 문헌에서 ‘菖蒲'(창포)의 일종으로 언급된 溪蓀(계손)을 붓꽃속의 식물로 이해하고, I. ensata를 창포의 일종으로 보는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를 추정할 수 있는 증거이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6] 식물명 변경을 주장하는 제안에 대한 검토

    위 식물학자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옛 문헌의 내용과 민속에 대한 여러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곡해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이 ‘확인’되었다며 식물이름 변경에 대한 여러 제안을 하고 있다.

    1. 약재명으로써 창포에 관한 제안에 대한 검토

    A. calamus(수창포라는 국명을 사용함)의 효능이 A. gramineus(석창포라는 국명을 사용함)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보고도 있어(Choi, 2011), 약재명으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수창포, 석창포, 창포 등의 개별 식물명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창포’를 약재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 신현철 외, 「식물명 창포와 석창포의 재검토」, 한국식물분류학회지 제47권2호(2017), 158쪽 참조.

    이게 무슨 뜻일까?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중일 3국의 약전은 모두 약재명 ‘石菖蒲'(석창포)에 대한 기원식물을 A. gramineus(또는 그와 같은 종으로서 Atatarinowii)로 보고 이를 약재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명칭을 ‘창포'(菖蒲)로 고치고 석창포와 더불어 창포까지 포괄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가 A. calamus의 효능이 A. gramineus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보고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한약재로 사용하는 식물의 종을 A. gramineus뿐만 아니라 A. calamus까지 포함하여 사용하는 뜻이 아닌가? 이런 제안을 성분 분석과 임상실험 등 한의학에 필요한 재실험을 행하지 않은 식물학자가 주장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나름의 논거를 들고 있으므로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위 식물학자가 창포라는 약재명에 창포속의 여러 식물명을 포함하여 사용하라는 내용의 제안을 하는 근거는 ‘Choi, 2011’이라는 논문이다. ‘Choi, 2011’은 최고야, 『창포류 약재의 종별 감별 및 효능 비교』, 우석대학교대학원 한의학과 박사학위논문(2011)이다.

    먼저 위 식물학자는 이 논문에서 A. calamus에 대한 국명을 수창포로 사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Choi, 2011’를 살펴보면 “한약재 유통과정에서 석창포와 동속종이며 한약명이 ‘水菖蒲’인*5) 창포(Acorus calamus L., : 중국명 ‘菖蒲’)가 유사종으로 유통되기도 하며”라고 기록하여 식물의 국명이 아니라 한약명이 ‘수창포’라는 내용이다. 그것도 중국 전체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주 *5)로 표시된 부분을 따라 가보면 중화본초위원회, 『중화본초』, 상해과학기술출판사(상해, 1997) 8권, 468쪽의 기재 내용에 따라 표시했다는 것이다. 왜 A. calamus라는 종에 대해 국명을 ‘창포’로 사용하지 않고 중국에서 편찬된 『중화본초』에 기재된 한약명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Choi, 2011’, 4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즉, ‘창포류 약재의 종별 감별과 효능 비교’를 위해 실험재료로 사용한 A. calamus가 국내산이 아니라 중국산 1점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어 중국의 문헌에서는 사용하는 약재명으로 표시한 것이다.

    참고9 : 『중화본초』는 중국의 ‘국가중의약관리국’에서 1997년 편찬에 한 것으로, 7615쪽에서 ‘水菖蒲'(수창포)의 기원식물을 A. calamus로 기록하였고, 7617쪽에서는 ‘石菖蒲'(석창포)의 기원식물을 A. tatarinowii(=A. gramineus)로 기록하였으며, 그 둘은 서로 약성이 다른 것으로 보았다.

    게다가 ‘Choi, 2011’은 국내산 석창포, 중국산 석창포, 중국산 창포(수창포) 및 소위 ‘九節菖蒲'(구절창포, Anemone altaica)의 형태 감별과 효능을 비교하기 위한 논문으로 그 결론(V.요약, 63쪽)을 살펴보면, 기존의 약성을 나타내는 주 성분인 베타 아사론(β-asarone)과 알파 아사론(α-asarone)의 항산화 효능에서는 “(국내산) 석창포, (중국산) 수창포, 중국석창포, 구절창포의 순으로 일관된 활성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약전이나 다른 문헌의 약성 분석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Choi, 2011’은 중국산 창포(수창포)에 대한 창포류 물 추출물의 시험관에서의 ‘항에세틸콜린에스테라제 활성’을 비교한 결과에서는 “수창포의 효능이 상대적으로 높아 약용가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고 기록했다. 이것이 위 식물학자가 “A. calamus의 효능이 A. gramineus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보고”로 든 근거이다. 그것도 자신이 이미 인용한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함량에서 이와 같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채취시기, 채취장소, 생장 년수와 제조 및 가공공정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한 차이라고 추측한다”[조지은 외, 「UPLC-PDA를 이용한 창포류의 분류 및 함량분석」, 『한국식물과학회지』 제45권3호(2013), 281쪽 참조]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중국에서 채취한 창포(A. calamus) 1점을 실험대상으로 전체도 아닌 일부 약성에 대한 효능에 대한 언급만으로 창포가 석창포보다 효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명칭과 그 사용하는 식물의 종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의적인 인용과 근거의 제시가 과연 과학(식물분류학)이기는 한 것인지, 위 식물학자 스스로 위 논문에서 한 “창포처럼 약재명과 식물명이 혼용해서 사용한 경우에는 더욱  더 유의해야만 할 것”이라는 주장과 걸맞지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할 뿐이다.

    2. 창포와 수창포라는 국명 제언에 대한 검토 

    위 식물학자는 한의학의 약재명에 대한 명칭뿐만 아니라 식물학에서 사용하는 국명도 변경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창포처럼 약재명과 식물명을 혼용해서 사용한 경우에는 더욱 더 유의해야만 할 것이다. 단지 과거에 사용했던 이름과 현재 사용하는 이름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잎맥이 발달한 A. calamus는 국명으로 “창포”를, 잎맥이 발달하지 않는 A. gramineus는 과거에 잎맥이 발달했던 식물로 간주했던 석창포라는 국명 대신 “수창포”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영문판 중국식물지에서도 석창포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이한 것으로 풀이된다.” – 신현철 외, 「식물명 창포와 석창포의 재검토」, 한국식물분류학회지 제47권2호(2017), 158쪽 참조.

    먼저 영문판 ‘중국식물지’에 대한 논의부터 살펴보자. 영문판 ‘중국식물지’ 어디를 살펴도 옛 명칭과 혼선이 있기 때문에 석창포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언급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1997년에 편찬이 완료된 중문판 ‘중국식물지’에서는 창포속(Acorus) 식물로 A. calamus(菖蒲), A. gramineus(金錢蒲)와 A. tartarinowii(石菖蒲)라는 3종이 중국에 분포하는 것으로 기록했으나, 2013년에 편찬이 완료된 영문판 ‘중국식물지’는 A. gramineus(金錢蒲)와 A. tartarinowii(石菖蒲)가 같은 종으로 판정하고 둘을 통합하여 선취권이 있는 학명인 A.gramineus만을 정명(correct name)으로 기록하고  A. tartarinowii를 이명(synonym)으로 처리하였다. 그에 따라 식물 1종당 오로지 하나의 중국명을 표시하는 영문판 ‘중국식물지’는 A. gramineus에 대한 중국명으로 ‘金錢蒲'(금전포)만을 표시하였다. 그것이 전부이다. 옛 명칭의 혼선 문제가 아니라 식물 종에 대한 분류학적 견해의 변화를 반영한 것 뿐이다.

    金錢蒲(금전포)라는 이름도 16세기 명나라 때에 편찬된 『본초강목』에서 石菖蒲(석창포) 중에서 식물체가 보다 작아서 뿌리의 길이가 2~3푼이고 잎의 길이 1촌 정도인 것을 전포라고 한다(甚則根長二三分, 葉長寸許, 謂之錢蒲是矣)는 중국의 역사를 계승한 것이다. 만일 옛 이름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石菖蒲(석창포)라는 이름을 피했다면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관여하는 중화인민공화국약전[Pharmacopoeia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015 edition, 2015. (China)]에서 여전히 A. tartarinowii를 ‘石菖蒲'(석창포)로 보아 약재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또한 앞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의 옛 문헌 중 19세기의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약용하는 것은 ‘石菖蒲'(석창포) 종류이며, 18세기에 저술된 『산림경제』의 「치약」편에 따르면, 수창포(수창)은 잎이 창포와 유사하지만 등골뼈가 없고 약으로 사용하지 않는 식물(水菖葉相似而但中心無脊 不堪入藥)이었다. 그외 달리 우리의 옛 문헌에서 수창포를 약재로 사용한다고 기록한 문헌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약전을 비롯하여 주요 한의학 문헌은 우리의 옛 문헌에서 기록된 石菖蒲(석창포)에 대한 기원식물을  A. gramineus로 약재로 사용하고 있으며, 산지 돌틈에서 자라고 뿌리가 작으며 마디가 촘촘하다는 내용은 모두 현재의 석창포(A. gramineus)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에 와서 왜 A. gramineus를 수창포라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옛 사람의 생각이 현재와 같다는 비합리적 가정으로 잎맥(leaf vein)=중맥/중륵(main vein/midrib)=척(脊)이 모두 동일한 개념이라는 왜곡된 시각으로 옛 민속과 기록을 살피니 스스로 혼란스럽게 인식되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반추할 일이 아닌가?

    3. 창포와 석창포라는 명칭에 관한 또 다른 제안에 대한 검토 

    위 식물학자는 몇해 전에 펼친 옛 문화와 민속에 관한 실제와 다른 주장을 넘어 최근에는 매우 기이한 주장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동의보감』에는 창포(菖蒲)의 우리말 이름이 셕창포로 되어 있다. 창포와 석창포가 같은 식물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창포에는 Acorus calamus라는 학명이 석창포에는 Acorus gramineus라는 학명이 붙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모리부터 시작된 분리 운동이 이시도야를 거처 정태현 등의 『조선식물향명집』에서 마무리되었나 보다…(중략)…흐미. 석창포라는 이름을 떼어내서 창포에 다시 붙어 주어야만 할 것이다. 잠시 이별했던 식물 이름을 다시 합해주어야만 한다.” – 위 식물학자의 facebook 글 중에서.

    먼저 『동의보감』에 기록된 한글 명칭은 ‘셕창포’가 아니라 ‘셕챵포’이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옛 문헌을 얼마나 주의없이 인용하고 살피는지를 볼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위 식물학자가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동의보감』의 「탕액편」에서 기록된 ‘菖蒲'(창포)에는 2종류가 있다고 언급한 스스로의 주장을 뒤엎는 내용이라는 점이다(실제로는 7종류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즉, 『동의보감』의 「탕액편」에서 기록된 ‘菖蒲'(창포)라는 표제는 1종류 식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창포를 열거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하나가 한글로 ‘셕챵포’로 부르는 식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셕챵포’는 “性溫一云平, 味辛, 無毒. 主開心孔, 補五藏, 通九竅, 明耳目, 出音聲. 治風濕㿏痺, 殺腹藏蟲, 辟蚤虱, 療多忘, 長智, 止心腹痛“[성질이 따뜻하고 평하다고도 한다 맛은 매우며 독이 없다. 심(心)의 구멍을 열고 오장을 보하며, 구규(九竅)를 통하게 하고 눈과 귀를 밝게 하며, 목소리가 잘 나오게 한다. 풍습비를 치료하고 뱃속의 충을 죽이며, 이와 벼룩을 없애고 잘 잊어버리는 것을 치료하며, 지혜롭게 하고 명치가 아픈 것을 멎게 한다]는 약성을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그 뒤에 이어지는 “生山中石澗沙磧上. 其葉中心有脊, 狀如劒刃. 一寸九節者, 亦有一寸十二節者“(산골짜기 개울가 모래더미에서 자란다. 잎은 한가운데에 등뼈가 있어 마치 칼날처럼 생겼다. 뿌리는 1촌 길이에 마디가 9개인 것도 있고 12개인 것도 있다.)라고 하여 석창포(A. gramineus)에 관한 형태와 생태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이는 분명하다.

    또한 앞서 살펴 보았듯이 『동의보감』의 「내경편」,「외형편」 및 「잡병편」에는 개별 병증에 대한 약재명으로 ‘石菖蒲'(석창포)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에서  ‘菖蒲=셕챵포’라고 보았다면 한자로 ‘石菖蒲'(석창포)라는 식물명을 별도로 개별 병증에 대한 치료에서 기록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 1539~1615)이 저술했던 『언해두창집요』(1601)에는 ‘石菖蒲, 셕챵포’라고 기록했고, 『언해태산집요』(1608)에서도 ‘石菖蒲, 셕챵포’라고 기록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위 식물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분리 운동(?)의 주창자는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 보았듯이, 『산림경제』의 「치약」편에는 『동의보감』의 「탕액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표제를 ‘石菖蒲'(석창포)로 하였다. 그러면 분리 운동은 『산림경제』를 저술한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되는 셈인가?

    백번을 양보하여  『동의보감』의 「탕액편」에 기록된 ‘菖蒲'(창포)=’셕챵포’이었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위 식물학자의 주장이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과학으로서 식물분류학이 도입되어 식물 사이의 연관관계에 근거하여 종(species)이라는 분류의 최소단위로 분류하기 시작했던 것을 ‘분리 운동’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에게 분류의 최소 단위로서 종을 식물 사이의 연관성에 따라 파악하고 그에 따른 분류, 그에 대한 학명의 부여 그리고 그에 따른 동정 등의 일련의 과학으로서의 식물분류학이 분리 운동 쯤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인식한 과거의 역사로 우리의 인식을 돌려 놓아 옛 그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간다. 『동의보감』이 저술된 시기는 17세기 초기이며 그 이후에 식물에 대한 우리의 옛 전통인식도 변화하고 발전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초기 식물분류학자들은 서양에서 전래된 과학을 수용하되 식물의 국명(조선명)에 관한한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살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연구가 이어져 현재의 식물분류학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17세기 초반으로 돌아가서 그 인식대로 명칭을 부르도록 해야 한다는 발상을 식물학자가 하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옛날로 다 함께 돌아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라도 만들고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니 황당할 뿐이다.

    [6] 결론

    한 식물학자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 있던 창포와 석창포에 인식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의학에서 약재로 사용하는 ‘石菖蒲'(석창포)의 명칭도 ‘菖蒲'(창포)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식물분류학에서 A. gramineus라는 종에 대해 ‘석창포’라고 부르는 우리의 이름도 ‘수창포’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동의보감』의 「탕액편」에서 ‘菖蒲'(창포)와 ‘셕챵포’는 같은 명칭이었는데 분리 운동(?)의 결과로 떨어졌으므로 – 어떻게 합쳐 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야 하는지에 대해 말도 없이 – 그저 합쳐 주어야 하고 제자리로 돌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졸지에 창포와 석창포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문화는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린다.

    여기에는 그 식물학자만의 뚜렷한 욕망이 엿 보인다. 그 욕망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학문적 충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학자의 권위를 내세우며 우매한 대중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본 것이 아니기에 알기 어렵다. 그런데 개인적 주관에 따른 욕망의 과잉은, 사실에 대한 설명이나 대상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아니라 자신이 품고 있는 욕망만을 정당화하며, 사실과는 거리가 먼 욕망 주체의 주관적 세계로 침전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현재의 우리의 인식과 문화 나아가 학문적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는 그 식물학자의 욕망의 이면에는 식물분류학의 용어와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옛 문헌의 기록된 시대의 인식과 문화가 현재와 같다는 전혀 합리성이 없는 가정을 전제하며, 한의학에 따른 옛 본초학자를 식물도감으로 보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 사실을 과장하거나 곡해하여 실제하였던 역사와 문화를 다른 것으로 만들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료마저도 무시하거나 왜곡되게 만든다.

    그러나 주관적 욕망 너머의 실제 옛 인식, 문화 그리고 민속의 실제를 알고자 한다면, 현재와는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 식물을 바라보고 인식했을 옛 사람들의 시각을 고려하면서 남아 있는 자료를 성실히 그리고 역사학, 언어학, 한의학 및 기타 민속학적 요소를 고려하여 살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창포와 석창포라는 식물을 둘러싼 우리의 우리 옛 인식과 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중국과 일본의 것을 함께 살피면, 일부 혼용과 혼선이 있었고 식물분류학이 학문으로 정착되기 이전에 사람이 의도하는 목적(효용성)을 위주로 식물을 인식했기 때문에 약재로 뿌리 등을 채취할 때 뿌리와 잎이 비슷한 붓꽃속(Iris) 식물을 함께 ‘菖蒲'(창포)라는 명칭으로 포괄하여 함께 고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혼선과 혼용 그리고 현재와는 다른 관점과 시각에도 불구하고, 옛 인식과 문화의 중심에는 저지대 습지에 자라고 단오에 머리를 감으며, 때로는 보조적인 약재로도 사용한 ‘菖蒲'(창포)는 창포(A. calamus)이고, 산지 계곡 물가의 돌틈에서 자라고 뿌리줄기의 짧고 마디가 촘촘하며, 주된 약재로 사용하고, 선비들이 벗하여 키웠던 ‘石菖蒲'(석창포)는 석창포(A. gramineus)이었다. 현재의 식물학에 따른 명칭은 이러한 옛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식물학자의 주관적 욕망 너머에 있는 민속의 실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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