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파리에서 가장 원칙적인 창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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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23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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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클라라』 카트린 로캉드로 지음, 최정수 옮김, Human & Books

    독립적인 창녀로 사는 것, 말하자면 손님들을 스스로 조절하고 자신의 밤과 낮을 엄격하게 분리하며 사는 것은 정말 가능할까? 아니, 이 물음은 이렇게 선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낮과 밤을 분리한다는 것은 낮을 제한하고 밤을 제한한다는 것을 뜻한다.

    비약한다면 영혼을 쪼개어 두 개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감옥은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감옥일 따름이다. 단지 아직 수인이자 『밤의 클라라』의 주인공 클라라만이 이것이 감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확실히 파리에서 가장 엄격한 원칙을 가진 창녀였다. 그리고 그런 원칙들 때문에 마음의 평온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때로는 육신의 안락함과 비슷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오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p.37)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여덟 시 삼십 분에는 시리얼과 요구르트 등으로 차린 간단한 아침식사를 든다. 아홉 시 삼십 분이면 공원에서 산책과 독서를 한다. 점심식사 이후에는 예상치 못한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거나 병원에 가며, 저녁 일곱 시가 되면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에서는 내내 책에 고개를 묻는다. 일곱 시 반이면 클라라는 이미 루이자네 가게에 도착해 있다.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여덟 시 삼십 분에는 시리얼과 요구르트 등으로 차린 간단한 아침식사를 든다. 아홉 시 삼십 분이면 공원에서 산책과 독서를 한다. 점심식사 이후에는 예상치 못한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거나 병원에 가며, 저녁 일곱 시가 되면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에서는 내내 책에 고개를 묻는다. 일곱 시 반이면 클라라는 이미 루이자네 가게에 도착해 있다.

    클라라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나의 낮 시간은 밤 시간의 네거티브 필름이었다. 알코올도 없고, 섹스도 없고, 남자들도 없었다.”(p.36) 그녀는 “나 자신에게 전적인 고독을 부여”(p.37)하는 방식으로 낮을 단련한다. 섣부른 오해는 말자. 그녀는 자신의 밤을 정화하기 위해 엄숙하고 엄격한 낮을 사는 것이 아니다.

    “독서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했다. 책은 나를 야만에서 구해 주었다”(p.38)고 말하고 있으나, 그녀가 말하는 기쁨의 최대치란 ‘전적인 고독’ 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클라라는 마치 낮과 밤을 거의 동일한 비중의 고독으로 평형을 맞추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창녀의 밤을 음탕한 욕망과 질펀한 쾌락으로만 이해하는 한 ‘낮의 클라라’와 ‘밤의 클라라’가 겪는 고독의 풍경을 결코 그리지 못할 것이다.

    클라라를 겁먹게 했던 것은, 화가 다니엘 레보비츠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당신을 원해요. 나는 당신을 원해요”로 시작하는 사랑의 편지를 낭독해 달라는 그의 요구. 창녀는 법적인 배우자 혹은 연인에게서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존재일 뿐,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대신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일은 ‘낮의 클라라’가 ‘밤의 클라라’의 영토를 잠식하는 문제 그 이상이었다. 나는 깨지기 쉬운 그 미미한 경계를 확립하느라 몇 년의 세월을 바쳤고, 그 경계를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p.17)

    낯선 남자의 낯선 요구는 낭독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니엘은 그녀를 자신의 이젤 앞에 세워 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클라라는 뒤라스의 소설을 다시 읽는다.

    “나는 내 관능성의 어두운 부분과 작가의 음악성을 발견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음악. 섹스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신랄한. 다니엘을 위해 모델로서 포즈를 취한 관능적인 그 새로운 경험 후에 아마도 뒤라스의 단어들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새로운 수련 후에.”(p.149)

    낮과 밤의 경계와 균형이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책(그것도 하필이면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사이를 가장 깊은 침묵의 언어로 가장 뜨겁게 가로지르는 뒤라스의 책)을 펴들고 있는 클라라. 그러므로 그녀에게 있어서 책은 곧 고독의 세계를 가장 최종적으로 완성시키기도 하고 그것의 균열을 가장 먼저 알아채기도 하는 영혼의 감지기가 되는 셈이다.

    낭독자에서 모델로 다니엘의 요구와 클라라의 역할이 진화한 만큼, 그들의 관계 역시 진화한다. 두 사람의 얽힘이 ‘소울 메이트의 만남’으로 막 변모하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에게 사랑의 편지를 전했던 여자의 자살과 그것에 얽힌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 말한다. 여자와 꼭 닮은 모습의 클라라로 하여금 그 여자의 고백을 대신 낭독하게 함으로써 그제야 화가는 자신을 홀로 가두고 있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창녀 역시 자신의 완고하고 억압적이며 지배적인 성향의 아버지를 회상하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클라라가 결코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작정으로 매춘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의 억압적인 세계에 종속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떠나왔지만, 길 떠난 자의 자유까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밤의 클라라’는 ‘진짜 클라라’이기보다는 말 그대로 ‘절반의 클라라’일 따름인 것이다.

    화가의 처지 역시 다르지 않다. 부모가 모두 죽고 홀로 남게 된 집, 그곳에서 그는 거의 자기 자신을 유폐하다시피 하며 살고 있다. 1층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겨두고, 2층은 모두 헐어 작업실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추억을 건드리지 않고 보존한다는 것, 혹은 박제해 두고 있다는 것, 그것은 추억을 옳게 추억하는 방법일 수 없다. 추억과 현재를 분리하는 화가, 그리하여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조차 스스로 파탄내고 만 화가. 낮과 밤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클라라와 영혼의 쌍둥이.

    그들은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의 유령과 동거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온전한 얼굴을 온전하게 대면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 그러한 두려움은 과연 사람을 살게 하는가, 아니면 산 채로 죽게 하는가.

    그러므로 소설은 누구든 길을 떠나기 시작한 순간에야 비로소 그 끝을 낼 수가 있다. 화가는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유령들을 죽이기 위해서 집을 나서 여행길에 오르고, 클라라 또한 파리를 떠난다. 다니엘에게 남긴 편지에서 클라라는 이렇게 쓴다.

    “나는 파리로부터 나를 실어 나르고 있는 기차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중략… 나는 내 진짜 얼굴을 찾을 거예요. 오직 당신만이 보았던 그 얼굴을!”(p.217)

    편지에 쓰인 서명은, 클라라가 아니라, 클레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창녀는 몸으로만 손님들을 유혹하지 않는다. “손님들은 A로 끝나는 이름을 좋아해. 그들을 들뜨게 하거든. 꽃 이름도 마찬가지야”(p.138)라는 충고에 따라 파리에 있던 내내 클레르는 클라라로 살았다.

    이제야 그녀는 “음탕함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약속과 뒤섞인 여성적인 이상(理想)같은 것”(p.139)인 A를 자신의 이름에서 떼어내고, 다시금 클레르로 돌아가노라 선언하는 것이다.

    화가가 여행을 떠나기 전 완성한 그림에는 클라라가 아닌 클레르의 얼굴이 있었을 터이다. “그는 내 얼굴을 그렸다. 오로지 그뿐이었다. 독서에 대한 그 부드러운 집중. 그 평정심.”(p.186) 그러므로 이런 식의 예감도 가능하리라. 클라라/클레르의 여행은 이내 그녀의 책읽기-삶을 밤과 낮으로 분할하지 않는 세계로의 여행이기도 하리라는 것.

    * * *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장편소설, 한은경 옮김, 민음사

    애초에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사랑의 역사』가 씌어질 수 있었다. 폴란드 영토가 되기도 했다가 러시아 영토가 되기도 하는 유대인 마을 슬로님의 한 소년은 한 소녀와 사랑에 빠졌으며, 이야기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소년은 레오 거스키, 소녀는 알마 메레민스키.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었던 시절, 소녀는 미국으로 떠났고 소년은 그 보다 늦게 소녀를 뒤따라갔다. 이것이 어긋남의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레오 거스키와 알마 메레민스키 그리고 이디시어로 씌어진 그들의 사랑 이야기 『사랑의 역사』는 더 이상 한 장면에 동시에 등장하지 못한다.

       

    알마에 대한 레오의 집념으로 그들이 같은 공간에 머무르기는 하지만, 서로의 삶을 개입하며 함께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살을 부대끼며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연인들이 감당해야 할 최고의 고난. 소설 속 연인들은 60년 이상의 세월을 그들은 서로 사랑하되, 홀로 사랑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 시간 동안 레오의 원고는 친구 즈비 리트비노프의 손에 들어갔고, 칠레로 간 즈비는 로사의 사랑을 얻으려 그것을 자신의 필체로 옮겨 적게 된다. 그렇게 해서 원래의 저자와 원래의 이야기 모태로부터 한참 멀어진 채로 스페인어판 『사랑의 역사』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레오가 사랑을 놓치고, 자신의 책 『사랑의 역사』 또한 놓치는 순간부터,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행로를 예측할 수 없는 확산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확산이 있었기에 니콜 크라우스는 이러한 종류의 액자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설 속 소설인 『사랑의 역사』는 때마침 남미를 여행 중이던 청년 다비드에게로, 또한 그의 연인 샬럿에게로 흘러들어간다. 헌데 이야기는 여기서 종착하지 않는다.

    레오와 알마가 함께한 사랑이 길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비드와 샬럿이 나눈 사랑의 시간 또한 짧다. 그들 사이에는 『사랑의 역사』의 여주인공 이름을 딴 알마라는 딸아이가 있으며, 번역가인 샬럿은 『사랑의 역사』의 영어 번역을 의뢰받게 된다.

    그 번역을 의뢰한 이는 다시금 저 레오와 알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그러나 레오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아이작 모리츠. 소설의 마지막까지 레오는 연인 알마 메레민스키와 아들 아이작과 만나지 못하지만, 또 다른 알마와는 만나게 된다.

    소설 속의 소설이 『사랑의 역사』의 원저자와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사랑의 역사』는 그렇게 여럿의 얄궂은 삶으로 쪼개진 뒤 어렵사리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한다.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책, 그리고 여러 갈래의 삶과 여러 갈래의 운명. 아무런 전조 없이 운명이 길을 트고, 어떤 예측도 불가능하게끔 책이 여럿의 운명을 여행한다.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미스테리가 된다.

    레오와 즈비, 그리고 아이작과 샬럿의 딸 알마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갈래진 운명들의 조우에 참여해야 한다. 그들은 한 권의 책을 살고(生), 그럼으로써 하나의 삶을 살게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인쇄본 2,000부 중에서 일부는 팔려서 읽히고, 대다수는 팔렸지만 안 읽히고, 일부는 선물이 되고, 일부는 서점 창가에서 빛이 바래서 파리나 꼬이는 고물로 전락하고, 일부는 연필로 표시가 되고, 상당수는 읽히지 않거나 안 팔리는 다른 책들과 함께 종이 압축기에 분쇄되어 기계의 칼날에 쪼개졌다.”(p.101)

    어쩌면 책의 생애와 사랑의 생애가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운명을 뒤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사랑이 언제나 그를 뒤흔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랑도, 책도 ‘운명적인 조우’가 이뤄지는 그 순간까지는 무력함과 무의미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서점의 한 구석에 꽂힌 『사랑의 역사』 또한 ‘사랑의 역사’를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첫 햇살이 『사랑의 역사』의 표지에 쏟아졌다. 파리들이 먼저 그 표지 위에 앉았다. 곰팡이가 슨 페이지들이 햇볕에 점차 마르기 시작했다. 청회색의 페르시아고양이가 가게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햇볕을 듬뿍 받고 싶은 마음에 『사랑의 역사』를 스치고 지나갔다.”(p.105)

    수없이 많은 날의 분주하고 따뜻한 아침을, 수없이 많은 날의 무료하고 긴 낮을, 그리고 수없이 많은 날의 깊은 밤을 견디고 『사랑의 역사』는 마침내 남아메리카를 여행 중이던 청년 다비드 싱어에게로 간다. 이 대목이 바로 다비드 싱어에게서 그의 연인 샬럿에게로, 샬럿에서 그 딸 알마 싱어에게로 이어지는 ‘사랑의 유전’이 ‘책의 유전’과 동일한 행로로 들어서게 되는 그 첫 시작점인 것이다.

    언젠가 레오 거스키와 알마 메레민스키가 소년이고 또 소녀였던 그 시절, 둘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손을 잡아야 할까?” “안 돼.” “그건 왜?” “그러면 사람들이 알 테니까.” “뭘 아는데?” “우리에 대해.” “사람들이 알면 뭐가 어때서?” “비밀인 게 더 좋아.” “왜?” “그래야 아무도 우리에게서 그걸 가져갈 수 없으니까.”(p.130)

    연인들 사이의 비밀스러움은 그 둘의 사랑을 더욱 진하고 특별하게 만든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탄생하는 언어들은 일상어로 번역할 수 없는 깊은 비밀과 특별한 의미들로 가득 채워진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 하나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읽는다는 것과 사랑의 근친 관계를 짐작해 보는 것은 어떤가.

    텍스트가 생산해낸 비의(秘意) 속으로 진입하여 텍스트를 의미 있게 해석하고 그것과 끈적끈적한 교감을 나누는 것은 바로 ‘책을 읽다’라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을 자신의 삶의 축으로 삼는 것처럼, 운명적인 한 권의 책 또한 누군가의 삶에 오래된 축으로 버티고 설 수 있다.

    레오가 연인 알마와 아들 아이작을 맴돌고, 샬럿의 딸 알마가 원저자를 찾기 위해 『사랑의 역사』를 맴도는데, 그 맴도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고달픈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레오의 이야기도, 알마의 이야기도 줄곧 일인칭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둘의 만남이 이뤄지는 순간이 곧 두 개의 ‘나’의 목소리가 조우하는 순간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 주인인 저자 ‘나’ 레오와 이야기의 마지막 주인인 독자 ‘나’ 알마가 만날 때, 서서히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도록 만드는 묘한 흥분이 스모그처럼 퍼지고 스민다.

    “나는 그 늙은 남자 앞에 섰다. 그는 간신히 나를 알아채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내가 알마예요.”
    “바로 그때 그녀를 보았다. 마음이 갈 길을 일러준다고 해서 정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느냐는 건 참 기이한 일이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달랐다. 그런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두 눈은 내가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천사를 보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마. 내가 가장 사랑하던 나이에 머물러 있다니! 나는 물었다. 알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인데, 꼬마 아가씨가 어떻게 알지?”
    “내가 말했다. 내 이름은 『사랑의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모든 여자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예요.”
    “내가 말했다. 내가 그 책을 썼지.” (p.334~337)

    알마에 대한 레오의 사랑이 하나의 책을 낳았고, 그 책이 또 다른 소녀에게 알마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주었다. 그 이름은 언제나 사랑에 대한 맹세였으며, 『사랑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단 하나의 결정적인 근거였다. 즈비 리트비노프가 레오의 원고를 자신의 것으로 바꿀 때에도 알마의 이름만큼은 훼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제거하는 행위는 구두점과 모음과 형용사와 명사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과 같았다. 알마 없이는 이 책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p.258)

    다르게 말하자면, 알마는 『사랑의 역사』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바로 그 때문에 즈비 리트비노프가 베껴 쓴 원고 역시 원(原)텍스트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알마가 하나인 한, 하나의 이야기(책 혹은 텍스트)는 다른 어떤 곳에도 그 근원을 둘 수가 없게 되는 셈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레오의 죽음이 장식하고 있다.

    “그는 누구에게 전화 거는 게 너무 당혹스러워서 혼자 죽었다. 아니면 알마에 대해 생각하다가 죽었다. 아니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죽었다. 실제로 할 말이 많지 않다.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p.349)

    여기에 한 마디를 더 새겨 그의 묘비문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났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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