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건재, 이태복
    두 사람의 부음을 접하고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어떤 인연
        2021년 12월 06일 09: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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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 이야기 조훈현 후속편을 써야 하는 중간에 늦은 부음 소식을 접했다. 유건재 프로가 숙환으로 아직 이른 연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건재의 비운의 별칭은 ‘유본선’이었다. 천하의 조남철을 무너트리고 일본 유학파 김인과 윤기현, 하찬석이 타이틀을 분점하는 시기에 전장에 나서야했다. 그 사이를 된장바둑 서봉수가 치고 들어오며 춘추천국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조훈현이 등장했다. 지금은 본선이 32강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도전자 결정전 방식인 당시의 본선은 8강 풀리그였다. 천하의 주인이 서로 5명이라고 하는 그 본선에 유건재는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모두가 패권의 제왕의 자질을 가진 시기는 반대로 유건재에게 불행한 시기였다. 말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진군했지만 언제나 처참하게 쓰러졌다. 그런 유건재가 단 한 번 서로가 천하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진압하고 도전권을 획득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천하통일을 시작한 조훈현이었다. 한판, 조훈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바둑은 결승전이었다. 이후 조훈현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하를 통일해 군림하는 조훈현을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도 제법 큰 준우승 상금으로 유건재는 큰 배를 하나 사서 북한강에 띄웠다. 지금으로 치면 오천만원 정도의 배였다. 유건재는 북한강에 선배들을 모시고 술과 안주를 대접을 하고 후배들이 오면 포커와 마작을 즐겼다. 이듬해 여름, 태풍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면서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관철동 선술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자 유건재는 “내년에는 타이틀을 따서 더 큰 배를 사면되지 않겠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생전에 유건재의 최고성적은 최강자전 준우승이 마지막이었다.

    7~80년대 한국기원이 관철동에 있을 때를 관철동 시대라고 한다. 지금의 한국기원은 상왕십리에 있으니 관철동 시대는 ‘추억’의 시대였다. 관철동에 어둠이 내리고 김인이 한국기원을 나서면 사람들은 말없이 따라나서 관철동의 선술집으로 향했다. 김인이 없을 때는 유건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고 따라 나섰다. 유건재는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김인과 함께 관철동의 영원한 좌장이었다. 어린 시절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관철동 시대에는 천재가 넘쳐났다.

    유건재 프로(왼쪽)와 이태복 전 장관

    필자가 조선공산당 평전을 출판한 후 낯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주간노동자신문 발행인이었던 이태복 선배였다. 책에 대해 호평을 해주시면서 (김)성동이 형도 칭찬을 많이 하시더라고 한다. 언제 셋이 소주 한잔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곧바로 언제든 연락을 주시라고 했다. 성동이 형 건강이 좀 안 좋으니 상황을 보자 하고 전화는 끝났고 술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두 분을 행사에서 뵌 적은 있지만 사석에서 뵌 적은 없다. 두 분은 필자와 같이 보령 출신이다. 필자는 87년에 재경보령대학생향우회(보우회) 회장을 한 적이 있어 보령 행사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두 분에게 필자는 건너 듣고 이름만 알고 있는 까마득한 후배였다. 보령 출신의 ‘빨갱이 대장’이 필자에게 한동안 붙어있던 꼬리표였다.

    한국기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바둑에 7번 사표를 쓰고 8번 입사를 한 노승일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바둑잡지 기자로 노승일만큼 탁월한 사람이 없었고 언제나 복직을 반복했다. 그리고 끝내 편집장 자리에 올랐다.

    한 번은 신입기자 면접을 보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한 명을 뽑아야 하나 고심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로 낯선 인물이 찾아왔다. 면접까지 끝난 상황인데 기자로 지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내는 승복 차림이었다. 천하의 노승일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유건재 프로가 자신이 추천했다며 시험이나 한 번 보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게 아닌가? 한국기원 언저리의 아마추어에게 프로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유건재의 관철동 단골 멤버 중에 하나가 노승일이었다. 어지간하면 칭찬이 인색한 노승일은 사내의 필력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막 파계 당한 김성동은 그렇게 월간바둑 기자로 입사했다.

    관철동에서 유건재와 술잔을 기울일 때면 노승일은 김성동 칭찬 일색이었다. 김성동의 유려한 문체에 대국의 흐름을 살리는 해설 솜씨는 순식간에 관철동의 화제로 떠올랐다. 김성동은 아마 5단의 기력 소유자였다. 그런 노승일도 평소에 궁금한 것이 있었다. 퇴근하면 술자리를 마다하고 싹싹하게 사라지는 것이 낯설었다. 얼마 후 김성동의 중편소설 <만다라>가 등장했다. 진정한 구도는 세속에 있다는 이 소설은 문단의 화제와 논쟁을 동시에 불러왔다.

    김성동은 중편을 개작해 장편으로 다시 출판했다. 장편소설 <만다라>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거액의 인세를 손에 쥔 김성동은 사표를 쓰고 월간바둑을 총총히 떠났다. 노승일은 관철동 선술집에서 쓴 소주를 털어 넣으며 울부짖었다. 노승일의 꿈은 세상이 놀랄 소설을 한 권 쓰는 것이었다. 노승일은 편집장을 그만둔 후 칩거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차민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올인>이었다. 소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노승일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관철동에 나타났다.

    노승일의 회고에 따르면 김성동이 입사한 첫 달에 점심시간만 되면 먼저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가진 노승일이 추궁을 하자 돌아온 답변은 뜻밖에도 “점심값이 없어서”였다. 자존감이 강한 김성동은 사정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그냥 굶었던 것이다. 심한 잔소리를 한 노승일은 첫 월급 받을 때까지 김성동의 점심을 사주었다.

    그때 유건재가 청탁을 하지 않았다면 김성동의 미래를 어떻게 되었을까. 반골 대장인 노승일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관철동의 좌장이자 풍운아 유건재 프로가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2월 3일 이태복 선배가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으로 부동의 하는 내용은 많았지만 소주 한 잔 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두 분의 영면을 빈다.

    *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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