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동조합은 사회적 집착체
    [책소개] 『다시, 협동조합을 묻다』(김기태, 강민수/ 북돋움coop)
        2021년 12월 04일 0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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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10년, ‘협동조합 2만 개 시대’를 맞아 지나온 역사와 현실 상황을 살피고, 한국의 협동조합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색하며 새로운 대안으로 ‘협동조합 허브론’을 제시한다.

    협동조합 운동의 본질은 협동하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지는 불평등과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 위기 앞에서 그 꿈은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회의의 정서가 짙다.

    책은 그런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음을 확인한다. 그것은 협동조합이 작은 협동의 경험들을 이어 큰 협동으로 나아가는 접착제 역할을 하고 사회 곳곳을 협동으로 연결하는 허브가 되는 것이다.

    김기태, 강민수 두 저자는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산증인으로, 현장은 물론 협동조합 연구 분야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보여 주었다. 이제 협동조합 허브론이라는 새로운 운동론을 제안하며 40년 전 레이들로가 ICA(국제협동조합연맹) 모스크바 대회에서 제기한 협동조합의 정체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협동조합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협동의 꽃을 피게 하라”

    경쟁과 갈등이 있었으므로 인류 문명이 발전하고 진보를 거듭할 수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경쟁만이 답일까? 인간이 서로 도움으로써 더 나아질 수는 없을까? 협동조합은 바로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1844년 영국의 로치데일 공정선구자조합이 협동조합 운영 원칙을 수립한 이후, 1895년 ICA(국제협동조합연맹)가 창립된 지 126년이 지났다. 협동조합은 여전히 유효하며 필요한 존재일까?

    이 책은 21세기도 20년 이상 경과한 현재, 협동조합은 어디쯤 와 있으며 어떤 과제를 앞두고 있는지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 ‘협동의 허브가 되는 협동조합’이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면 어디서 왔는지 보라

    협동조합의 정체성과 향후 나아갈 바를 알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아야 가야 할 길을 가늠할 수 있다. 로버트 오언의 협동촌 구상에서 처음 싹튼 협동조합이 로치데일 공정선구자조합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건과 이론, 평가를 시기별로 나누어 고찰한다.

    특히 1895년 설립된 이래 협동조합 운동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의 비영리, 비정부 기구로 성장해 온 ICA가 협동조합의 실천 규범인 협동조합 원칙을 제정하고 개정해 온 과정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이 내포하는 의미를 짚어 본다.

    ICA는 1980년 제27차 모스크바 대회에서 레이들로 보고서를 채택했다. 레이들로는 보고서에서 협동조합이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 본연의 사상을 명확하게 해야만 한다고 천명했다. 레이들로 보고서 이후 여러 단계를 거쳐 1995년, 역사적인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이 이루어졌다. 협동조합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을 새롭게 확인한 것이다. 전 세계의 협동조합은 모두 이 선언 아래 모여 있다.

    책은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에서 과감하게 한발 더 나아간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생태계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구성원과의 관계, 영리기업과의 관계, 국가와 지방정부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활용할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제까지 협동조합 내부를 향해 있던 관점을 외부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지금 어디 있는지 보라

    협동조합은 여러 사회적 조건 속에 존재하며 다양한 개인 및 단체와 관계 맺고 있다. 사회경제라는 체제 안에서 수많은 구성원, 사회 집단, 그리고 국가와도 내부·외부적으로 갈등하고 소통한다. ‘협동조합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다른 주체들과 결합하면서 어떤 수준으로 사회를 더 낫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답하려면 협동조합은 어떤 조건 속에 위치하는지 알아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인류에게 생산성 증가와 생활의 편리성을 선물했지만 다른 한편 엄청난 파괴력으로 자연은 물론 일상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빠른 변화 속에서 불안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무형재가 세계 시장을 주도하며 플랫폼 경제의 자연 독점이 날로 심각해진다. 자산의 양극화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과도한 에너지 사용은 지구 생태계를 한계로 몰아갔고 코로나 19는 현재 사회경제 체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충격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가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이유는 존재의 필요성을 묻는 외부의 질문에 답하고 나를 드러내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심화하기 위해 이 책은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협동조합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점검한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바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협동조합, 우리가 갈 길은 조금 다르다

    협동조합이 최초로 시작된 것은 영국이고 이후로도 서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한국의 협동조합은 두레, 계, 향약 등 전통적 협동 조직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일제 식민지와 급격한 산업화라는 독특한 역사 속에서 서구와는 매우 다른 길을 걸어왔다. 즉 한국의 협동조합은 세계 차원의 협동조합이 가지는 일반성을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나라가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환경 속에서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경로와 문화적 유전자의 차이를 잘 이해할 때 그에 맞는 과제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특수성은 오랜 중앙집권 체제의 경험, 적대적 분단 상황, 산업투자국가의 압축 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은 왕조만 바뀌었을 뿐 1,300년 넘는 오랜 중앙집권기를 거쳤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쇼윈도 국가로서 냉전의 전면에 있다가 현재는 남북 분단의 전면 동원 체제 아래 있다. 경제적으로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최빈국이었다가 불과 70여 년 만에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세계 유일의 나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국가적 특수 상황은 한국의 협동조합이 국가, 시장, 시민사회와 관계 맺는 데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민간이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주도할 기회나 시간 없이 근대가 이식되면서 산업 진흥 정책의 일환으로 업종별 개별법에 의해 농협, 수협, 중소기업협동조합 등 한정된 유형과 한정된 부문에서만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민간 활동에 의한 신용협동조합과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있었고 2011년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이후 다양한 협동조합 설립이 이루어졌다.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공유하지만 성격이 약간 다른 것이다. 이런 한국적 특수성을 인정하고 이해한 상황에서 저자들은 한국 협동조합의 실현 가능성 있는 실천 방안을 제안한다.

    사회 곳곳에 스며드는 협동의 허브를 꿈꾸며

    한국 협동조합의 숫자는 2만 개를 상회한다. 이제는 개별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운영한다는 사실만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협동조합에 대한 억압, 폄하의 시선도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임을 증명하는 것에서 벗어날 때이다. 그리고 협동조합만의 가능성과 성과를 보여 주어 많은 사람이 협동조합의 거대한 잠재력에 감동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협동조합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모든 활동의 허브로 자리 잡아야 한다. 협동조합 허브론은 협동조합 공화국론과 협동조합 섹터론, 협동조합 지역사회론이 가진 장점을 하나의 체계 속에 연결해서 이들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협동촌으로부터 출발한 협동조합 운동은 이제 협동의 지역사회 구축을 향한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다양하게 연결된 사회의 네크워크 안에서 협동조합이 허브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키며 어디에서나 빠질 수 없는 감초 역할을 한다면 사회 구석구석 협동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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